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호동왕자(好童王子)

작품소개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왕자 호동에 대한 설화.
원문
夏四月, 王子好童遊於沃沮, 樂浪王崔理出行, 因見之, 問曰, 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 遂同歸, 以女妻之, 後, 好童還國, 潛遣人, 告崔氏女曰, 若能入而國武庫, 割破鼓角, 則我以禮迎, 不然則否, 先是, 樂浪有鼓角, 若有敵兵則自鳴, 故令破之, 於是, 崔女將利刀, 潛入庫中, 割鼓面角口, 以報好童, 好童勸王, 襲樂浪, 崔理以鼓角不鳴不備, 我兵掩至城下, 然後知鼓角皆破, 遂殺女子, 出降(或云, 欲滅樂浪, 遂請婚, 娶其女, 爲子妻, 後, 使歸本國, 壞其兵物)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4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대무신왕(大武神王)조
국문풀이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 지금의 함흥 일대) 지방에 유람하였는데 마침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거기에 출순(出巡)하여 그를 보고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 듯하니 혹 북국신왕(北國神王)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드디어 그를 데리고 돌아와 사위를 삼았다. 그후 호동이 귀국하여 비밀히 사람을 보내어 최씨의 딸에게 말하기를, “네가 너의 나라 무고(武庫)에 들어가 고각(鼓角: 군중(軍中) 악기(樂器))을 부수면 내가 예로써 너를 맞이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맞지 않겠다.”고 하였다. 앞서 낙랑에는 이상한 고각이 있어 적병이 오면 저절로 울리기 때문에 부수게 한 것이다. 이에 최씨의 딸은 잘 드는 칼을 가지고 몰래 무고에 들어가 북의 가죽과 취각(吹角)의 주둥아리를 부순 후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은 왕을 권하여 낙랑을 엄습하였다. 최리는 고각이 울지 아니하므로 방비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우리(고구려) 군사가 성 아래에 닥친 후에야 고각이 다 부서진 것을 알았다. 그래서 드디어 그 딸을 죽이고 나와 항복하였다.(혹은 이르되 고구려왕이 낙랑을 멸하려고 혼인을 청하여 그 딸로 며느리를 삼은 후 그를 본국에 돌려보내어 병기를 파괴하게 한 것이라고 한다.) 참고: <삼국사기>, 이병도 역주, 을유문화사, 1996
해설
호동왕자의 어머니는 갈사국왕(葛思國王)의 손녀로, 대무신왕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호동왕자는 얼굴이 수려하여 부왕으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그래서 이름을 호동(好童)이라 하였다고 한다. 호동왕자에 대한 설화는 앞에서 본 내용 외에 한 가지가 더 있는데 호동왕자에 대한 전체 설화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면 그 하나는 낙랑에 들어가 낙랑공주와 결혼을 하고 신기(神器)인 고각(鼓角)을 낙랑공주로 하여금 부수게 하여 낙랑을 쳐서 이겼으나 공주는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와 다른 하나는 원비(元妃)가 호동을 시기하여 왕에게 참소하여 호동이 자살하고 마는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본 설화는 극적인 구성으로 되어 있어 그것 자체가 훌륭한 문학 작품이다. 특히 낙랑으로 대표되는 한족(漢族)과 고구려족 간의 갈등을 신화·전설에 나오는 신기 쟁탈의 화소(話素)의 원형에 넣어 형상화하였다는 것은 작품으로서도 빈틈없는 구성을 보이는 것이다. 또한 호동의 비극적인 일생과 낙랑공주의 로맨스는 후대 문학 작품의 훌륭한 소재가 되었다. 실제로 1953년에는 작곡가 현제명에 의해 <왕자호동>이라는 제목으로 전 4막 2장의 오페라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이밖에도 희곡·시나리오·소설 등에서 이 설화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이 창작되고 있음은 앞에서 말한 사실을 충분히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연계정보
-둥둥 낙랑둥
-왕자호동
-왕자호동
-자명고
-삼국사기(三國史記)
관련멀티미디어(전체0건)
이미지 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