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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노(L`avare)

작가소개
몰리에르(Moliére, 1622~1673) 파리 출생. 부유한 실내장식업자의 장남으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학업을 마칠 무렵 여배우 마들렌 베자르와 알게 되어 일뤼스트르 테아트르를 결성하고 연극에 첫발을 내디뎠으나 관객을 확보하지 못해 해산하였고 동료와 함께 남부 프랑스 순회공연을 떠났다. 지방귀족의 비호를 받으며 오랜 기간에 걸쳐 프랑스 중부·남서부를 이동하는 동안 차츰 실력을 쌓아 리옹에 본거지를 둔 유력한 지방극단으로 성장하였다. 그동안 그는 극단 경영자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동시에 이탈리아즉흥극의 계통을 잇는 연기술, 극작법을 익힌 것으로 짐작된다. 1658년 ‘왕제전하(王弟殿下)의 극단’의 직함을 얻어 파리로 돌아와 루이 14세에게 인정받아 왕실 소유의 프티부르봉극장 사용을 허가받았다. 1659년 참신한 풍자희극 <재치를 뽐내는 여인들>의 성공으로 기반을 쌓았고, 아르놀프(Arnolphe)라는 개성적인 인물의 창조로 이 시기의 정점을 이룬 <여인학교>(1662)로 명성을 높였다. 그는 ‘우수한 극시인’의 자격으로 국왕으로부터 연금을 받았다. 이 사이 팔레 로얄극장으로 옮겨 이곳을 필생의 본거지로 삼았다. 또한 1662년 20세 연하인 여배우 아르망드 베자르와 결혼하였다. 그의 공적은 그때까지 비극보다 한 단계 낮은 장르로 취급되었던 희극의 지위를 높인 데에 있다. 그 작법은 인물, 풍속의 적확한 묘사,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것을 첫째로 두는 전개, 인물의 내면에 드라마를 인정하려고 하는 성격·심리극의 지향으로 요약된다. 연기·낭송법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견해를 가지고, 기성극단의 비극배우에게서 볼 수 있는 과장을 배제한 자연스러운 발성법과 연기를 강조하였다. 1664년 5월 루이 14세는 신궁전 베르사유에서 1주간에 걸친 페스티발 ‘마법섬의 환락’을 열고 몰리에르와 작곡가 륄리가 연극·음악을 담당했는데, 이 페스티발에 <타르튀프(3막)>가 상연되었다. 이단 신자를 주제로 한 이 작품은 당시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던 교회, 특히 예수회파의 결사 성체비적협회(聖體秘蹟協會)를 자극하여 1667년 1회의 공연으로 상연이 금지되었다. 위선자에 대한 분개는 <동 쥐앙>(1665)이나 그 이듬해에 발표된 <인간혐오자>에서도 강하게 표출되었다. <타르튀프> 이후의 이 두 작품은 모두 주인공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 있는 대작이다. 만년의 작품 경향은 <타르튀프>, <인간혐오자>로 대표되는 본격 희극보다는 극 구성의 양식화를 목표로 한 경쾌한 희극을 지향했음을 엿볼 수 있다. 주요 작품은 중세의 파블리오에서 소재를 얻은 <어쩔 수 없이 의사가 되어>(1666), 그리스신화의 형식으로 궁정을 은유한 <앙피트리옹>(1668), 륄리 작곡의 코미디 발레를 대표하는 <서민귀족>(1670), 이탈리아풍의 소극(笑劇)을 균형잡힌 구도로 재현한 <스카팽의 간계>(1671)가 있다. 또 구두쇠의 전형을 그린 <수전노>(1668)와 <재치를 뽐내는 여인들>에서 다루었던 재치 있는 여인들을 다시 소재로 쓴 사회풍자극 <여학자>(1672)는 대작으로 주목된다. 이 작품들에서 특히 눈에 띄는 줄거리는 가장권(아버지)에 대항하는 젊은이(아들, 딸)의 사랑과 그것을 도와주는 하인이라는, <타르튀프> 이래의 테마로, 이 도식은 더욱 긴밀한 형태를 취하여 드라마를 움직이고 있다. 의학 풍자희극 <기분으로 앓는 사나이>가 몰리에르의 최후 작품인데, 그 상연에서 흉부질환을 무릅쓰고 주인공 역을 맡은 그는 공연 4일째, 1673년 2월 17일 연기 도중 기침 발작이 일어났으나 무사히 연극을 끝낸 뒤 그대로 쓰러져, 집으로 옮겼으나 각혈 끝에 숨을 거두었다. 몰리에르의 사후에 미망인 아르망드는 배우들을 이끌고 게네고극장으로 옮겼으나, 1680년 국왕의 명령으로 경쟁세력이었던 오텔 드 부르고뉴극장과 합병함으로써 새로이 ‘국왕의 극단’이 결성되었다. 이것은 현재의 국립극장 코메디 프랑세즈의 전신이다. 몰리에르의 작품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극장의 가장 중요한 레퍼토리로서 상연을 거듭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작품들이 시대풍속에 대한 예민한 시각과 비판정신에 뒷받침되어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인간상을 묘사한 때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내용
