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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방 (1927.5.5~)

문화재관련정보
1987.7.1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보유자 인정 1990.10.10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 춤 보유자 인정
학력(계보)
1935.4.1 이대조에게 승무 사사 1939.9.1 박영구에게 승무고법 사사
생애(약력)
1948. 임방울 명인명창대회 승무 출연 1955.11. 이매방 무용발표회(광주극장) 1970.10. 일본 하관시부산시 자매결연 기념공연 1977.6. 제19회 눌원문화상 수상 1978. 세계민속예술제 한국대표 참가 1981.8. 전통무용공연(미국 워싱턴 캐네디센터) 1982.6. 서울시립무용단 주최 한국명무전 출연 1984.10. 대한민국정부 옥관문화훈장 서훈 1984.10. 옥관문화훈장 서훈기념 공연 1986.9. '86서울아시안게임 문화예술축전 공연 참가 1988.9. '88서울올림픽게임 문화예술축전 공연 참가 1992.10. 제23회 중요무형문화재 발표공연 1993.12. 제24회 중요무형문화재 발표공연 1998.7. 아비뇽페스티벌 참가 1988. 프랑스예술문화훈장 수훈 1999.11.28~29 춤인생 65주년기념 대공연(국립극장 대극장) 2000.2.9 춤인생 65년기념 부산 대공연(부산문화회관 대강당) 2000.10.11~12 Mae-Bang Lee Master of Korean Tradition Dance (Pertorming Arts Center) 2001.9.26 중요무형문화재 우봉 이매방 전통무용대공연(목포 문화예술회관) 2001.12.17~18 공개행사 발표공연(국립극장 해오름극장) 2002.8.31~9.1 일본 교토 <한국전통음악과 춤의 향연> 출연(일본 교토조형예술대학 춘추좌) 2002.10.23~11.3 일본 시코쿠 공연 <한국 천년의 소리> 출연
리뷰
인간문화재시대를 연다 56 “두 종목 예능(藝能) 보유자인 타고난 춤꾼 쟁쟁한 제자(弟子)들, 후계자는 아직 미정(未定)”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버선이여…… 조지훈(趙芝薰)의 시(詩) <승무(僧舞)>를 읽은 사람이라면 승무(僧舞)를 보지 않고도 승무(僧舞)의 춤사위가 어떠한지를 대충 짐작할 것이다. 지난 5월 7일 서울 연지동에 있는 연강홀에서는 <승무(僧舞)>의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 이매방(李梅芳)씨 초청무용의 밤 행사가 펼쳐졌다. 솟구치는 장삼자락의 움직임과 고깔 속에 감추어진 표정의 고요함이 어우러져 정중동(靜中動)의 극치를 빚어낼 때 객석은 고요와 정적 뿐이었다. 그의 장삼자락이 펼치는 아름다움과 현란하게 두들겨대는 북춤은 가히 일품이었다. <살풀이춤>의 인간문화재이기도 한 이(李)씨는 이날 그 동안 일부만 보여오던 <승무(僧舞)>와 <살풀이 춤>의 온전한 형태를 모두 보여주어 만장한 관객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승무(僧舞)>는 경향류(京鄕流)인 한성준(韓成俊)계보의 춤이 한영숙(韓英淑)씨(작고)에 의하여 전승되어 왔으며 호남류(湖南流)인 이대조(李大祚)계보의 춤이 이매방(李梅芳)씨에 의하여 전해지고 있다. 한성준(韓成俊)계보의 승무가 우아하고 섬세한데 반하여 이대조(李大祚)계보의 승무는 그 움직임에 힘이 있고 선이 굵직하여 시원스럽고 또한 북놀이가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살풀이 춤>은 오늘날 각 대학의 무용과에서 한국무용의 기본으로 채택하고 있으리만큼 우리나라 춤 중에서 가장 예술성이 뛰어난 춤이다. 