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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작품소개
<열하일기>는 1780년(정조 4) 저자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행하는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하여 청나라 고종의 피서지인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기록한 총 26권 10책의 연행일기이다. 청조치하의 북중국과 남만주일대를 견문하고 그곳 문인·명사들과의 교유 및 문물제도를 접한 결과를 소상하게 다루고 있다.
저자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또는 연상(煙湘)·열상외사(洌上外史)이다.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박필균(朴弼均)이고, 아버지는 박사유(朴師愈)이며, 어머니는 함평 이씨(咸平李氏) 이창원(李昌遠)의 딸이다. 1765년 처음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으며 이후로 과거 시험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86년에 뒤늦게 음사(蔭仕)로 선공감감역에 제수된 것을 필두로 1789년 평시서 주부(平市署主簿)·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1791년 한성부판관, 1792년 안의 현감(安義縣監), 1797년 면천 군수(沔川郡守), 1800년 양양 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910년(순종 4)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도공(文度公)의 시호를 받았다. 그는 북학사상(北學思想)을 주장하여 비록 우리가 청나라에 적대적 감정이 쌓여 있지만 그들의 문명을 수용해 우리의 현실이 개혁되고 풍요해진다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였으며 서학(西學)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당시의 세계관에서 탈피, 확대하였다. 나아가 당시에 풍미하던 주자학(朱子學)의 사변적 세계에만 침잠하는 것을 반성하면서 이론적 세계의 현실 적용, 곧 유학의 본질 속에서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찾고자 하였다. 위와 같은 박지원의 사상은 그가 남긴 문학 작품 속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곧 당시 주조를 이루는 복고적 풍조에서 벗어나 문학이 갖는 현실과의 대립적 현상을 잘 조화시켜, 시대의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수렴할 수 있는 주제와 그 주제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였다. 이것은 그의 사고가 고정적 관념에서 벗어나 일대 전환을 시도한 것과 맥락을 이루며, 문학 작품의 매개체인 언어의 기능을 이해하고 당대에 맞는 문체 개혁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것을 거울삼아 새로운 것을 창조함)으로 표현되는 이 말은 시속문(時俗文)의 인정을 의미하며 새로운 현실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문학을 창조하고자 새롭기 위해서 또다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나타난 표현의 절제와 문장 조직 방법의 운용, 사실적인 표현 등은 그가 생각한 당대의 현실과 문학과의 관계를 연결짓는 방법들이었다. 이는 그의 문집 속에 수록된 당시 그와 교유했던 사람들의 문집서(文集序) 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또한 그가 남긴 일련의 한문 단편(漢文短篇)들 속에서도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저서로는 <열하일기>, 작품으로는 <허생전>·<민옹전(閔翁傳)>·<광문자전(廣文者傳)>·<양반전>·<김신선전(金神仙傳)>·<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등이 있다.
