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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성

개요
윤백남과 조일재가 조직한 신파극단. 문수성을 이끈 윤백남과 조일재는 동경 유학생 출신으로, 당대 최고의 인텔리였다. 이들은 임성구의 연극을 ‘대중을 그르치는 사극’이라 비판하고, 가와카미가 하는 신파 정극을 극단 목표로 내세웠다. 문수성은 혁신단, 유일단과 함께 1910년대의 대표 신파극단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해설
문수성은 스스로를 기존 신파극단들과 차별화하며 등장했다. 창단목표를 ‘기존 연극에 대해 부패함을 개탄하고 문수성이라는 신연극을 연구하야 풍속의 모범을 지을 목적’이라 밝혔다. 윤백남과 조일재는 3월 29일 원각사에서 덕부로화 작 <불여귀>(전9막)를 창립공연으로 올렸는데, 당시의 공연평을 보면 이들의 공연이 실제로 기존의 신파극과는 크게 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 문슈성 일행의 불여귀 연극은 시작일부터 서부 원각사에서 재연하였는데, 불여귀는 본래 일본 덕부로화 선생의 걸작으로 오늘날 연극 중에 꽃이라 할 만한 것이다. 그런고로 불여귀는 다년 연습한 배우가 안이면 가히 관람쟈로 하야곰 희로애락의 경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지 못하는 바이어늘 이번에 문수성이 이것을 연극하니 그 어려운 것은 다시 말할 것 업거니와 문슈성 이름으로 말하면 다년 동경에 유학하야 일본연극을 만히 본 사람이라 처음 연응으로는 매우 잘한다 할만 하도다. (……) 그 체격이며 태고가 가히 육국중장군이라 할 만하야 매우 잘되얏스나 그 소리가 좀 나져서 관람쟈에게 잘 들리니 안이한 것이 결뎜이라 하겟도다. 그날은 쳐음이라도 관람자가 만히 드러와서 연극쟝에 가득찻스되 설명이 변변치 못한 까닭으로 관람쟈가 불여귀 연극의 뜻을 해석치 못하야 배우제군의 고심한바를 빠트리는 념려가 업지 안이하니 애석하다. 그 연극 즁에도 비참한 구졀이며 인졍 의리에 대하야 가히 동졍의 눈물을 흘릴만한 것이 잇스되 관람자즁에 다수는 비참한 눈물을 흘닐터인대 도리혀 웃고 드리여 장내가 소요하게 되는데 이것은 배우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관람쟈가 볼줄을 모르는 까닭이로다 - <매일신보>, 1912년 3월 31일 문수성의 연극방식은 공연 중간의 막 설명이 없었다. 임성구 일행이 했던 연극 내용과 진행설명을 배제했던 것. 신문기사를 보면 상연 때 오히려 역작용이 일어나 평자가 오히려 막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관객이 연극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작품 외적인 군더더기를 과감히 배제했다는 것에서 문수성 연극의 근대성을 엿볼 수 있다. 문수성의 레퍼토리로 일본 신파의 번안극으로는 <덕국토산>이 있다. 그리고 일본 신소설을 한국의 신소설로 번안한 것을 다시 극으로 각색한 레퍼토리에는 <불여귀>(1912년 3월), 우리의 신소설의 각색공연으로는 <청춘>(1914년 3월) 등이 있다. 1914년까지 전성기를 맞이하다 신파극의 인기가 하락하자 서울과 지방을 활발히 순회하다 1916년 해단에 이른다.
