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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Gengangere)

작가소개
헨릭 입센(Henrik Ibsen, 1828~1906) 텔레마르크주(州) 시엔 출생.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8세 때 집이 파산하여 15세까지 약방의 도제(徒弟)로 일하였다. 독학으로 대학 진학을 위한 수험준비를 하는 한편, 신문에 풍자적인 만화와 시를 기고하였다. 파리의 2월 혁명(1848)에서 받은 감격으로 국왕에게 시를 헌정하였다가 각하(却下)되기도 하였다. 로마 시대의 혁명가를 주인공으로 하여 쓴 희곡 <카틸리나(Catilina)>(1848)가 한 친구의 호의로 출판되었으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 후 단막물 <전사의 무덤>(1850)이 극장에 채택되어 상연되자 대학 진학을 단념하고 작가로 나설 것을 결심하였다. 친구들과 <사람(Andhrimner)>이란 주간지를 발간하였으나 사회주의적 경향 때문에 곧 폐간되었다. 1851년 가을 음악가 O. B. 불이 베르겐에서 개관한 국민극장 전속작가 겸 무대감독으로 초청되었다. 이때 무대 기교를 연구한 것이 훗날 극작가로 대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에스트로트의 잉겔 부>(1855), <솔하우그의 향연(饗宴)>(1856) 등의 시작(試作)을 거쳐 <헤르게트란의 전사(戰士)>(1857)가 나올 무렵부터 박력이 넘치는 작풍을 보였는데, 모두 다 노르웨이의 고대 및 중세에서 취재한 희곡이었다. 1857년에 수도 크리스티아니아(현재의 오슬로)에 신설된 노르웨이 극장의 지배인으로 직장을 옮겼으나, 경영난으로 5년 만에 폐쇄되었다. 이 사이에 최초의 현대극 <사랑의 희극>(1866)과 <왕위를 노리는 자>를 발표하였으나, 역시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고국에 싫증을 느끼고 독일을 거쳐 이탈리아로 가서, 그리스·로마의 고미술을 접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무(無)냐 전부냐’를 모토로, 이상을 찾아 헌신하다 쓰러지는 목사 브랑을 주인공으로 한 대작 <브랑(Brand)>(1866)을 발표하여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연달아 <파우스트>풍의 편력극(遍歷劇) <페르 귄트(Peer Gynt)>(1867),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걸린 세계사극 <황제와 갈릴레아 사람>(1873) 등에서 사상적 입장을 확고하게 굳혔다. 이어 그는 사회의 허위와 부정을 파헤치는 사회극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으로 발표한 것이 <사회의 기둥>(1877)과 <인형의 집(Et Dukkehjem)>(1879)이다. <인형의 집>은 “아내이며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살겠다”며 새로운 유형의 여인 노라의 각성 과정을 그려냄으로써, 온 세계의 화제를 모았고 명실상부한 근대극의 제1인자가 되었다. 또한 입센은 <유령(Gengangere)>(1881), <민중의 적(En Folkefiende)>(1882), <들오리(Vildanden)>(1884), <로스메르 저택(Rosmersholm)>(1886), <바다에서 온 부인(Fruen fra Havet)>(1888), <헤다 가블레르(Hedda Gabler)>(1890)에 이르는 사이에, 한 작품마다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세상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해외에서 체재한 후 귀국한 그는 <건축사 솔네스(Bygmester Solnes)>(1892), <작은 아이욜프(Lille Eyolf)>, <보르크만(John Gabriel Borkman)>, <우리들 죽은 사람이 눈뜰 때>(1898) 등의 작품을 썼다. 그는 힘차고 응집된 사상과 작품으로 근대극을 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근대 사상과 여성해방 운동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쳤다. <유령>에 관한 가장 잘 알려진 얘기로는 이 작품이 전작인 <인형의 집>에 대한 비난의 답변 형식으로 씌어졌다는 것이다. <인형의 집>은 발표 후 노라가 무책임하게 자식과 가정을 버렸다는 이유 등으로 맹렬한 비난을 받은 바 있다. 따라서 입센은 노라가 만일 그의 위선적인 남편과 집으로부터 뛰어나오지 않았으면 생겼을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을 <유령>을 통해 보여주었다는 이야기다. <유령>에서 알빙 부인이 필사적으로 마주 싸우고 있는 대상인 유령은 바로 노라를 뛰쳐나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그런 과거의 인습이고 위선인 것이다. 자신이 사회 개혁가가 아니라 시인으로 받아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그 당시 변화하는 유럽의 삶과 가치관,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개인들의 의지를 예리한 지성과 깊은 통찰력으로 그려냈던 것이다.