따라서 <승무(僧舞)>와 <살풀이 춤>은 오늘날 한국무용 독무(獨舞)의 정수로 인정받고 있으며 예술성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품위와 격조가 높은 춤이다. 우리 춤의 모든 감정과 기교가 집약된 가장 완벽한 예술작품으로 꼽히는 이 <승무>와 <살풀이 춤>의 두 예능을 보유하고 있는 이매방(李梅芳)씨는 한국 전통무용의 정상(頂上)인 셈이다. 장삼자락에 숨어든 춤사위 하나로 60평생을 살아온 춤꾼 이매방(李梅芳)씨를 서울 마포구 아현동 혜성아파트로 찾아가 그의 춤 인생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매방(李梅芳)씨(본명 이규태, 李圭泰)는 1926년 3월 7일(음) 목포시 대성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싸전을 하던 이경식(李京植)씨의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여성취향이 짙어 경대 앞에서 춤을 추거나 화장하는 흉내를 즐겼다. “걸음마를 하던 세 살 때부터 누나의 치마를 걸치고 춤을 추었다고 하더군요. 7세 때부터는 이대조(李大祚)선생으로부터 <승무>와 <살풀이춤>을 배웠으며 다시 이창조(李昌助)선생에게 <검무(劍舞)>를, 박영구(朴永九)선생에게 <법고>를 익혔습니다.” 이씨는 어려서부터 가무(歌舞)와 가까운 환경에서 자랐다. 그의 집에는 목포 권번(券番)의 반장격인 함국향이라는 기생이 세 들어 살았다.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권번의 기생들 틈에 끼어 살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의 춤 재롱은 7세 때부터 본격적인 수업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하루는 함국향의 꼬드김에 따라나서 목포권번에서 춤을 추었다. 그의 춤을 본, 목포권번에서 승무와 고법을 가르치던 이대조(李大祚)선생은 ‘너는 태가 고와 춤을 배우면 크게 성공할 것’ 이라고 칭찬하였다. 이대조(李大祚)씨는 명무ㆍ명고수로 호남일대에서 날리던 명인이었다. 무안(務安)출신인 이대조(李大祚)씨는 이매방(李梅芳)씨의 할아버지뻘이기도 하였다. 이(李)씨는 이때부터 할아버지한테 승부와 살풀이 춤 등을 착실하게 학습하였다. 목포 북교(北橋)국민학교를 다니면서도 그의 춤 공부는 계속되었다. 방학 때면 광주(光州)권번의 이창조(李昌助)선생과 박영구(朴永九)선생을 찾아가 사사하였다. 국민학교 2학년 때부터 5학년 때까지는 사업을 하던 형을 따라 중국의 대련(大連)과 북경(北京)에서 일본인 학교를 다녔다. 이 때 그는 중국 경극(京劇)의 대가(大家) 매란방(梅蘭芳)을 만났다. 뒤에 그가 매방(梅芳)을 예명으로 삼고 다시 본명 규태(圭泰)를 버리고 매방(梅芳)으로 이름을 바꾼 것만 보아도 매란방을 얼마나 흠모하였는지 알 만하다. 춤에 대하여 큰 눈을 뜬 것도 이 때였다. 국민학교 6학년 때 귀국한 그는 다시 옛 스승들을 찾아 목포와 광주에서 춤 공부를 계속하였으며 목포공업학교로 진학한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가 16세 때 <임방울명인명창대회>가 목포역전 가설무대에서 펼쳐졌다. “이 때 승무 춤꾼 박봉선씨가 회갑잔치에 가느라 오지 못했어요. 그래 내가 대타로 나갔지요. 인기 만점이었습니다. 임방울씨가 내 볼을 꼬집으며 ‘요게 사람이여, 요물이여’하더군요.” 목포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의 강제징집으로 해군에 입대한 그는 훈련이 고되고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친구 셋이서 줄행랑을 쳤다. 