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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항석(徐恒錫)

예술가명
서항석(徐恒錫)
전공
연출
개요
서항석은 우리 문학과 연극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가졌던 인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연극이론, 연출, 희곡번역, 외국의 문학이론 등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전후 한국연극의 모든 요직들을 두루 맡아 역량을 발휘했던 그는 우리 연극계의 여론과 행정을 주도하는 주체였다고 볼 수 있다. 1900년 함경남도 홍원(洪原)에서 태어난 서항석은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동경제국대학 독문과를 졸업하였다. 대학시절부터 해외문학파에 가담하여 한국에 독일문학을 소개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1929년 동경에서 귀국하여 동아일보 학예부기자로 문예비평활동도 폈다. 대학시절, 독일희곡에 심취하였던 그는 점차 연극운동에 뜻을 두기에 이르렀고, 그것은 1931년 극예술연구회 조직으로 구체화되었다. 본격적인 연극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극예술연구회는 연극을 단순한 대중오락물로 보지 않겠다는 뜻에서, “극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넓히고 기성 극단의 사도(邪道)에 흐름을 구제하는 동시에 나아가서는 진정한 의미의 우리 신극을 수립하고, 아일랜드의 문예부흥운동에 자극 받아 외국 문예를 통한 한국 문예의 발전을 꾀하고자” 발족되었다. 서항석은 극예술연구회의 창립 멤버 12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극예술연구회에서 서항석은 주로 재정을 담당했다. 극예술연구회의 모든 뒷바라지는 서항석이 도맡아 했다고 한다. 학예부장 월급은 두말할 것도 없고, 집에서도 이 핑계, 저 핑계로 많은 돈을 갖다 썼다. 그래서 집에서도 따돌림을 받았음은 물론이었다. 그만큼 당대 지식인으로서 연극에 대한 열정을 지녔던 그는, 1937년 극예술연구회 제17회 공연으로 톨스토이의 <부활>을 처음으로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극예술연구회의 창립 정신을 잃고 흥행적이었다는 비판을 들었다. 생활과 연극 사이에서 고민했던 그는 이 일로 동아일보 학예부장 직을 그만 두고 본격적으로 연극과 영화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서항석이 연극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보여준 시기는 1941년 조선연극작가회 회장에 피선되고 나서부터이다. 1937년 이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황국식민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면서 연극과 연극 지식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극예술연구회’의 기관지 <극예술>을 폐간하고, ‘연구회’라는 단체를 해체하도록 했다. 가장 대표적인 신극 단체였던 극예술연구회는 평범한 직업극단인 ‘극연좌’로 바뀌었고, 회원들도 초기 회원들이 거의 떠난 탓으로 서항석, 유치진, 강기제 세 명뿐이었다. 그러나 극연좌도 내분에 휘말려 1939년에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1940년대에 들어서는 연출에도 손을 대었고 <견우직녀>, <콩쥐팥쥐〉등의 희곡도 쓴 바 있다. 광복 후 국립극장 설립에 앞장섰으며, 피난지 대구에서 유치진에 이어 제2대 국립극장장에 임명되었다. 1960년까지 7년간 국립극장장을 역임한 뒤 괴테의 <파우스트〉번역에 심혈을 쏟았고, 그 작품은 1960년대 중반에 최초로 국립극장무대에 올려지기도 하였다. 이로써 그는 독일정부로부터 괴테훈장을 받은 최초의 한국인으로 기록되었다. 그 뒤 서라벌예술대학 연극과에서 강의하면서, 연극계의 지도자로서 예술원 회원, 서울시 문화위원, 국립극장 운영위원 등을 지냈다. 한국연극사에서 서항석은 신극 이론가이자, 연출가이며, 연극 행정가로 널려 알려져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가 연극에 대해서 언급한 사항들은 거의 가려져 있다. 1987년에 나온 <서항석 전집>(전 6권, 하산 출판사)은 그의 삶과 연극 활동을 송두리째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근대문학을 전공했고, 연출과 희곡 번역 등을 했으며, 국립극장 단장을 역임한 그가 한국의 현대 연극에 미친 영향은 매우 지중했겠지만 그에 관한 논문과 연구 성과는 앞서 말한 것처럼 거의 없다. 