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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복(李秉福)

  • 개요

    1966년 1월, 이병복은 연출가 김정옥과 함께 극단 자유를 창단한 이래 지금까지 40년 가까이를 극단 대표로서 극단을 이끌어오며, 공연의 모든 의상을 도맡다시피 했다. 우리의 열악하고 불리한 문화적 환경 가운데에서 그녀가 극단 대표로서, 까페 떼아뜨르라는 소극장 운영자로서, 그리고 무대예술가협회장으로서 기여한 공로는 아무리 높은 점수를 주더라도 지나치지 않는다. 1947년 이병복은 이화여대 영문학과 졸업기념 공연인 오스카 와일드의 <윈더미아 부인의 부채>에서 처음으로 무대를 밟았고, 졸업 후 1948년 12월 오화섭과 박노경 부부가 창단한 여인소극장의 창단 멤버로 동참했다. 박노경은 극작가 오혜령의 모친으로 6·25때 장독대에 장을 뜨러 나갔다가 폭격에 맞아 타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인소극장의 첫 작품은 입센의 <인형의 집>으로 오화섭이 번역하고 박노경의 연출로 1948년 12월에 공연되었다. 이병복은 그때 남편인 헬머 역을 맡았는데 그것이 성인극단의 첫 경험이 되었다. 6·25때 박노경이 타계하고 동인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극단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부산 피난지에서 함흥에서 월남한 화가 권옥연과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1957년에 시어머니에게 두 어린아이를 남겨두고 부부가 파리 유학길에 올랐다.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파리에 간 그녀는 시간이 나는 대로 조각연구소에 가서 조각을 공부하고 또 의상연구소에 가서 패션을 배우고 분주히 뛰어다닌 결과 의상에 대한 학위(디플로마)를 받는다. 귀국 후 옛날 여인소극장 동인들을 수소문했으나 허사로 돌아가자 유학시절에 알게 된 김정옥과 만나 극단을 조직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극단 자유와 무대미술가 이병복의 제2의 삶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다. 이후 무려 100편에 가까운 작업에 참여하는 동안 극단 자유의 연극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해왔다. 집단창작방식이라고는 하지만 연출을 맡은 김정옥과 무대예술 전체를 맡은 이병복의 아이디어, 혹은 이미지는 누구의 창의력보다도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극단 자유의 초반 10년 동안 이병복은 의상을 전담하여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세계의 모든 의상에 관한 기본 탐색과 충분한 무대체험과 실험을 할 수 있었고, 한 걸음 나아가서 한국적인 이미지에 방향을 돌릴 수 있는 창조적 안목을 갖추게 된 것이다. <무엇이 될고하니>부터 이병복은 집단창작방식에 의해 의상과 무대를 전담하였는데, 극단측에서 내세운 창작원리는 집단창작 이외에도 몽타주 사상, 제3의 연극, 총체극, 생과 죽음, 서사극 방식의 활용 등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 자유의 연극은 실제로 삶과 죽음을 내용으로 하면서 여러 광대들이 자유롭게 변신하여 극중 역할을 맡고, 한국적이고도 인간적인 보편성이 있는 행위를 단순하고도 강렬한 이미지로 표현하는 무대로서 관객들에게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인식이 있기까지 이병복의 무대예술이 보여준 기여도는 실로 창조적이고 전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형과 가면을 연극의 표현매체로 크게 활용한 것, 다양한 종이의상을 개발하고 한국의 전통의상과 전통색상을 변화시켜 무대의상으로 새롭게 정립시킨 것, 각종 소도구들을 무대미술의 개념으로 확장시킨 것, 종래의 장치미술의 개념으로부터 개방적인 개념으로, 연극적 이미지의 개념으로, 나아가서는 전환이 빠른 기동성을 갖는 무대로 새롭게 바꾸어 놓은 것, 전체적으로 과감한 생략과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색채감을 통해 삶과 죽음에 관한 느낌, 즉 인간의 원형성을 발견하도록 해준 것 등이 이병복이 이룩한 무대예술적 성과로 높이 평가된다.

