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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악부(小樂府)

작품명
소악부(小樂府)
저자
이제현(李齊賢)
장르
한시
작품소개
고려 후기에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악부시. 당시 유행하던 우리말 노래를 한시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익재난고(益齋亂藁)> 권4에 수록되어 있다. 모두 칠언절구(七言絶句) 11수로 이루어졌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
본관 경주(慶州). 자 중사(仲思). 호 익재(益齋)·역옹(櫟翁)·실재(實齋). 초명 지공(之公). 시호 문충(文忠).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했으며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 등을 지냈다. 1308년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등용되고 제안부직강(齊安府直講)을 역임했다. 이듬해 사헌규정(司憲糾正), 1310년(충선왕 2) 선부산랑(選部散郞), 이듬해 전교시승(典校寺丞)·삼사판관(三司判官) 등을 거쳐 1312년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가 되고 성균악정(成均樂正)·풍저창사(豊儲倉使)를 지냈다. 이듬해 내부부령(內府副令) 풍저감두곡을 거쳐 1314년 원나라에 가서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琅) 등 한족(漢族) 출신 문인들과 접촉하면서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 세 번에 걸친 중국 내륙까지의 먼 여행은 그의 견문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316년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이 되고, 1320년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다. 같은 해 충선왕이 모함으로 유배되자 원나라에 그 부당함을 밝혀 1323년 풀려나게 하였다. 이듬해 광정대부밀직사사(匡靖大夫密直司使)에 승진, 1325년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이 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 1336년 삼중대광영예문관사(三重大匡領藝文館事)에 오르고 1339년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원나라에 충숙왕을 모함하자 연경(燕京)에 가서 해명하고 돌아왔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원나라 사신이 왕을 잡아가자 사면을 요청했고, 이듬해 삼사판사(三司判事)에 복직,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348년(충목왕 4) 왕이 죽자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으로 원나라에 가서 충정왕의 승습(承襲)을 요청했고,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정승(右政丞)·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가 되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찬화공신(同德協議贊化功臣)에 오르고 1353년 사직했다가 이듬해 우정승에 재임,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그 후 사직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13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청주(淸州)로 호종,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공민왕 묘정(廟庭)에 배향, 경주의 귀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조맹부의 서체(書體)를 도입하여 유행시켰다. 특히 문학부문에서 대가를 이루었다.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가 특징을 이룬다. 또한, 사(詞)의 장르에서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시키면서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를 통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櫟翁稗說)>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益齋集)>이라 한다.
국문풀이
