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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텔(Wilhelm Tell)

  • 작가소개

    요한 크리스토퍼 프리드리히 폰 쉴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 독일 극작가, 시인. 마르바흐 출생.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부모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성직자를 희망하여 그 과정을 밟았으나, 13세 때 영주인 카를 오이겐 공의 간섭으로 진로를 바꾸고 명령에 따라 군학교(카를학원)에 입학했다. 군대식 규율과 감독이 엄한 이 학교에서 처음 2년 동안 법학을 배운 뒤 의학으로 바꾸었다. 1780년 <인간의 동물적 본성과 정신적 본성의 연관에 관해서>라는 논문으로 졸업한 후 바로 연대 부속 군의관으로 임명되었다. 재학 중 몰래 읽은 당시의 신문학운동의 여러 작품, 특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과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1604)에 자극받아 희곡 습작을 시작하고 있던 무렵, 격심한 자아주장과 깊은 종교감정이 교착하는 처녀작 <군도(群盜)>를 거의 완성하고 있었다. 그는 1781년 초여름에 <군도>를 익명으로 출판했으며, 다음해 1월 만하임국민극장에서 초연되자 평판이 대단했다. <군도>는 쉴러에게 ‘가족과 조국에 대가를 치러야 했던’ 작품이었다. 중상하는 사람이 있어 영주의 노여움을 사게 된 쉴러는 1782년 만하임국민극장 지배인 달베르크를 의지하여 망명했다. 그 후 함께 도망한 슈트라이허의 도움으로 바우어바흐에 있는 볼초겐의 어머니의 별장에 숨어서 정치적 야심가와 공화제의 비극인 <게누아의 피에스코의 반란>(1783)과 궁정적 전횡(專橫)의 희생이 된 청순한 사랑을 그린 시민비극 <음모와 사랑>(1784)을 썼다. 1783년 만하임국민극장 전속 시인이 되었으나 다음해 계약이 갱신되지 않아 다시 궁지에 빠졌고 이때, 쾨르너의 도움을 받아 2년 동안 그의 밑에 있었다. 이 무렵의 작품으로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합창 텍스트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환희에 부치다>(1785)와, 이상과 우정의 비극인 <돈 카를로스>(1787)가 있다. 그는 <돈 카를로스>를 그때까지의 거칠고 파괴적인 산문적 작풍을 버리고 운문으로 썼는데, 그것은 그가 슈투름 운트 드랑(Sturum und Drang)과 결별하고 고전주의적 문학양식으로 나아가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그는 이 작품이 완성되자 1787년 괴테, 헤르더, 빌란트 등이 있는 바이마르로 이주하여 왕성한 의욕으로 <네덜란드 이반사(離反史)>(1788)와 소설 <견령자(見靈者)>(1787∼89)를 쓰는 한편, 그리스 비극과 칸트철학을 연구했다. 1789년 예나대학 역사학교수가 되었다. 1791년 문학사상에서 고전주의의 프롤로그로 평가받은 뷔르거 비평을 발표했으며, 시인에게 불가결한 요건은 개성의 순화와 이상화 기법에 의한 보편적 인간성의 조형(造形)이라고 갈파했다. 이어 <30년전쟁사>(1791∼93)를 썼으며 또한 칸트의 철학서를 탐독하여 많은 영향을 받음과 함께 그 주관주의적 미학이론을 극복하려는 일련의 미학논문을 썼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우미와 존엄에 관해서>(1793),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1795), <소박한 문학과 감상적 문학에 관해서>(1795∼96) 등이다. 쉴러는, 인간의 인격적 완전성은 이성과 감성의 조화적 통일에 있다는 관점에서 첫번째 논문에서 그와 같은 인격적 완전성을 <아름다운 영혼>이라 했다. 두 번째 논문에서는 근대인이 <아름다운 영혼>에 이르는 길은 예술에 의한 미적 유희교육뿐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이 말의 완전한 의미로서의 인간일 때에만 놀 수 있으며, 놀 때만 완전한 인간이다”라는 그의 말은 유명하다. 세 번째 논문에는 시인을 2가지 유형으로 파악했는데, 자연에 따라 살고 자연을 현실로서 묘사하는 시인을 소박시인, 자연을 상실하여 자연을 이상으로서 묘사할 수밖에 없는 시인을 감상시인이라 하였으며, 인위적인 근대문화 안에서 감상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근대 시인과 문학 본연의 모습을 논했다. 1794년 여름, 괴테와 쉴러는 급속하게 친해졌고, 이후 쉴러가 죽을 때까지 11년 동안 두 시인은 변함없는 우정으로 협력하여 독일고전주의를 확립했다. 이들 사이에 오고 간 1009통의 편지는 보기 드문 우정의 기념비이며 귀중한 문학사적 자료이다. 1795년 여름, 봇물 터지듯이 시상(詩想)이 다시 넘치자 <이상과 인생>, <산책> 등의 사상시가 나왔으며, 1796년 가을에는 사극 <발렌슈타인>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797년에는 한 때, 괴테와의 경쟁작으로 서사시에 몰두했으며 1799년 <발렌슈타인>을 겨우 완성했다. 이후 거의 1년에 1편 씩의 희곡을 썼으며, <마리아 슈투아르트>(1801), <오를레앙의 처녀>(1801), <메시나의 신부>(1803), <빌헬름텔>(1804)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1805년 5월 9일 바이마르에서 생애를 마쳤으며 <데메트리우스>라는 미완성 유고를 남겼다. 쉴러는 그 웅혼한 희곡, 전아한 사상시, 고결한 이상주의적 정신 때문에 오늘날에도 괴테와 나란히 경애받는 독일

