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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흥 (1909.2.9~)

문화재관련정보
1968.12.21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보유자 인정 1971.1.8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 인정
학력(계보)
1922.7.1~1926.3.2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해금 전공, 양금, 아쟁 겸공) 1941.7.1 한성준에게 무용 사사
생애(약력)
1926.~1940. 이왕직 아악부원 아악수보(雅樂手補), 아악수(雅樂手), 아악수장(雅樂手長) 1932. 이왕직 아악부 아악수장 승입 1940. 이화여전 음악과 강사 1943.~1945. 조선음악가협회 조선악부 회원(무용담당) 1949. 구왕중 아악부 아악사 피명 1951. 국립국악원 국악사 1954.~1978. 김천흥고전무용연구소 소장 1962.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강사 1969.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70. 예술원상 수상 1973. 은관문화훈장 서훈 국립국악원 자문위원, 국민훈장 모란장 서훈 1978. 예술원 회원, 원로회원(현) 1983. 국악대상 수상 2001.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서훈
리뷰
인간문화재시대(人間文化財時代)를 연다 1 전통문화예술(傳統文化藝術)을 이어받고 또 이어주면서 위대한 창조(創造) 처용무(處容舞) 김천흥(金千興)씨 어쩌면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천 가지의 즐거움’을 주기위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김천흥(金千興, 78)씨. 그는 이 나라 국악계의 큰 별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과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인 <처용무(處容舞)>의 두 가지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을뿐 아니라, ‘서울시 문화상(文化賞)’, ‘예술원상(藝術院賞)’, ‘국민훈장(國民勳章)모란장’ 등을 수상하기까지 65년의 긴 세월을 오직 국악(國樂)의 한 길만을 달렸다. 필자가 국립국악원 김천흥(金千興)씨를 찾았을 때 웃는 얼굴로 맞이하는 그의 건강한 몸맵시에서 희로애락의 일생을 즐겁게 살아왔다는 인상을 받았다. - 국악에 입문(入門)한 동기는 무엇인가? “별다른 동기는 없었다. 나는 서울 정동에 있는 정동보통학교를 졸업, 서당을 다니다가 1922년 9월쯤 국악원의 전신 이왕직 아악부 아악생 양성소에 제2기생으로 들어갔다. 이 국악학교는 일반공부에다 음악을 가르칠 뿐 아니라 관비로 한 달에 15원씩 수당을 지급해 주는 외에 공책ㆍ연필 등을 지급하여 가정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좋은 면학의 보금자리가 됐다.” - 이왕직 아악부의 변천 과정과 입소생들의 면모는 어떠한지? “이왕직 아악부는 국악원의 전신으로 궁중음악을 담당하는 기구로 한일합병 후 장악원이 아악대, 이 아악대가 아악부로 변천되어 왔다. 당시의 아악사(雅樂師)로는 김영제(金榮濟), 함화진(咸和鎭), 이수향(李壽鄕)씨 등이고, 3기생에 성경린(成慶麟)씨, 4기생에 김기수씨, 5기생에 김태임씨 등이 입소했었다.” - 춤을 추게 된 계기와 첫 무대는? “때는 1923년, 순종 50회 탄신잔치가 인정전(仁政殿)에서 베풀어 졌을 때였다. 내 나이 14살 적인데 선발되어 춤을 추게 됐다. 이 궁중음악제전에 공연된 것은 장생보연지무, 춘앵전,무곡, 포구락, 수연장, 보상무, 연백복지무, 가인전목단 등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춤은 장생보연지무로 이 춤은 임금께서 오래 오래 연수하라는 뜻으로 춘다고 볼 수 있다.” - 일생을 이같이 국악계에서 보낸 보람은 무엇인지? “우리 한국의 전통성 예술에 65년이 넘게 몸 담아오면서 한가지 보람이 있다면 민족의 전통 음악과 무용을 면면히 이어왔고 또 이를 전승시키겠다는 긍지를 갖는 일이다. 또 개인적으로는 가정을 꾸며 오는 동안 별 탈이 없이 지내오면서 후진들을 양성했다는 것이 큰 보람이라 하겠다. 그 중에서도 학무 기능보유자인 이흥구(李興九, 40)씨를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을 갖고 있다는 것도 보람 중의 하나이다.” - 그러면 우리의 전통적인 춤을 통하여 인간의 심성에 무엇을 주는지? “아시다시피 무용은 몸 동작이다. 그러나 이 무용은 육체의 기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어떤 동작을 통하여 이를 보는 사람들에게 희ㆍ노ㆍ애ㆍ락의 공감대(共感帶)를 형성시키는데 그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작품을 공연할 때 먼저 연기자 자신이 그 작품에 심취되어 그것이 행동화되면 관객들에게 감명을 주어 공감대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몸과 마음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면 <처용무(處容舞)>의 역사적 기원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이 개운포(開雲浦) 즉 지금의 울산에서 놀다가 돌아오는 길에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한 발자국 앞 지척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괴상히 여겨 좌우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것은 동해의 용왕의 조화이므로 거룩한 사업을 행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용왕을 위해 절을 세우도록 명하니, 즉시 구름이 개고 안개가 흩어졌다. 