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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사(井邑詞)

작품소개
현전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이며, 한글로 기록되어 전하는 가요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내용은 정읍현(井邑縣)에 사는 행상의 아내가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므로, 높은 산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 남편이 혹시 밤길에 위해(危害)를 입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나타낸 노래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악학궤범> 권5 시용향악정재조(時用鄕樂呈才條)에 <동동>·<처용가>·<정과정> 등 고려가요와 함께 실려 전하고, <고려사> 악지 2 삼국속악조에도 <정읍사>에 관한 기록이 있다.
현대어풀이
달님이시여, 좀더 높이 돋으시어 멀리 비추어 주십시오 시장에 가 계십니까? 어두운 밤길을 가시다가 진 데를 디딜까 두렵습니다 어느 것이나 다 부려놓고 오십시오 나의 가는 데가 저물까 두렵습니다.
어휘풀이
- 진 데 : 진 곳, 즉 ‘수렁물(진탕물)이 고인 곳’으로 해석되나, 이 말의 상징적인 뜻은 주색(酒色) 또는 화류항(花柳巷)을 비유한 것으로 풀이한다. - 나의 가는 데 : ‘내가 가는 곳(가는 길)’, ‘나의 가는 길’ 등으로 해석한다. <정읍사> 전편의 문맥으로 보아 ‘남편의 오는 길’이어야 할 것이 ‘내가 가는 길’로 된 점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부부 일심동체설까지 나오게 되었으나, 이 점을 해결하고자 한 풀이가 ‘내이 곧, 내사람 가는 길’로 보는 견해이며, ‘내가 놀던 곳’이라는 아주 색다른 해석도 있다. 원문상의 풀이로는 ‘내가 가는 곳(또는, 나의 가는 곳)’이어야 하나, 그것이 오가는 길이 아닌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본다면 ‘내 사랑 가는 곳’, 즉 ‘사랑하는 님, 남편의 마음’으로 풀이된다. - 참고: <고려시대의 가요문학>, 정병욱 해설;김열규·신동욱 공편, 새문사, 1982 <고전시가강독>, 최철·박상태 공저, 한국방송통신대학출판부, 1986
<정읍사>의 유래와 전승
<고려사> 악지의 ‘삼국속악조’에 백제 노래로 소개돼 있는 것은 <禪雲山(선운산)>, <無等山(무등산)>, <方等山(방등산)>, <井邑(정읍)>, <智異山(지리산)>이다. 이렇게 5편이 <고려사>를 통해 전해지게 된 것인데, 그렇게 된 이유를 <고려사>의 다음 설명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신라·백제·고구려의 음악을 고려가 아울러 써서 악보로 편성하였다. 그래서 여기에 붙여 저록(著錄)한다. 가사는 이어(俚語)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삼국의 노래들 중 고려가 공식적 악장으로 채택하여 쓴 노래들이 <고려사>에 소개돼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정읍사>만 유일하게 <악학궤범>에 고려가요들과 함께 그 노랫말이 실려서 전해지고 있으니, <정읍사>는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승되고 있는 유일무이한 백제시대의 시가문학 유산인 셈이다. “정읍(井邑)은 전주(全州)의 속현(屬縣)이다. 그 고을 사람이 행상을 하였는데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처가 산의 바위에 올라서서 바라보다가 남편이 밤길에 해를 입지나 않을까 걱정한 나머지 진흙탕의 수렁을 비유하여 노래를 불렀다. 세상에 전하기를 재(岾)에 올라가 남편을 바라보았던 돌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상은 <고려사 악지>의 <정읍사>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에서 “정읍은 전주의 속현이다.”라는 진술은 <정읍사>가 백제 노래인지의 여부에 관한 논란을 일으킨 내용이다. 