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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Sei personaggi in cerca d'autore)

작가소개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 1867~1936) 이탈리아의 극작가, 소설가, 단편작가. <작가를 찾는 6명의 등장 인물(Sei personaggi in cerca d'autore)>(1921)이라는 희곡에서 극중극을 창안하여 근대 희곡의 중요한 혁신자가 되었으며, 1934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유황 광산주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자신의 뒤를 잇기를 원했지만 사업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공부하기를 원했다. 처음에는 시칠리아의 수도인 팔레르모로 갔다가, 1887년 로마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고전 문학교수와 논쟁을 벌인 뒤, 이듬해 독일의 본대학교에 편입해 1891년 아그리젠토 방언에 관한 논문으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894년 아버지의 동업자인 부유한 유황 광산주의 딸 안토니에타 포르툴라노와 결혼했다. 아내가 가져온 결혼지참금 덕분에 경제적으로 독립해 로마에서 살면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이미 조수에 카르두치가 확립한 시 형식에 경의를 표한 첫 시집 <유쾌한 파멸(Mal giocondo)>(1889)을 출판했고, 이어서 <제아의 부활절(Pasqua di Gea)>(본에 남겨두고 온 연인 예니 슐츠 란더에게 바침)을 비롯한 시집들과, 괴테의 <로마 비가(Römische Elegien)>를 번역한 <로마 비가(Elegie romane)>가 출판되었다. 그러나 초기에 발표한 중요한 작품은 원고료도 받지 않고 잡지에 기고한 단편소설들이었다. 1903년에 산사태가 일어나는 바람에 아내와 아버지가 투자한 유황 광산이 폐쇄되었다.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피란델로는 로마의 사범대학에서 이탈리아어를 가르쳐 생계를 꾸려나가야만 했다. 경제적 재난이 낳은 또 하나의 결과로 아내가 피해망상증에 걸렸다. 이 병증은 남편에 대한 광적인 질투로 나타났다. 그의 고통은 1919년 아내가 요양원에 수용된 뒤에야 끝이 났다(아내는 1959년에 죽음). 초기 단편에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한 그의 가장 독특한 주제, 즉 ‘변화무쌍한 인간성 내부 세계에 대한 탐구’를 마지막으로 결정한 것은 바로 이 쓰라린 경험이었다. 피란델로의 초기 서술 양식은 19세기말에 활동한 뛰어난 이탈리아 소설가들인 루이지 카푸아나와 조반니 베르가의 베리스모(사실주의)에서 유래한다. <사랑 없는 사랑(Amori senza amore)>(1894), <삶과 죽음의 장난(Beffe della morte e della vita)>(1902~03) 같은 초기 단편집 제목은 초기 장편소설 <추방자(L'esclusa)>(1901), <차례(Il turno)>(1902)에서도 엿보이는 그의 사실주의의 뒤틀린 성격을 암시한다. 피란델로는 흔히 대표작으로 꼽히는 3번째 장편소설 <고(故) 마티아 파스칼(Il fu Mattia Pascal)>(1904)을 통해 비로소 성공을 거두었다. 이 주인공이 직면하는 장애는 외적 상황이 낳은 결과이기 때문에 그의 전형적인 주제를 다루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소설은 나중에 등장 인물의 잠재의식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날카로운 심리적 통찰력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피란델로는 프랑스의 실험심리학자 알프레드 비네가 쓴 <성격의 변화(Les altérations de la personnalité)>(1892) 같은 저서들을 읽고 심리학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그가 <성격의 변화>에서 받은 영향의 흔적은 자신의 예술 원칙을 검토한 장문의 평론 <기질론(L'umorismo)>(1908)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두 저서의 공통점은 잠재된 인간성에 대한 이론, 즉 한 사람이 아는 것 또는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의 존재의 가장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란델로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저서를 알기 전부터 이미 작품에서 심리학의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가 사용한 심리학적 주제가 가장 완벽하게 표현된 작품은 <함정(La trappola)>(1915), <내일, 월요일…(E domani, Lunedì)>(1917) 같은 단편집, 그리고 <목소리(Una voce)>, <삶의 고통(Pena di vivere così)>, <다른 눈으로(Con altri occhi)> 같은 단편들이다. 