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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흐름
시조라는 명칭의 원뜻은 시절가조(時節歌調), 즉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라는 뜻이었으므로, 엄격히 말하면 시조는 문학부류의 명칭이라기보다는 음악곡조의 명칭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있어서도 그 명칭의 사용은 통일되지 않아서, 단가(短歌)·시여(詩餘)·신번·장단가(長短歌)·신조(新調) 등의 명칭이 시조라는 명칭과 함께 두루 혼용되었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서구문학의 영향을 입어 과거에 없었던 문학부류, 즉 창가·신체시·자유시 등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들과 이 시형을 구분하기 위하여 음악곡조의 명칭인 시조를 문학부류의 명칭으로 차용하게 된 것이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시조라는 명칭이 문학적으로는 시조시형이라는 개념으로, 음악적으로는 시조창이라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문학적 측면에서의 시조의 흐름
시조는 고려 조 말기에 그 형태가 완성되었다고 하나, 그 기원에 대하여는 의견이 일정하지 않다. 민요, 무당의 노랫가락, 향가, 별곡 등 심지어는 한시에서 연유되었다는 서로 다른 입장에서 서로 다르게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시조의 형태가 완성된 시기는 고려 말엽이라 해도 그것이 본격적으로 융성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 이다. 시조는 고려 말 이래의 새로운 지도이념인 성리학을 신봉하는 유학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새로운 시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시조의 간결한 정형성은 유학자의 미의식에 알맞은 시형으로 그들은 한시만으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을 이에 담아 단아한 기품으로 노래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시조집에서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작가들을 들어보면 고려 충숙왕 때의 우탁(禹倬), 충혜왕 때의 이조년(李兆年), 공민왕 때의 이존오(李存吾)·길재(吉再)·원천석(元天錫)·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조선 초기의 정도전(鄭道傳)·변계량(卞季良)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 말 조선 초의 유학자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교주의의 구현은 분명 조선시대 시조 중의 대표적인 주제 내지 제재론의 대상이다. 말하자면 시조에 있어서 동일한 주제가 그 모티프를 어떻게 달리 하는가를 살피는 작업은 시조의 본령을 이해하는 데 여러 모로 뜻 깊은 암시를 준다. 가령 고려 말의 회고가(懷古歌), 조선 조의 창업송영(創業頌詠), 중기의 강호가(江湖歌), 도학가(道學歌), 억군가(憶君歌), 충의가(忠義歌) 등은 서로 다른 모티프의 선택에 따라 그 제재와 계기는 시대에 따라 달리 나타나지만 역시 주제는 유교적 윤리이며, 그리고 주제인 유교적 이념의 시적 변이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시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강호가 역시 일견 자연시로 보이지만, 그것은 결코 엄격한 의미에서 자연시가 아니라 충의사상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자연을 주관적으로 관념화한 것이다. 맹사성(孟思誠)의 <강호사시가>가 바로 그것이다. “적군은(赤君恩)이샷다”로 작품을 끝맺음으로써 임금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 그들은 자연을 구가하면서도 유교적인 충의를 잊지 않고 그것을 노래 속에 반영하였다. 조선 전기의 시조가 지니고 있던 이러한 현상은 16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세 갈래의 지향점을 발견하고, 그 세 방향에서 각기 우수한 작품을 산출하고 있다. 그 하나는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과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등이 대표하는 것으로서 정치적 이념과 태도를 선행시키고 있는 조선 전기의 자연에 대한 유학자들의 태도가 도달할 수 있는 고아한 품격과 자연에 투영된 인생관의 한 극치를 시조가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정철(鄭澈)의 <훈민가>(訓民歌)가 대표하는 것으로서 유교적인 윤리관을 주제로 하되 백성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쓰여진 토속적인 언어기교를 시조가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황진이(黃眞伊)로 대표되는 기녀(妓女)들의 작품들로서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애정의 형상화가 시조시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특히 유학자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시조의 작자로 등장하게 된 기녀들의 작품은 전대의 고려가요가 지녔던 발랄한 애정표현을 시조시형을 통하여 재창조하였고, 시조문학 내지는 조선시대의 모든 면에서 억제되고 있었던 여심(女心)의 표현을 활발하게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신흠(申欽)과 윤선도(尹善道)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윤선도는 시조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서 손꼽힌다. 