  • 생애와 약력

    1943년 서울 숙명여자고등여학교 졸업 1948년 이화여자대학교 영문학부 졸업 1948년~1950년 극단 여인소극장 창단활동 1957년 도불 1958년 프랑스 파리 ACADEMIE DE COUPE DE PARIS 졸업 1957년~1960년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수업 1957년~1961년 파리 아카데미 드 페에서 조각 수업 1961년 귀국 1962년~1964년 덕성여자대학 의상미술과 과장 1965년 한불문화협회 사무국장 1965년~현재 극단 자유 대표 1966년~현재 한불협회 이사 1967년 프랑스 아비뇽연극페스티벌 시찰 1968년~1975년 소극장 까페 떼아뜨르 설립 운영 1971년 I.T.I.(세계극예술협회)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런던) 1973년 I.T.I. 총회 참가(스웨덴 스톡홀름) 1976년~1979년 I.T.I. 한국지부 이사 1981년 <무엇이 될고하니>로 스페인 씨저스페스티벌 및 프랑스 렌느페스티벌 참가, 네덜란드 암스텔담 초청공연 1983년 <바람부는 날에도 꽃은 피네>로 프랑스 낭시세계연극제 참가 / 파리 및 튀니지 하마멧트 국제연극페스티벌 초청공연 1984년 <바람부는 날에도 꽃은 피네>로 일본 오키나와 국제연극제 초청공연 1985년 <바람부는 날에도 꽃은 피네>로 일본 동경, 오사카, 히로시마, 홋카이도 및 프랑스 깔까존느페스티벌, 스페인 바르셀로나페스티벌, 말라가페스티벌 초청 공연 1987년 한국무대미술가 협회 회장 1988년 OISTAT(세계무대예술가협회) 정회원국으로 가입 / I.T.I. 총회(핀란드 헬싱키) 참석 1990년 이스트로폴리타나 연극페스티벌(체코 브라티슬라바) 참가 1991년 프라하 콰드리날레(PQ. 세계무대미술경연대회) 참가 / 프랑스 파리, ROND POINT 극장 초청 공연. 작품 <햄릿> <노을을 나르는 새들> / 독일 뮌헨초청공연. 작품 <햄릿> 1995년 PQ 국제심사위원으로 참가 / 일본 동경 삼백인극장 초청공연. 작품 <피의 결혼> 2000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상훈

    1965년 동아연극상 수상 1970년 서울문화예술상 수상 / 한국연극영화상 특별상 수상 1971년 동아연극상 대상 수상 1973년 동아연극상 수상 1983년 중앙일보 예술상 수상 1987년 화관문화훈장 수상 1989년 한국일보 백상예술대상 무대미술상 수상 / 프라하 콰드리날레(PQ)에서 무대미술상 수상 / 사랑의 연극제에서 미술상 수상 1992년 동아연극상 무대미술상 수상 1993년 동랑연극상 수상 / 동아연극상 무대미술상 수상 1999년 프라하 콰드리날레(PQ)에서 테마섹션 은상

