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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즐겁다

작품명
노래는 즐겁다
작곡가
윤용하
개요
1956년 작품으로 KBS 방송동요로 발표되었다.
해설
노래는 즐겁다 지저귀는 멧세처럼 비이 뱃쫑 비뱃쫑 비뱃쫑 뱃쫑 뱃쫑 노래를 부르면 해도 달도 내친구 노래는 즐겁다 속삭이는 냇물처럼 조올 졸졸 졸졸졸 차알랑 찰랑찰랑 노래를 부르면 산도 들도 내친구 동요창작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던 시인 박목월과 작곡가 윤용하가 1950년대에 남긴 동요곡이다. 그 후 이 노래는 합창곡으로도 편곡되어 애창된 바 있다. <한국의 동요>, 한용희, 세광음악출판사, 1994
작사가
박목월(朴木月, 1916~1978) 본명 영종(泳鍾). 경북 경주(慶州) 출생. 1935년 대구 계성(啓星)중학을 졸업하고 1939년 문예지 <문장(文章)>에 시가 추천됨으로써 시단에 등장하였다. 1953년 홍익(弘益)대학 조교수, 1961년 한양(漢陽)대학 부교수, 1963년 교수가 되었다. 1965년 대한민국 예술원(藝術院) 회원에 선임되었고, 1968년 한국시인협희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73년 시전문지 <심상(心像)>의 발행인이 되었다. 1976년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장에 취임하였다. 자유문학상, 5월문예상, 서울시문화상, 국민훈장모란장 등을 받았다. 저서에 <문학의 기술(技術)>, <실용문장대백과(實用文章大百科)> 등이 있고, 시집에 청록집(靑鹿集)>(3인시), <경상도가랑잎>, <사력질(砂礫質)>, <무순(無順)>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구름의 서정시>, <밤에 쓴 인생론(人生論)> 등이 있다.
작곡가
윤용하(尹龍河, 1922~1965) 황해도 은율군 출생. 만주 봉천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독실한 가톨릭교도의 집안에서 성장하여 어렸을 적부터 교회를 통해 음악을 접하였다. 정규 음악교육을 받은 적은 없으며 봉천방송국 관현악단의 지휘자인 일본인 가네꼬로부터 부정기적으로 화성법과 대위법을 배우고 그 외 독학과 개인적인 음악적 경험으로 합창곡, 동요곡 등을 작곡하였다. 봉천에서는 조선합창단을 조직하여 서너 차례에 걸쳐 발표회를 가졌다. 이 당시에 교성곡 <조선의 사계>와 가곡 <독백> 등을 작곡하였으며, 특히 <조선의 사계>는 그의 처녀작으로 봉천조선합창단의 합창과 봉천방송국 관현악단의 반주로 연주되고 방송되었다. 1943년 신경으로 가서 김동진, 김대현 등과 함께 활발한 음악활동을 펼쳤다. 이 세 사람이 합작으로 대합창곡을 작곡하여 한국인 연합합창단과 신경교향악단의 협연으로 발표회를 갖기도 하였다. 또한 백조합창단을조직하여 합창음악을 계속 발표하였다. 그 후 간도사범에서 교편을 잡다가 8·15 해방 이후 귀국하여 함경도 용정과 함흥 영생여중 교사를 지냈다. 서울의 한양공고와 동북고교에서 음악교사를 하면서 많은 가곡과 동요곡을 발표하였다. 동요곡 <나뭇잎배>는 이 때 나온 작품이다. 한편 박태현, 한갑수, 이흥렬 등과 함께 ‘한국음악가협회’를 발족하여 6·25 이전까지 활동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난 서 동래에 자리를 잡고 이후 대중적인 사랑을 받은 가곡 <보리밭>(1952년)을 작곡하였다. 피난지인 부산에서도 동요 작곡에 계속 힘써 대한어린이음악원을 만들고 여러 차례 동요작곡 발표회를 개최하여 전시 동요 <피난온 소년> 등을 발표하였다. 또한 전시작곡가협회를 조직하여 종군작곡가로서 최전방을 순회하면서 많은 군가를 만들었다. 정부가 환도한 뒤에는 서울로 올라와 카톨릭음악협회원, 한국작곡가협회 사무국장 등을 지냈다. 1956년 가곡 작품발표회를 열어 <달밤>, <산골의 노래>를 연주하였으며 1957년 서울시향 주최의 ‘한국작곡가의 밤’에서 교향적 서곡 <농촌 서곡>을 연주하였다. 1965년 세상을 떠난 뒤, 1972년에 작품집 <보리밭>(세광음악출판사)이 발간되었다. 주요작품으로는 가곡 <보리밭>(1952), <도라지꽃>(1956), 교성곡<조국의 영광>, 교향곡<개선>,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작인 오페라 <견우직녀>, 플룻 독주곡 <병사의 꿈>, 교향적 서곡 <농촌풍경> 등이 있다. <한국작곡가사전1>, 한국예술연구소, 한국예술종합학교한국예술연구소, 1995