용왕이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데리고 왕에게 나타나 덕을 찬양하고 영광을 축복하였다. 이때부터 이곳을 구름이 걷히었다고 하여 개운포라 불렀으며, 뒤에 영취산에 절을 세우고 망해사(望海寺)라고 이름하였다. 용왕의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에 와서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하였는데, 미녀로써 아내를 삼게 하고 급간(級干)의 벼슬까지 주었다. 하루는 역신(疫神)이 처용의 아내를 흠모, 사람으로 변하여 은밀히 처용의 아내와 정을 통하다가 그 불륜이 처용에게 발각되었다. 그러나 어질고 착한 처용은 처용가(處容歌)(헌강왕 5년에 처용이 지은 것이다)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방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때에 역신이 현형(現形)하여 앞에 꿇어앉아 가로되, ‘내 공(公)의 아내를 사모하여 과오를 범하였으나 공이 노하지 아니하니, 감격하여 차후 공의 형용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였다. 이로 인하여 신라 사람들은 처용의 화상을 호부(護符)라 생각했고, 조선조 말엽까지 이 가면부는 벽사진경(僻事進慶), 즉 악귀(惡鬼)를 몰아내기 위하여 궁중에서 행하여졌다는 것이다.” - 처용가의 가사 내용은? “원문(原文) 동경명기월양[東京明期月良] 야입이유행여가[夜入伊遊行如可] 입양사침의견곤[入良沙寢矣見昆] 각오이사시양나[脚烏伊四是良羅] 이혜은오하어질고[二兮隱吾下於叱古] 이혜은수지하언고[二兮隱誰支下焉古] 본의오하시여마어은[本矣吾下是如馬於隱] 탈질양을하여위리고[奪叱良乙何如爲理古] 역문(譯文)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 들어서 자리에보니 가락이 너히더라 둘은 내해 엇고 둘은 누치해 엇고 본대 내해 연만 빼앗긴 것을 엇지할고” - 당초 <처용무>가 발생하였을 때는 한 사람이 추었다는 설이 있다는데? “무재총화[叢話] 권일(卷一)에 의하면 <처용무>가 한 사람이 검은색 도포(道袍)에 사모(紗帽)를 쓰고 추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지금의 <처용무>는 일명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라고 한다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문헌에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지 않아 그 진상을 알기 어렵다. <오방처용무>라는 것은 5방을 상징한 동(東)의 청(靑), 남(南)의 홍(紅), 중앙(中央)의 황(黃), 서(西)의 백(白), 북(北)의 흑(黑)으로 5인의 군무로 되었다.” - 오늘날의 <처용무>는 어떻게 전해 오는 것인지? “오늘에 남아 있는 <처용무>는 악학궤범(樂學軌範)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를 고증해서 연구하여 재생시킨 것이고 가면, 의상 등도 물론 여기에 의거해서 제작된 것이다.” - <처용무>의 기본 사상은? “잡귀를 쫓아 모든 액운을 없이하여 백성을 평화스럽게 하는데 있다.” - 그렇다면 이 <처용무(處容舞)>의 현대적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지? “산업화의 근대사회에 접어 들면서 물질문명은 인류의 정신문명을 쇠퇴 또는 몰락되고 있는 위기적 상황에 놓여있다. 우리는 처용무라는 하나의 전통적 고전무를 통해서 인간은 물질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산다는 교훈을 깨닫게 된다. 처용무의 가면에서 풍기는 색(色)과 의상에서 자연의 이치를 일깨워 주고 있다.” 김천흥씨, 그는 조금도 피곤을 느끼지 않고 한 시간 이상의 인터뷰를 해낸다. 1909년 2월 9일 서울 양동에서 김재희(金在熙)씨의 3남으로 태어난 김천흥씨는 22살 때 정성녀(鄭姓女)씨와 중매결혼을 하여 3남 3녀의 6남매를 거느리고 있다. 김씨의 건강비결은 음식을 적게 먹고 적당한 운동을 하는데 있으며 취미로는 등산, 그의 좌우명은 정직(正直)이라고 하면서 늘 반성(反省)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인간문화재시대를 여는 첫 번째 주인공 김천흥씨는 ‘전통(傳統)과 창작(創作)’ 즉 우리민족의 전통문화 예술을 이어받고 또 이어 주면서 위대한 새 문화예술을 창조하는 것이 나의 사명(使命)이고 우리 모두의 역사적 사명감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이다. <월간 문화재>, 1987년 10월, 제39호관련가치정보
연계정보
-종묘제례악
-일무(佾舞)
-당악정재
-향악정재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
-김천흥 (19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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