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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악정재

개요
항악정재는 중국에서 들어온 중국 궁중무용의 대칭으로 우리나라 궁중무용에 붙인 이름으로 <고려사> 악지 향악조에는 무고, 동동, 무애의 세 가지가 전하고 있으나 이 밖에도 삼국 이래로 전해 오는 춤도 향악정재에 포함되고 조선 초기 또는 조선 말기에 새로 창작된 궁중무용도 향악정재에 속한다. 기록에 이름만 남아있는 무용을 제외하고 신라시대에 기원을 두고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 무용은 무애무, 처용무, 검무, 사선무, 선유락 등이 있는데 무애무는 고려조에, 처용무는 조선 초기, 검무와 사선무, 선유락은 조선 후기에 무용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조선후기 순조 때에는 30여 종의 향악정재를 창제하였으며, 전대에 내려온 무용들을 보완, 개선하고 총정리하여 궁중무용을 정립시키기도 하였다. 신라시대를 포함하여 조선시대 이전에 발생한 무용은 겨우 15종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모두 38종이 창작되었다.
내용
조선 후기에 이르면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형식적인 구분은 거의 사라지게 되어 단지 죽간자(竹竿子)의 유무만이 유일한 차이점이 된다. 향악정재의 특징은 시작과 끝에 엎드려 절을 하는 것, 우리 말로 된 노랫말을 쓰는 것, 당악정재에서 나오는 죽간자, 구호, 치어가 없다는 것이다. 많은 향악정재 가운데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처용무과 학무(학연화대처용무합설, 鶴蓮花臺處容舞合設)과 그 밖에 봉래의(鳳來儀), 춘앵전(春鶯囀), 선유락(船遊樂), 무고(舞鼓),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등의 대표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처용무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인 처용무는 신라시대부터 전해지는 가면무용이다. <삼국유사> 권 2에 수록된 ‘처용설화’에서 유래되었다. 신라 말엽에 시작된 이래 궁중 대회일(大晦日)의 나례, 또는 중국의 사신의 내조(來朝) 등에서 추어졌으며, 조선 성종 때 찬정된 <악학궤범> 시절에 더욱 발전하였다. 후에 학무와 연화대무가 합설된 후 처용무와도 합설되어 <악학궤범> 권 5 시용향악정재에는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이 전해져 지금까지도 전승되고 있다. 처용무는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라고도 이르며 5방위를 상징하는 동쪽의 청, 남쪽의 홍, 중앙의 황, 서쪽의 백, 북쪽의 흑 5인이 추는 군무이다. 5명의 무원(舞員)이 5방위(五方位)에 따른 색의 옷을 각각 입고 처용의 탈을 쓴 다음 한 사람씩 무대에 나가 한 줄로 선 채 ‘처용가’를 일제히 부르고, 노래가 끝나면 선 자리에서 5명이 두 팔을 올렸다 내리고 서로 등지고 선다. 다음에는 발돋움춤으로 3보 전진하여 4방으로 흩어져 서로 등을 지고 추는 상배무(相背舞), 왼쪽으로 돌며 추는 회무(廻舞)를 마친 뒤, 중무(中舞)가 4방의 무원(舞員)과 개별적으로 대무(對舞)하는 오방수양수무(五方垂揚手舞)를 춘다. 이 춤이 처용무의 절정을 이루는 부분이다. 이어서 일렬로 북향하고 《봉황음》을 제창한 다음 잔도드리[細還入] 곡조에 따라 낙화유수무(落花流水舞)를 추면서 한 사람씩 차례차례 오른쪽으로 돌아 퇴장한다. 처용무의 반주 음악을 봉황음(鳳凰吟:鳳凰吟中機)이라고 한다.