리뷰
“집잃은 나그네 박목월” 한국 시단을 대표하던 청록파 시인 박목월(朴木月, 1916~1978) 선생이 말년 동안 창작활동에 열중했던 서울 용산구 원효로 4가 단독주택이 철거돼 문화계 등 주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2층 양옥인 이 집은 1965년 지어진 이래 1978년 선생이 타계할 때까지 머물며 <어머니>, <경상도의 가랑잎>, <사력질(砂礫質)> 등의 작품을 집필했던 곳이다. 타인도 아닌 유족들의 손에 의해 철거된 것을 두고 “알만한 사람들이….”라며 개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유족들의 사연을 들어 “오죽했으면 그랬을까”라며 측은해하는 반응이 교차하고 있다. 실제 유족들은 그간 빚에 쪼들리다 못해 옛집을 헐어 다세대 주택을 짓기로 하고 철거를 결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때마침 서울시는 선생의 옛집을 보존하기 위해 최근 문화재청에 등록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요청했고 문화재청이 이번 주 중 현장조사를 벌일 계획이었다. 서울시는 유족들이 지난 14일 용산구청에 건물 철거 신고서를 제출한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고 유족들에게 철거를 보류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시의 이런 요청에도 불구, 유족들은 건설업체에 의뢰해 지난 21일 건물 철거를 강행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면 재산권 행사에 일부 제한을 받게 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저열한 문화수준의 반영이라고 치부해 버리거나 소유주의 잘못만을 탓하는 풍조로는 하나 둘씩 자취를 감추고 있는 근대문화유산 문제의 해법이 나오지 않는다. 이런 풍조엔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의 논리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번 사례를 계기로 근대문화유산의 보존 당사자가 갖는 고통에 대한 공감과 사회적 해결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개인과 공동체 전체가 함께 수긍할 수 있는 방안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선생은 이제 경북 경주시에 자리잡은 부친의 생가, 목월기념관 정도밖에 머물 수 없다. 스스로 <나그네>를 노래했지만 서울 옛집 터에 남은 표석만을 보게 될 나그네의 마음은 쓰릴 게 분명하다. <문화일보>, 2004년 2월 24일
관련음반
<꿈꾸는 동요>, 가람미디어, 2005 <열려라 동요천국>, 가람미디어, 2004 <신나는 동요나라 135곡>, 블루마인드, 2005 <국민학교 3학년 학습용 음악교재>, 지구레코드, 1984
관련도서
<한국작곡가사전1>, 한국예술연구소, 한국예술종합학교한국예술연구소, 1995 <박목월 시전집>, 이남호 편, 민음사, 2003 <박목월 시전집>, 박목월, 서문당, 1984 <박목월: 청노루의 꿈, 목마름의 시>, 이탄, 건국대출판부, 1997 <박목월 시의 연구>, 홍희표, 문학아카데미, 1993 <박목월>, 이형기 편, 문학세계사, 1993 <보리밭>, 윤용하, 세광음악출판사, 1972 <윤용하작곡집>, 윤용하, 세광출판사, 1972 <민족음악가 윤용하>, 이정화, 대교출판, 1988
연계정보
-박목월(朴木月)
-나그네
-얼룩 송아지
-나뭇잎 배
관련사이트
한국동요음악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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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음악교육연구회
관련사이트
한국음악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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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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