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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제례악

개요
종묘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도 있었으나 고려 초기 숙종(1096∼1105) 무렵부터 음악을 제향에 사용하였다. 이때의 음악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 후 송나라에서 대성아악(大晟雅樂)이 들어와 1116년(예종 11) 10월부터 아악이 제향에 사용되었으나 체계가 갖추어지지 못했다. 조선초기에는 고려시대의 것을 답습하다가 1395년(태조 4) 11월에 고려의 옛 제도를 바꾼다는 원칙 아래 종묘악장(宗廟樂章)을 고쳤으나 그 음악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1425년(세종 7) 세종은 “아악은 본래 우리나라 음악이 아니므로 평소에 익히 듣던 음악을 제사용으로 쓰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살아서 향악을 듣다가 죽으면 아악을 연주하니 어찌된 까닭인가.”하고 음악의 모순을 지적하였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국초(國初)에 여러 곡을 지었는데, 조종(祖宗)의 공덕의 성대함과 초창(草創)의 어려움을 표현하기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고취악(鼓吹樂)과 향악에 바탕하여 <정대업(定大業)> · <보태평(保太平)> · <발상(發祥)> · <봉래의(鳳來儀)> 등 신악(新樂)을 창제하였다. 그 중 <정대업>과 <보태평>은 1447년에 회례악무(會禮樂舞)로 창제되었고 아직 종묘제례악으로 쓰이지는 않았다. <정대업>은 15성(聲)이고 <보태평>은 11성인데, 이 두 곡은 세종이 친히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절(節)을 만들고 하루저녁에 지어, 수양대군이 여기(女妓) 10명으로 하여금 대궐 안에서 익히게 하였다. 1460년 세조는 <정대업> 과 <보태평>이 그 음악의 성대함에도 불구하고 종묘에 쓰이지 않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최항(崔恒)에게 명하여 세종 때의 가사의 뜻은 그대로 두면서도 간략하게 새로 짓게 하여, 1464년(세조 10) 종묘제례악으로 <정대업>과 <보태평>을 정식 채택하였다. 선조조에는 임진왜란으로 음악이 약화되었으나 광해조에 점차 복구되었다. 1626년(인조 4)에 <보태평> 중 정명장(定明章) 다음에 광국중흥(光國中興)의 위업을 이룩한 선조의 실(室)에 새로 지은 중광장(重光章)을 삽입하였다. 1946년에 종묘제례악은 중단되었다가 1971년부터 다시 시작하여 해마다 5월 첫 일요일에 행하는 종묘대제에서 <보태평> 11곡과 <정대업> 11곡을 연주하고 있다.
내용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은 종묘에서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에게 제사드릴 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와 춤을 아울러 일컫는 것으로 ‘종묘악’이라고도 한다. 종묘제례악에서 부르는 노래를 악장(樂章)이라 하는데, 조선 초기 종묘제례악의 악장의 형식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4자(字) 1구(句), 8구 1장(章)의 정형의 한시(漢詩)였다. 세종이 만든 <정대업>·<보태평> 가사의 자구(字句)가 많아 짧은 제의(祭儀)에 다 부르기 어려웠으므로 세조 때, 내용을 줄이고 악장이 없던 진찬(進饌)·철변두(徹邊豆)·송신(送神) 등을 최항(崔沆)이 새로 지었다. <보태평> 11곡이 창제 당시에는 임종궁평조(林鐘宮平調)였고, <정대업> 15성은 남려궁계면조(南呂宮界面調)였으며, 정간(井間)도 1행 32정간에 12율명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1463년에는 <정대업>과 <보태평>의 곡 수를 각각 11곡으로 줄이고 악보도 1행 16정간으로 축소, 개편함과 동시에 표기도 율자보(律字譜)대신 오음약보(五音約譜)를 창안하여 썼다. 