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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작품소개
작자가 42세 되던 해 황해 해주 석담(石潭)에서 제자들의 교육에 힘쓰고 있을 때 그곳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그 풍광을 노래한 것이다. 서곡 1수, 본문 9수로 모두 10수의 연시조인데,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지었다 하나 시상(詩想)에 있어 독창적인 면이 엿보인다. 서곡부터 시작하여 제1곡은 관암(冠巖), 제2곡은 화암(花巖), 제3곡은 취병(翠屛), 제4곡은 송애(松崖), 제5곡은 은병(隱屛), 제6곡은 조협(釣峽), 제7곡은 풍암(楓巖), 제8곡은 금탄(琴灘), 제9곡은 문산(文山) 등으로 나누어 각각 그곳의 경치와 흥취를 읊었다. <율곡전서>를 비롯하여 <악학습령(樂學拾零)>·<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시가(詩歌)>·<악부(樂府)>(서울대학교본)·<청구영언>(洪民本·가람본·육당본)·<시조유취>·<해동가요>(一石本·周氏本)·<교주가곡집(校註歌曲集)> 등과 유중교(柳重敎)의 문집인 <성재집(省齋集)>(권49·50)·<현가궤범(絃歌軌範)> 부록에도 실려 있다.
이이(李珥, 1536~1584)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원도 강릉 출생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 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 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한 그는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었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현대어풀이
고산(高山)의 아홉 굽이 계곡의 경치를 사람이 모르더니 풀을 베고 터를 잡아 살매 벗님네 다 오는구나 아 무이(武夷)를 생각하고 주자의 학문을 배우리라 첫 계곡은 어디인가 관암(冠巖)에 해 비친다 잡초 우거진 들에 안개 걷히니 원근의 경치가 그림이로다 솔사이 술통을 놓고서 벗이 오는 듯 보노라 제이계곡은 어디인가 꽃핀 바위에 봄이 가득하다 푸른 물결에 꽃을 띄워 멀리 들판에 보내노라 사람이 경치 좋은 곳을 모르니 알게 하는 것이 어떨까 제삼계곡은 어디인가 푸른 병풍 같은 절벽에 녹음이 퍼졌다 푸른 나무에 산새는 높고 또 낮게 지저귀는데 반송(盤松)이 바람을 받으니 여름 풍경이 아니구나 제사계곡은 어디인가 소나무 절벽으로 해 넘어간다 깊은 물 속 바위 그림자에 온갖 빛이 담겼구나 임천(林泉)은 깊을수록 좋으니 흥겨워 하노라 제오계곡은 어디인가 은병(隱屛)이 보기 좋다 물가의 정사(精舍) 아주 맑고 깨끗함이 끝이 없네 여기서 강학(講學)도 하려니와 영월음풍(詠月吟風)하리로다 제육계곡은 어디인가 낚시하기 조협(釣峽)에 물이 넓구나 나와 물고기 중 누가 더 즐기는고 황혼에 낚싯대를 메고 달빛 받으며 돌아오노라 제칠계곡은 어디인가 단풍 덮인 바위에 가을빛이 좋도다 맑은 서리가 엷게 덮이니 절벽이 수놓인 비단 같구나 한암(寒巖)에 홀로 앉아 세상일을 잊고 있노라 제팔계곡은 어디인가 금탄(琴灘)에 달이 밝다 아주 좋은 거문고로 몇 곡을 연주해도 옛 곡을 알 리 없으니 혼자 즐거워 하노라 제구계곡은 어디인가 문산(文山)에 한 해 저무는구나 기이한 바위와 돌이 눈 속에 묻혔도다 유인(遊人)은 와보지 아니하고 볼 것 없다 하더라
어휘풀이
- 고산(高山) : 황해도 해주에 있는 산 이름 - 무이(武夷) : 중국 복건성에 있는 산. 주자가 여기에 정사를 짓고 학문을 닦았음 - 관암(冠巖) : 바위 봉우리의 이름. 갓바위. 갓같이 우뚝 솟은 데서 붙인 이름 - 임천(林泉) : 숲 속의 샘 - 은병(隱屛) : 으슥한 병풍처럼 되어 있는 낭떠러지 - 영월음풍(詠月吟風) : 자연을 읊은 시를 짓고 즐겁게 노는 것 - 조협(釣峽) : 낚시질하기 좋은 골짜기 - 한암(寒巖) : 차가운 바위 - 금탄(琴灘) : 물 흐르는 소리가 마치 거문고나 가야금을 타듯이 흥겹게 들리는 여울 - 유인(遊人) : 놀러다니는 사람. 세상 사람
해설
이 작품은 작자가 석담에서 고산구곡을 경영하여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은거하면서 주희(朱熹)의 <무이도가(武夷櫂歌)>를 본떠서 지었다고 한다. 내용은 서곡(序曲), 제1곡 관암(冠巖), 제2곡 화암(花巖), 제3곡 취병(翠屛), 제4곡 송애(松崖), 제5곡 은병(隱屛), 제6곡 조협(釣峽), 제7곡 풍암(楓巖), 제8곡 금탄(琴灘), 제9곡 문산(文山)의 경치를 두고 각각 그 흥취를 읊은 것이다. 이 작품이 주자의 <무이도가>를 본 떠서 지었다고는 하나 서로 내용을 검토하여 보면 단순한 모방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산구곡가> 제1곡과 <무이도가> 제1곡을 놓고 볼 때, <무이도가>가 수채화에 견줄 수 있는 반면, <고산구곡가>는 담백한 묵화를 연상하게 한다. <고산구곡가> 제1곡 고산(高山)의 아홉 굽이 계곡의 경치를 사람이 모르더니 풀을 베고 터를 잡아 살매 벗님네 다 오는구나 아 무이(武夷)를 생각하고 주자의 학문을 배우리라 (원문 감상 참조) <무이도가> 제1곡 武夷山上有仙靈 무이산 위에 선영이 있으니 山下寒流曲曲淸 산아래 한류가 굽이굽이 맑네 欲識箇中奇絶處 그 가운데 빼어난 곳을 알고자 하니 櫂歌閑聽兩三聲 돛대 노래를 한가히 두 서너 소리 들어보세 그 까닭은 작자 나름의 확고한 시론(詩論)에 바탕을 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이의 시론은 “시는 담백하고 꾸밈이 없어야 한다(主於食澹蕭散不事繪飾).”(栗谷全書 拾遺卷四 精言妙選總飾)는 것이다. 이이와 주자는 한결같이 도학적 문학론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도학의 문구는 전혀 없다. 이는 그들이 문학의 본질, 즉 문학이 지닌 미의식을 긍정하였기 때문이다. 작자는 주자의 미의식을 그대로 추종하지 않고 독창적인 시경(詩境)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조선시대의 주자학적 지식인들이 <무이도가>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 이황(李滉)의 경우처럼 거의 한시로 차운(次韻)을 한 데 반하여, 작자는 시조의 형태로 변용하였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17세기에 와서 송시열을 비롯한 주자학적 지식인들에게 계승되어 한역되기도 하고, ‘고산구곡’이라는, 자연을 소재로 한 많은 한시가 창작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 작품이 17세기 조선 문단에 중요한 작품으로 부각된 뚜렷한 예라 할 수 있다.
연계정보
-시조
-청구영언(靑丘永言)
-해동가요(海東歌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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