한편 그는 장편소설들도 썼는데, 그 중에서 특히 중요한 작품은 <늙은이와 젊은이(I vecchi e i giovani)>(1913), <하나, 없음, 그리고 10만(Uno, nessuno e centomila)>(1925~26)이다. 이 두 작품은 <고마티아 파스칼>보다 더 전형적이다. <늙은이와 젊은이>는 19세기말의 시칠리아 섬과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통일운동)의 이상이 사라진 것에 따른 이탈리아 전체의 고통을 반영하고 있는 역사소설로서, <기질론>에 나오는 그의 말을 빌리면 ‘작품을 짜임새 있게 구성’하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스럽게 해체’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작품이 하나의 완전한 통일체를 이루지 못하고, 개별적인 삽화들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하나, 없음, 그리고 10만>은 그의 장편소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가장 전형적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자신의 아내가(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 발생하는 결과를 초현실주의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소설이 인간성의 실체를 탐구하는 방식은 그의 희곡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898년에 희곡 <에필로그(L'epilogo)>를 통해 처음으로 극문학에 관심을 돌렸지만, 이 희곡은 여러 가지 사건으로 상연이 지연되어 1910년에야 <족쇄(La morsa)>로 제목이 바뀌어 상연되었다. 이런 사건들 때문에 그는 1917년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네가 옳다(Cos' íè (se vi pare)>가 성공할 때까지는 어쩌다 한 번씩만 희곡을 시도했다. 첫 희곡이 뒤늦게야 상연된 것은 그의 극작 능력이 발전하는 데 오히려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에필로그>는 당시의 다른 희곡들과 별 차이가 없지만,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네가 옳다>를 필두로 한 일련의 희곡들은 1920년대에 그를 세계적인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연극적 관점에서 진실의 상대성을 보여주고, 개인의 시각에 좌우되지 않는 객관적 현실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이 작품은 피란델로의 위대한 희곡 <작가를 찾는 6명의 등장 인물>(1921), <엔리코 4세(Enrico Ⅳ)>(1922)를 예시하고 있다. <작가를 찾는 6명의 등장인물>은 불변하는 예술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생에서 전형적인 피란델로적 대조가 가장 흥미롭게 제시되고 있다. 작가에게 거부당한 등장 인물들이 무대 위에 나타나, 진짜 배우들보다 더욱 격렬하고 활기차게 고동친다. 따라서 진짜 배우들은 희곡 상연을 시도할 때 그 희곡을 왜곡할 수밖에 없다. <엔리코 4세>의 주제는 광기인데 이 광기는 정상적인 생활의 껍데기 바로 밑에 놓여 있고, 만족스러운 현실을 만드는 능력에서는 아마 정상적인 생활보다 더 우월할 것이다. 이 희곡의 힘은 주인공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사느니 차라리 비현실성 속으로 도피하는 쪽을 선택한 데 있다. 이 두 희곡 가운데 첫 번째 희곡이 1923년 파리에서 상연되어 피란델로에게 폭 넓은 명성을 안겨주었고, 그의 작품은 프랑스 연극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장 아누이와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염세주의에서 이오네스코와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 희극에 이르는 프랑스 희곡은 모두 ‘피란델로주의’에 물들어 있다. 