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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전(許生傳)

작품소개
<허생전>은 <호질(虎叱)>, <양반전>과 아울러 박지원의 소설 중에서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허생의 상(商)행위를 묘사하는 가운데 부국이민(富國利民)의 경제 사상과 건전한 인본주의(人本主義)를 내세우고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작자의 문집인 <연암집(燕巖集)> 별집(朴榮喆本, 1932)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중 ‘옥갑야화(玉匣夜話)’에 수록되어 있다. 이가원(李家源) 소장의 일재본(一齋本) 필사본에는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에 들어 있다. 두 이본의 내용은 별 차이가 없지만, 후지(後識)는 전혀 다르다. 그리고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3류(類)·15종(種)의 이본(異本)이 있다. 현대에 이르러 이광수(李光洙)의 <허생전>이 나오면서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 작품의 창작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박지원이 중국에 다녀온 것이 1780년(정조 4)이고, <열하일기>를 다시 기술한 것이 1793년이므로 그 사이에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덕재야화’의 후지로 미루어 볼 때는 1780년 이전의 4, 5년 사이에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본관 반남(潘南), 자 중미(仲美), 호 연암(燕巖).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라다가 16세에 조부가 죽자 결혼, 처숙(妻叔)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 학문 전반을 연구하다가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사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하였다. 1777년(정조 1) 권신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했다. 랴오둥(遼東)·러허(熱河)·베이징(北京)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보고 귀국,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1789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이듬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제릉령(齊陵令), 1791년(정조 15)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 사퇴했다가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찬진(撰進)하고 1800년(순조 즉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 홍대용·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 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발표, 당시 양반계층의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이덕무(李德懋)·박제가·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이 그의 제자들이며 정경대부(正卿大夫)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등이 있고, 작품에 <허생전>, <호질>, <마장전>, <예덕선생전>, <민옹전>, <양반전> 등이 있다.
내용
허생은 10년 계획으로 남산골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는 독서를 좋아하였으나 몹시 가난하였고, 아내가 삯바느질을 하여 살림을 꾸려나갔다. 굶주리다 못한 아내가 푸념을 하며 과거도 보지 않으면서 책은 무엇 때문에 읽으며, 장사 밑천이 없으면 도둑질이라도 못하느냐고 대든다. 허생은 책을 덮고 탄식하며 문을 나선다. 허생은 한양에서 제일 부자라는 변씨를 찾아가 돈 만 냥을 꾸어 안성에 내려가 과일 장사를 하여 폭리를 얻는다. 그리고 제주도에 들어가 말총 장사를 하여 많은 돈을 번다. 허생은 어느 사공의 안내를 받아 무인도 하나를 얻고 변산에 있는 도둑들을 설득하여 각기 소 한 필, 여자 한 사람씩을 데려오게 하여 그들과 무인도에 들어가 농사를 짓는다. 3년 동안 거두어들인 농산물을 흉년이 든 나가사키(長崎)에 팔아 백만금을 얻게 된다. 그는 외부로 통행할 배를 불태우고 50만금은 바다에 던져버린 뒤에 글 아는 사람을 가려 함께 본토로 돌아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남은 돈 십만 냥을 변씨에게 갖다 준다. 변씨로부터 허생의 이야기를 들은 이완(李浣) 대장이 변씨를 데리고 허생을 찾는다. 이완이 나라에서 인재를 구하는 뜻을 이야기하자 허생은 “내가 와룡선생을 천거할 테니 임금께 아뢰어 삼고초려를 하게 할 수 있겠느냐?”, “종실의 딸들을 명나라 후손에게 시집 보내고 훈척(勳戚: 나라에 훈공이 있는 임금의 친척) 귀가의 세력을 빼앗겠느냐?”, “우수한 자제들을 가려 머리를 깎고 호복을 입혀, 선비들은 유학하게 하고 소인들은 강남에 장사하게 하여 그들의 허실을 정탐하고 그곳의 호걸들과 결탁하여 천하를 뒤엎고 국치를 설욕할 계책을 꾸미겠느냐?”라고 묻는다. 이완은 이 세 가지 물음에 모두 어렵다고 한다. 허생은 “나라의 신신(信臣)이라는 게 고작 이 꼴이냐!”고 분을 참지 못하여 칼을 찾아 찌르려 하니 이완은 달아난다. 이튿날 이완이 다시 그를 찾아갔으나 이미 자취를 감추고 집은 비어 있었다.