그의 작품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는 4계절마다 각 10수씩 총 40수로 된 연시조인데,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갈고 닦아 간결하면서도 품격이 돋보이는 표현에 뛰어났으며, 속화된 자연을 시로써 승화시킨 대표작이다. 이때까지의 시조는 유학자들의 여기(餘技)로서 창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조는 그들의 소박한 감정을 직선적으로 표출하는 영탄적인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또한 시조는 확고한 창작의식이나 문학적 진통을 겪지 않고 수월히 불리어졌던 만큼 ‘어즈버, 아희야, 두어라’와 같은 감탄사가 빈번하게 쓰였으며 또한 그것이 시행종결(詩行終結)의 방법으로 즐겨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많이 사용된 표현기교는 서술적인 방법으로서, 대부분의 전원시(田園詩) 또는 자연시들이 서경(敍景)을 위주로 하는 서술적인 방법을 통하여 표현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유학도들의 여기로서 창작된 시조이었다 할지라도, 때로는 천재적인 작가를 만나 서정적인 표현이나 사실적인 표현으로 지향, 승화되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고도의 상징적 수법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의 시조에서 나타나는 가장 커다란 변화는 사설시조의 등장이다. 조선 조 유교주의가 고려의 고속가의 인간적 성정에 대한 반명제로 나타났다고 하면 18세기 중엽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 사설시조는 유교주의의 반발로 나타난 것은 좋은 대조이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등장한 실학사상의 영향이 압도적이다. 시조가 지닌 3장체의 형식적 특성은 살리면서, 초장과 중장에는 그리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범위 내에서이기는 하지만, 일부 비판적 유학도들은 정형률을 깨고 새로운 가치관에 의하여 사설시조를 창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설시조는 이들 일부 비판적인 유학도보다는 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하여 더욱 새롭게 발전하였다. 서민들은 유학도와는 생활감정·사고체계·가치관을 달리하였기 때문에 사설시조로의 전환을 이룩하는 데에 보다 적극적으로 그 창법(唱法)과 작법(作法)을 개발하였고, 일부 비판적인 유학도에 못지않게 날카로운 현실의식으로 시조의 전통적인 미학을 변혁하고 극복해나갔다. 그들은 한편에서는 지배계층인 유학도의 이념과 통치방법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유학도적인 행동을 취하려 하였고, 그들의 대상으로서 지배계층을 언제나 의식함으로써 유학도에 의존하고 동화하려는 사고방식에 젖어들기 일쑤이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이 뿌리를 내리고 호흡하고 있는 피지배계층의 가치관에 의하여 유학도의 그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지배계층의 의식구조에 의존하고 동조하려 할 때 시조의 미의식을 사설시조 속에 그대로 연장, 수용하였으나, 지배계층의 가치관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때는 시조의 미의식을 변혁하고 극복하였으며, 때로는 지배계층의 미의식에 대응하는 서민들의 독자적인 미의식을 창조하였다. 사설시조는 지난날의 영탄이나 서경의 경지를 완전히 탈피하고, 폭로적인 묘사와 상징적인 암유(暗喩)로써 그 표현기교를 바꾸고 있고, 애정·거래(去來)·수탈(收奪)·패륜(悖倫)·육감(肉感) 등 다채로운 주제를 다루면서 지난 시대의 충의사상에 밀착된 시조의 주제를 뒤엎고 있다. 사설시조의 발달과 함께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 발달과정에 있어 가장 주동적인 구실을 하고 있는 평민가객(平民歌客)의 출현이다. 이들 평민가객들 중의 한 사람인 김수장(金壽長)이 편찬한 시조집 <해동가요>에는 17, 18세기에 걸쳐 활약한 가객 56인의 명단이 실려 있다. 이들은 대개가 문벌이나 지위가 낮은 인물들이며, 사회적으로 크게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16세기 이래 시조의 창작에 참여한 기녀들과 함께 시조문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바 이들의 업적을 세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로, 이들은 끊임없는 연수를 통하여 시조의 작법과 창법을 전수하고 있다. 둘째로, 이들은 사설시조라는 새로운 시형을 발굴하고 발전시켰다. 현전하는 사설시조는 그 대부분이 작자를 알 수 없는 작품이고 또 가객들이 창작한 작품도 평시조가 대부분인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18세기의 평민가객을 대표하는 김수장이 36수의 사설시조를 창작하고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당시의 문학과 음악은 이들 평민가객에 의하여 발달하였고 동시에 이들의 독자적인 미의식인 희극미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이들은 가단(歌壇)을 형성하고 시조집을 편찬함으로써 시조문학의 항구적인 발전을 꾀하고 있다. 김천택은 시조집 <청구영언>을 편찬하였고, 김수장은 시조집 <가곡원류>를 편찬하였다. 이들이 편찬한 <청구영언>·<해동가요>·<가곡원류>는 다른 시조집들에 비하여 수록한 작품수가 많고 그 편차체제(編次體制)가 정연하여 3대 시조집이라고 일컫고 있다. 이밖에도 송계연월옹(松桂烟月翁)의 <고금가곡>(古今歌曲), 이형상(李衡祥)의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편찬자 미상의 <화원악보>·<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 김교헌(金喬軒)의 <대동풍아>(大東風雅) 등의 시조집들이 전한다.