서항석에 관한 연구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그가 남긴 글들을 촘촘하게 읽어 가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극예술연구회와 극연좌의 활동, 식민지 시대에 친일극 활동을 한 현대극장과 국민연극연구소 시절, 한국전쟁 이후 국립극장의 책임자로서의 역할, 독일문학 작품의 번역, 1964년 서라벌예술대학 교수가 되면서부터 1973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그가 써놓은 길고 짧은 글들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생애와 약력
1904년 출생지에서 한학을 공부 1914년 모산(帽山)학교 졸업 1915년 중성(中成)학교 고등보습과 1년 수료 / 경성 보성학교 제2학년에 보결입학 1917년 경성 중앙학교 제4학년에 전입 1918년 경성 중앙학교 졸업 1920년 일본 동경 아오야마(靑山)학원 중학부 졸업 1925년 일본 제2고등학교 문과 을류(乙類, 獨文) 졸업 1929년 일본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독일문학과 졸업 / 동아일보사 정치부에 입사하여 지방부를 거쳐 학예부로 1931년 극예술연구회 창립동인으로 신극운동에 종사 1933년 동아일보사 학예부장 겸 논설위원 1938년 동아일보 사퇴 1940년 조선예흥사 주간 1941년 극단 현대극장에 참가 / 조선연극작가회장에 피선 1942년 조선연예협회 이사에 피임 1947년 서울시 성북구 동선남동(東仙南洞) 회장 / 경기여자고등학교 강사 1948년 한국무대예술원 부원장에 피선 / 민주일보사 편집국장 / 대한국악원 이사 1949년 동양외국어전문학관 교수 겸 처장 1950년 국립극장 운영위원 1951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위원장에 피선 / 국제도서주식회사 회장 1952년 대학신문사 주필에 피임 / 선명여자고등학교 강사 /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부 강사 / 국방부 종군극작가단 극단장 1953년 중앙국립극장장 피임 /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 피선 1954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창립에 가담 1957년 예술원 회원 피선 / 서울시 문화위원 피임 1959년 한국무대예술원 최고위원에 피선 1960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의장단 피선 1961년 예술원 연예분과 회장 피선 / 중앙국립극장 정년 퇴임 / 한국연극협회 이사 피선 / 한국문인협회 이사 피선 / 한국독일문학회장 피선 1962년 서독정부 초청으로 3주간 서독시찰 1963년 전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 /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 독문학과 강사 / 문교부 교육제도심의위원 피선 / 정부 파견 재일교포 성인교육 강사가 되어 일본 6대 도시 순강 1964년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 전임교수 /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피선 1965년 서울시 문화위원회 부위원장 피선 / 한국외국어대학 독일어과 강사 /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재선 1966년 경희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과 강사 / 서라벌예대에서 대학교수로 문교부 승인을 얻음 1966년 극단 창조 창립 1968년 성신여자사범대학 강사 / 3·1문화상 심사위원 피촉 1970년 한국독일어교육회장 피선 / 문화예술상 운영위원 피촉, 동 위원장에 피선 1972년 동국대학교 대학원 연극과 강사 1973년 서라벌예술대학 정년 퇴직 1974년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독문과 강사 / 국립극장 운영위원 피촉, 동 위원장에 피선 1976년 펜클럽에 재입회 1978년 예술원 부회장 피선 / 예술원 종신회원 임명 1981년 예술원 원로회원으로 추대 1983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고문 / 한국연극협회 고문 / 한국희곡작가협회 고문 / 국립극장 연극부 종신단원 위촉
상훈
1961년 서울시 문화상 1962년 건국문화훈장 1964년 예술원상 1967년 문교부 제6회 문예상 1973년 국민훈장 모란장 1983년 제1회 전국연극인대회 공로상 1984년 노후찬하월남장(제21호)
