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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전(兩班傳)

작품소개
<양반전>은 연암의 초기작 가운데 하나로 조선 후기 양반들의 경제적 무능과 허식적인 생활 태도를 폭로하고 비판한 한문 소설이다. 작자는 신분 질서가 문란해진 조선 후기 사회에서 양반이라는 특권 계층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양반이 양반답지 못한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본관 반남(潘南), 자 중미(仲美), 호 연암(燕巖).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라다가 16세에 조부가 죽자 결혼, 처숙(妻叔)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 학문 전반을 연구하다가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사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하였다. 1777년(정조 1) 권신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했다. 랴오둥(遼東)·러허(熱河)·베이징(北京)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보고 귀국,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1789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이듬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제릉령(齊陵令), 1791년(정조 15)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 사퇴했다가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찬진(撰進)하고 1800년(순조 즉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 홍대용·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 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발표, 당시 양반계층의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이덕무(李德懋)·박제가·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이 그의 제자들이며 정경대부(正卿大夫)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등이 있고, 작품에 <허생전>, <호질>, <마장전>, <예덕선생전>, <민옹전>, <양반전> 등이 있다.
내용
정선에 한 양반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어질고 독서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가난하여 해마다 관곡을 꾸어 먹은 것이 여러 해가 되어 1,000석에 이르렀다. 관찰사가 군읍을 순행하다가 관곡을 조사해 보고 크게 노하여 그를 잡아 가두라고 명하였다. 양반의 형편을 아는 군수가 차마 가두지 못하였고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양반은 아무리 생각해도 갚을 길이 없었다. 그의 아내는 “당신이 평소에 글 읽기를 좋아하였으나 관곡에는 소용이 없구려! 어이구 양반! 양반(兩半: 한 냥 반, 兩班과 兩半은 동음)은커녕 한 푼어치도 안 되는구려!” 하고 푸념하였다. 그 마을의 부자가 “양반은 비록 가난하여도 늘 존귀하고 영화로우나 나는 비록 부유하여도 비천하니 참으로 욕된 것이다. 지금 양반이 가난하여 관곡을 갚을 수 없으므로 양반을 보전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내가 사서 가지겠다.”고 사사로이 의논을 하였다. 드디어 양반을 찾아가 관곡갚기를 청하자 양반은 기뻐서 허락하였으며, 부자는 그 자리에서 관곡을 실어 보냈다. 군수가 놀라 몸소 가서 그 양반을 위로하고 관곡 갚은 경위를 물어보려 하였다. 그러자 양반은 전립에 짧은 옷을 입고 땅에 엎드려 소인이라 자칭하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경위를 알게 된 군수는 짐짓 부자의 행위를 야단스럽게 기리고 나서, 이런 사사로운 매매는 소송의 단서가 되므로 문권(文券: 공적인 문서나 서류)을 만들어야 한다고 명하고, 관아로 돌아와 모든 고을 사람들을 불러놓고 문권을 만들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건륭(乾隆) 10년 9월 일 명문(明文)은 양반을 팔아 관곡을 갚으니 그 값이 1,000곡(斛)이다. 양반을 일컫는 말은 선비·대부(大夫)·군자(君子) 등 여러 가지이다. 네 마음대로 하라. 더러운 일은 하지 말고 옛일을 본받아 뜻을 세운다. 오경(五更: 새벽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는 항시 일어나서 유황을 뜯어 기름불을 켜고 눈은 코끝을 보면서 발꿈치를 모아 꽁무니를 괴고 <동래박의(東萊博議)>를 얼음에 박 밀듯이 외우고…… 소를 잡지 않고 노름을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온갖 행동이 양반에 어긋남이 있거든 이 문권을 가지고 관가에 나와 바로잡을 것이다.” 