  • 작가소개

    의 국민시인이다. 출생지인 마르바흐에는 쉴러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으며 쉴러국민박물관이 있다. 바이마르에는 쉴러의 자택과 괴테·쉴러 문고가 있다. <빌헬름 텔>은 1300년 무렵 스위스 3개 주의 주민이 합스부르크가의 압박에 항거해서 자유권을 수호했을 때, 영웅적인 활동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 전설적 인물인 텔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운문극이다. 압제에 대항하여 결속해서 싸울 것을 서로가 서약하는 소박하고도 늠름한 중세 사나이들이 알프스의 대자연을 배경으로 활동하는 이 민중적 해방극은 자유와 정의와 인간애의 장대한 드라마로서 발표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석궁(石弓)의 명수인 텔이 막대기 위에 걸려 있는 수령(守令) 게슬러의 모자에 경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당한 뒤, 관원의 강요로 80보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자기 아들의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활로 떨어뜨리는 장면은 특히 유명하다. 그 뒤 텔은 제2의 화살을 몰래 지니고 있었다고 해서 다시 체포되어 호수로 호송되던 도중, 폭풍우를 만나 그 틈을 타서 도망하여 산길에 매복해 있다가 게슬러를 사살한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스위스인은 일제히 봉기하여 압제자측 성채를 차례차례 파괴하고 적을 몰아낸 뒤 승리의 노래를 부른다. 이탈리아 초기낭만파의 작곡가 로시니는 이 희곡에 의한 4막의 오페라 <윌리엄 텔>을 작곡하였다. 주디가 각색하고 비가 프랑스어로 번안하여 1829년 9월 ‘기욤 텔(Guillaume Tell)’이라는 제목으로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로시니의 수많은 오페라 가운데 마지막 대작이었는데, 오늘날에는 표제음악으로 뛰어난 서곡(序曲)만이 잘 알려져 있다. 이 서곡은 4부로 되어 있으며 <여명>, <폭풍우>, <목가(牧歌)>, <스위스 독립군의 행진> 순으로 정경묘사가 되어 있다.