송죽절
<송죽절>은 신파극 내용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신파극의 주제는 탐정, 군사극에서 점차 가정비극류로 바뀐다. 일본 신파극의 변화 순서를 따라간 것이다. <송죽절>은 과도기의 작품으로, 군사극적 요소와 가정비극의 특징이 함께 한다. 가정극의 주인공으로 군장교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군사극에서 가정극으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 임교상이라 하는 사람이 이왕에 국쟝으로 잇다가 벼슬을 하직하고 집에서 한양할 때 일찍이 상쳐를 하고 싶할세된 딸이 있는대 화용월태와 온휴슉덕이 특이함으로 림국장은 쟝즁보옥 가치 사랑하며 아름다운 자를 구하더니 육군대위 김수좌라 하는 청년에게 그 딸 화자를 허혼하얏더라. 그러나 김수좌는 상부의 명령으로 덕국에 유학하야 화약을 연구하는바 그 귀국함을 기다려서 성혼코 하더니 김대위는 불행히 화약이 폭팔하야 두 눈이 폐망되고 아니 귀국하얏더라. 림국장은 기간에 가산을 탕진하고 겸하야 로국사람에게 빗을 지고 곤박을 무수히 당하더니 하로는 그 고국사람의 인력거가 엇던 공원에서 김영규와 충돌이 되어 압 못보는 김대위가 걱구러 젓스므로 분연히 일어나서 무례함을 책망한 즉 로국사람이 도로혀 단쟝으로 무수히 구타함에 김대위난 양미간에 중샹을 당하고 집으로 도라간즉 그 모친과 서생이 김대위가 상한 것을 보고 분하야 하순청이가 그 로국사람을 징치할차로 뒤로 쫒아가는 것을 김영규와 그 모친이 만류하얏는대 그 사실을 임국장의 딸 임방자가 듣고 원슈를 갑고저하야 혼져 그 로국사람을 차져갓더니 로국사람은 림방자의 아름다움을 보고 흠모하다가 차져온 것을 보고 비루한 행동을 하고자 하거늘 림방자가 칼로써 로국사람의 배를 질너 죽인지라 그 집에서 뽀이노릇하는 지나인이 그 광경을 보고 경찰셔에 고발하야 림방자를 잡아다가 예심하난 마당에셔 지나사람의 증서로써 림방자가 무죄방면 하얏더라. (……) - <매일신보>, 1912년 5월 22일
윤백남 (1888~1954)
소설가이자 영화감독. 개척기 한국영화계의 선구자적 인물로 꼽힌다. 1902년 일본에 유학, 와세다 실업학교를 거쳐 관비유학생으로 와세다대학 정경과에 진학했다. 귀국 후 <매일신보> 기자가 된 후, 극단 문수성에 참여해 연극활동을 했다. 1919년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긴 후 본격적인 문필활동과 함께 1922년 민중극단을 창단했다. 1923년 한국 최초의 극영화로 기록되고 있는 <월하의 맹세>를 감독하며 영화활동을 시작했다. 1925년에는 영화사 ‘윤백남 프로덕션’을 설립했으며 1928년에는 이기세, 김을한, 안종화 등과 함께 문예영화협회를 만들어 영화연구와 신인교육에 힘썼다. 말년에는 서라벌예술대학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한국영화의 재건과 발전에 관심을 기울였다. · 대표작품 <월하의 맹세> <심청전> <개척자> <정의는 이긴다> <낙조의 노래> <야화>
리뷰
(……) 일뎐부터 연흥사에셔 문슈성이 흥행하는 <눈물>연극은 초일에 관람쟈의 드러오난 것이 구름갓치 모혀드러 만원의 셩화을 이우엇스며 작일밤에도 계속하야 흥행하난대 석양때부터 사람이 문압헤 만히 모히어드러 쟝고 호적 소리에 눈물이 스스로 흐르는 듯 눈물극이 과연 사람의 눈물을 자아내여 권션징악에 확실한 효과가 잇겟다더라 (……) - <매일신보>, 1914년 6월 26일
관련도서
<한국연극운동사>, 유민영, 태학사, 2001 <우리연극 100년>, 서연호·이상우, 현암사, 2000 <한국근대연극사>, 유민영,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6
연계정보
-민중극단
-윤백남(尹白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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