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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과정(鄭瓜亭)

작품소개
우리말로 전하는 고려가요 가운데 작자가 확실한 유일한 노래이다. <정과정(鄭瓜亭)> 또는 <정과정곡(鄭瓜亭曲)>이라고도 한다. <고려사> ‘악지(樂志)’에 제작 동기와 이제현(李齊賢)의 한역시(漢譯詩)가 수록되어 있으며, 우리말 노래는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전한다. 또, <대악후보(大樂後譜)>에는 노래와 함께 곡조도 아울러 표시되어 있다.
저자
정서(鄭敍)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 문인.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과정(瓜亭).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항(沆)의 아들이다. 인종비 공예태후(恭睿太后) 동생의 남편으로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음보로 내시낭중(內侍郎中)에 이르렀으며, 1151년(의종 5)에 폐신 정함(鄭歟)·김존중(金存中)의 참소로 동래 및 거제로 유배되었다가 1170년(명종 1)에 풀려났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성격이 경박하였다고도 하나 그에 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 저서로는 <과정잡서(瓜亭雜書)>가 있고, 배소에서 지은 <정과정곡(鄭瓜亭曲)>이 있다.
현대어풀이
내, 님을 그리며 울고 지내더니 산 접동새와 난 비슷합니다 옳지 않으며 거짓이라는 것을 잔월효성(殘月曉星: 지는 달 새벽 별)만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넋이라도 님을 함께 모시고 싶어라 우기던 이, 그 누구입니까 잘못도 허물도 전혀 없습니다 뭇 사람들의 참소하던 말입니다. 슬프구나! 님께서 나를 벌써 잊으셨나이까 마십시오. 님이여, 내 사연 들으시고 다시 사랑해 주소서 - 참고: <고려시대의 가요문학>, 정병욱 해설;김열규·신동욱 공편, 새문사, 1982 <고전시가강독>, 최철·박상태 공저, 한국방송통신대학출판부, 1986
해설
<삼진작(三眞勺)>이라고도 한다. 이는 조선시대의 <악학궤범>에 그 곡조가 ‘삼진작’이라는 이름으로 수록된 데서 연유하며, 후세 사람들이 그의 호를 따서 <정과정(鄭瓜亭)> 또는 <정과정곡(鄭瓜亭曲)>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작자의 벼슬은 후에 내시낭중(內侍郞中)까지 이르렀으나, 그에 앞서 1151년(의종 5) 참소를 받고 동래(東萊)로 귀양을 갔다가 1170년(명종 즉위) 정중부(鄭仲夫)의 난(亂)으로 의종이 축출된 후에야 재기용되었다. 이 작품은 동래 유배시절에 10구체(十句體) 향가 형식으로 지은 충신연군(忠臣戀君)의 노래이다. 형식과 내용으로 보아 광의(廣意)의 향가로 처리하는 학자도 있어 향가의 시대적 하한선이 12세기까지도 내려올 수 있다는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되는 작품이다. <고려사> 악지에 이제현(李齊賢)의 한역시(漢譯詩)가 실려 전한다. 우리말로 전하는 고려가요 가운데 작자가 확실한 유일한 노래이다. <고려사> 악지에 따르면 작자는 인종과 동서 간으로서 오랫동안 왕의 총애를 받아왔는데, 의종이 즉위한 뒤 참소를 받아 고향인 동래로 유배되었다. 이때 의종은 머지않아 다시 소환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오래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이에 거문고를 잡고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작자가 귀양에서 풀려난 것은 무신란이 일어나 명종이 즉위한 해였다. 작자의 호를 따서 후세 사람들이 이 노래를 <정과정>이라 하였다. 유배지에서 신하가 임금을 그리워하는 정을 절실하고 애달프게 노래하였다 하여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로 널리 알려졌으며 그 때문에 궁중의 속악 악장으로 채택되어 기녀(妓女)는 물론 사대부 간에도 학습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후대에 정철(鄭澈)의 <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 같은 연주지사의 원류가 되었다. 이 노래의 제작 연대에 대하여서는, ① 의종 5년∼24년(1151∼1170), ② 의종 5년∼11년(1151∼1157), ③ 의종 20년 이후(1166∼?), ④ 의종 24년(1170) 9월∼10월 등 여러 견해가 있다. 여기에서 의종 5년이 준거가 되는 것은 이 해에 작자 정서가 의종의 아우를 추대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참소를 입어 동래로 귀양갔기 때문이며, <고려사> ‘악지’의 해설을 존중하여 귀양간 이후 상당 기간이 흐른 이후의 어느 시기에 임금의 소환을 기다리며 지은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또, 의종 24년으로 보는 근거는 이 해에 무신의 난이 발생하여 의종이 폐위되고 작자는 소환되기는커녕 다시 거제도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이때 의종이 축출됨을 슬퍼하는 동시에 자기의 곧은 절개는 변하지 않겠다는 맹세의 심정을 노래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래의 내용과 <고려사>의 해설이 더욱 일치하므로 앞의 견해가 더 타당성이 있다. 형식은 문학상으로는 10구체 단련(單聯)으로 되어 있으며, 악곡상으로는 속악에서 가장 빠른 템포인 ‘삼진작(三眞勺)’으로 모두 11개의 악절로 나뉘어 불렸다. 그래서 악곡상의 변화에 따라 행(行)을 구분하면 모두 11행이지만 악곡상의 제8행인 삼엽(三葉) 부분과 제9행인 사엽(四葉) 부분을 통합하여 전체를 10행으로 다루면서 문학적 형식으로는 10구체 사뇌격(詞腦格) 향가의 계승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사뇌가의 양식을 수용하면서도 ‘아소 님하’라는 낙구(落句)의 위치가 정통 사뇌가와 다르다는 점에서 사뇌가의 해체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장르를 향가에 귀속시키고 쇠퇴기의 향가 혹은 향가의 잔존형태로 처리한다. 아니면 별곡(別曲)의 양식이 나타나기 이전의 특수 형태라 하여서 전별곡적(前別曲的) 형태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이 노래의 제5행과 제6행의 사설이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의 제3연과 의미론적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 부분은 당대에 유행하던 민요사설을 수용한 것으로 보아, 이 노래를 10구체 사뇌격 향가라는 기존 장르의 양식적 변용에다 당대의 유행 민요를 복합적으로 수용하여 창출한 독특한 형태로 이해하기도 한다.
연계정보
-소악부(小樂府)
-고려사악지(高麗史樂志)
-악학궤범(樂學軌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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