1막 수전노 아르빠공은 돈을 지나치게 좋아한다. 아들 끌레앙뜨는 가난한 소녀 마리안느를, 딸 에리즈는 바렐을 사랑하나 아버지의 인색함 때문에 아무 진전을 보지 못한다. 그 가운데 아르빠공도 마리안느를 사랑한다. 한편 수전노는 아들을 돈 많은 과부와 딸은 돈 많은 늙은이 앙세름과 결혼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발레리가 이 틈에 끼어 들어 아르빠공의 편을 드는 척하면서 일을 처리해 나간다. 2막 클레앙뜨는 중개인 시몽을 통하여 어느 고리대금업자에게 결혼자금을 빌리려고 하지만 그가 폭리를 취하려고 하자 화를 낸다. 한편 고리대금업자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되고, 수전노도 자기 자식이 돈을 빌리려는 자임을 알고 노한다. 노파 프로진느는 구두쇠와 마리안느를 결혼시켜준다며 그로부터 돈을 짜낸다. 3막 마리안느를 초대하는 파티에 프로진느와 참석한 마리안느는 끌레앙트를 보고 놀란다. 클레앙트는 아버지의 기분을 대신하는 척하고, 자기 사랑을 고백하고는 아버지의 보석반지를 선물로 준다. 4막 아르빠공은 자식과 마리안느 사이를 의심하여 자백시키려다 싸움이 벌어진다. 클레앙트의 하인이 아르빠공의 보석상자를 발견하여 클레앙트가 가지고 도망간다. 아르빠공의 지나친 인색함이 집안의 행복을 파괴하고 여기에 자식이 대항해서 책략을 쓰고 있는 장면은 희극을 초월한 박력이 있다. 5막 바렐에게 원한을 품은 요리사 작끄가 그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한편 바렐은 그의 딸과 사랑한 것을 고백하지만 이야기는 꼬이고 만다. 그때 앙세름이 나타나 바렐이 귀족임이 밝혀지고 마리안느와도 한 남매로 아버지가 앙세름임이 증명된다. 클레앙트가 돌아와 상자를 돌려주는 대신 마리안느와의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한다. 아르빠공은 상자만 돌려주면 두 쌍의 젊은이의 결혼을 허락한다고 말한다.
국내공연연보
1936년 10월 24일~25일 조선연극협회 / 부민관 / 오정민 연출 1950년 극단 신협 / 군부대 위문공연 1952년 4월 16일 극단 신협 / 이광래 연출 1953년 극단 신협 / 이해랑 연출 1967년 극단 광장 / 이진순 연출 1971년 5월 12일~16일 극단 광장 / 국립극장 / 이진순 연출 1972년 극단 광장 / 드라마센터 / 이진순 연출 1975년 극단 중앙 / 이창구 연출 1980년 극단 은하 / 정병희 역 1980년 극단80 / 이봉운 연출 1980년 극단 대하 / 이창구 역 1983년 극단 신협 / 심회만 연출 1985년 10월 31일~11월 6일 극단 사조 / 중앙아트홀 / 이해랑 연출 1991년 극단 원각사 / 아성 연출 1992년 극단 대하 / 이석형 연출 / 공연제목: 1992 수전노 1993년 인천시립극단 / 방태수 연출 1994년 극단 한국 / 강만희 연출 1998년 2월 21일~3월 13일 극단 유 / 문예회관소극장 / 유재철 연출
예술가
이진순(李眞淳, 1916~1984)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일본대학 연극과에서 함께 공부했던 이진순도 처음에는 단역배우로 무대에 서면서부터 연극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학생예술좌에서는 주로 단역배우로 나섰고, 1938년 귀국 후에는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유치진 주도의 극연좌 신인배우로 한두 번 무대에 섰다. <목격자>(앤더슨 작)와 <깨어서 노래부르자>(클리포드 오뎃츠 작) 두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한 것이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진순은 곧 극단을 떠나 북경으로 이주한다. 1938년부터 1946년까지 8년 동안을 그곳에서 보낸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는 대학동기생인 이해랑, 김동원 등과 어울리다가 1947년 10월 중국통이라 할 김광주와 손잡고 극단 신지극사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그리고 김승호, 강계식, 전두영, 주선태, 하옥주 등 소장배우들과 함께 중국 작가 조우의 <태양이 그리워(日出)>를 직접 연출하여 공연했으나 별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2회 공연으로 <언덕에 꽃은 피고>라는 작품을 직접 쓰고 연출했으나 창립공연보다도 관심을 모으지 못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구와 부산을 오가며 간간이 연출을 했다. 