음악적 측면에서의 시조의 흐름
음악에서의 시조는 시조시(時調詩)를 노래하는 전통 성악곡이다. 본래 시조는 성악곡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노랫말인 단형시를 지칭하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므로, 그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흔히 시조창이라고 한다. 대금·해금·장구 등의 악기로 반주되는데, 반주선율은 따로 없고 악기가 노래선율을 따라서 연주한다. 시조창의 발생은 조선조 영조대의 학자 신광수(申光洙)의 <석북집>(石北集)에 일반시조에 장단을 배열한 사람은 이세춘(李世春)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초창문개설태진(初唱聞皆說太眞) 지금여한마외진(至今如恨馬嵬塵) 내자장안이세춘(來自長安李世春) 일반시조에 장단을 배열한 것은 장안에서 온 가객 이세춘으로부터 비롯한다고 한 이 시에 근거하면, 시조는 대개 영조 무렵에 비롯한 듯 하다. 정조 때의 시인 이학규(李學逵)가 쓴 시 <감사(感事)> 24장 가운데 “그 누가 꽃피는 달밤을 애달프다 하는고. 시조가 바로 슬픈 회포를 불러주네(誰憐花月夜 時調正處懷).”라는 구절이 있고, 이에 대한 주석에서 “시조란 또한 시절가(時節歌)라고도 부르며 대개 항간의 속된 말로 긴 소리로 이를 노래한다.”라고 하였다. 이 내용은 시조창을 두고 쓴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실제로 시조음악은 조선중기의 고악보 <금합자보(琴合字譜)> 등에 보이는 단가 <북전(北殿)>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영조 대에 이르러 그때까지 유행하던 단가 <북전>을 조금 변형시킨 단가 시조(평시조)가 대두되었고, 그것이 <북전> 대신에 새로 널리 유행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영조 이후로는 평시조에서 많은 변형시조가 파생하게 된다. 시조가 기록되어 있는 악보를 통해서 시조의 파생, 변주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서유구가 지은 <임원경제지> 중 <유예지>에는 현행 평시조에 해당하는 한 곡만이 있다. 또 이규경의 <구라철사금자보>에는 양금악보의 시조보가 전한다. 19세기 후반 <삼죽금보>에는 현행 평시조, 지름시조에 해당하는 두 곡의 시조가 있다. 따라서 3장 형식의 시조는 적어도 18세기 전기 이전에 형성되어 이세춘 활동 시절에 유행했을 것이고, 18세기말 19세기 초에는 현행 평시조에 해당하는 곡이 양금반주로 연주되기도 했을 것이며 19세기에는 평시조에서 파생, 변주되어 지름시조·사설시조가 불려졌고, 19세기 후반에는 경제·향제 등으로 퍼져 지역별 특징이 생기게 되었을 것이다. 시조의 파생·변주 양상은 가곡 삭대엽의 파생곡(농·낙·편·중거·평거·두거) 등에 비교되어 설명되며 가곡의 변주곡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의 풍류방에서 전승된 시조의 전통은 일제강점기에 장악원의 음악유산을 후대에 전승시키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왕직아악부에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왕직아악부에 아악부원양성소가 설치되면서 그곳에서 아악사장 이하 장악원의 후예들은 새 세대들에게 구한말의 국악을 교육시켰다. 그런데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에서 1930년대부터 정악이 교과과정에 삽입되었고, 하규일과 임기준에 의해서 시조·가곡·가사가 아악생들에게 전수되는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풍류방의 음악이 궁중음악만을 다루었던 교육기관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사실은 후일 국악의 연주곡목을 다양하게 넓혔다는 점과 왕실 중심의 양반관료사회의 특수층만을 위하여 연주되었던 음악문화의 폐쇄성을 개방적으로 전개시키는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음악사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시조가 하규일과 임기준에 의해 아악생들에게 전승되기도 했지만 60년대 초반까지는 서울장안에 수십 여 개의 풍류방에서 시조창을 널리 부르기도 했다. 현재 시조는 여러 지역의 시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내용
시조 곡조는 순조 때의 <유예지>에 처음으로 경제에 해당하는 평시조의 악보가 전하지만 그 뒤 여러 가지 가곡형태의 영향을 받아 많은 시조 곡조가 파생하였고, 시조창이 각 지방으로 널리 번짐에 따라 그 지방사람의 기호에 의하여 창법상의 지방적인 특징이 생김으로써 지역적으로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즉 서울지방을 중심으로 한 경제, 전라도지방을 중심으로 한 완제, 경상도 중심의 영제, 충청남도지방의 내포제 등 지방제가 생기게 되었다. 경제의 시조는 원래 현행 평시조에 해당하는 시조곡의 한 가지이었는데 전통 가곡의 형식을 본받아 많은 파생곡이 생기게 되었다. 즉, 평시조·중허리시조·지름시조·사설지름시조·수잡가(엮음 또는 언편시조)·휘모리잡가(편 또는 엮음시조의 변형) 등 변화곡이 나오게 되었다. 완제·영제·내포제는 평시조와 사설시조(엮음시조·편시조)가 중심이 된다. 시조의 기본장단은 경제와 완제·영제·내포제에 있어서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경제는 피리나 대금 등 반주가 수반되고, 완제·영제·내포제에 있어서는 각종 악기의 반주를 갖추지 못하고 기껏해야 장구장단 아니면 무릎장단으로 미봉하는 관계로 초장과 중장 끝장단에서 5박자가 줄어든 점이 경제의 장단과 다른 점이다. 경제의 평시조와 중허리시조, 완제·영제·내포제의 평시조와 사설시조는 황종·중려·임종의 3음으로 된 계면조이다. 경제의 지름시조·사설지름시조·수잡가·여창지름시조는 황종·중려·임종·무역 또는 남려의 4음으로 된 계면조이다.