움츠린 참새야 너는 어이하여 그물에나 걸리는 황구아가 되었느냐 보라는 눈은 어디에 두고서 그물에 걸리는 가엾은 새가 됐나 까치는 울 옆 꽃 가지에 지저귀고 희자는 상 머리에 그물을 치네 우리님 오실 날 멀지 않겠지 그 정신 미리 사람에게 알려주네 완사계 언덕 위에 버들이 늘어지고 백마랑 손잡고 심중을 터놓았네 처마에 쏟아지는 삼월 비라도 차마 어이 내손의 향기야 씻어낼까 참새야 어디서 오가며 나느냐 일 년의 농사는 아랑곳 않고 늙은 홀아비 애써 지은 농사인데 그 벼와 기장을 다 먹어치우다니 봄옷을 벗어서 어깨에 걸치고 친구 불러 채마밭에 들어갔다네 동서로 쫓아가며 나비 잡던 일들이 어젯날 놀이같이 완연하구나 옛날 신라의 처용 늙은이 바닷 속에서 왔노라 말을 하고서 자개 이빨 붉은 입술로 달밤에 노래하고 솔개 어깨 자주 소매로 봄바람에 춤췄다 나무 끝에 조그마한 닭을 조각하여 젓갈로 집어다 벽 위에 놓았네 이 새가 울면서 시간을 알려오니 어머님 얼굴이 비로소 지는 해 같네 바윗돌에 구슬이 떨어져 깨지긴 해도 꿰미실만은 끊어지지 않으리라 님과 천추의 이별을 하였으나 한 점 단심이야 변함이 있으랴 매일같이 님 생각에 옷깃이 젖어 흡사 봄산에 자규새 같네 옳고 그릇됨을 묻지를 마오 응당 새벽달과 별만은 알리라 도시 부근 하천에 제방이 터져 수정사 마당까지 물이 넘치네 사방엔 오늘밤 선녀를 숨겨두고 절 주인이 도리어 황모랑이 되었네 거꾸러진 보리 이삭 그대로 두고 가지 생긴 삼도 내버려 두었네 청자와 백미를 가득 싣고서 북풍에 오는 배만 기다리고 있구나
어휘풀이
- 황구아(黃口兒) : 참새의 새끼 - 희자(喜子) : 거미(蜘蛛)의 별칭인데, 거미가 내려오면 기다리는 사람이 온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해설
이제현의 <소악부>는 모두 11수인데, 그 가운데에 국문사설이 현재까지 전하여지는 것이 3편이다. 여섯 번째 시 <처용가>, 여덟 번째 시 <정석가> 혹은 <서경별곡>, 아홉 번째 시 <정과정곡>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설은 전하지 않으나 제목과 내용이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것이 5편이다. 첫 번째 시 <장암(長巖)>, 두 번째 시 <거사련(居士戀)>, 세 번째 시 <제위보(濟危寶)>, 네 번째 시 <사리화(沙里花)>, 일곱 번째 시 <오관산(五冠山)>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출처를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으로 다섯 번째 시가 있다. 옷을 벗어 어깨에 둘러메고 꽃밭에서 나비를 좇던 지난날의 추억을 그리는 내용으로 보나, “이 고을 사람들은 남녀가 봄을 만나 놀기 좋은 시절을 서로 즐기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는 <양주>와 일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까지의 아홉 수의 시가 제목도 해설도 없이 기록된 것과 달리 열 번째와 열한 번째 시는 작자가 직접 제주도 민요를 옮긴 것이라고 밝히면서 해설을 덧붙여 놓았다. 열 번째 시 <수정사(水精寺)>는 젊은 여자가 재산 많은 사주(寺主)에게 시집감으로써 사주는 황모(黃帽)를 쓴 신랑이 되어 상방으로 신부를 맞아들인다는 내용이다. 열한 번째 시 <북풍선(北風船)>은 제주도 주민들이 종래 물산이 별로 없어 뭍에서, 특히 전라도 쪽에서 장수들이 옹기와 백미를 팔러 오면 크게 도움이 되었는데, 그나마 자주 올 수 없었으므로 북풍이 불어 보내는 이 배를 항상 고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몽골의 목장이 설치된 뒤로 관사(官私)의 우마가 전야를 덮어 현지 백성들은 경작할 땅조차 없게 되고, 드나드는 관리들은 북새를 이루어 더욱 백성들을 못 살게 하고 있었으므로 그동안 여러 차례 변고가 있었다는 내용이다. 처음 이제현이 아홉 수의 시를 발표했을 때 당시 사대부(士大夫) 사이에 상당한 인기가 있었던 듯하다. 지우(知友)들 중에 곧 그것을 본떠 화답하려는 뜻을 밝히는 이도 있었다. 급암 민사평(及菴 閔思平)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제현은 그것을 전해 듣고 다시 뒤의 2수를 지서 민사평에게 화답을 재촉한 것이라 한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조선말엽 자하 신위(紫霞 申緯)는 이조 역대의 시조를 골라 칠언절구 40수를 만들었다. 한시도 표현이나 정서에 있어서는 우리 문학다운 면모를 갖추어야 하겠다는 자각에서 이런 작품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속악가사를 다른 측면에서 재검토하고, 속악가사로 전하지 않는 우리말 노래까지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소악부는 어느 것이나 칠언절구의 짧은 형식이어서 우리말 노래의 개요를 옮겨놓았거나 어느 한 대목을 번역하였을 따름이다. 우리말 노래의 묘미를 살리는 데에 충실할 수 없었던 것이 한계이다.
연계정보
-서경별곡(西京別曲)
-정과정(鄭瓜亭)
-역옹패설(櫟翁稗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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