학연화대합설무(鶴蓮花臺合設舞)
학무는 ‘학춤’이라고도 하며, 중요무형문화재 제40호로 학의 탈을 쓰고 추는 춤이다. 고려 때부터 전해오는데, 궁중행사나 나례의식 등에서 연희되었다. 고려 때 발생하여 조선 성종때에 처용무, 연화대무와 합쳐서 큰 발전을 보았고 그 뒤 궁중에서 성행되어 조선말 철종과 고종연대까지 전해졌다. <고려사> ‘악지(樂志)’에는 연화대무에 학무가 보이고, 조선 성종 때의 <악학궤범>에는 학무가 연화대무, 처용무와 합설되어 나오지만 학무의 무보(舞譜)가 따로 독립되어 있어서 독자적인 발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나라 무용 중에 조류의 탈을 쓰고 추는 춤은 학무뿐이며, 새의 탈을 쓰고 추는 춤이기 때문에 새의 행동에 어울리는 동작과 가락 등을 표현하는 독특한 예술성을 가진 춤이다. 학무는〈보허자령(步虛子令)〉의 주악에 따라 청학과 백학이 지당판(池塘板-네모난 마루) 앞에 동서로 갈라 서서 북향(北向)한다. 어미 두 마리의 학은 몸을 떨거나 부리를 부딪치는 등의 무작(無作)을 벌인 뒤 지당판(池塘板) 앞으로 가서 연통을 쪼으면 연통(蓮筒)이 열리고 두 명의 동녀(童女)가 나온다. 이에 놀란 학이 뛰어 퇴장함으로써 춤이 끝난다. 학의 탈은 광목과 닭털을 사용하여 만들기도 한다. 근래에는 백학(白鶴) 혼자만의 독무(獨舞)로 추는 경우가 많으며 지당판과 연통도 생략하는 것이 통례이다. 반주는, 옛전에는 향악과 당악을 번갈아 하였으나 현재는 삼현도드리로 시작하여 타령으로 끝낸다. 이 춤은 한성준(韓成俊)에게 사사받은 한영숙(韓英淑)이 초대 기능보유자 인정을 받았고, 한영숙 사후 이흥구(李興九)에게 계승되었다. 문화재 지정 학무(鶴舞)라 하였으나, 93년 12월 학연화대합설무(鶴蓮花臺合設舞)로 이름을 고쳤다.
봉래의(鳳來儀)
조선 전기 세종이 태조(太祖) 창업의 공덕을 경송(敬頌)하기 위하여 만든 춤으로 <용비어천가>를 무악(舞樂)으로 구성하였다. <세종실록> 악보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으며, 형식은 전인자(前引子), 진구호(進口號), 여민락(與民樂), 치화평(致和平), 취풍형(醉豊亨), 후인자(後引子), 퇴구호(退口號)로 구성된다. 전인자는 전주곡(前奏曲)이고 후인자는 후주곡(後奏曲)에 해당하며, 진구호와 퇴구호는 춤의 앞뒤에서 죽간자(竹竿子)가 부르는 구호이고, 나머지는 무원(舞員)들이 부르는 노래이다. 죽간자(竹竿子, 궁중무용에서 사용되는 무용도구) 2명, 여무(女舞) 8명, 봉위의(奉威儀) 18명과 그 안쪽 좌우로 월금, 당비파, 향비파, 향피리, 대금, 장고 각 1인씩 벌려 앉아 음악을 연주한다.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曲)>을 기악(器樂)으로 연주하면 죽간자 2명이 나가 “恭念古昔 隆洽於億(공손히 옛적 일을 생각하니 억만년이 되도록 흡족하다)”라는 선구호(진구호)를 한다. 그 다음으로 여무 8명이 나가 해동장(海東章:용비어천가 제l장)인 “海東六龍飛 莫非天所扶 古聖同符:해동의 육룡이 날으실 제 일마다 천복이시니 옛 성인의 사적과 잘 부합하도다”를 부른다. 이것이 끝나면 죽간자와 원무(元舞)가 병창(竝唱)하여 야인장(野人章-용비어천가 제7장)을 노래하고 끝나면 원무만이 근심장(根深章-용비어천가 제2장), 원원장(源遠章-용비어천가 제3장), 석주장(昔周章-제4장), 금아장(今我章-제5장), 적조장(赤鳥章-제10장)을 차례로 노래한다. 이어 몇 가지의 춤사위가 더 있은 후 죽간자와 무원이 처음의 배열로 서면, 죽간자가 “萬姓歡心 永賀昇平(만 백성이 마음이 기뻐 길이 승평을 축하하네)”이라는 후구호(퇴구호)를 부른다. 이것이 끝난 후 죽간자와 무원이 퇴장하면서 모든 춤이 끝난다.