시조와 가곡의 비교
시조와 가곡이 다같이 시조시를 노랫말로 사용한 점에 있어서는 양자가 같다. 시조창의 형식은 문학적인 형식과 같이 3장형식이고, 관현반주가 따르지 않는다. 음계는 3음 혹은 4음의 계면조이다. 가곡은 노랫말을 세분하여 5장으로 구분하고 관현반주를 가지며 전주곡 혹은 후주곡에 해당하는 중여음이 3장과 4장 사이에 있다. 음계는 3음 혹은 4음의 계면조와 5음의 우조로 되어 있다. 또 시조창에서는 종장 끝 음절인 ‘하노라’, ‘하느니’, ‘하오리라’등은 그 음악의 즉흥성을 가진 전달음악이기 때문에 생략하나, 가곡에서는 끝까지 다 부르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시조는 3음 또는 4음의 적은 음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창법에 따라서는 요성(搖聲)·전성(轉聲)·퇴성(退聲) 등의 여러 가지 기법으로 시조시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표현할 수가 있어서 옛 선비들이 즐겨 부르던 대중음악이라 할 수 있으며 줄기찬 생명력을 가진 귀중한 전통음악으로서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에도 계승되어 전국적으로 시조인구가 널리 분포되어 수많은 동호인 모임이 있다.
평시조
평시조는 시조 형태의 하나이다. 이 명칭은 음악과 문학에서 공통적으로 쓰이고 있는데, 원래는 창에서 그저 시조라고만 부르다가 뒤에 엇시조·사설시조 등 변조가 생겨 음악이 분화되면서 종래의 평탄한 가락의 시조를 이렇게 부르게 되었고, 문학에서도 그 명칭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평시조는 시조의 기본형으로서 그 형태가 가장 먼저 정립되었을 뿐 아니라 전시조사를 평하여 주류를 이루어 시조를 대표한다. 작자를 살펴보면 고시조에서는 위로 왕후장상·사대부로부터 아래로 평민·가객·기녀에 이르기까지 상하 남녀의 구별없이 광범위한 작자층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사설시조 등 장형시조가 주로 무명의 서민층에서 성행된 데 비하여, 평시조는 사대부시조라고 일컬어질 만큼 양반계층에서 보다 성행한 형태였다. 이것은 시형이 극도로 긴축, 정제되어 한시의 정형성과 사상의 압축성에 익숙한 지식인에게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현대시조에 이르러서는 전문적인 작가들이 배출되어 전업화 하였으나, 그 한편에서는 일반인이나 부녀자·학생들 사이에서 교양적 생활문학으로서 확산되고 있다. 내용면에서 보면 고시조에서는 장형시조가 서민생활의 애환을 직설적인 해학과 풍자로 표현한데 비하여, 평시조에서는 단형시조가 풍류적 서정이나 윤리·도덕을 읊은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현대시조에서도 서정시가 많지만 근년에 이르러 주지적 상념이나 현실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화하였고,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비유·상징 및 초현실주의적 수법까지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다. 정형은 시조의 보편적 형태인 장·구·음수(자수)가 그 기본을 이룬다. 장은 초장·중장·종장의 3장으로 이루어진 바 한시의 절구가 기·승·전·결의 4구(4장에 해당) 구조이고 일본의 하이쿠(徘句)·와카(和歌)가 기·결의 2구(2장에 해당) 구조인 것과 비교해 볼 때, 시조는 기·승·결 또는 기·전·결 구조로서 중국과 일본의 정형시의 중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구의 구분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널리 통용되는 설은 12구설로서 1장을 4구씩으로 가르는 방법이고, 그밖에 1장을 2구씩으로 가르는 6구설, 초·중장은 2구씩, 종장은 4구로 갈라 1수를 8구로 분구하는 설 등이 있다. 