  • 작품활동

    1966년 <따라지의 향연>(스칼페타 작, 김정옥 연출) / <신의 대리인>(롤프 호크후드 작, 김정옥 연출) 1967년 <해녀 뭍에 오르다>(오영진 작, 김정옥 연출) / <한꺼번에 두 주인을>(까를로 콜도니 작, 김정옥 연출) 1968년 <피크닉 작전>(죠르주 떼르봐뉴 작, 김정옥 연출) / <살인환상곡>(로베르 토마 작, 유길촌 연출) 1969년 <마리우스>(마르셀 빠뇰 작, 김정옥 연출) / <흑인 창녀를 위한 고백>(윌리엄 포크너 원작, 알베르 까뮈 각색, 김정옥 연출) 1970년 <사자(死者)의 훈장>(김지현 작, 김정옥 연출)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최인훈 작, 김정옥 연출) 1971년 <아가씨 길들이기>(몰리에르 작, 김정옥 연출) / <그물 안의 여인들>(박양원 작) / <슬픈 카페의 노래>(카를 멕클러스 작, 에드워드 올비 각색, 김정옥 연출) / <푸로랑스는 어디에>(로베르 토마 작, 최치림 연출) 1972년 <세빌리아의 이발사>(보마르세 작, 김정옥 연출) / <따르띠프>(몰리에르 작, 김정옥 연출) / <따라지의 향연>(스칼페타 작, 김정옥 연출) 1973년 <도적들의 무도회>(장 아누이 작, 김정옥 연출)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최인훈 작, 김정옥 연출) 1974년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테네시 윌리암스 작, 최치림 연출) / <동리자전>(김용락 작, 김정옥 연출) 1975년 <흐르지 않는 강의 전설>(이기영 작, 이윤영 연출) / <파우스트>(괴테 작, 이윤영 연출) / <여인과 수인>(솔제니친 작, 최치림 연출) 1976년 <대머리 여가수>(이오네스코 작, 김정옥 연출) / <밀란도리나의 여인들>(까를로 골도니 작, 최치림 연출) 1977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드워드 올비 작, 이윤영 연출) / <환도와 리스>(페르난도 아라발 작, 이윤영 연출) 1978년 <그 여자 사람잡네>(로베르 토마 작, 김영렬 연출) / <무엇이 될고하니>(박우춘 작, 김정옥 연출) 1980년 <백양섬의 욕망>(유고 베티 작, 김정옥 연출) 1981년 <엘레펀트맨>(에슈리 몬떼규 원작, 버너드 포메란스 각색, 김정옥 연출) 1982년 <달맞이꽃>(김병종 작, 김정옥 연출) 1983년 <피의 결혼>(페데리코 가르샤 로르카 작, 김정옥 연출) 1984년 <바람부는 날에도 꽃은 피네>(김정옥 작·연출) 1987년 <손오공>(조동희 작, 주요철 연출) 1988년 <수탉이 안울면 암탉이라도>(김정옥 작·연출) /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페데리코 가르샤 로르카 작, 김정옥 연출) 1989년 <그리고 그들은 죽어갔다>(김정옥 구성) 1991년 <기도>(페르난도 아라발 작, 김정옥 연출) 1992년 <노을을 나르는 새들>(김정옥 작·연출) 1993년 <햄릿>(셰익스피어 작, 김정옥 연출) 1997년 <그 여자 억척어멈>(김정옥 작·연출) 1999년 <페드라>(라신느 작, 김정옥 연출) / <옷굿-살> 2001년 <화수목나루>(김정옥 작, 김승미 연출)

  • 대표작품

    <따라지의 향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아가씨 길들이기> <도적들의 무도회> <동리자전> <무엇이 될고하니> <피의 결혼> <바람부는 날에도 꽃은 피네> <옷굿-살>