춘앵전(春鶯&#22208;)
궁중의 진연(進宴) 때 추던 춤을 말한다. 연감유함(淵鑑類函, 청(淸)나라 강희제(康熙帝)의 칙명에 따라 편찬된 장르 백과사전을 말함)에 의하면 당나라 고종이 이른 아침에 멀리서 들려오는 꾀꼬리 우는 소리를 듣고 백명달에게 춘앵전(春鶯鶩)을 작곡했다고 명했다 하며, 이러한 내용을 조선 순조 때 효명세자가 순종 숙황후 (純宗 肅皇后) 보령 40세를 경축하기 위하여 이름을 빌려지은 향악정재이다. 이 춤은 화문석(花紋席, 물들인 왕골로 꽃무늬 등을 놓아 짠 돗자리) 위에서 진퇴, 회선(回旋)을 하면서 추는데, 무동(舞童)이나 여기(女妓) 혼자서 추는 독무(獨舞)이다. 길이 6자 가량의 화문석(花紋席) 위에서 비리(飛履, 뒷꿈치를 날리듯이 한다는 뜻으로 한 손은 앞쪽 위로 높이 들고 한 손은 뒤로 낮게 들며 발뒤꿈치를 앞뒤로 들었다 놓는다), 탑탑고(塔塔高, 탑을 높이 쌓아가는 한다는 뜻으로 세 걸음 앞으로 나가면서 두 팔을 밑에서 점점 위로 올려든다), 타원앙장(打鴦場, 원앙이 날개를 펼쳤다 접듯이 한다는 뜻이며 두 팔을 뿌려 뒤로 내린다), 화전태(花前態, 꽃을 바라보는 태도), 낙화유수(落花流水, 흐르는 물에 떨어지는 꽃잎과 같이 한다는 뜻으로 오른손을 들어 뿌려 뒤로 내려 여미며, 왼손은 옆으로 펴든 상태에서 왼쪽으로 돌며 다시 왼손을 들어 뿌려 뒤로 내려 여미며 오른 손은 옆으로 펴든 상태에서 오른쪽으로 돈다), 여의풍(如意風, 바람에 날리듯 하늘하늘 걷는다는 뜻) 등의 춤사위를 연출하는데, 특히 화전태는 흰 이를 보여 곱게 웃음짓는 미롱(媚弄)으로 이 춤의 백미로 꼽을 수 있다. 무의(舞衣)는 무동일 경우는 복건(幅巾)에 앵삼(鶯衫), 여기일 경우는 화관(花冠)에 앵삼인데, 앵삼은 꾀꼬리를 상징하는 노란색이다. 사용되는 반주음악은 <평조회상(平調會相)> 전곡이다.