즉, <정읍사>는 구전해온 민간전승의 가요로서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백제의 가요 작품으로 통하지만, 가사 본문(원문 참조) 중 ‘全져재’의 ‘全(전)’자를 전주(全州)의 지명으로 보고, 백제시대의 완산주(完山州)를 신라 경덕왕 15년에 전주로 개명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동국여지승람 권32 전주부), 경덕왕 때 이후 내지는 고려시대 옛 백제 지방의 민요로 보기도 한 것이었다. 또 한편에서는 <고려사> 권71 악지(樂志) 삼국속악조(三國俗樂條)의 <정읍사>를 <고려사> 편찬자들의 잘못으로 돌리고, 같은 책의 고려속악조에 무고정재(舞鼓呈才) 때 <정읍사>를 가창하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무고>와 동일시하고, <무고>를 만든 사람인 이곤(李混)의 생존 연대와 관련하여 <정읍사>를 고려 충렬왕 때 전후에 개성 주변에서 작사, 작곡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악지와 <고려사>의 악지가 다 같이 재래속악에 대한 편차 방식이 같은 점으로 보더라도, 삼국속악조에 백제속악으로 기록된 <정읍사>는 고려속악과 구별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고, 편찬자의 잘못이 아니라 백제속악으로 인정함이 옳을 것이다. 또 고려속악조에 들어 있다 하여 모두가 고려시대의 가요로 볼 수는 없듯이, 무고정재 때 <정읍사>를 불렀다 하여 <정읍사>의 제작연대가 무고를 지은 이곤의 생존 연대와 같을 수는 없고, 이는 재래속악, 곧 유전악(遺傳樂)인 <정읍사>를 고려속악정재 때 이곤이 지은 무고라는 악곡에 얹어 불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읍사>는 삼국속악의 하나로 전승되어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무고의 무의(舞儀) 때 가창되었고, 특히 조선시대에 와서는 섣달 그믐날 밤에 궁중에서 악귀를 쫓기 위하여 베풀던 의식인 나례(儺禮) 후에 거행된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에서 <처용가> 등과 함께 연주되었다(악학궤범 권5). 이와 같이, <악학궤범>에 채록되어 악장(樂章)의 하나로 정착하게 되었으나, 중종 때에 이르러 음란한 노래라 하여 궁중에서는 폐지되고 새로 만든 악장인 <오관산(五冠山)>으로 대용하였다(중종실록 13년 4월조).
<정읍사>의 형식(원문 참조)
음악 형식은 전강(前腔)·후강(後腔)·과편(過篇)·금선조(金善調)·소엽(小葉)으로 되어 있으며, 시의 형식은 11행이고, 후렴을 뺀 기본 시행(詩行)만으로 본다면 3연 6구의 형식이 되고, 또 각 연의 음절 수가 3음 또는 4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여 시조의 3장 6구 형식의 근원을 <정읍사>에서 찾고자 하는 경향이 많다. 각 연의 후렴을 보면, 제1·3연에 해당하는 전강과 과편에는 각각 2구로 돼있으나, 제2연에 해당하는 후강은 ‘어긔야 어강됴리’ 1구뿐이고, ‘아으 다롱디리’가 없다. 그리하여 후강이라는 악조명 다음에 ‘전(全)’자를 붙여 후강에는 소엽 ‘아으 다롱디리’가 없는 것이 온전하다는 뜻으로 ‘후강전(後腔全)’이라 표시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아직은 어느 문헌에도 ‘후강전’이라는 악조명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후강에 소엽 ‘아으 다롱디리’가 있어야만 완전한 것이 된다. 특히, 시가 형태 면에서 보더라도 <정읍사>가 백제가요로 인정되기는 하나, 오랜 세월 고려속요와 함께 불려오는 동안 다분히 고려적인 특성을 갖게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바, 후렴을 지니는 모든 고려속요가 예외 없이 각 연마다 똑같은 후렴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후렴이란 언제나 똑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므로 고려속악과 함께 가창된 <정읍사>도 각 연마다 동일한 후렴을 지녀야만 형태상으로도 온전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계정보
-수제천(壽齊天)
-무고(舞鼓)
-고려사악지(高麗史樂志)
-악학궤범(樂學軌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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