그의 영향은 다른 나라의 희곡에서도 엿볼 수 있고, 엘리어트의 종교적 운문 희곡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920년에 피란델로는 자신의 예술에 대해 “생각컨대 인생은 매우 슬픈 익살이다. 왜, 무엇을 위해 그러는지, 그 욕망이 어디서 오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우리는 하나의 현실을(저마다 다른 현실을 각자 하나씩) 창조함으로써 끊임없이 자신을 속이려는 욕망을 우리 속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따금 이 현실이 헛되고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내 예술은 자신을 속이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쓰라린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연민 뒤에는 반드시 인간을 자기 기만으로 몰아넣는 운명의 잔인한 비웃음이 따라오게 마련이다”라고 말했다. 이 절망적인 견해는 피란델로의 희곡에서 가장 힘차게 표현되었다. 그의 희곡은 처음에는 지나치게 ‘지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그 밑에 깔려 있는 감수성과 연민으로 인정을 받았다. 사무원과 교사 및 하숙집 주인처럼 평범한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그의 희곡이 카푸아나와 베르가의 ‘진실주의’를 반영하고 있지만, 그러한 주인공들의 변화하는 운명에서는 보편적인 인간의 의미를 결론으로 끌어낸다. <작가를 찾는 6명의 등장 인물>과 <엔리코 4세>가 세계적으로 갈채를 받았기 때문에, 피란델로는 로마에 있는 그의 ‘예술 극단’을 이끌고 세계 순회공연(1925~27)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이 희곡들의 성공에 우쭐한 나머지 후기에 쓴 일부 단편소설에서 초현실주의적이고 환상적인 요소들을 강조했듯이, 후기에 쓴 일부 희곡 <각자 나름대로(Ciascuno a suo modo)>(1924)에서는 그 자신에게 관심을 쏟을 것을 촉구함으로써 작품의 질을 떨어뜨렸다. 1928년에 재정난으로 ‘예술 극단’이 해체된 뒤에는 세계를 두루 여행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유언장에서 요란한 공개 장례식을 치르지 말고 ‘가난한 사람의 관과 말, 그리고 마부’뿐인 조촐한 장례식을 치러달라고 당부했다. 시민적 모랄에 충격을 주는 동시에 현실의 극화 불가능성, 언어·행위의 비전달성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은 피토예프 연출로 1923년 파리에서 상연된 이후, 세계 각국에서 번역, 상연되어 현대의 실존주의적 부조리연극의 선구가 되었다.
내용
피란델로의 작품 <역할의 유희>를 연습 중인 극장무대에 느닷없이 가면을 쓴 ‘6인의 등장인물’이 모습을 드러내고 놀란 배우들과 연출가에게 자신들의 진실을 무대에 올려 줄 것을 요구한다. 6인의 등장인물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배우들이 새로운 호기심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아버지가 살고 있는 가정에 애정의 무관심으로 외로움을 느낀 어머니는 새로운 사람과 가정을 이루어 집을 나가게 된다. 새로 이루었던 가정의 아버지가 죽고 어려운 생활을 위해 바느질 일을 해주던 마담 파체의 가게에 그녀의 의붓딸이 집안을 위해 몸을 팔게 된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의붓딸의 단골손님으로 드나드는 사람이 어머니의 전 남편임을 알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아버지의 집으로 모든 식구들이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 간의 갈등과 부모님의 냉담한 분위기 속에 그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어 간다는 내용을 드러내 보이면서 연극은 점점 더 고조되어 간다. 극을 진행하는 도중 또 다른 사건이 전개되어 가며 혼란과 진실의 외침들 속에 의붓딸에 의하여 등장인물들이 극적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배우들과 연출가의 어리둥절한 상황 속에 죽음과 거짓의 논쟁이 오가고 죽어 가는 아버지의 진실의 외침이 여운을 남긴다. 조명은 꺼지고 무대에 또 다른 시작처럼 빛이 들어오고 그 자리에 죽었던 등장인물이 다시 등장하고 그 사이를 의붓딸이 돌아다니며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로 막을 내린다.