음수(자수)에 있어서 12구설에서는 3·4·3(4)·4, 3·4·3(4)·4, 3·5·4·3조와 같이 1장을 15자 내외, 1수를 45자 내외로 가른다. 6구설에서는 1구를 7 또는 8자로 가르고, 8구설에서는 초·중장은 6구설에 준하고 종장은 12구설에 준하는 절충적 방법인데 자수의 증감폭을 5-8 또는 6-9자로까지 넓히고 있다. 12구설과 6구설은 평시조의 정형을 이해하는 데 편리하고, 8구설은 현대시조 창작에서 보다 융통성 있는 음수율은 초장의 3·4·3(4)·4의 파상적 단순 기록을 중장까지 네 번 반복한 다음 종장 전구에서 3·5로 격동하는 파랑(波浪)을 거쳐 최종구에서 4·3과 같이 초장 첫구의 3·4를 뒤집어서 회귀하는 흥미로운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점이 동양 3국의 정형시 가운데 중국이 나 일본의 그것들과 다른 특징이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중 <유예지>나 이규경의 <구라철사금자보>에 전하는 시조 악보는 현행 평시조와 같은데 이름이 시조로 되어 있다. 시조는 원래 한 곡조였는데, 그 뒤 가곡 의 영향을 받아 많은 곡이 파생됨에 따라 평·중허리·지름·엇사설(엮음) 등으로 구분하는 이름이 생겼다. 평은 고지의 대칭이 평지인 것처럼, 처음을 높은 음으로 질러 부르는 지름시조의 대칭으로 높지도 낮지도 않은 소리로 시작된다. 지름시조는 가곡의 두거의 창법을 본받은 곡이고, 평시조는 가곡의 평거와 비교된다. 평시조의 음계는 황종·중려·임종의 3음음계의 계면조에 속한다. 형식은 초장·중장·종장으로 구분되며, 장단은 초장이 5박·8박·8박·5박·8박이며, 중장이 5박·8박·8박·5박·8박, 종장이 5박·8박·5박·8박(1박)으로 이루어진다. 가사는 초장·중장·종장 합하여 모두 45자 내외의 단형시조를 주로 부른다. 현행 시조의 곡이름과 형태는 가곡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가곡의 곡이름과 시조 곡이름의 관계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가곡 시조 평거 평시조·평거시조 중거 중거시조 두거 두거시조 언롱·언락 엇시조 언편 엇엮음시조(또는 사설지름시조) 편수대엽 엮음시조(또는 편시조, 사설시조) 이와 같이 평·중허리·지름·엇·엇엮음·엮음 등의 명칭은 시조 곡조의 창법을 본떠서 붙여진 이름이고, 시조 자수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평시조에 있어서 지역적 배경으로 경제(京制)와 향제(鄕制)를 분별한 점 역시 가곡이나 가사와는 또 다른 시조의 지방적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서울 중심의 경제의 평시조에 있어서는 그 중간 둘째 장단, 넷째 장단, 넷째 박, 다섯째 박에서, 그리고 종장 첫 장단, 첫 박, 둘째 박, 셋째 박에 높은 속소리를 쓰고 있는데 반하여 지방의 향제에 있어서는 경제에서 속소리로 내는 목을 전혀 속소리를 쓰지 않고 평성(平聲)으로 내는 점이 크게 다르고 장단에 있어서도 다소 차이가 있다. 먼저 경제 평시조의 장단을 보면 초장 5박·8박·8박·5박·8박, 중장 5박·8박·8박·5박·8박, 종장 5박·8박·8박·5박·8박(실은 1박), 실박수(實拍數) 87박이고, 다음 향제 평시조의 장단은 초장 5박·8박·8박·8박·5박, 중장 5박·8박·8박·8박·5박, 종장 5박·8박·8박(실은 6박)으로 실박수는 역시 87박으로 떨어지고 있어 장단의 내용의 차이는 있으나 실제의 박수는 양쪽이 다 같다.