작품활동
1937년 삼성영화사를 창립하여 영화 <애연송(愛戀頌)>을 제작 1948년 국제 오페라사의 베르디 작 <춘희> 연출 / 문예사 창립, 종합무대운동을 시험 1949년 한불문화협회의 구노 작 <파우스트> 연출 1961년 철오의 <여당원>(이진순 연출, 시공관) 각색 1962년 <침종>(하우프트만 원작) 연출 1967년 <이끼 낀 고향에 돌아오다>(윤조병 작) 연출
대표작품
<부활> <견우직녀> <파우스트> <여당원> <신앙과 고향> <침종> <이끼 낀 고향에 돌아오다>
저서
<서항석 전집 1~6>, 서항석, 하산출판사, 1987
리뷰
(……) 우리 극단의 원로 서항석 씨는 식을 줄 모르는 연극에의 정열과 그의 꿋꿋한 숙원적(宿願的) 의지(파우스트)로서의 번역 상연이라는 난작업을 성공리에 이룩해 놓았으며 이제 성실한 노력만 집주(集注)한다면 어떠한 어려운 고전작품이라도 우리 연극인의 힘으로 능히 소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다짐했다, 기획, 번역, 연출의 1인 3역을 맡은 서항석 씨의 사명감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이 밤의 무대(11월 1일 밤)를 줄기차게 이끌어 나간 것은 중진 배우 김동원 씨(메피스토펠레스 역 분)의 성숙한 기교의 힘에 의존함이 컸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인물의 내면형성보다 역의 외관정리에 치중하는 김동원 씨의 양식주의적인 연기자세는 “희곡의 골격이나마 우리 관객에게 친근해지는 기회를 마련하자”는 연출자의 의도에 합일되어 흔히 난삽해지고 따분해지기 쉬운 문학성의 번역극을 3시간이란 긴 상연시간 동안 재미있게 볼 수 있는 큰 동력이 되었다. (……) 그리고 이것은 연출자에게 너무 지나친 요구일지는 모르나 인물들을 표면적인 성격의 차원에서 다루지만 말고 보다 깊은 본성의 차원에서 추구하여 행복에의 고뇌를 장면 단위로 부각시키며 극의 기복을 쌓아올렸더라면 이 연극은 예술적인 성공도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 - <대한일보>, 1977년 7월 23일 (……) 그는 당대 연극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행복했던 이였다. 이론면에서나 실천, 사회활동 면의 거의 모든 면에서 수장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내세우는 삶과 연극활동의 지표는 그가 말한대로 “인간에 대한 존경”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 그는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모든 준비에 결함이 없는 뒤에 지식인, 현대가 아무리 분화를 요구하는 시대라 할지라도 그 반면에 있어서는 종합적인 것을 희구하는 경향이 또한 농후함”을 강조했다. 다만 그가 활동했던 시간 사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에 관한 연구논문이 거의 없다는 것이 매우 아쉬울 뿐이다. 서항석에 관한 연구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그가 남긴 글들을 촘촘하게 읽어가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서항석을 다시 읽은 지금, 필자는 단순히 그에 대한 소개가 아니라, 그를 통해서 한국연극의 기나긴 역사적 맥락을 잇는 단초를 발견하고 싶었다. 서항석을 비롯한 근대 연극의 이론가와 실천가들을 통해서 한국 근대 연극의 맹아를 발견하고, 한국근대 연극의 감수성, 낡은 형식을 뚫고 새로운 연극을 표현하려 했던 그 시대의 움직임들을 이해하고자 했다. 오늘날 한국연극을 이해하기 위해서, 서항석을 비롯한 근대연극사는 일본으로부터 연극에 대한 앎과 실천양식을 수용했다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 유산이 가난하다는 것을 떠나 오히려 연구해야 하는 냉철한 인식의 대상이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한국연극의 전면적 개화에 이르지 못한 모습들, 왜곡된 채 수입되었을지도 모르는 이론들을 섬세하게 다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서항석 론: 신연극의 개안(開眼)을 위한 열정’, 안치운, <한국예술총집>, 2000
관련도서
<서항석 전집 1~6>, 서항석, 하산출판사, 1987
연계정보
-이끼낀 고향에 돌아오다
-견우직녀
-창극 백운랑
-국립극단
-빌헬름 텔(Wilhelm Tell)
-신앙과 고향
-파우스트(Faust)
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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