  • 저서

    <이병복 무대미술 30년>, 한국무대미술가협회 편, 한국무대미술가협회, 1997

  • 리뷰

    1996년 5월 10일 현재, 극단 자유는 창단 30주년 기념공연으로 제148회 33일간의 막을 올렸다. 창단공연부터 이번 공연까지 이병복은 무대의상가로서 기여하였다. 그러나 제78회 공연 <무엇이 될고하니>부터는 집단창작방식에다 무대미술과 의상의 개념도 종래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이병복의 창작론은 1978년 10월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고찰됨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먼저 전기에 공연된 창작극으로는 오영진의 <해녀 뭍에 오르다>, 최인훈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채만식의 <가죽버선>, 김용락의 <동리자전>, 박성재의 <작년에 왔던 각설이> 등을 들 수 있다. 번역극으로는 스칼페타의 <따라지의 향연>, 호크후드의 <신의 대리인>, 골도니의 <한꺼번에 두 주인을>, 이오네스코의 <대머리여가수>, 마르셀 빠뇰의 <마리우스>, 까뮈의 <흑인 창녀를 위한 고백>, 시스갈의 <타이피스트>, 올비의 <동물원이야기>, 몰리에르의 <아가씨 길들이기> 등 수 편이다. 재공연 작품 26회를 포함해서 전기에는 모두 77회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아직 무대의상이라는 개념도 제대로 없던 시절에 나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의상을 전담하게 되었다. 연극을 뒤에서 돕기로 작정하였고, 극단에 돈이 없어 의상을 남에게 맞길 수도 없는데다 마침 맞춤옷집을 하면서 공방도 있고 해서 손수 만들기 시작했다”고 이병복은 초창기의 작업을 이처럼 겸허하게 회고하였다. 극단 자유의 정기공연에서는 국내, 국외를 막론하고 유명한 작품들이 거의 망라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유명 작품들은 이병복으로 하여금 무대의상에 대한 연구와 모색을 쉴 새 없이, 가혹하리만큼, 강요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한 마디로, 이병복의 옷들은 단순 강렬한 색상에 다양하고 품격이 있고,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특징이다. 흑백의 대조에 주로 백색을 기조로 많이 쓰지만, 자세히 보면, 그 백색에도 변화를 주고 있다. 선과 모양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이 여러 가지 변화를 가미한다. 배우의 역할에 따라서 옷들이 갖는 품위는 다르게 보이고, 어느 옷이든 홑감이 아니라 두세 가지 겹감으로 만들어져 인격의 무게와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시대성과 지역성을 살리는 것도 특징이다. 몰리에르 시대의 프랑스, 삼국시대의 고구려, 1930년대의 서울, 1940년대의 미국 등, 옷 가운데 시대와 지역이 함께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값싼 재료를 충분하게 활용하고, 무엇보다도 배우들이 입고서 연기를 하는데 편안함과 기능성을 살릴 수 있도록 만들어지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특징이다. 극단 자유의 배우들은 무대의상에 진실로 ‘복받은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div align='right'>- <이병복 무대미술 30년>, 한국무대미술가협회 편, 한국무대미술가협회, 1997 극단 자유가 창단 33주년 기념작으로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페드라>(장 라신 원작, 김정옥 번안 연출)의 무대장치는 단순하다. 무대 좌우에 흰 배경막 3개만이 덩그렇다. 이 세트가 극이 진행되면 다양한 조명을 받아 환상적 분위기를 낳는다. 의상도 낯설지 않아, 희랍신화에서 따왔다는 내용이 마치 우리 것인 양 익숙한 느낌을 준다. 이런 무대장치는 ‘무대미술·의상의 개척자’ 이병복 씨의 작품이다. (……) 장충동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두 가지 일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모습이었다. 하나는 <페드라>이고 또 하나는 6일부터 열리는 제9회 프라하 콰드리비엔날레(PQ) 세계무대미술·극장건축 전시대회. 그는 4년마다 체코에서 열리는 무대미술계 최대의 잔치에 한국을 대표하여 개인부스를 설치한다. 외국에서 먼저 그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공연이 맘에 걸려 안 가려고 했는데 주위에서 워낙 떠밀어 가게 되었습니다. 지난 1991년 처음 참가해 영예의 의상상을 받았고 다음 대회 땐 심사위원으로 위촉받았죠.” PQ는 그의 진면목을 세상에 널리 알려준 대회였다. 하지만 그의 명성은 이미 해외공연 때 여러 차례 확인된 바 있다.그의 무대를 본 외국인들은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최소한의 소재로 저 큰 무대를 어떻게 꽉 채우는지 궁금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1979년부터 해외공연을 많이 했는데 ‘꿇리지 않겠다’는 오기가 생기더군요. 모든 무대를 한국적인 것으로 만들었죠. 서양 사람들은 흉내 못 낼 저만의 무대언어를 시도했는데 특히 ‘한지(韓紙)의상’을 시도한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 결과 ‘피의 결혼’ 등의 작품이 원산지가 아닌 ‘자유의 OO’라는 공인을 받았다. 흉내나 모방이 아닌 ‘한국 식의 재해석’이란 독창적인 방법론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자유의 무대장식은 매우 단순했다. 깃발 한 쌍, 푸르고 붉은 몇 개의 주머니, 병풍, 두개의 테이블 그리고 무대 위에 펼쳐졌을 때 흥미를 끌었던 몇m의 천, 이것들이 무대를

