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일무(佾舞)

개요
종묘의 제향(祭享)행사에서는 음악(音樂)과 악장(樂章), 일무(佾舞)가 하나의 종합예술이 되어 제의(祭儀)에 병행하였다. 일무는 문묘(文廟) 및 종묘제례 때 제례악에 맞춰 여러 줄로 벌여 서서 추던 춤으로 일(佾)은 열(列)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일무는 중국으로 전해져 환구(圜丘), 사직(社稷), 태묘(太廟), 선농(先農), 선잠(先蠶), 문선왕묘(文宣王廟) 등의 제사에 사용된 아악(雅樂) 일무와 조선 세조 때에 창제되어 전승되어 온 종묘 일무가 있다.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일무가 유입된 것은 고려 예종(睿宗) 9년(1114년) 6월에 사신 안직숭(安稷崇)이 송나라에서 귀국할 때 휘종(徽宗)이 신악기(新樂器)와 악보 및 지결도(指訣圖)를 주었고, 1116년(예종 11년) 6월에는 역시 휘종이 송나라에 하례사(賀禮使)로 가 있던 왕자지(王字之)와 문공미(文公美)에게 대성아악(大晟雅樂, 송나라 궁중에서 사용하던 제례음악으로 휘종(徽宗)이 대성부(大晟府)에 일러 새로이 만든 아악을 말한다.)을 주면서부터다. 이때 들어온 대성아악은 환구(圜丘), 사직(社稷), 태묘(太廟), 선농(先農), 선잠(先蠶), 문선왕묘(文宣王廟) 등의 제사와 그 밖의 연향(宴饗)에 쓰이게 된다. 일무는 제례의 대상에 따라 8일무, 6일무, 4일무, 2일무 등으로 구분되는데, 천자(天子)는 8명씩 8줄로 늘어선 64명의 8일무로 하고 제후(諸侯)는 6명씩 6줄로 늘어선 36명의 6일무, 대부(大夫)는 4명씩 4줄로 늘어선 16명의 4일무, 사(士)는 2명씩 2줄로 늘어선 4명의 2일무로 춘다. 고려 예종 때 우리나라에 수입된 일무는 6일무였다. 중국에서 수입된 일무는 전래된 곳에서는 소멸된 지 이미 오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예종 이후 그 일부가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으며, 종묘의 일무는 조선 세종때 만들어진 정대업과 보태평 음악에 맞춰 세조 시대에 창제되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내용
일무는 문덕(文德)을 칭송하는 문무(文舞)와 무덕(武德)을 칭송하는 무무(武舞)로 구분할 수 있으며, 문묘와 종묘제례악무로 경건하게 공연되었다. 문무는 왼손에 약(籥, 대나무로 만들어졌으며 구멍이 셋이 있는 세로 부는 악기), 오른 손에 적(翟, 나무에 꿩털을 달아 장식한 무구(舞具)로 평화와 질서를 상징함)을 들고 춤을 추었고, 무무는 목검(木劍)과 목창(木槍)을 들고 추었다. 또 문무에 사용되는 음악을 보태평이라 하여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무무에 사용되는 음악이 정대업이라 하여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라 하기도 하였다. 문무과 무무는 제사의 엄격한 절차에 따라 의식적은 성격을 띠고 진행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1) 문무(文舞, 보태평지무) 문무는 문묘제례(文廟祭禮)나 종묘제례(宗廟祭禮) 때 추는 춤이며, 고인의 문덕(文德)을 송축하는 뜻으로 춘다. 무공(武功)을 찬미하는 뜻인 무무(武舞)와 대응하며 문묘와 종묘의 제의 절차 가운데 영신(迎神, 신을 맞이하는 예), 전폐(奠幣, 폐백을 올리는 것을 말함), 초헌(初獻, 첫번째 술잔을 올리는 것) 때 추게 된다. 문무는 수십 명의 무원들이 약과 적을 맞부딪치며 율동적인 음향을 울리면서 춤을 추었다. 춤사위는 비교적 동작이 느리고 움직일 때마다 경건한 자세를 취한다. 먼저 상반신을 45도 각도로 굽히고 가슴 가운데 두 손을 붙이나 오른손으로 왼손을 덮었다가 45도 가량 옆으로 떼었다가 또 가슴 가운데 얹었다가 옆으로 조금씩 들어올리되 어깨에서 약 2.3cm 가량 처뜨리는 등 이와 같은 동작이 반복되는 상징적인 내용이다. 종묘제례 무원(舞員)의 복장은 홍주의(紅周衣)에 남사대(藍絲帶)를 띠며, 목화(木靴)를 신고 머리에는 진현관(進賢冠)을 쓴다. 사용되는 음악은 보태평과 풍안지악(豊安之樂)이 연주되고 곡(曲)은 희문(熙文, <보태평> 11곡 중 첫번째 악곡으로 신을 맞는 영신례(迎神禮)와 초헌(初獻)에 쓰임)을 비롯하여 많은 곡이 연주되나 절차에 따라 곡이 바뀐다. 2) 무무(武舞, 정대업지무) 문묘제례나 종묘제례 때 추는 춤으로 무공(武功)을 찬미하는 의미의 춘다. 