선유락(船遊樂)
신라 때 비롯된 향악정재(鄕樂呈才)에 속하는 춤으로 <진찬의궤> 기축년 권 1 ‘악장’조에 따르면 채선(彩船, 채방(彩舫) 또는 화선(畵船)이라고도 하며, 무원(舞員) 10여 명이 탈 수 있게 만든 큰 배로 아름다운 그림과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을 설치해 놓고 여러 기녀들이 뱃줄을 잡고 추는 춤이라 한다. 조선 숙종 이후로 궁중에서 추어졌다고 하며, 먼 뱃길을 떠나는 사람을 전송하는 내용이다. 곱게 단장한 채선(彩船) 둘레에 여러 여기(女妓)가 패를 나누어 서서 배 가는 시늉을 하며, <이선가(離船歌)>와 <어부사(漁父詞)>에 맞추어 춤춘다. 동기(童妓) 2명이 배에 올라 돛대 앞 뒤로 갈라서 닻과 돛을 각각 잡으면, 여기(곧 집사기(執事妓)를 말함) 2명이 앞에서 호령 하고, 여기(女妓) 10명이 뱃전 좌우로 줄지어 뱃줄을 잡고 안쪽에서 춤춘다. 그 둘레를 여기(女妓) 32명이 역시 뱃줄을 잡고 바깥쪽에서 춤추며, 행선령(行船令)에 따라 징소리가 세 번 크게 울리면 배가 떠난다. <어부사>를 부르며 배를 빙빙 끌어 돌리면서 뱃놀이 흉내를 내다가 징소리가 다시 세 번 울리면 춤을 멈춘다.
무고(舞鼓)
가운데 무고(舞鼓)라는 북을 놓고 8명의 무원(舞員)이 여러 모양을 짜가며 추는 춤이다. 이 춤의 유래에 대해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는 “고려 25대 충렬왕 때 시중(侍中) 이혼(李混)이 영해(寧海)에 유배되었을 때 바다 위에서 물에 뜬 뗏목을 얻어 큰 북을 만들었는데, 그 소리가 매우 컸으므로 이 북을 두드리고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고려 때에는 북을 하나 놓고 두 사람이 추었으나, 조선 성종 때에는 춤추는 사람의 수대로 북의 수도 맞춰 4고무(四鼓舞), 8고무(八鼓舞) 등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는 무고 1개를 가운데 두고 4인의 원무(元舞)가 긴 북채로 북을 치며 춤을 추면 4인 혹은 8인의 협무(挾舞)가 그 주위를 돌면서 원무와 조화를 이루어 춤을 추었다. 1920년대부터는 1인의 원무는 북채를 들고 4인의 협무가 삼지화(三枝花, 꽃방망이를 말함) 무고에 사용된 음악의 창사(唱詞)는 고려시대에는 우리말로 된 정읍사를 사용하였으며, 조선 초기에는 총춘사를 말기에는 오언절귀의 한시를 부르는 것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무고에 쓰이는 북은 교방고(敎坊鼓, 네 발로 된 나무틀 위에 큰 북통을 가죽을 위로 향하게 건 북)를 약간 작게 만든 것으로, 세 기둥 위에 북통을 세로로 올려놓았다. 북통의 둘레는 청홍백흑으로 아름답게 그려 장식하였다.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중국 송(宋)나라 태조(太祖) 때 도곡(陶穀)이라는 한림학사가 봉조(奉詔)하여 제작한 것을 조선 순조 29년(1829)경 효명세자가 그 내용과 명칭을 본떠 만든 춤이다. 붉은 옷을 입고 머리에는 금봉관에 목단꽃을 꽂고 춤을 추는데, 무대 중앙에 활짝 핀 모란 화준(花樽:꽃병)을 놓고 10의 무원(舞員)이 편을 짜 화준을 돌면서 꽃을 꺾어 들고 춘다. 음악이 풍경지곡(豊慶之曲)을 아뢰면 전원이 앞으로 나아가 염수족도(斂手足蹈, 손을 여밀 때 여자는 오른 손을 위로, 남자는 왼손을 위로 하여 배꼽 약간 아래쪽에 손을 놓아 두 팔 모양이 원을 이루는 듯한 형상을 하게 하고 발은 옮겨 디디면서 무릎을 구부렸다 펴면서 발바닥은 보이지 않게 하는 걸음 동작을 말함)하고 서는데, 이 때 음악이 그치고 창사(唱詞)를 부르면 무용이 시작된다. 음악은 처음의 풍경지곡(豊慶之曲)으로 시작하여 함녕지곡(咸寧之曲), 타령(打令) 등으로 바뀌며 연주된다.
