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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백남(尹白南)

  • 개요

    윤백남의 초기 작품은 계몽주의적, 인도주의적 경향을 띠었다. 그러나 점차 현실패배적인 역사소설이나 야담류로 흘렀고, 1933년 무렵에는 본격적인 야담가로 나서기도 했다. 그의 희곡은 신여성에 대한 매도와 구식 결혼제도 비판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보수와 진보사상을 동시에 드러내는데, 이는 개화시대 지식인들의 과도기적 복합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논문 <연극과 사회>는 크레이그의 <극예술론>에 바탕을 두고 우리나라의 관점에서 서술한 것으로, 소박한 논조이기는 하나 당시 연극계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는 개화기의 선구적인 인물로서 언론인, 연극인, 교육자, 문인, 영화인, 만담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특히, 그는 영화계에 선구적인 공적을 남겼고 연극인으로서도 초창기에 극단을 주재하고 희곡을 쓰는 등 신파극을 정화하려고 노력했다. <p align='right'>- 참고 :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국어국문학자료사전>, 국어국문학편찬위원회 편, 한국사전연구사, 1995</p>

  • 생애

    충남 공주에서 출생한 윤백남은 서울 명동의 경성학당 중학부을 졸업, 1904년 도일하여 후쿠시마현 반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고, 이듬해에는 일본 와세다대 예과를 거쳐 도쿄고등상업학교를 졸업했다. 귀국 후 경술국치 이후에는 매일신보 기자로 문필생활을 시작했고, 1912년에는 작가 조일재와 함께 신파극단 ‘문수성’을 창단해 배우로도 활약하는 등 연극활동을 겸했다. 1913년 매일신보 편집국장을 거쳐 잡지사 반도문예사를 세우고 월간잡지 <예원>을 발간했다. 1916년 이기세와 함께 신파극단 ‘예성좌’를 조직했고, 1917년 백남프로덕션을 창립해 몇 편의 영화를 제작, 감독하기도 했다. 1918년 김해 합성학교 교장을 거쳐, 1919년 창간된 동아일보에 입사했고, 같은 해 매일신보에 단편소설 <몽금>을 발표하였다. 이어 1920년 동아일보에 신극사 최초의 연극론인 논문 <연극과 사회>를 발표했다. 그는 또한 소설창작에 이어 희곡 <국경>과 <운명>을 발표했다. 1922년 민중극단을 조직해서 자신의 희곡 <등대지기>, <기연>, <제야의 종소리> 등과 번안·번역극 등을 상연했다. 1923년 우리나라 최초의 극영화인 <월하의 맹서>의 각본과 감독을 맡았다. 1930년 다시 연극으로 눈을 돌려서 경성소극장의 창립동인이 되었으나 곧 유산되었고, 1931년 창립된 신극단체인 극예술연구회의 창립동인이었으나 1920년대 중엽 이후로는 실제로 연극일선에 나서지 않았다. 1934년 만주로 건너가 역사소설 <낙조의 노래>와 <미수> 등을 집필했으며, 광복 후에 귀국해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장을 역임했다.

  • 약력

    1888년 충남 공주 출생 1906년 일본 와세다대학 고등예과 졸업 1910년 동경고등상업학교 졸업 후 귀국 / 한성수형조합 이사대리 / 보성전문학교 강사 / 서울 횡성기독교청년회관 교사 역임 1913년 매일신보사 편집국장 1915년 예술협회 창립 1916년 반도문예사를 창립하여 <예원> 창간 / 극단 예성좌 · 민중극단 지도 1917년 백남 프로덕션 창립 · 대표로 취임 1918년 김해합성학교 교장 취임 1919년 동아일보사 입사 1921년 영화 <월하의 맹서> 감독 1922년 예술협회 소속 극단 예술좌에 참여 1932년 신극운동 참여 1937년 만주 화북으로 이주 1945년 귀국 1950년 출판사 백수사 창립 · 경영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 학장 취임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피선

  • 소설집 <대도전>(1931) <봉화>(1936) <흑두건>(1948) <해조곡>(1949) <후백제 비화>(1949) <낙조의 노래>(1953) <야화>(1954) <홍도>(1955)