중허리시조
가곡 중거(中擧)의 음악적인 형태를 본받아 평시조에서 변형한 시조로 ‘중간을 드러낸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곡의 중거는 초장 첫째장단 중간에서 높은 음으로 드러내는 데 비하여 초장 셋째 장단 제1박에서 청황종으로 높이 드러내며, 이 점이 또한 평시조와 다르다. 중거를 우리말로 ‘중허리 드는 잦은 한입’이라고 한 점에서 가곡 중거와 중허리시조와의 상관성을 충분히 살필 수 있다. 음계는 평시조와 같이 황·중·임의 3음음계의 계면조에 속한다.
지름시조
지름은 말 그대로 지른다는 뜻으로, 초장의 첫째·둘째 장단을 높은 소리로 질러서 부르며, 중장과 종장은 평시조의 가락과 같다. 가곡 중 두거(頭擧) 또는 삼수대엽(三數大葉)의 음악적인 창조를 본받아 평시조에서 변형시킨 곡조이다. 즉, 두거는 머리를 높이 드러낸다는 뜻인 것과 같이 지름시조도 초장 처음을 높은 소리로 질러 내기 때문에 두거시조(頭擧時調)라고도 하며, <삼죽금보>에서는 소이시조(騷耳時調)라고도 하였다. 이주환은 지름시조를 평시조로 부를 수 있는 단형시조로서 되도록 그 내용이 장엄하고 호기롭고 또는 지극히 통분한 것으로 초장만을 높게 부르고 중장과 종장은 평시조와 같이 부르는 창법이라고 정의하기도 하였다. 음계는 평시조가 황(黃)·중(仲)·임(林)의 3음음계인 계면조인데 대하여 황·중·임·무의 4음음계인 계면조이다. 지름시조로 부를 수 있는 노래말은 평시조와 같은 단형시조이면 모두 해당된다. <삼죽금보>와 <서금보>에 악보가 전한다.
여창지름시조
여성에 의하여 불리는 시조창의 하나이다. 중장과 종장의 창법은 평시조와 같으나 대개 남자의 지름시조와 같이 고음으로 질러 내지 않고 초장 둘째 장단 첫 박에서부터 셋째 장단 끝 박까지를 높은 목으로 들어 내는 것이 다르다. 초장의 둘째·셋째 장단에서 청황종 이상으로 올라가는 높은 음은 남창지름시조와는 달리 가성을 사용한다. 황·중·임의 3음음계의 계면조에 속한다. 여성은 주로 이 시조창을 불러야 하겠지만, 최근에는 여성들도 남창지름시조를 더 즐겨 부른다. <서금보>에 <여창지름시조>에 해당하는 악보가 전한다. 이주환은 여창지름시조를 규원(閨怨)의 애절한 내용의 사설을 부르기에 적합한 여성적인 창법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지역에 따른 시조의 분류
시조를 지방의 특성에 따라 분류해 보면 서울을 중심으로 해서 불리는 경제(京制)와 여러 지방에서 연구되고 있는 향제(鄕制)로 나뉜다. 향제시조는 창의 특징에 따라 경기지방의 경제(京制), 충청지방의 내포제, 전라도지방의 완제(完制), 경상도지방의 영제(嶺制)로 구분한다.
완제시조
완제시조는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시조창이다. 평시조와 사설시조가 대부분이지만 엇시조, 반사설시조 등 명확하게 구분이 어려운 시조들도 있다. 악기없이 장구나 무릎장단으로 일시적 연주를 하기 때문에 초장과 중장 끝 장단에서 5박자가 줄어들기도 한다. 음계는 3음의 계면조와 5음의 우조로 되어 있으며, 연결성이 발달하여 소리가 윤택한 것이 특징이다.
영제시조
영제시조는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시조창이다. 평시조와 사설시조가 가장 많고, 뚝뚝 끊어지게 불러서 경상도 특유의 액센트가 강하게 나타나며, 씩씩하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영제시조도 악기 없이 장구나 무릎장단으로 일시적 연주를 하기 때문에 초장과 중장, 끝 장단에서 5박자가 줄어들기도 한다. 음계 역시 3음의 계면조와 5음의 우조로 되어있다. 영제시조는 “영남시조가 좋다”라는 말에서 “영판좋다”라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로 음악성이 뛰어나며, 점잖고 격조가 높아 궁중에서까지 소중히 여기던 시조창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다른 지역의 시조창에 비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어서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게 되었다.
내포제시조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에서 불려오던 시조창(時調昌)이다. 원래 내포라는 것은 서산·당진·예산·홍성을 가리키는 지역으로 이곳에서 널리 불리웠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내포제시조의 선율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중장, 둘째 장단 4박-7박과 종장 첫째 장단의 2박과 3박인데 경제에서는 이 부분을 청황(淸黃)으로 올려내지만 내포제에서도 4도 아래음인 임(林)-태(太)-황(黃)음으로 종지형을 분명히 나타내지만 내포제에서는 중(仲)-황(黃) 음으로 떨어뜨려 끝내어 여운을 남긴다. 또 경제에서 쓰는 가성(假聲)을 쓰지 않고 각 장의 첫 박은 경제에 비하여 많은 장식음을 사용하고 있다.