전승자 정보
김천흥(金千興, 1909~)김천응은 처용무의 예능보유자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의 해금과 일무 기능보유자이기도 하다.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천흥은 13살이던 1922년부터 아악서(雅樂署)에서 기예를 익히기 시작하였다. 처음 익히기 시작한 것은 해금이었으나 그 후 양금 연주를 더 많이 하였다. 뿐만 아니라 처용무와 춘행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4살 때인 1923년에는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순종의 50세 생일축하공연에 참가하였다.1926년 이왕직 아악부원양성소(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를 마치고, 이왕직 아악부에 들어가 1932년 아악수장(雅樂手長)이 되었다. 1940년까지 아악부에서 궁중음악과 궁중무용 연구에 힘을 쏟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궁중무용 40여종을 문헌 및 기록을 토대로 내용을 풀이하여 10여 차례의 공연을 갖고 유일한 정재 계승자로 정재의 재현과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이흥구(李興九, 1940~)1961년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 양성소를 제 1회로 졸업했으며, 김보남, 김천흥, 한영숙 선생 등으로부터 한국무용을 사사받았다. 수연장, 헌천화, 사선무, 오양선, 몽금척, 향발무, 하성명, 춘앵전, 처용무, 승전무, 가인전목단, 하왕은, 제수창, 무애무, 박접무, 봉래의, 고구려무, 보상무, 연화대무, 만수무등 40여종의 궁중정재 재현에 힘썼으며, 학연화대합설무의 무용과 학제작 기예능보유자였던 한영숙의 뒤를 이어 1993년에 보유자 인정을 받았다.
무보
조선 성종 시대에 간행된 <악학궤범>과 기타 궁중에서 발간된 진작의궤, 진찬의궤 등에는 궁중무용의 무보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현재까지 전승이 활발한 무보들을 소개한다.
관련도서
한국예술사전 4권(연극/무용/영화 편), 대한민국예술원, 1985. 조선궁중무용, 이흥구/손경순 역, 열화당, 2000. 고종황제 50세 경축연향 여령정재홀기, 인남순/김종수 공역, 민속원, 2001. 김천흥, 韓國舞踊의 基本舞譜, 문화재관리국, 1969.
용어해설
죽간자(竹竿子)궁중무용 할 때 사용하는 무구(舞具)로 길이 2~3 m 되는 붉은 칠을 한 나무자루 위에 가는대[細竹] 100개를 꽂고 붉은 실로 엮은 후, 대끝 3 cm 가량에 금박한 수정구슬을 달아서 장식한 의물(儀物)이다. 춤출 때 두 사람이 하나씩 들고 무원(舞員)들 앞에 서서 무원들을 등장 ·퇴장시키는 역할을 하며, 대개 당악정재(唐樂呈才)에 사용된다. 나례(儺禮)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마귀와 사신(邪神)을 쫓아낸다는 뜻으로 베푼 의식으로 대나(大儺)라고도 한다. 본래 중국에서 시작되었는데, <고려사>에 1040년(고려 정종 6)에 세밑 나례를 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전래된 듯하다. 나례의식은 조선시대까지 전해져 궁중뿐만 아니라 민간에도 널리 퍼졌다. 민간에서는 섣달 그믐날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악귀는 굉음에 놀라서 달아난다 하므로 그믐날 밤에 마당에 불을 피우고 폭죽을 터뜨렸다. 조선시대에는 나례가 악귀를 쫓아내는 일 외에도 칙사의 영접, 왕의 행차, 감사의 영접 등에 광대의 노래와 춤을 곁들여 오락으로 전용되었다.
연계정보
-당악정재
-무고(舞鼓)
-무애
-고려사악지(高麗史樂志)
-악학궤범(樂學軌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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