  • 리뷰

    장식하기 위해 이들 예술가들이 필요로 한 전부였다.” (1985년, 스페인 <피의 결혼> 평 중) “……표의문자들이 그려진 흰 천들과 함께 상(相)의 변화를 나타내는 무대장치의 아름다움……한국적인 기적은 바로 그러했다…….” (1984년, 프랑스 <바람부는 날에도 꽃은 피네> 평 중) 그러나 한국에선 그 공이 늘 연출자 김정옥 씨나 배우들의 몫이었고 무대미술가는 뒷전에 머물렀다. 그래서 이씨는 자신을 폼나는 ‘앞광대’가 아닌 ‘뒷광대’라고 말한다. “누가 이 짓(?)을 하겠어요. 저도 20여 년 전부터 늘 ‘이번만 하고 이젠 나도 무대에 서야지’라고 되뇌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부엌에서 밥상만 챙기는 일(무대미술)보다 상위의 요리와 술(연출·배우)에 더 눈길이 가지, 누가 이 외로운 일에 나서겠습니까.” 극단의 대표로서, 궂은 일도 마다않는 마음가짐이 없었다면 힘든 일이었다. 남편인 서양화가 권옥연 씨의 프랑스 유학 경비를 대려고 양재학교를 다니면서 터득한 ‘손맵시’도 큰 힘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명문가 10남매의 맏딸이 광대가 된다’며 단식까지 한 할머니의 반대에 맞서 ‘문설이’란 가명을 쓰면서까지 무대를 고집한 뚝심이 있었다. 이런 묵묵한 ‘외길 인생’에 힘입어 이른바 스태프라는 분야가 요즘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div align='right'>- <대한매일>, 이종수, 1999년 6월 8일 이병복 씨의 장충동 작업실은 아침 9시부터 하루 종일 분주하다. 한쪽에서는 천을 마름질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재봉틀이 돌아간다. 나무로 만든 단도에 종이를 말아 붙이는가 하면, 색깔 고운 매듭실로 화관 장식을 짠다. ‘한국 무대미술계의 대모’는 손수 옷감을 꿰매랴, 작업을 돕는 이들에게 꼼꼼히 주의를 주랴 잠시도 쉴 새가 없다. 자칭 ‘뒷광대’. 전면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과는 거리가 먼, ‘무대 뒤 인생’이다. 1966년 연출가 김정옥 씨와 극단 자유를 창단한 뒤 30여 년, 이씨는 그렇게 연극과 함께 살아 왔다. 10월 2, 3일 문예회관 대극장 무대에는 99 서울연극제 특별초청작인 <이병복의 옷굿-살>이 올라간다. ‘옷굿’이라는 생소한 용어에서도 짐작되듯, 이 작품은 연극 속에 쓰였던 옷을 매개로 벌이는 일종의 초혼제(招魂祭)다. “연극 속에서 수없이 많은 작품 속 인물들을 위해 옷을 지어 주었어요. 그 가운데는 허망한 죽음을 맞는 이들이 적지 않지요. 배우는 공연이 끝나 옷을 벗어버리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그 옷들은 죽은 이의 한처럼 제 곁에 남아 있게 돼요. 이 공연은 그 죽은 이들의 혼을 불러 수의를 지어 입히고 천도시킨다는 뜻에서 올리는 것이지요.” ‘살’에는 이씨의 근작이자 대표작들로 꼽히는 <왕자 호동>(1991), <햄릿>(1993) <피의 결혼>(1995), <그여자 억척어멈>(1998) 네 작품이 나온다. 거기서 죽은 이들이 생전의 옷을 입고 등장하며, 그들을 저승으로 천도하는 또 다른 무리가 있다. 전자는 박정자, 한영애 등 오랫동안 연극무대에 서온 중견배우들이, 후자는 이제 막 발을 디딘 젊은 배우들이 맡는다. 이씨가 예술감독을 맡고 윤정섭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가 연출한다. (……) 이번 공연에 배우들이 입고 나올 무대의상도 마찬가지지만, 이병복 씨는 종이와 헝겊, 흙, 지푸라기 등 고집스럽게 전통의 재료들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씨는 그 이유를 ‘오기’로 설명한다. 일찍이 그는 1960년대부터 외국을 드나들며 서양무대의 압도적인 기술과 미학적 완벽함을 목격했다. 하지만 좌절하는 대신 그는 우리 소재로 개성 있는 무대를 만들어 연극적 주제를 승화시켜 보겠다는 승부근성을 발동시키게 됐다고 한다. 이씨의 작업실 곳곳에는 그가 ‘늘 꿈지럭거리며 만들어낸’ 한지인형이나 종이탈, 천조각으로 이어 붙인 조형물들이 널려 있다. 그의 손길을 거친 흑백의 한지와 모시 삼베 등의 질료는 이번에도 삶과 죽음, 생기와 귀기, 축제와 제의의 무대를 창조해낼 것 같다. 30년 작업의 결산, 혹은 새로운 발걸음이 될 공연 앞에서 칠순을 넘은 무대미술가는 소녀처럼 상기돼 보였다. <div align='right'>- <주간동아>, 김영신, 1999년 9월 30일