  • 내용

    제1막 제1장 어느날 운터발덴주의 나무꾼 바움가르텐이 그의 아내에게 추근대는 로스베르크의 총독 볼펜쉬이쎈을 도끼로 요절을 내고 자르넨의 총독 란덴베르크의 부하들에게 쫓겨, 살 길은 오직 호수 건너 슈뷔츠주로 도망하는 길밖에 없었는데, 때마침 호수에는 폭풍우가 일어 익숙한 뱃사공도 감히 엄두를 못내는 판에 사냥꾼 텔이 배를 저어 그를 구원한다. 제2장 슈뷔츠의 총독 게슬러가 슈타우파허의 집을 보고 “토민 주제에 재산량이나 있답시고 덩그렇게 집을 짓고 뽐내는 꼴을 그냥 두고 보지 않겠다.”는 공갈을 남기고 간다. 슈타우파허는 부인 게르트루우트의 격려도 있고 하여 대책을 강구할 목적으로 우우리주로 동지를 찾아간다. 마침 텔이 비움가르텐을 데리고 와서 그 집에 맡긴다. 제3장 슈타우파허의 길은 알토르프 광장을 지나게 된다. 이 광장에는 지금 감옥이 지어지는 공사가 한창인데, 여기 작대기 위에 모자를 걸어가지고 “이 모자를 총독으로 알고 경의를 표하라! 명령을 어기면 신체와 재산을 몰수한다.”는 포고가 돈다. 이런 포고를 듣고 더욱 결의를 굳히는 슈타우파허는 텔에게 동조하기를 청한다. 그러나 텔은 이를 거절하면서 “언제든지 부르면 응하겠다.”하고 헤어진다. 제4장 슈타우파허는 퓌르스트를 찾아갔다. 그는 우우리주에서 토민들의 존경을 받는 노인이요 텔의 장인이다. 여기에는 멜히탈이라는 운터발덴주의 청년이 숨어 있었다. 그는 자르넨의 총독 란덴베르크에 대한 자기의 사소한 잘못으로 자기의 암소가 끌려가는 것을 보다 못해 그 부하에게 손찌검을 하고 도망쳐 온 것이었다. 그러나 총독이 그 청년의 아버지를 잡아들여 칼로 두 눈을 빼버린 줄은 모르고 있다가 슈타우파허에게서 그 소식을 듣고 복수의 염에 불탄다. 드디어 세 사람은 각각 자기 주에서 10명씩 동지를 구해 뤼틀리의 으슥한 곳에 모이기로 한다. 제2막 스위스 3주의 각계 각층의 동지 33인이 모인 뤼틀리의 회의는 크리스마스를 기하여 거사하기로 합의를 본다. 제3막 제1장 아팅하우젠 남작은 스위스가 오스트리아의 통치 하에 들어가기 전까지 스위스 백성들을 통솔하여 온 토착귀족의 한 사람이다. 85세의 고령인 이 사양(斜陽)의 귀족은 지금도 그 집의 오랜 풍습대로 머슴들을 불러 아침술잔을 나누곤 한다. 그의 조카 루우덴츠는 자신의 영달을 생각하여 오스트리아 편에 붙어 가지고 그 편의 귀족 딸 베르타와 사랑에 빠져있는 속없는 청년이다. 그는 남작이 “언제고 한번은 반드시 고향산천을 그리며 눈물 흘릴 때가 올 것이다”라고 타이르는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름답고 상냥한 베르타가 명분을 바로 세워 충고하는 말에 감동하여 루우덴츠는 조국 스위스의 편으로 돌아서게 된다. 제2장 아들을 데리고 사냥하러 가던 텔이 알토르프 광장을 지나다가 아들과의 대화에 정신이 팔려 작대기 위의 모자를 주의하지 않고 지나쳐 파수병에게 붙잡힌다. 파수병이 텔을 반역자로 구속하려 하자 승강이가 벌어진다. 이때 그 근처에 매사냥을 나왔던 게슬러가 나타나서 “모자에 경의를 표하지 않은 것은 황제나 나를 모욕한 것이나 다름없다”하고 아들의 머리 위에 능금을 올려놓고 80보 밖에서 활로 쏘아 맞히라는 명령을 내린다. 명령을 어기고 안 쏘거나, 쏘아도 못 맞히거나 하면 아비와 아들의 두 생명을 함께 뺏겠다고 말한다. 토민 여러 사람과 함께 루우덴과 베르타가 이 가혹한 명령을 거두라고 호소해도 막무가내다. 이에 쏠 수도 없고 안 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궁지에 빠진 텔은 화살 하나를 활에 잰다. 그러나 차마 쏘지 못한다. 텔은 다시 화살 하나를 더 꺼내 허리에 꽂고 기어코 활을 쏜다. 능금은 보기 좋게 화살에 꿰어진다. 군중의 환성이 일어난다. 그러나 게슬러는 텔에게 허리에 꽂은 화살은 무엇때문이냐고 추궁한다. 솔직한 텔은 “만일에 실수를 해서 어린 것을 쏘았을 때는 둘 째 번 화살로는 각하를 쏘려고 한 것입니다”라고 이실직고한다. 이 때문에 텔은 게슬러의 거성(居城)인 퀴스나하트로 끌려간다. 제4막 제1장 아팅하우젠 남작은 토민들의 간호와 위로를 받으며 임종의 숨을 거둔다. 뒤늦게 뛰어온 루우덴츠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큰아버님! 저는 당신의 이 식어진 손에나마 맹서합니다. 저는 영구히 스위스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는 토민들을 향하여 크리스마스까지 기다릴 것 없이 당장에 일어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행을 미룬 데서 텔이 끌려갔고 베르타가 유괴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일각도 지체할 수 없다고 한다. 제2장 퀴스나하트 부근의 동굴길에 나타난 텔은 자기가 끌려가던 도중에 호수에 폭풍이 일어 풀려날 기회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무엇인가 기다리는 눈치다. 그는 이 길로 게슬러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폭