문덕(文德)을 송축하는 뜻의 문무(文舞)와 대응되며, 문묘와 종묘의 제의 절차 가운데 아헌(亞獻,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것)과 종헌(終獻, 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것) 때 추게 된다. 무무는 활(弓), 창(矛), 검(劍)을 들고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음악에 따라 여러 대형을 형성하면서 추는 춤으로 그 형태들이 조금씩 변화되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머리에 꽃을 그린 화화복두(畵花복頭)를 쓰고 홍주의(紅周衣)를 입고 남사대(藍絲帶)를 두르고 목화(木靴)를 신은 복장에 칼과 창을 드는데 앞 3줄은 검을, 뒤의 3줄은 창을 든다. 춤의 대형은 박의 울림 신호에 따라 곡진도(曲陣圖), 직진도(直陣圖), 예진도(銳陣圖), 원진도(圓陣圖), 방진도(方陣圖) 등 다양한 대형을 형성하면서 춤춘다. 이 춤은 전 과정에 걸쳐 의물을 든 사람들은 음악의 변화에 따라 족도(다리를 굽혔다 폈다 하는 춤동작)를 하는데 이들은 71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이 동원된다. 무무의 춤사위는 가슴 앞으로 손을 모아 준비자세를 취한 뒤 음악이 시작되면 먼저 왼쪽으로 몸을 돌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며 양손을 벌려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가 척으로 간을 내리치는 동작만을 반복하는 간단한 춤사위이다. 그러나 보태평과 달리 무무는 무위(武威)가 엿보이는 듯이 장중한 모습이며, 허리를 굽히고 칼을 든 오른손을 내리되 몸에서 약 40도 가량의 자세를 취한다든가 손에 쥔 칼을 들어 어깨를 내리치는 시늉을 하기도 하고, 칼을 든 손을 구부려 어깨까지 올리나 칼이 뒤로 향하도록 하거나 왼발은 세우고 오른발은 꿇고 앉되 두 손을 왼쪽 무릎 위에 놓는 등 무무의 기상을 보여준다. 사용되는 음악은 정대업이고, 곡은 소무(昭武)를 비롯하여 많은 곡이 연주되고 악기는 영신(迎神) 때의 보태평과 같으나 태평소와 대금이 추가로 편성된다.
전승자 정보
일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종묘제례악의 예능보유자인 김천흥이 일무와 해금으로 보유자 인정을 받았다. 김천흥(金千興, 1909~)김천흥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의 일무와 해금분야 예능보유자이자 처용무 보유자이기도하다.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천흥은 13살이던 1922년부터 아악서(雅樂署)에서 기예를 익히기 시작하였다. 처음 익히기 시작한 것은 해금이었으나 그 후 양금 연주를 더 많이 하였다. 뿐만 아니라 처용무와 춘행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4살 때인 1923년에는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순종의 50세 생일축하공연에 참가하였다.1926년 이왕직 아악부원양성소(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를 마치고, 이왕직 아악부에 들어가 1932년 아악수장(雅樂手長)이 되었다. 1940년까지 아악부에서 궁중음악과 궁중무용 연구에 힘을 쏟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궁중무용 40여종을 문헌 및 기록을 토대로 내용을 풀이하여 10여 차례의 공연을 갖고 유일한 정재 계승자로 정재의 재현과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연계정보
재구성한국예술사전 4권(연극/무용/영화 편), 대한민국예술원, 1985.한국무용사, 김매자, 삼신각, 1995.조선궁중무용, 이흥구/손경순 역, 열화당, 2000.
관련도서
한국예술사전 4권(연극/무용/영화 편), 대한민국예술원, 1985. 한국무용사, 김매자, 삼신각, 1995. 조선궁중무용, 이흥구/손경순 역, 열화당, 2000.
관련사이트
문화재청
관련멀티미디어(전체4건)
이미지 4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