내용
<열하일기>는 정조 4년(1780)에 박지원이 그의 삼종형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수행원(隨行員)으로, 청(淸) 고종(高宗)의 70수를 축하하기 위하여 중국에 들어가, 성경(盛京)·북평(北平)·열하(熱河) 등지를 역람(歷覽)하고 돌아와서 저술한 책이다. 박지원은 중국의 산천·풍토와 문물·제도에 대하여 오랫동안 염모하다가 그들의 통도(通都)·요새를 몸소 살펴보고 돌아와 모든 역사·지리·풍속·습상(習尙)·고거(攷據)·건설·인물·정치·경제·사회·종교·문학·예술·고동(古董: 골동품) 등을 두루 망라하여 수록하였다. 내용을 권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도강록(渡江錄) :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 15일 동안의 기록이다. 그는 책문(柵門) 안을 들어서자 곧, 그들의 이용후생적(利用厚生的)인 건설에 심취하였다. 주로 성제(城制)와 벽돌을 쓰는 것이 실리임을 역설했다. 성경잡지(盛京雜識) : 십리하(十里河)로부터 소흑산(小黑山)에 이르기까지 5일 동안의 기록이다. 속재필담(粟齋筆談)·상루필담(商樓筆談)·고동록(古董錄) 등 재미있는 기사가 많다. 일신수필(馹迅隨筆) :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의 병참지를 달리는 9일 동안의 기록이다. 거제(車制)·희대(戲臺)·시사(市肆)·점사(店舍)·교량 등에 대한 서술로서 그 서문에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에 대한 논평이 있다. 관내정사(關內程史) : 산해관 안으로부터 연경(燕京)에 이르기까지 11일 동안의 기록이다. 그 중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사당 중에서, “백이 숙채(熟菜)가 사람을 죽이네.”라는 이야기와 우암(尤菴)의 화상에 절하던 이야기 등 기사도 재미있거니와 연암소설(燕巖小說)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호질(虎叱)>이 실려 있다. 유학대가(儒學大家)와 정절부인(貞節夫人)을 가장하여, 사회를 속이며 풍기를 문란하게 한 북곽선생과 동리자가 호랑이에게 꾸짖음을 당하는 이야기로 당시 사회의 부패상을 여지없이 폭로하였다.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 연경으로부터 열하에 이르기까지 5일 동안의 기록이다. 열하의 요해를 역설한 것이 모두 당시 열하의 정세를 잘 관찰한 논평이며, 열하로 떠날 때의 이별의 한을 서술한 한 토막의 문장은 특히 애처롭다.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 열하의 태학에서 묵은 6일 동안의 기록이다. 중국의 학자 윤가전·기풍액·왕민호·학성 등과 함께 양국의 문물·제도에 대한 논평을 전개하다가, 월세계(月世界)·지전(地轉) 등의 설을 토론하였다.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열하에서 다시금 연경으로 돌아오는 도중 6일 동안의 기록이다. 주로 교량(橋梁)·도로(道路)·방호(防湖)·방하(防河)·탁타(정원사)·선제(船制) 등에 대한 논평이다. 경개록(傾蓋錄) : 열하의 태학에서 묵던 6일 동안 그곳의 학자와 응수한 기록이다. 심세편(審勢編) : 조선 사람의 오망(五妄)과 중국 사람의 삼난(三難)을 역설하였다. 망양록(忘羊錄) : 윤가전·왕민호 등과 함께 음악에 대한 견해를 교환한 기록이다. 혹정필담(鵠汀筆談) : 윤가전과 함께 전일 태학유관록 중에서 미진한 이야기를 계속한 것이다. 곧 월세계(月世界)·지전(地轉)·역법·천주(天主) 등에 대한 논평이다. 찰십륜포(札什倫布) : 열하에서 반선(班禪)에 대한 기록이다. 찰십륜포는 서번어(西番語)로 ‘대승(大僧)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반선시말(班禪始末) : 청 황제의 반선(班禪: 판첸라마)에 대한 정책을 논하고, 또 황교(黃敎)와 불교(佛敎)가 근본적으로 같지 않음을 밝혔다. 황교문답(黃敎問答) : 당시 천하의 정세를 파악하여 오망(五妄)·육불가(六不可)를 논하였다. 모두 북학(北學)의 이론이거나 서학자(西學者) 지옥설에 대한 논평이다. 