그 뒤 1625년에 선조의 광국중흥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용광(龍光)과 정명(貞明)을 열광정명(烈光貞明)으로 합치고 중광장(重光章)을 새로 첨가하였다. 이는 악장(가사)만 새로 지어 역성곡(繹成曲)에 얹어 불렀을 뿐 악곡에는 별 변동이 없었다. 음계에서 세종 때와 세조 때의 <보태평>과 <정대업>은 서로 다르다. 세종 때의 <보태평>은 임종궁(林鍾宮) 평조(平調)인 5음 음계였고, <정대업>은 남려궁(南呂宮) 계면조(界面調)인 5음 음계였으나, 세조 때는 <보태평>은 황종궁(黃鍾宮) 평조인 5음계로 <정대업>은 황종궁 계면조로 바뀌며, 세조 때의 철변두·송신·진찬의 음악은 7음계를 보인다. 황종조로 바뀌는 까닭은 향악기 중심의 음악에 아악기와 당악기를 섞어 쓰기 위한 것이다. 조선 말기에는 다른 향악계 음악처럼 평조인 보태평은 5음 음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계면조인 정대업은 4음 음계로 변하여서 현재에 이른다. <정대업>과 <보태평>의 선율구조는 모두 선율타악기(편종·편경·방향)의 기둥선율 위에 선율악기(당피리·대금·해금·아쟁)들이 장식적 부선율을 덧붙이기도 하고, 장식적으로 주선율을 보강하면서 연주되며, 그 위에 더 다양한 가락을 가진 악장의 노래가 중첩된다. 세종조나 세조조에는 각 음악의 시가가 달랐지만 <속악원보(俗樂源譜)> 이후 현행에는 모두 균일화되어 그 위에 새로운 선율선이 이루어졌으며, 리듬의 주기 등이 전곡에 불규칙하게 나타난다. 아악기로만 이루어진 문묘제례악과 달리 아악기에 해당하는 편종·편경과, 당악기에 속하는 방향·장구·해금·아쟁·당피리, 그리고 향악기에 속하는 대금 등이 종합 편성된다. 제례 절차에 따라 댓돌 위에서 연주하는 등가악과 댓돌 아래에서 연주하는 헌가악이 교대로 연주한다. 종묘대제의 행례는 당상에 있는 집례의 창홀(唱笏)로 진행되며, 음악이 병행되기 때문에 집박악사(執拍樂師)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행례절차는 크게 8단계로 나누어진다. 첫째, 영신(迎神) 절차에서는 헌가(軒架)에서 <영신희문(迎神熙文)> 9성(成)을 연주하며, 일무는 문무(文舞)를 춘다. 편성악기는 편종·편경·방향·당피리·대금·해금·장구·진고·축·박이다. 둘째, 전폐(奠幣) 절차에서는 등가(登歌)에서 <전폐희문(奠幣熙文)>을 연주하며, 일무는 문무를 춘다. 편성악기는 영신과 같고, 해금 대신 아쟁, 진고 대신 절고를 편성한다. 셋째, 진찬(進饌) 절차에서는 헌가에서 <진찬>을 연주하며 일무는 없다. 편성악기는 영신과 같다. 넷째, 초헌(初獻) 절차에서는 등가에서 <보태평> 11곡을 연주하며, 그 악곡명은 <희문(熙文)>·<기명(基命)>·<귀인(歸人)>·<형가(亨嘉)>·<즙녕(輯寧)>·<융화(隆化)>·<현미(顯美)>·<용광정명(龍光貞明)>·<중광(重光)>·<대유(大猶)>·<역성(繹成)>이다. 일무는 문무를 추고, 편성악기는 전폐와 같다. 다섯째, 아헌 절차에서는 헌가에서 <정대업> 11곡을 연주하며, 그 악곡명은 <소무(昭武)>·<독경(篤慶)>·<탁정(濯征)>·<선위(宣威)>·<신정(神定)>·<분웅(奮雄)>·<순응(順應)>·<총유(寵綏)>·<정세(靖世)>·<혁정(赫整)>·<영관(永觀)>이다. 일무는 무무를 추고, 편성악기는 영신과 같으나 태평소와 징이 첨가된다. 여섯째, 종헌(終獻) 절차에서는 헌가에서 아헌과 같이 연주하며, 일무는 무무를 추고 편성악기도 아헌과 같다. 일곱째, 철변두(徹籩豆) 절차에서는 등가에서 <진찬> 1곡을 연주하며, 무무가 퇴장하고, 편성악기는 전폐와 같다. 여덟째, 송신(送神) 절차에서는 헌가에서 <진찬> 1곡을 연주하며, 일무는 없고, 편성악기는 영신과 같다. 종묘제례악에서 추는 춤을 일무(佾舞)라 하며, 일무(佾舞)는 열(列)을 지어 추는 춤을 뜻한다. 종묘의 일무는 세조 이후 육일무(六佾舞)를 사용하였으며 조종의 문덕을 찬양한 <보태평>에는 문무(文舞)를, 무공(武功)을 찬양한 <정대업>에는 무무(武舞)를 춘다. 오늘날의 일무는 <시용무보(時用舞譜)>에 따라 재현된 것으로, 춤추는 인원은 8일무로 64인이며, 문무는 왼손에 약과 오른손에 적을 들고, 무무는 앞 4줄은 목검(木劍), 뒤의 4줄은 목창(木槍)을 들고 춘다
전승자 정보
종묘제례악은 조선 말기까지 장악원(조선시대에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의 악사들이 전승하였고, 일제 때에는 구 왕궁아악부의 악사가 전승하였으며, 8·15광복 후에는 국립국악원의 악사들이 전승하고 있다.