이때 신협에서 <붉은 장갑>을 연출했지만 호평을 받지 못하면서 신협과 멀어졌고, 이후 국립극장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국립극장과는 1950년 개관 공연 때 오페라 <춘향전>을 연출한 인연이 있었다. 그러다 1960년대 동인제 극단 시대가 열리자 그도 1966년에 극단 광장을 조직하고 나섰다. 그는 창단의 변에서 “어디까지나 민중과 더불어 살며 입김을 나눠야 한다. 민중이 연극에서 멀어져가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연극에 대한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데 있지 않을까”라며 기성극계를 비판한다. 따라서 그는 고설봉, 백성희, 신원균, 이진수, 이석구, 고은정 등 중견과 신인을 중심으로 극단을 조직하고 셰익스피어의 <윈저의 아낙네들>로 창립공연을 올린다. 이후 몰리에르의 <수전노>를 수 차례 공연하면서 연극 대중화에 힘을 쏟는다. 또한 음악극에도 관심이 많았던 이진순은 국립극장에서 추진한 창극정립운동에 앞장섰고, 연극잡지 발간에도 열성을 기울였다. 즉 그는 6·25전쟁 이후 최초로 연극 전문지인 <연극>을 자비 출판한 것이다. 물론 이 연극지는 2호를 발간하는 데서 멈췄지만 우리 연극계에 전문잡지의 필요성을 제시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연극전문 잡지 발간에 대한 욕구는 그가 동국대 연극과 전임이 되고 연극협회 이사장까지 맡으면서 실현된다. 전문잡지 <한국연극>을 월간지로 발행하고 한국희곡전집도 발간하는 등 출판사업에 힘을 쏟는다. 이진순은 작품의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연출하기로 유명했다. 가령 정통극에서부터 악극, 창극, 무용극, 오페라 등 전방위에 걸쳐 손대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그가 연출한 수백 편의 작품 가운데 대표작은 역시 정통극과 창극에 있다. 1961년 국립극단의 <산불>로부터 <갈매기>(체호프 작), <학마을 사람들>(이범선 원작), <로물르스 대제>(뒤렌마트 작)로 이어지는 정통리얼리즘 계열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미첼 작), <전쟁과 평화>(톨스토이 원작), <남한산성>(김의경 작) 등 대형작품들은 이진순이 연출가로서 족적을 남긴 작품들로 평가된다. 또한 1960년대 국립극장이 국극정립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면서부터 창극에 깊숙이 간여한 그는 누구보다도 창극에 애착을 갖고 작업에 임했다. <춘향가>, <흥보가>, <배비장전>, <수궁가>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리뷰
신극(新劇)운동의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창립된 조선연극협회(朝鮮演劇協會)에서는 그동안 공연준비에 몰두하고 잇드니 오는 시월 사오일(十月 四·五日) 양일간(兩日間) 오후 7시(七時)부터 시내(市內) 부민관(府民館)에서 불란서 고전희극(古典喜劇) 몰리엘의 <수전노(守錢奴)>를 상연(上演)하리라고 합니다. 연출(演出)에는 동경(東京)에서 다년간 신극(新劇)을 공부하고 도라온 오정민(吳楨民) 씨이고 장치에는 김일영(金一影) 씨인데 립체무대의 새로운 시험과 참신한 연출로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리라고 하는데 동회의 멤버는 얼마 전 극연(劇硏)을 탈퇴한 실천부(實踐部) 사람들과 동경에서 신극운동에 참가했든 사람들이 중심이라고 합니다. <매일신보(每日申報)>, 1936년 10월 15일
관련도서
<몰리에르: 진실추구의 총체적 희극>, 이경자,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6 <몰리에르 희곡선집>, 몰리에르 저, 이화원 역, 평민사, 2004 <몰리에르 희곡선>, 몰리에르 저, 민희식 역, 범우사, 1999 <몰리에르 희곡집>, 몰리에르 저, 정병렬, 김정옥 공역, 서문당, 1972
연계정보
-이진순(李眞淳)
-이해랑(李海浪)
-귀족수업(원제: 서민귀족 Le Bourgeois Gentilhom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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