말단에는 세계의 이민종(異民種)을 열거하였으되, 특히 몽고(蒙古)와 아라사(俄羅斯) 종족의 강맹(强猛)함에 대하여 주의하여야 할 것을 논하였다. 피서록(避暑錄) : 열하 피서산장(避暑山莊)에 있을 때의 기록이다. 주로 동중(東中) 두 나라의 시문(詩文)에 대한 논평이다. 양매시화(楊梅詩話) : 양매서가(楊梅書街)에서 중국 학자들과 문답한 한시화(漢詩話)이다. 동란섭필(銅蘭涉筆) : 동란재(銅蘭齋)에 머무를 때의 수필이다. 주로 가사(歌辭)·향시(鄕試)·서적(書籍)·언해(諺解)·양금(洋琴) 등에 대한 잡록이다. 옥갑야화(玉匣夜話) : 일재본(一齋本)에는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로 되어 있다. 홍순언·정세태에 대한 기록 등이 재미있고, 특히 <허생전(許生傳)>이 실려 있다. 허생은 서울 묵적골에 살고 있던 한 불우한 서생으로 당시 속유(俗儒)들의 위학(僞學)과는 달리 경세치용학(經世致用學)을 연구하였다. 허생은 서울 재벌로 이름 높은 변씨(卞氏)의 돈을 빌려 재물을 쌓고, 바다 가운데 빈 섬으로 떠돌이 도적을 몰아넣어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고 돌아온 뒤 당시 유명무실한 북벌책(北伐策)을 여지없이 풍자하는 동시에, 이완(李浣)에게 세 가지의 당면한 대책을 제시하는데, 이는 북벌책의 정반대인 북학의 이론이었다. 연암의 세상을 향한 냉소와 질타가 이 한 편에 유감없이 표현되어 있다. 행재잡록(行在雜錄) : 청(淸) 황제의 행재소(行在所)에서 보고 들은 모든 기록이다. 특히 청(淸)의 친선정책(親鮮政策)의 까닭을 밝혔다. 금료소초(金蓼少鈔) : 주로 의술에 관한 기록이다. 환희기(幻戲記) :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 밑에서 중국 요술쟁이의 여러 가지 연기를 구경하고 그 소감을 적은 것이다. 산장잡기(山莊雜記) : 열하 산장에서의 여러 가지 견문을 적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상기(象記) 등이 비장(悲壯)하고도 뛰어나다. 구외이문(口外異聞) : 고북구(古北口) 밖에서의 이문을 적은 것이다. 반양(盤羊)으로부터 천불사(千佛寺)에 이른 60종의 기이한 이야기이다. 황도기략(黃圖紀略) : 황성의 구문(九門)을 비롯하여 화조포(花鳥舖)에 이르기까지 38종의 문관(門館)·전각(殿閣)·도지(島池)·점포(店舖)·기물(器物) 등의 기록이다. 알성퇴술(謁聖退述) : 순천부학(順天府學)으로부터 조선관(朝鮮館)에 이르기까지 역람한 기록이다. 앙엽기(盎葉記) : 홍인사(弘仁寺)로부터 이마두총(利瑪竇塚)에 이르기까지 20개의 명소를 역람한 기록이다. 참고: <국역 열하일기Ⅰ·Ⅱ>, 이가원, 민족문화추진회, 1983
해설
종래의 연행록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열하일기>는 발표 당시 보수파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중국의 신문물(新文物)을 망라한 서술과 실학사상의 소개로 수많은 조선시대 연경 기행문학의 정수(精髓)로 꼽힌다. 이 책은 당초부터 명확한 정본(正本)이나 판본(版本)도 없었고, 여러 전사본(轉寫本)이 유행되어 이본(異本)에 따라 그 편제(編制)의 이동이 심하다. 이 책에는 중국의 역사·지리·풍속·습상(習尙)·고거(攷據)·토목·건축·선박·의학·인물·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문학·예술·고동(古董: 골동품)·지리·천문·병사 등에 걸쳐 수록되지 않은 분야가 없을 만큼 광범위하고 상세히 기술되었는데, 경치나 풍물 등을 단순히 묘사한 데 그치지 않고 이용후생(利用厚生) 면에 중점을 두어 수많은 <연행록(燕行錄)> 중에서도 백미(白眉)로 꼽힌다. 이 작품이 완성되었을 당시 연암 자신이 주변사람들에게 이 글을 서슴지 않고 자랑하였을 만큼 자신의 모든 저서 중에서 이 <열하일기>만이 후세에 전할 수 있을 것이라 자부하였던 듯하다.
연계정보
-허생전
-양반전(兩班傳)
-허생전(許生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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