전승자 정보
시조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선비들의 실생활 속에서 불리워졌기 때문에 파생된 종류도 많고 창법도 다양하여 능숙한 창법 구사가 쉽지 않다. 따라서 예부터 시조명창은 없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전문음악인인 가객들과 기녀들의 활동으로 가곡·가사와 함께 크게 발달한 시조는 일제강점기에 이왕직아악부와 권번에서 필수로 가르쳤던 과목이었다. 12가곡을 전창한 하규일과 임기준이 이주환·정경태·김호성 등에게 시조를 전승시켰다.현재 시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시조창은 임산본 외 2명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임산본은 1932년에 완주군 구이면에서 출생하였는데, 10대 후반부터 마을 시조인들로부터 시조창의 습득을 시발로 하여, 20세 무렵에는 전주시우회에 가입하였고, 이후부터 완제시조의 명인인 석암(石庵) 정경태(鄭坰兌) 문하에서 완제 시조창 및 12가지를 사사하였다. 1982년에는 대한시우회 전주지회 교도, 1985년에는 시조연구소 개설운영, 1986년-1987년에는 전북도립국악원 전북지부 시조분과위원장, 1994년부터는 한국국악협회 전북지부감사 및 전북도립국악원 시조부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수상경력은 1966년 부산시조경창대회 1등, 1979년 대한시우회 명창부 1등, 전주대사습 시조부 장원, 1985년에는 제31회 백제문화제 시조경창대회 특상, 1988년에는 완주군민의 장 등을 수상하였다.또 완제시조는 전라도 사람들 특유의 기백이 묻어나는 귀중한 음악으로 현재 광주에 사는 이상술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상술은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에서 1927년 출생하였다. 19세(1945년)에 박희성에게 시조창을 처음 배웠으며 21세에는 나주시 문평면 출신의 박남규에게 시조창을 배웠다. 28세에는 광주국악원의 안치선에게 시조창과 단소(短簫)를 배웠으며 34세에는 유종구에게 시조를 배웠다. 37세에는 정경태에게 시조 음계와 시조창을 접목한 율여상조법(律呂相調法)과 정가(正歌)로 불리는 가곡(歌曲), 가사(歌詞), 시조(時調) 등을 배웠다. 이외에도 단소, 소리북 장단 등에 매우 능하며, 풍부한 성량을 지니고 있어 변화무쌍한 5박, 8박 장단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다. 또한 1963년 제1회 전국 시조·가곡·가사 경창대회 명창부 1등으로 그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1968년부터는 전국시조경창대회에서 여러 차례 심사위원도 역임하였다. 광주국악원(1963~1973)과 광주시립국악원(1973~1981)에서 시조와 단소를 가르쳤으며, 광주국악원장을 역임(1976~1981)하면서 후진 양성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악보정보
시조의 악보가 처음 보이는 것은 순조 때 학자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가운데 <유예지>와 이규경의 <구라철사금자보>이다. 해독에 의하면 이 악보의 시조는 현행 경제(京制)의 평시조에 해당하므로 시조 곡조의 원형은 다른 자료가 새로 발견되지 않는 한 경제의 평시조가 원형에 든다고 하겠다.