  • 내용

    풍의 덕택으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자기와 자기 처자의 안전을 위해서는 게슬러를 죽여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드디어 게슬러가 나타난다. 텔의 화살이 그의 심장을 뚫는다. 뤼틀리 회의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로 남겨 놓은 일을 텔이 해결한 것이다. 제5막 봉우리마다 봉화불이 타오르고 여기저기서 종소리가 울린다. 적은 모조리 몰아냈고 성은 죄다 함락시켰다. 성에 갇혔던 베르타도 구해냈고 아버지의 원수 란덴베르크를 붙잡은 멜히탈은 다시는 이 나라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놓아보낸다. 때마침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황제는 그 조카 요오한 공에게 암살을 당하고 황제의 자리는 하프스부르크가(家)를 떠나서 자유선거로 결정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온다. 이것으로 이후에 스위스 백성들의 자유를 억압할 외부로부터의 권력은 사라진 것이다. 이에 베르타는 자유 스위스의 한 여인으로서 루우덴츠의 가슴에 안기고 루우덴츠는 그의 노예를 전부 해방한다고 선언한다. 이로써 스위스는 밖에 침략의 위협이 없고 안에 계급의 차별이 없는 완전한 자유의 나라가 된다. 일동은 텔을 맞이하여 스위스 만세를 부른다.

  • 국내공연연보

    1952년 8월 극단 신협 / 대구피난지 / 이해랑 연출 1953년 극단 신협 / 부산극장 / 이해랑 연출 1960년 10월 10일~15일 국립극단 / 시공관 / 서항석 연출 1975년 11월 27일~12월 1일 국립극단 / 국립극장 / 허규 연출

  • 예술가

    이해랑(李海浪, 1916~1989) 이해랑은 본명 해량(海良)으로 1916년 7월 서울 와룡동에서 의사 이근용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경성의전과 경도제국대학 의학부에서 공부했던 그의 부친은 세브란스의전 외과부장과 4·19혁명 직후 부산시장을 지냈다. 이런 명문가에서 태어난 이해랑은 초등학교 졸업 후 휘문, 배제고보 등 여러 학교를 다녔으며, 일본으로 건너가서 두 곳의 중학교를 거쳐 니혼[日本]대학에 입학하여 연극을 공부할 수 있었다. 대학 재학 중 유학생들과 함께 동경학생예술좌를 조직하여 <춘향전>의 단역으로 무대에 서 보기도 했다. 1938년 대학졸업과 동시에 귀국하여 극예술연구회 신입회원으로 가입했다. 극예술연구회 후신 극연좌에서 몇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이듬해 대중극단 고협에 가입하여 몇 작품 출연했으며, 1941년 유치진이 현대극장을 창단함으로써 유치진과 필생의 인연을 맺게 된다. 한편 친구였던 함세덕과 고협에서 잠시 인연을 맺었던 황철 등과 낙랑극회를 출범시켰으나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어 김동원 등과 극단 전선도 만들었으나 역시 좌익연극의 기세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다. 이러한 좌익연극에 대응하기 위해 김동원, 박상익, 김선영 등과 함께 극예술협회(약칭 극협)를 창립했으며, 1950년 4월 국립극장이 문을 열면서 극협회원들을 이끌고 들어가 신협을 탄생시켰다. 국립극장 신협시절까지만 해도 배우로서만 활동했던 그가 부산 피난시절부터는 연기와 연출을 겸한 것은 물론, 제작까지도 책임지는 거의 전천후 연극인으로 변신해갔다. 1962년 드라마센터가 개관하면서 극장장으로 참여했지만 1여 년 만에 문을 닫음으로써 연극인으로서 최대의 좌절을 겪기도 했다. 이때부터 얼마 동안 예총 등과 같은 문화단체 활동에 힘을 쏟았고 출연과 연출은 뜸했다. 이 시기 민주공화당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이동극장을 만들면서부터 다시 연극에 대한 집념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약 7년 동안 전국을 다니면서 연극활동을 벌인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는 연출에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배우보다는 연출가로서 큰 성공을 거둔 셈이다. 이러한 성공요인을 유민영은 크게 세 가지로 꼽는다. 첫째, 연극이론에 대단히 밝았다는 점. 즉 서양연극이론을 섭렵하는 과정에서 스타니슬라브스키에 심취했고, 그것을 자기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둘째, 그가 배우로서 무대에 십 수 년간 섰기 때문에 작품해석과 성격창조에 뛰어났고 무대를 잘 알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세 번째, 인간심리를 파악할 수 있는 추리소설 중심으로 꾸준한 독서를 했기 때문에 삶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풍부한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가 한국연극사에 남긴 것은 무엇일까? 해방직후와 6·25전쟁 중에도 연극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 그리고 1970년대 이후 연극계가 새로운 모색을 위해 혼란을 겪을 때 오로지 리얼리즘 연극의 맥을 굳건하게 지켰다는 것, 여러 극단과 대학(가령, 드라마센터와 동국대학 연극과)에서 후진을 많이 길러낸 연극계의 큰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 그의 공로로 인정받는다. 마지막으로 이동극장운동을 통해 대중으로부터 멀리 있던 연극을 다시 대중에 밀착시키고 동시에 지방문화를 활성화시킨 공로도 빼놓을 수 없다.