국내공연연보
1958년 3월 5일 국립극단 신인연기양성소 / 국립극장 / 이진순 연출 1967년 드라마센터 1975년 극단 밀 1975년 5월 27일~6월 11일 극단 맥토 / 김윤철 연출 1979년 3월 8일~13일 극단 에저또 / 국립극장소극장 / 기국서 연출 1996년 6월 1일~30일, 7월 6일~21일 우리극연구소 / 북촌창우극장 / 임경식 연출
예술가
이진순(李眞淳, 1916~1984)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일본대학 연극과에서 함께 공부했던 이진순은 처음에는 단역배우로 무대에 서면서부터 연극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학생예술좌에서는 주로 단역배우로 나섰고, 1938년 귀국 후에는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유치진 주도의 극연좌 신인배우로 한두 번 무대에 섰다. <목격자>(앤더슨 작)와 <깨어서 노래부르자>(클리포드 오뎃츠 작) 두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한 것이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진순은 곧 극단을 떠나 북경으로 이주한다. 1938년부터 1946년까지 8년 동안을 그곳에서 보내게 된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는 대학동기생인 이해랑, 김동원 등과 어울리다가 1947년 10월 중국통이라 할 김광주와 손잡고 극단 신지극사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그리고 김승호, 강계식, 전두영, 주선태, 하옥주 등 소장배우들과 함께 중국 작가 조우의 <태양이 그리워(日出)>를 직접 연출하여 공연했으나 별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2회 공연으로 <언덕에 꽃은 피고>라는 작품을 직접 쓰고 연출했으나 창립공연보다도 관심을 모으지 못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구와 부산을 오가며 간간이 연출을 했다. 이때 신협에서 <붉은 장갑>을 연출했지만 호평을 받지 못하면서 신협과 멀어졌고, 이후 국립극장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국립극장과는 1950년 개관 공연 때 오페라 <춘향전>을 연출한 인연이 있었다. 그러다 1960년대 동인제 극단 시대가 열리자 그도 1966년에 극단 광장을 조직하고 나섰다. 그는 창단의 변에서 “어디까지나 민중과 더불어 살며 입김을 나눠야 한다. 민중이 연극에서 멀어져가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연극에 대한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데 있지 않을까”라며 기성극계를 비판한다. 따라서 그는 고설봉, 백성희, 신원균, 이진수, 이석구, 고은정 등 중견과 신인을 중심으로 극단을 조직하고 셰익스피어의 <윈저의 아낙네들>로 창립공연을 올린다. 음악극에 관심이 많았던 이진순은 국립극장에서 추진한 창극정립운동에 앞장섰고, 연극잡지 발간에도 열성을 기울였다. 즉 그는 6·25전쟁 이후 최초로 연극 전문지인 <연극>을 자비 출판한 것이다. 물론 이 연극지는 2호를 발간하는 데서 멈췄지만 우리 연극계에 전문잡지의 필요성을 제시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연극전문 잡지 발간에 대한 욕구는 그가 동국대 연극과 전임이 되고 연극협회 이사장까지 맡으면서 실현된다. 전문잡지 <한국연극>을 월간지로 발행하고 한국희곡전집도 발간하는 등 출판사업에 힘을 쏟는다. 이진순은 작품의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연출하기로 유명했다. 가령 정통극에서부터 악극, 창극, 무용극, 오페라 등 전방위에 걸쳐 손대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그가 연출한 수백 편의 작품 가운데 대표작은 역시 정통극과 창극에 있다. 1961년 국립극단의 <산불>로부터 <갈매기>(체호프 작), <학마을 사람들>(이범선 원작), <로물르스 대제>(뒤렌마트 작)로 이어지는 정통리얼리즘 계열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미첼 작), <전쟁과 평화>(톨스토이 원작), <남한산성>(김의경 작) 등 대형작품들은 이진순이 연출가로서 족적을 남긴 작품들로 평가된다. 또한 1960년대 국립극장이 국극정립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면서부터 창극에 깊숙이 간여한 그는 누구보다도 창극에 애착을 갖고 작업에 임했다. <춘향가>, <흥보가>, <배비장전>, <수궁가>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어쨌든 이진순은 해방 이후 이해랑과 함께 연출 제3세대의 양각(兩脚)을 이룬 인물이다. 이해랑과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며 서구근대극을 이 땅에 이식, 구체화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연출활동을 했다. 그러나 연극전문화, 대중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오로지 신극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일관했던 이해랑과는 다른 의의를 지니는 연극인이라 하겠다.