  • 평론

    소설의 재미는 허구성에 있다. 허구성은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출해낼 때 소설적 재미가 배가되는 것이다. 역사소설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역사소설은 사실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에 한계를 지운다. 그러므로 역사소설 작가들은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사실의 뒤안에 있었음직한 이야기를 끄집어올려 소설 구성의 표면에 올려놓는 것이다. (……) 그의 경력이 말해주듯 그의 성격 또한 활달했다. 작가의 기질은 곧 그의 문학세계에 투사된다. 윤백남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동아일보사에 입사한 뒤였다. 당시는 일제하의 식민통치 지배를 10여 년 겪은 후였으니만큼 이 시기의 지식인들은 민족정기의 고양을 의식했고, 문필가들은 이것의 한 수단으로서 역사소설을 써서 민족적 울분을 토로할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도전>도 이 시기의 작품임을 고려해볼 때, 한갓 재미만을 추구하는 역사소설의 영역을 넘어서서 작가가 체험하고 있는 시대상황의 묘사와 연결되는 것이라 하겠다. 고려말엽 조정과 탐관오리 등의 학정을 일제의 탄압정치에 빗대어 놓고, 고려시대 민중의 고통과 신음을 당대의 아픔으로 두고 본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현실을 풍자한다. 따라서 일제하의 암담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사태를 일거에 반전시켜줄 영웅을 간절히 소망했던 우리 민중들의 아이덴티티이다. (……) 가뜩이나 협소한 우리 문학사의 공간을 생각해볼 때 윤백남의 문학 업적은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계몽주의 문학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역사소설의 한계도 벗어나보려는 그의 실험정신을 높이 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급문화 지상주의자들에 의해 매도되고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어왔던 점은 반성해야 할 시기가 되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윤백남 문학의 재조명은 필요하다. 윤백남은 우리나라 대중소설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대중소설이 이후의 우리 대중소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논구된 바 없으나 대중소설의 원형인 것만은 분명하며, 이에 대한 문학사적 위상 정립이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div align='right'>- ‘윤백남의 작품 세계’, 범우사편집부, <대도전>, 범우사, 1989

  • (……) 우리 신파극은 임성구가 출발시킨 것이었지만, 그것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키고 거기에 세련미를 더한 사람은 윤백남이었다. 그의 희곡 <운명>은 조일재의 <병자삼인>과는 달리 희곡으로 창작된 후 본격적으로 무대화된 작품이었으며, 작품에 대한 반응이 좋아 당대 지식인 청년들이 앞다투어 반복 공연한 바 있다. 윤백남 역시 이 작품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여, 희곡집 <운명>의 머리말에서 “이 <운명>은 나의 처녀작이었고 동시에 조선인의 적으로 조선무대에 상연된 최초의 희곡이다”라고 자랑스럽게 밝힌 바 있다. 희곡 <운명>은 20세기 초반에 있었던 하와이 이민 교포와의 사진 결혼의 폐단을 소재로 한 사회문제극이다. 여주인공 박메리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하와이 교포와 사진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화학당 출신의 인테리와 무식한 양화수선업자 사이의 학력 및 교양의 큰 격차가 드러나면서 갈등하게 된다. 이 작품의 주된 갈등은 관념적으로는 이수옥을 따르고 현실적으로는 양길삼과 결혼하게 된 박메리의 이율배반성에서 비롯된 삼각관계에 기인한다. 이 작품에서 작가 윤백남의 관심사는 신문물의 무비판적 수용-작품에서는 사진 결혼의 폐해로 드러남-에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잘못된 현실 논리, 즉 신문물에 대한 맹종에서 비롯된 두 연인 사이의 갈등과 고난을 다룬 신파극으로 볼 수 있다. (……) 악당의 죽음이라는 결말이 극의 인과 관계에 의해 진행된 것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촉발된 것이라는 점과 이러한 결과를 역시 운명의 논리로 설명하고 갑작스럽게 박메리를 받아들이는 이수옥의 태도 역시 두 연인의 행복한 결합과 방해자의 참회라는 전형적인 신파극의 구조와 어긋나지 않는다. 또한 마지막 장면 교당의 “찬미 소리와 종소리”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려는 운명론적인 극의 논리를 상징화한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무대 장치와 시·청각적 효과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고 있어, 극작술의 큰 진전을 보여준다. 음향 효과를 통해 작품의 주제를 강화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대 장치 중의 하나인 “정면의 큰 유리창”을 통해 주요 인물들 간의 삼각 관계가 형성되는 주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처럼 안과 밖을 가르면서 동시에 내재성과 외재성을 공유하고 있는 유리창의 속성을 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작가 윤백남이 운영한 극단 ‘예성좌’가 일본 극단 ‘예성좌’의 영향으로 서양식 무대 장치나 의상, 분장을 성취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사실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2장의 지문에서는 전반적인 극 분위기를 ‘공동묘지’, ‘월광’, ‘검은 구름’, ‘음습한 바람결’, ‘빗방울’ 등을 통해 암시하고 있는데, 이는 앞으로 벌어질 사건을 위한 분위기를 암시하는 한편 주인공들의 고난을 보다 강화시켜주는 효과도 지니고 있다. 특히 ‘공동묘지’와 ‘십자가’는 곧 있을 작품의 결말을 암시하는데, 이렇듯 시각적 지문으로 제시된 고난은 결말의 해피엔딩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준다. 이처럼 초기 일본 신파극의 이식을 넘어선 이 작품은 <병자삼인>보다는 극작술상의 진보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당대 지식인들의 현실 인식 문제와 더 나아가 모든 것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는 세계관상의 문제는 아직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던 신파극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 <div align='right'>- ‘작가와 작품’, 이재명, <우리 극문학의 흐름 1>, 평민사, 2000

  • 관련도서

    <한국영화감독론 1>, 김수남, 지식산업사, 2002 <우리 극문학의 흐름 1>, 이재명 편, 평민사, 2000 <윤백남 작품세계>, 문화체육부 편, 문화체육부, 1993 <대도전>, 윤백남, 범우사, 1989

  • 연계정보

    -월하의 맹서
    -야화
    -극예술연구회
    -민중극단
    -문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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