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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사적으로 짚어보는 한국 극단활동의 흐름

오늘날 의미의 연극 극단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소위 신연극의 출범 이후이다. 최초로 신연극을 행하였던 ‘협률사’나 이를 이은 ‘원각사’는 최초의 실내극장이라는 의의가 지대한데, 이들은 단체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협률사’나 ‘원각사’에는 배우(특히 창우)가 속해 있어서, 극장으로서의 명맥을 다 한 후에도 가끔 이들이 공연한다는 광고가 눈에 띄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최초의 연극 단체였다고도 하겠다. 본격적인 극단의 출범은 1910년대 신파극 이후이다. 임성구의 ‘혁신단’은 최초의 신파극단으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이외에도 윤백남과 조일재의 ‘문수성,’ 이기세의 ‘유일단,’ 윤백남과 이범구의 ‘예성좌’, 김도산의 ‘개량단’, 김소량의 ‘취성좌’ 등은 대표적인 신파극단이었다. 이들은 근대 사실주의극에서는 미치지 못했으나, 그 인기로 인하여 화극(話劇)이 정착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하겠다. 1920년대에 들면서, 여러 학생극 운동이 일어나서 우리 연극을 한발 더 근대 사실주의극에 가깝게 했다. 김우진이 주도했던 ‘극예술협회’가 동우회 등 여러 단체들과 관련을 가지며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1920년대 연극을 주도했던 ‘토월회’도 시초는 학생극 운동의 하나였다. ‘토월회’는 제2회 공연 후 박승희가 신극운동 단체로 탈바꿈하며 거듭나서, 1925년 광무대를 일년간 전속극장으로 계약하기도 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무대장치나 의상이 사실성을 띄게 되었고, 일상회화식의 대사나 연기가 일반화되어 소위 신파조가 줄어들었으며, 구찌다데 식이 아니고 상연 대본을 쓰게 되었다. 이외에도 윤백남의 ‘민중극단’이나 홍노작과 박진 등의 ‘산유화회’ 등이 신극운동에 힘썼으며, 김소량의 ‘취성좌’는 개량 신파극단으로 거듭났다. 한편 경향극단들도 등장했는데, ‘염군’이나 ‘불개미’ 등의 극단이 공연 한번도 못 가진 채 유산되기도 했으며, 1927년 연학년의 ‘종합예술협회’ 가 <빰 맞는 그 자식>을 공연하기도 했다. 1930년대는 ‘극예술연구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홍해성과 유치진의 활약으로 근대 사실주의극의 수용이 본격화되었다. 1931년 창립되어 1939년 극연좌로 막을 내리기까지 해외 근대극과 창작극 발굴에 힘써서 연극계 전반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한편 상업극은 연극 전문극장을 가졌던 ‘동양극장’이 주도적 역할을 하여, 최초로 배우들의 월급제를 실시하며 소위 고등신파를 꽃피웠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등 전설적인 인기를 자랑하였으며, 수많은 일화를 낳기도 했다. 이외에도 ‘조선연극사’, ‘연극시장’, ‘신무대’, ‘중앙무대’ 등이 상업극단으로 활약했으며, 창극단 ‘조선성악연구회’도 조직되었다. 경향극단으로는 ‘메가폰’이나 ‘신건설’ 등이 활동했으며, 특히 신건설 사건은 카프의 해산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후 일본의 군국주의를 선전·고무하는 국민연극이 성행하다 해방을 맞게 된다. 해방기의 격동 속에서 좌익 연극단체는 ‘조선연극동맹’으로 대표되었고, 우익 연극단체는 ‘민족예술무대’나 ‘극예술원’을 꼽겠다. ‘극예술원’의 해산 후 유치진의 주도로 ‘극예술협회’가 결성된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국립극장 설치 운동도 활발히 진행되어서, 1950년 4월 <원술랑>으로 개관 공연을 갖는다. 운영에 있어서 오늘날과 같이 전속배우를 둔 ‘국립극단’을 두지 않고, 전속극단을 계약제로 고용하였는데 이들이 ‘극협’과 ‘신협’이다. 이들은 사실상 해방공간에서 우익연극의 선두였던 ‘극예술협회’가 재조직된 ‘신극협의회’의 멤버들이다. 6·25 동란 중 ‘신협(신극협의회)’의 <햄릿>공연은 아직도 항간에 회자할 정도로 전설적인 공연이었다. 이외 1950년대의 대표극단으로는 ‘제작극회’를 꼽겠으니, 차범석, 김자림, 박현숙 등 동인 극작가와 허규, 오사량, 이두현 등의 연출가와 연기자 및 연극학자를 배출하였다. 1960년대는 우리연극에서 현대극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극단에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으니, 소위 동인제극단 운동이다. ‘실험극장(1960)’, ‘산하(1963)’, ‘민중극장(1963)’, ‘극단 드라마센타(1964)’, ‘가교(1965)’, ‘자유극장(1966)’, ‘광장(1966)’, ‘여인극장(1966)’, ‘에저또(1969)’, ‘극단 성좌(1969)’ 등이 잇따라 창단되었으며, 각기 이상적인 연극을 내세웠다. 1970년대에도 이러한 동인제극단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니, ‘산울림(1970)’, ‘작업(1970)’, ‘민예(1973)’, ‘맥토(1973)’, ‘제3무대(1973)’, ‘고향(1974)’, ‘현대극장(1976)’, ‘창고극장(1976)’, ‘세실극장(1976)’, ‘극단76(1976)’, ‘뿌리(1977)’, ‘대하(1977)’, ‘연우(1979)’, ‘춘추(1979)’ 등이 새로이 창립되었다. 이들 중 ‘실험극장’은 <에쿠우스> 등 서구 현대극의 실험으로, ‘자유극장’은 전통적 이미지를 되살린 한국적인 시각적 무대로, ‘에저또’는 감각적 실험연극으로, ‘현대극장’은 상업적 연극의 가능성 타진으로, ‘연우’는 재야 연극인의 등장 등으로 특히 주목되었다고 하겠다. 1980년대 창단된 ‘목화’, ‘미추’, ‘작은 신화’ 등도 오늘날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1980년대 말 ‘현장,’ ‘아리랑’ 등 마당극 계열 극단들의 부상이 주목된다.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우리나라에도 포스트모던 사회의 여러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존의 극단들에 ‘무천’, ‘연희단거리패’, ‘차이무’, ‘극단 창파’, ‘극단 파티’, ‘지구연극연구소’, ‘골목길’ 등 많은 극단이 활동하며, 그 다양성을 더하고 있다. 실로 극단의 역사는 우리 연극의 구체적인 실체이며 산 증인이라고도 하겠다. 이미원(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극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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