리뷰
1950년대의 소극장운동은 대학극과 함께 극계의 침체를 극복하고 새로운 연극을 열어나갈 수 있는 대안으로 논의된다. 소극장운동은 근대극의 발달과 함께 일어난 것으로 3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연극의 만성적인 부진을 겪고 있던 50년대에는 그 필요성이 절실했다. 소극장운동의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논의는 의례 당시 기성극단인 국립극단과 신협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그 전제는 외적인 연극환경의 변화가 곧 연극의 발전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외적 조건이 변한다고 해서 기성극계가 곧바로 타성을 벗고 선진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성극계는 현상유지 차원의 공연활동에 머무르지 말고 신인을 기용하여 그 양성에 힘써야 하며 대학극을 비롯한 소극장운동 단체들은 그 전위적 역할을 의식하고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갈 때 연극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이러한 논의는 주로 미국연극의 발전이 대학연극과 소극장운동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기성연극에 자극과 영향을 미쳤다는 예로 뒷받침되고 있다(……) “연극은 인생의 재현과 단면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기성연극인의 연극관과 근본적으로 대립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젊은 연극인들은 현대가 무엇이며 그 현대에 있어서 연극의 위치와 연극이 표현해야 할 세계는 무엇인가를 가장 진지한 태도로써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인용은 소극장운동 주체들의 연극관부터가 기성연극인들과는 다른 출발점에 있다는 것이다. 기성연극인들은 근대적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연극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외국의 현대 연극을 소개 공연한다 하더라도 그 형태를 벗어날 수 없었다. 리얼리즘에 입각한 무대나 연출방법으로는 비사실주의적인 작품의 본의를 형상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로 국립극장연구생들의 제1회 연구발표회를 들 수 있다. 이태리 희곡작가 피란델로의 작품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이 이진순 연출로 59년 3월 7일부터 시공관에서 공연되었다. 작품이 매우 난해한 내용과 표현주의적인 것이었고 국립극장 연구생들의 발표였기 때문에 이 공연은 주목을 받는다. 그런데 대사의 발성이 신파적인 만네리즘을 벗어나지 못했고, 극의 분위기나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리얼리즘적 연출로만 이끌어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무대효과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는 평을 듣는다. 이것은 연구생에게 맞지 않는 레퍼토리 선정과 사실주의에 경도된 연출로 인한 문제로 책임은 지도자인 기성연극인에 있다는 비판이다. (……) 또한 직업적 기성 연극인으로서 새로운 연극을 실험하기 어려운 조건도 그 한계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연극을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비약 발전시킬 수 있는 동력은 소극장운동을 전개하는 젊은 연극인들에게 있다고 보았던 것이고 기성연극인들도 소극장운동에 대한 의미와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1950년대 소극장운동과 원각사’, 정호순, <한국극예술연구> 12집
관련도서
<노벨상문학대전집v.6~10>, 고려출판사 편, 고려출판사, 1971 <루이지 피란델로1:바보 항아리>, 루이지 피란델로 저, 장지연 역, 예니, 2001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루이지 피란델로 저, 김효정 역, 문학과지성사, 1999 <피란델로 대표 희곡선: 근대 연극의 혁신자 피란델로의 노벨문학상 수상작품>, 루이지 피란델로 저, 장지연 역, 생각의나무, 2001
연계정보
-이진순 인물
-이진순(李眞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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