연계정보
재구성국악대사전, 장사훈, 세광출판사, 198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일조각, 1984.http://www.ocp.go.kr 문화재청http://www.koreandb.net 디지털 한국학
관련도서
국악대사전, 장사훈, 세광출판사, 1984.국악의 역사, 장사훈,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국악전집8: 종묘제례악, 김기수, 국립국악원, 1980.無形文化財調査報告書1, 문화재관리국. 전통음악개론, 김해숙 외, 어울림, 1997.종묘제례 · 종묘제례악, 문화재청, 2001.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일조각, 1984.한민족음악론, 권오성, 학문사, 1999.
용어해설
* 세종실록 악보15세기에 간행된 악보로 지금까지 전하는 관찬 악보(官撰樂譜)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오래된 악보이다. 종묘제례악에 연주되는 <보태평>과 <정대업>은 <세종실록> 권138에서, 1행 32정간에 12율명의 율자보(律字譜)로 기보되었다. 그 외에 <조회아악보>는 권136, <제사아악보>는 권137, <봉래의>는 권140~145, <봉황음>과 <만전춘>은 권146에 실려있다. <세종실록 악보>는 1430년(세종12)과 1447년(세종29)에 편찬되었던 여러 악보를 모아서 실록 편찬 때 간행하였다. 세로줄과 가로줄을 그어서 마치 바둑판처럼 그려진 이 기보법의 모양이 한문의 우물 정(井)이라는 글자처럼 생겼다고 하여 <정간보>라고 한다. 1행이 32정간으로 구성되었는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읽는다. 제1행은 현악기를 위한 악보이며, 제2행은 관악기를 위한 악보이고, 제3행은 장고를 위한 악보이며, 제4행은 박을 위한 악보이고, 제5행은 노래 가사이다. 음의 시가는 정간보로 표시할 수 있지만 높낮이를 표시할 수 없는 것이 약점이라서, 음의 높낮이를 나타내는 다른 기보법과 함께 사용된다. * 세조실록 악보종묘제례악의 <정대업> 11곡과 <보태평> 11곡은 <세조실록> 권48에서, 1행 16정간으로 음의 시가를 기록할 수 있는 오음약보(五音略譜)로 기보되었다. 그 외에 권49는 원구 송신과 전폐의 <희문지악>, 진찬의 <융안지악>, 초헌의 <기명지악>, 아헌의 <선위지악>, 종헌의 <탁정지악>, 철변두의 <성안지악>, 송신의 <영안지악>, <창수지곡>, <경근지곡>이 기록되어 있다. 세조는 세종의 정간보를 개량하여 1행을 16정간으로 만들고, 16정간을 육대강으로 나누었으며, 율자보 대신에 오음약보를 사용하였다. 오음약보는 정간보에 압축된 다섯 글자로 높낮이를 표기하는 기록법이다. 어느 한 곡의 중심음인 궁보다 높은 음들은 상1 · 상2 · 상3 · 상4 · 상5로 표시하고, 궁보다 낮은 음들은 하1 · 하2 · 하3 · 하4 · 하5로 표시하였다. * 대악후보1759년(영조 35) 서명응이 세조 때의 음악을 모아 편찬한 7권 7책의 악보이다. 권1에는 세조 때의 <속악보서> 외 8곡이, 권2에는 <시용보태평도> 외 1곡, 권3에는 <시용향악보> 외 2곡, 권4에는 <시용향악보> 외 1곡, 권5에는 <시용향악보> 외 4곡, 권6에는 <시용향악보> 외 5곡이, 권7에는 <동동> 외 3곡이 실려있다. <대악후보(大樂後譜)>의 기보법은 세조가 창제한 오음약보를 택하여 정간보에 6대강으로 나누어 16정간씩 기보하였고 <영산회상(靈山會相)>의 경우에만 4대강으로 기보하였다. <대악후보>는 현보와 관보, 고보, 박, 가사 등을 한꺼번에 기보한 총보(總譜)에 해당한다. <대악후보>는 18세기 간행된 악보이지만, <조선왕조실록>과 별개로 독립되어 최초로 관에서 편찬한 악보이며, 세조 때의 음악을 비롯하여 여러 시기 음악을 담고 있다는 점과, 고려에서 전래된 <정읍> 등 다양한 향악곡 및 조선 후기까지 다양한 변화와 생성과정을 거친 정악곡의 초기형태를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자료이다.* 속악원보조선 후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악보이다. <속악원보 俗樂源譜> 권1(仁) · 권6(信)에 종묘제례악 관련 악보가 실려있다.
연계정보
-성경린(成慶麟)
관련사이트
국립국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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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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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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