해설
이 작품은 현전하는 연암의 열 편의 소설 중 가장 유명한 걸작이다. 주인공 허생이 실존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물론 작품에 앞서 연암이 밝힌 바, 허생에게 돈을 빌려주는 갑부 변씨가 변승업(卞承業)의 조부임을 감안하면, 변승업의 조부와 동 시대에 살았던 어떤 인물을 모델로 하지 않았을까 추측되기도 한다. 하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허생의 기상천외한 독점 수법이나, <홍길동전>의 율도국과도 같은 이상향의 건설, 그리고 당대 권력자인 이완에 대한 꾸짖음 등으로 미루어볼 때, 허생은 실존 여부와는 무관하게 연암에 의해 창조된 인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은 박지원 본인이 윤영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옮긴 것이라 서술하고 있어 민담(民譚)을 소설화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희준(李羲準)의 <계서야담(溪西野譚)>에도 이 작품과 흡사한 내용의 허생 이야기가 실려 있다. 또 실존하였던 인물 허호(許鎬)의 일이 허생과 비슷하다. 그러나 <허생전>의 후지 두 편의 내용이 서로 다르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윤영이라는 인물의 정체가 애매하다. 심지어는 허생의 성인 허(許)조차 부인되고 있다. 박지원이 자신의 작품임을 숨겨서 당대의 사람들의 비난을 모면하려 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연암의 사상은 이 작품 속에서 허생을 통해 재현된다. 연암은 우선 만 냥을 가진 독점업자에게 좌지우지되는 빈약한 국가 경제를 탄식한다. 이것은 그가 평소 주장하던 중상주의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적을 모아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후 그들을 위한 의관(衣冠)을 창제하고, 굶주리고 헐벗은 백성을 구제하는 부분은, <수호전>이나 <홍길동전> 등 당시 민간에까지 널리 알려졌던 군담소설들이 취한 ‘군도취의(群盜聚義)’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허생이 이완에게 말한 세 가지 제안은, 본래의 의도와는 동떨어져 한갓 붕당으로 전락해버린 북벌파에 대한 냉소임과 동시에 연암이 주장하는 북학(北學)의 이론이기도 하다. 이완이 자신을 향해 칼을 빼든 허생을 피해 달아난 순간, 연암은 북벌파의 종말을 선언한 것이다. 이 작품은 박지원의 실학적 경륜을 보여준다. ‘남한설치(南漢雪恥)’라는 국민감정을 부채질하여 ‘북벌’이란 허울 좋은 구호를 내걸고, 국민 모두의 관심을 이에 집중시켜, 자체 안의 병리에 눈감아 버리게 한 당대 위정자의 무능과 허위를 꼬집어 풍자한 문제작이다. 허생이 이완에게 제시한 인재 등용, 훈척들의 추방 및 명나라 후예와의 결탁, 유학(留學)과 무역 등의 시사삼난(時事三難)의 단편적인 내용을 묶어 작품의 절정을 삼고 있다. 그럼으로써 무능한 북벌론자를 통매(痛罵)하고, 북학론(北學論)을 주장한 수법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은 지난날의 전기소설(傳奇小說)과는 달리 사회의 병리를 통찰하고 그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실천할 열정을 가졌던 이상주의자 허생을 창조하였다는 점에서 한국소설사의 새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연계정보
-허생전
-양반전(兩班傳)
-열하일기(熱河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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