관련도서
<개정판 국악통론>, 서한범, 태림출판사, 1995 <국악개론>, 장사훈·한만영 공저, 사단법인 한국국악학회, 1975 <국악대사전>, 장사훈, 세광음악출판사, 1984 <전통음악개론>, 김해숙·백대웅·최태현 공저, 도서출판 어울림, 1997 <최신국악총론>, 장사훈, 세광음악출판사, 199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91 <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일조각, 1984 <한민족음악론>, 권오성, 학문사, 1999
용어해설
석북집(石北集) : 조선 영조 때의 문인 신광수의 시문집이다. 16권 8책이며 목판본이다. 1906년 5대손 관휴가 간행하였다. 이밖에 아들 우상·기상이 사후 시문을 정리, 편집하여 엮은 필사본 8책이 따로 전한다. 권1-10은 시, 권11·12는 서(書), 권13은 서·소·상량문, 권14는 제문, 권15는 서(序)·비음기(碑陰記)·전(傳)·여문, 권16은 잡저·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록에는 그의 행장과 연기(年記)를 수록하였다. 권두에 장석룡의 서문이 있다. 권2에는 서관록, 권5·6에는 여강록, 권7에는 탐라록, 권8에는 북산록, 권9에는 임장록, 권10에는 월중록 등의 제목을 붙여 장소와 시기별로 편집한 것이 특이하다. 권10에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관서악부>가 수록되어 있다. 권1-4에 실린 시들은 주로 서울과 시골에서 평소 벗들과 주고 받은 것들이고, 권2의 서관록은 관서지방을 여행하면서 읊은 시들이다. 문집에 실린 시는 모두 1,200여수에 달한다.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歎關山戎馬)>는 과체시(科體詩)로서, 특히 평양기생들에 의하여 애창되어 널리 인구에 회자되었던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데, 문집에는 실리지 않았다. <관서악부>는 모두 108수로 된 장편 악부시인데, 평양감사로 부임하는 채제공(蔡濟恭)에게 전별시로 지어준 것이다. 작품에는 서경을 중심으로 관서지방의 지리와 형승, 역사와 인물, 관변과 민간의 풍속 등의 내용을 담아 향토애와 국토에 대한 긍지, 자주정신과 우국충정 등을 유장한 악부의 가락으로 잘 형상화하였다. 가단(歌壇) : 가단이란 가객들의 사회 또는 그 모임을 말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객이라고 하는 경우는 보통 조선 후기의 중인(中人)·아전(衙前)층을 중심으로 한 가객집단을 가리킨다. 조선 후기에는 시조창(時調唱)이 크게 발달하면서 중인·서리층 출신의 가객들이 도시의 문학과 풍류를 주도했는데, 가단은 중인 신분으로 한시를 쓰는 사람들의 모임인 시사(詩社)에 대응하는 모임이었다. 이들이 일정한 모임을 갖고 함께 활동한 흔적은 기록에 남아 있지만, 가단이란 이름 아래 본격적인 활동을 했다는 뚜렷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서 그 양상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해동가요(海東歌謠)>의 장복소(張福紹) 서문에 ‘김수장(金壽長)과 김천택(金天澤)이 경정산(敬亭山)으로 상대한 사이인데, 두 사람은 당대의 노래에 통달한 사람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에 의거해 학자들은 김수장과 김천택이 중심이 되어 활동한 가단을 경정산가단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김천택과 김수장은 각각 별도의 가단 활동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김수장은 말년에 서울 화개동에 자기 호를 딴 노가재(老歌齋)란 이름의 정자를 지어놓고, 여러 동료 및 후배 가객들과 함께 활발한 시조 창작과 가창·가집 편찬 활동을 했다. 학자들은 이 모임을 노가재가단이라고 부른다. 이 외에도 가창에만 전념한 이세춘(李世春) 가단, 19세기 후반 박효관(朴孝寬)·안민영(安玟英)이 중심이 된 승평계(昇平契)·노인계(老人契)가 생겨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시조사의 종장을 장식하였다. 풍류방(風流房) : 풍류방은 세상의 속된 일을 떠나서 음악과 함께 운치있고 멋있게 인생을 즐기려는 음악 애호가들이 모여서 연주활동을 사사로이 벌이던 곳으로, 율방이라고도 한다. 조선 말기 가곡·가사·시조 등 성악곡에 능통하였던 사람들을 가객이라 불렀고, 가곡반주나 <영산회상> 등의 기악곡에 뛰어난 거문고 연주자를 금객이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가객과 금객이 함께 어울려 풍류를 즐기던 곳을 풍류방이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중인출신들이 새로운 음악수용층으로 등장하였고, 이들이 풍류방을 중심으로 음악활동을 벌였는데, 정악이라는 새 갈래의 음악문화가 바로 그러한 중인출신 음악애호가들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조선 후기의 정악은 가곡·시조·가사 같은 성악곡 및 대풍류·줄풍류 같은 영산회상과 보허자·사관풍류·자진한잎·청성자진한잎 같은 기악곡으로 구분되는데, 그러한 성악곡과 기악곡 모두가 풍류방에서 성장한 대표적인 음악문화의 실례들이다. 숙종 말 무렵 가객 김천택과 금객 김성기가 대표적인 풍류방의 풍류객이었고 이들의 작품이 <청구영언>·<해동가요> 등의 노래책에 전한다. 양반사대부 못지 않게 많은 지식을 지닌 중인 출신의 풍류객들은 그들이 연주하던 악곡들을 대개 거문고악보로 후세에 남겼는데, 이득윤의 <현금동문유기>, 김성기의 <어은보>, 작자 미상의 <한금신보>·<졸장만록>·<신작금보> 등이 대표적인 실례들이다. 이런 풍류방의 전통 일부가 일제시대 하규일 같은 뛰어난 가객에 의하여 이왕직 아악부에 전승되었고, 현재 국립국악원에서 전승되고 있다.
연계정보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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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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