  • 창작노트

    (……) 질문 : 선생님의 첫 무대미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환도와 리스>(1975년, 아라발 작, 김정옥 연출)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데요. 이병복 : 내가 지금 처음으로 이야기하자면 <환도와 리스> 그게 바로 (내가 말하는) 무대미술이야. 그 당시에 무대장치를 하겠다는 사람을 데려왔는데 도대체 이 작품 해석을 못 하는 거야. 너무 전위적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앞서 말한 것처럼) 상식적인 장치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잖아. 그래서 안 되겠어서 급한대로 혼자 북치고 나팔분거지. 두꺼운 펠트천하고 부직포를 가지고 장미꽃을 한 송이 만들어서 무대에 주렁주렁 매달아놓고, 이태원에 가서 소 구루마 바퀴를 가져다놓고 그랬다구. 거기에 로프로 사다리를 만들어서 걸쳐놓고. 그러니까 “저 여자가 미쳤나” 하더라구. 그런데 그 무대는 정말 이뻤어. 질문 : 그때 “내가 무대미술을 한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작업하셨나요? 선생님께서 의상을 전공하셨으니 무대 의상을 하신 것은 자연스럽지만 무대미술은 조금 의외인 구석이 있는데. 이병복 : 무의식중에 그랬겠지. 그때는 그냥 무대장치를 하시는 분들이 우리가 하는 연극하고는 맞지 않고 못 알아들으시니까 답답해서 그냥 내가 한 거야. 웃기는 얘기지만 맡길 사람이 없어 내가 해보자 해서 한 거지. 당시에는 국내에 무대미술에 대한 체계적 교육이 전혀 없었으니까. 배우고 싶어도 배울 데가 없었어요. 질문 : <환도와 리스>가 첫 무대 작품이라면 1978년의 <무엇이 될고하니>(최인훈 작, 김정옥 연출)에서부터 본격적인 무대미술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시던데요. 그 작품에 대해 좀 말씀해주세요. 이병복 : (그 무대에 대해 말하자면) 그건 역사적인 일이야. 역사적인 거라구. 그전까지 쭉 번역극만 하다가 그때 우리 연극을 시작했는데, 그게 컨셉이 달라지니까 같이 의논해서 작업할만한 무대장치가들이 없는 거야. 그래서 연기자, 앞스태프, 뒷스태프들이 전부 모여서 텍스트를 놓고 그걸 해석해갔어. 그래서 모두들 아이디어를 쏟아 부어서 작품에 접근해가는 방식을 택했지. <무엇이 될고하니>는 과거에서 현재로, 바깥에서 안으로 마구 왔다 갔다 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어떤 구조물을 세울 수가 없었어. 그래서 생각해낸 게 연기자들이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하나씩 들고 나가서 놓는 그런 개념이었어. 그렇다보니 자연히 조명에도 참견하게 됐지. 이때는 이 각도로, 혹은 저 각도로 비춰 달라하고 말이야. 그때 무대에 대해 찬반양론이 대단했어. (……) 질문 : 당시에 특별히 영향을 받으신 무대미술가는 없었나요? 이병복 : 별로 없어. 솔직한 얘기로 난 다른 극장 돌아다니면서 극장 구경하면서 아이디어를 구하고, 그런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바깥과 단절하고 혼자 일하는 스타일이지. 그래서 한국에서도, 외국에서도 특별히 영향 받은 게 없어. 질문 : 그 이후 선생님 작업에 대해서 보통 한국적인 것을 세련되게 표현했다라는 지적이 많거든요. 사용하시는 재료만 봐도 그렇고. 한국적인 것에 천착하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세요? 이병복 : 그 전에 번역극을 계속하다보니까 이건 아니다 싶더라구. 왜 있잖아, 서양 사람 흉내내고 있다는 느낌.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찾게 되더라구. 관심을 갖고 민속품도 모았고. 내가 주로 사용하는 재료들이 종이, 흙, 지푸라기 같은 건데 난 이렇게 원시적인 것들이 그렇게 좋더라구. <div align='right'>- <웹매거진 디자인db>, 2003년 3~4월호

  • 관련도서

    <우리 시대의 연극인>, 서연호, 연극과인간, 2001

  • 연계정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피의 결혼
    -새불
    -극단 자유
    -김정옥(金正鈺)
    -따라지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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