정선군수가 문권에 수결(手決)을 하고 좌수·별감이 증인으로 서명한 뒤에 통인이 가운데에 관인을 찍었다. 호장(戶長)이 읽기를 마쳤다. 부자는 슬픈 기색으로 “양반이 신선 같다고 들었는데, 참으로 이와 같다면 한쪽은 너무 이익이고 한쪽은 너무 손해니, 이익이 될 수 있도록 고쳐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다시 문권을 만든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백성을 낼 때, 그 백성이 넷이고, 사민(四民)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선비다. 이것을 양반이라 일컬으니 그 이익이 막대하다. 농사도 하지 말고 장사도 하지 말고 대강 문사(文史)나 섭렵하면 크게는 문과에 오르고 작아도 진사는 된다. 문과 홍패(紅牌)는 두 자[尺]밖에 안 되지만 백물(百物)이 갖추어져 있는 돈주머니이다…… 궁사(窮士)가 시골에 살아도 오히려 무단(武斷)을 할 수 있다. 이웃집 소로 먼저 밭을 갈고, 마을 일꾼을 데려다 김을 맨들 누가 감히 나를 홀만하게 여기랴. 네 코에 잿물을 붓고 머리끝을 잡아 돌리고 수염을 뽑더라도 감히 원망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자는 문권의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혀를 빼물며 “그만두시오, 그만두시오, 맹랑합니다. 장차 나를 도둑놈으로 만들 작정이오?” 하고 머리를 흔들고 가서 죽을 때까지 양반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해설
이 작품에 대하여 박지원은 〈방경각외전>의 자서(自序)에서 다음과 같이 그 저작 경위를 밝히고 있다. “사(士)는 천작(天爵)이니 사(士)와 심(心)이 합하면 지(志)가 된다. 그 지(志)는 어떠하여야 할 것인가? 세리(勢利)를 도모하지 않고 현달하며 궁곤하여도 사(士)를 잃지 말아야 한다. 명절(名節)을 닦지 아니하고 단지 문벌이나 판다면 장사치와 무엇이 다르랴? 이에 <양반전>을 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천작을 팔고 산, 정선 양반과 부자 상인을 풍자한 것으로 허위와 부패를 폭로한 것이다. 처음 만든 문권에 나타나는 것은 양반의 형식주의이다. 두 번째에 만들다가 만 문권에서는 양반의 비인간적인 수탈 등이 매우 구체적이고 희화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 점에 착안하여 이 작품을, 양반의 위선적인 가면을 폭로하고 봉건계급 타파를 주장한 소설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즉, 치부를 한 뒤 신분 상승을 꾀하여 양반이 되고자 하는 정선의 한 부자가 마침 어느 몰락한 양반이 당면한 극한 상황을 계기로 그 양반 지위를 사서 가지는 사건을 두고, 같은 양반 계층인 군수가 기지를 써서 그 매매 행위를 파기시킨 골계소설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최초에 설정하였던 관곡 보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뒤에 군수가 새로 이 사건에 개입한 점, 문권의 내용은 양반이 상인(常人)이 되어 지켜야 할 일들이 제시된 것이 아니고 상인이 양반이 되어 지켜야 할 것만을 요구하는 일방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첫째 문권은 양반이 행하는 일들의 골계적인 표현이며, 둘째 문권은 계약 파기의 적극적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작가가 가진 철저한 계급의식을 감안한다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또한 이 작품에는 부농이 등장하여 경제력에 의한 양반 신분 획득의 가능성이 나타난다. 그리고 관료사회의 부정이 깊어졌으며, 몰락한 양반의 비참한 모습이 드러나는 등, 조선 후기의 역사적 상황이 작가의 간결한 필치로 잘 그려져 있다. 또한 사이사이에 끼여 있는 교묘하고 익살스러운 표현이 독자의 웃음을 유발한다. 속된 표현이라 하여 당대에 많은 비난을 받았던 이 작품은 도리어 그 표현 때문에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할 것이다. 구성 면에서도 소설다운 짜임새를 선명하게 갖추고 있다(조동일, <한국문학통사 3>, 1994). 그리고 이 작품은, 사상적 측면뿐만 아니라 문학사적 측면에서도 매우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즉, 김만중의 <구운몽> 이후 소설 분야를 독점하던 귀족적 낭만주의에 일침을 가하며, 이후로 <춘향전>과 같은 판소리계 소설의 탄생을 촉진하는 가교의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연계정보
-허생전(許生傳)
-열하일기(熱河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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