요즘 말로 탈영을 한 그는 목포 앞 비금도에 숨어 살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을 맞은 뒤 목포의 권번에서 춤을 가르치기도 하고 임방울이 이끌던 <명인명창대회> 순회공연 때마다 <승무>를 도맡아 추었다. 6·25 때는 대구 육군본부 군예대에 들어가 위문공연을 다녔으며 그 후 다시 전남경찰국 선무공작대에 들어가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 후 군산, 광주, 부산 등지로 춤을 추며 떠돌이생활을 하다 1954년에 서울에 정착하게 되었다. 신익희(申翼熙)선생의 딸 성균씨가 그의 춤에 반해 서울 동대문 밖 창신동에 무용연구소를 차려준 적이 있었고, 삼성(三星)의 이병철(李秉喆)회장은 특히 그의 <살풀이춤>을 사랑하여 자주 별장에 불러 춤을 추게 하기도 하였다. 1957년 처음으로 부산에서 개인발표회를 가진 것을 비롯하여 1959년 서울에서의 개인발표회 이래 무수한 국내공연은 물론 일본과 중국, 소련, 유럽, 미국 등지의 해외공연을 통하여 그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승무>와 <살풀이춤>의 명무자(名舞者)로 자리를 굳혔다. 이(李)씨는 평생을 춤추고 춤을 가르치며 살아왔다. 지난 84년에는 무용인생 50년 특별기념공연을 가졌으며, 같은 해 가을에는 전통무용의 선양에 기여한 공로로 ‘옥관문화훈장’을 받았고 1987년에는 <승무>의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인정되었으며 이어 1990년에는 <살풀이 춤>의 인간문화재 반열에 올랐다. 인간문화재가 되고 난 후의 그의 일과는 더욱 분주하였다. 지금은 다 그만두었지만 중앙대, 서울예전, 숙명여대, 추계예전, 광주조대 등의 강사로 영 일이 없었다. 몸을 두 쪽으로 낼 수도 없고 해서 지금은 그의 말마따나 춤 도매상만 하고 있다. 자신에게 춤을 배워 다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무용교사와 교수를 일컬어 춤 소매상이라며 씩 웃는다. 그를 스쳐간 제자는 각 대학의 무용과 학생들까지 합치면 수백명… 우선 이수자만도 송수남, 임이조, 김진홍, 채향순, 김진신, 진유림, 정명숙, 유숙희, 국수호, 채상무, 이길주, 김정녀 등 기라성 같은 무용계의 거물들이 포진하고 있으며 전수자로도 최은희, 오율자, 양학년, 김은경, 강혜숙, 김숙자, 조승미 등 각 대학의 교수급들이 있다. 대학이나 중ㆍ고교 그리고 무용학원 등에는 한영숙(韓英淑)씨의 이수자 말고는 거의가 그의 제자들이 진을 치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이매방(李梅芳)씨는 지금도 그가 거처하고 있는 아파트의 바로 맞은편에 있는 혜성빌딩 4층에 30평 남짓한 우봉전통무용보존회(宇峰傳統舞鏞保存會) 겸 이매방전수소(李梅芳傳授所)를 차려놓고 대학교수를 비롯하여 중ㆍ고교의 무용교사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장구를 치면서 그의 춤사위를 가르치고 있다. 우봉(宇峰)은 그의 호(號)이다. 춤에 관한 한 이세상[宇宙]에서 최고(봉우리)라는 뜻이다. 한국무용의 정수라 할 <승무>와 <살풀이춤>의 두 종목 인간문화재에 대한 대접이 스포츠계의 두 종목 메달리스트에 비해 너무 소홀하다며 섭섭해 한다. “이제 여생을 무보(舞譜)의 발간과 후진양성에 바칠랍니다. 전주(全州) 이동호(李東浩) 병원장께서 책도 발간해주시고 전수회관도 건립해 주시기로 하였습니다.” <월간 문화재>, 1993년 6월, 제1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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