  • 리뷰

    국립극단의 74회 공연 쉴러 작, 서항석 역·편, 허규 연출의 <빌헬름 텔>은 최근 몇 년간 국립극단이 선택한 작품 중에서 젊은 관객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 수 있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압제를 받던 스위스 3개 주의 백성들이 자유를 위해 봉기해서 그들의 평화를 지켜낸다는 감격적인 이야기를 빌헬름 텔이라는 사냥군과 헤르만 게슬러 총독이라는 압제자를 대비시켜 끌고 나가는 이 고전적인 대작은 신협 전성 시절부터 우리 무대의 인기작품이었다. 일제 식민지 통치 하의 괴로움을 아는 우리에게는 남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자유를 위해 싸우는 이야기가 남다른 감동을 준다는 매력적인 요소가 있고 고전 작가에 대한 젊은이들의 관심이 또 인력으로 작용한 것 같다. 국립극장 무대에서만 가능한 웅장하고 호화스러운 무대장치가 이번 공연에서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고 역시 국립극단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인적 자원의 풍부함을 십분 이용한 화려한 무대였다. 고설봉, 강계식, 이기홍 등 원로 배우에서부터 각 연령층으로 이어지는 국립극단의 모든 배우들이 이번 무대에서는 상당히 통일된 호흡으로 연기의 조화를 이루었으며 빌헬름 텔 역의 장민호, 아팅하우젠 남작 역의 권성덕, 스타우터허의 이호재 등이 안정된 대사 전달에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기자들이 객석의 장단과 작품의 감격 요소에 압도된 탓인지 너무 촐싹거리는 가벼움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국립극단 <빌헬름 텔>’, 구히서, <일간스포츠>, 1975년 12월 3일

  • 관련도서

    <독일 문학사>, 프루츠 마티니 저, 황현수 역, 을유문화사, 1989 <빌헬름 텔>, 프리드리히 쉴러 저, 차성진 역, 웅진닷컴, 2003 <빌헬름 텔>, 프리드리히 쉴러 저, 한기상 역, 범우사, 1993 <소박문학과 감상문학>, 프리트리히 쉴러 저, 장상용 역, 인하대학교 출판부, 1996 <쉴러 문학의 연구>, 장상용 저, 형설출판사, 1996 <쉴러의 문학과 미학>, 고창범 저,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6 <예술시대의 독일문학>, 조창섭 저,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3 <위대한 교육사상가들Ⅲ: 괴테·쉴러·페스탈로찌·헤르바르트·슐라이에르마허·훔볼트·피히테·헤겔>, 연세대학교 교육철학연구회 편, 교육과학사, 1999

  • 연계정보

    -서항석 인물
    -신극협의회
    -국립극단
    -서항석(徐恒錫)
    -이해랑(李海浪)
    -군도(Die Ruber)
  • 관련사이트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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