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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출연/스태프
*출연 김승호, 전창근, 최남현 *스태프 제작/박정수, 기획/이정선, 감독/전창근, 각본/이정선,전창근, 촬영/이용민, 조명/윤영운, 음악/김희조, 미술/박석인, 의상/석철, 편집/이종기, 녹음/이경순
내용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본격적으로 대한 제국을 위협한다. 그리고 1905년 강압적인 수단으로 을사 5조약을 맺어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간섭을 하기 시작한다. 이에 고종황제는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담에 밀사를 파견. 일본의 행위를 폭로하려 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한다. 초대 조선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이를 핑계로 고종황제를 퇴위 시키고 조선을 일본에 합병하려 한다. 항일운동을 위해 가족을 떠나 망명해 있던 안중근 의사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토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쏘아 죽인 안중근 의사는 그 자리에서 체포된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당당한 자세로 재판과정에서 저격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교전국의 포로로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 기개에 일본인들도 감복한다. 꿋꿋하게 감옥 생활을 하던 안중근 의사는 끝내 여순 형무소에서 사형 당한다.
예술가(감독)
*전창근(1908~1975) 1908년 함북 회령 출생. 1925년 ‘윤백남 프로덕션’에 입사한 후 상해로 건너가서 상해중화학원과 무창대학에서 수학한다. 자신이 주연을 맡고 이경손이 감독을, 한창섭이 촬영을 담당한 <양자강>으로 상해 영화계에 진출하였고 <대지의 비극>, <초악>, <춘시> 등 여러 작품을 감독한다. 1938년 고국으로 돌아와 <복지만리>(1941)를 감독하여 성공을 거두지만, 일경에게 체포돼서 풀려난 후 거의 활동을 중단한다. 전창근은 해방과 더불어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50년대 중반 이후에는 <단종애사>와 같은 사극으로 전성기를 열었다. 그 후 많은 작품을 통해 영화계에 많은 공헌을 한 그는 ‘서울시문화상’ 등 영화상을 수차례 수상했으며 초기의 ‘한국영화인협회’ 부회장, ‘한국 시나리오 작가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작품정보
복지만리 (1941) 해방된 내 고향 (1947) 민족의 성벽 (1947) 그 얼굴 (1948) 여인 (1948) 낙동강 (1952) 불사조의 언덕 (1955) 단종애사 (1956) 마의 태자(1956)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1959) 삼일독립운동 (1959) 아아 백범 김구 선생 (1960) 운명의 골짜기 (1962) 차이나타운 (1963)
리뷰
*작품해설 50년대 중반이후 <단종애사>를 시작으로 사극에 감각을 보였던 전창근 감독의 작품. 안중근 의사의 애국심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영화로 당시로서는 세심한 고증과 객관적인 접근이 돋보였다는 평을 받았다. *평론 지나치게 절규로 일관된 극적인 흐름은 감동의 밀도를 적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선이 굵은 전창근 감독의 중후한 연출은 인간을 그리지 못했다는 흠은 있어도 각 연기자의 열연을 얻어 우리 겨레가 지녔던 한 슬픈 시기의 단면을 재현하기에 성공한 편이다. 특히 김희작씨의 음악은 한국영화음악이 본궤도에 올랐다는 감을 주는 좋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박석인씨의 미술도 노력의 산물이었다. (<조선일보>, 1959년 4월 16일자)
수상내역
제2회 국산영화상 최우수상, 장려상
관련도서
<한국영화전사>, 이영일, 한국영화인협회, 1969 <한국영화 70년 대표작 200선>, 영화진흥공사 기획, 집문당, 1996 <한국영화 100년>, 호현찬, 문학사상사, 2000 <우리영화 100년>, 김종원·정중헌, 현암사, 2001
연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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