내용
알빙 부인은 남편을 추도하기 위한 기념관으로 고아원을 설립한다. 이 건물은 곧 개관되기로 되어 있고, 제막식에 참여하기 위해 알빙 부인의 오랜 친구 사이인 페르손 만데르스 목사가 알빙 부인 집에 도착한다. 알빙 부인은 만데르스 목사와 사담을 나누던 중, 자신의 남편, 알빙대위는 죽는 날까지도 타락한 생활을 해왔다고 밝힌다. 그리고 그녀는 타락한 남편의 유산이 아들 오스왈드에게 전해지는 것이 싫어서 그 돈으로 고아원을 설립한 것이라고 말한다. 오랜 외국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온 오스왈드는 자신이 유전으로 생각되는 불치의 병에 걸렸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오스왈드는 자신의 아버지, 알빙을 완벽한 사람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유전이라는 사실에 고민한다. 알빙 부인은 오스왈드에게 할 수 없이 알빙이 타락한 사람이었음을 밝히고 오스왈드의 병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오스왈드는 자신이 곧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하녀인 레지네를 증인으로 삼고 싶어한다. 그는 레지네에게 연정을 느끼고 있기도 했지만 자신이 병으로 치명적인 발작을 일으켰을 때 레지네가 자신에게 독약(마약)을 줘서 고통스런 삶을 마감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알빙 부인이 레지네가 오스왈드의 이복동생이라는 사실을 밝히자 이에 동요된 레지네는 오스왈드와 함께 남기를 거부하고 알빙 부인 집을 떠난다. 이제 오스왈드는 병 때문에 마지막 발작을 일으키면 자신에게 약을 줄 것을 어머니, 알빙 부인에게 부탁한다. 마침내 오스왈드는 마지막 고통을 맞게 되고, 알빙 부인은 그에게 약을 줘서 고통을 덜어 줄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약을 주지 않고 그가 고통을 이겨내기를 바랄 것인지 기로에 선다. 오스왈드는 의자에 꼼짝 않고 앉아 환한 ‘태양의 빛’을 되뇌이며 스러져간다.
국내공연연보
1934년 6월 경성여자기독청년회 / 홍해성 연출 1949년 고려예술좌 김기영 연출 1959년 원방각 1960년 원방각 1961년 극단 팔월 1971년 6월 5일~6일 극단 탈 / YMCA강당 1975년 6월 12일~17일 극단 산하 / 연극인회관 / 차범석 연출 1976년 5월 1일~6일 극단 산하 / 쎄실극장 / 차범석 연출 1979년 9월 14일~17일 부산레퍼토리시스템 / 부산시민회관소극장 / 허영길 연출 1993년 9월 25일~11월 3일 한양레퍼토리 / 충돌소극장 / 박중현 연출
예술가
홍해성(洪海星, 1893~1957) 본명은 재원(在遠). 1920년 김우진, 조명희와 함께 극예술협회를 조직했고, 1921년 동우회순회연극단으로 <김영일의 사(死)>를 연출하여 데뷔했다.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법과를 자퇴하고 본격적인 연극수업을 위해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를 수료했다. 일본 신극의 선구자 오사나이 카오루[小山內薰]의 제자가 되었고 그의 소개로 일본 스키지[築地] 소극장 전속배우로 신극을 배웠다. 1929년 윤백남, 박승희 등과 경성소극장을 조직했으나 곧 해산되었다. 1930년 10월 신흥극장 조직에 참여하여 <모란등기(牡丹燈記)>를 연출했다가 실패했으나 같은 해 12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벚꽃동산>을 연출하여 성공했다. 1931년 극예술연구회의 창립에 선배 격으로 참가해 극단 공연평을 담당했고, 극예술연구회 직속 실험무대의 제1회 공연작품인 <검찰관>을 비롯해 제2·6·9회 공연의 연출을 맡았다. 1934년, 입센의 <유령>을 번역, 경성여자기독청년회와 공연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하게 된다. 1936년부터는 동양극장에 연출담당으로 들어가 활동했으며, 1956년 국립극단의 <신앙과 고향>을 연출했다. 그 밖의 연출작품은 극예술연구회의 <바보>(1933), 연극사(演劇舍)의 <개화전야(開化前夜)>, <신라의 달>, <항구의 비가>(1933), 동양극장의 <승방비곡(僧房悲曲)>(1937), <어머니의 힘>(1939) 등이다.
리뷰
한양레퍼토리 극단의 <유령>(입센 작·박중현 연출)은, 이상하게도 우리 연극계에선 잘 공연되지 않던 근대 사실주의 고전을 무대에 올렸다는 점에서 관람을 놓치긴 아까운 공연이다. 1881년 작품이니 이미 100여 년 전의 작품이지만, 지금 읽거나 연극을 보아도 위대한 극작가 입센의 예언자적인, 시대를 초월한 현대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 이 극의 ‘유령’의 상징성은 의미심장하다. ‘삶의 즐거움’을 희구하는 알빙의 피를 물려받은 아들, 유전적 병, 과거의 인습과 낡은 도덕관…… 이 모든 과거의 경험이 ‘유령같이’ 현재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의 발견이 이 극의 비극성을 높인다. 알빙 부인이 인고하며 살았던 결혼생활은 과거의 죄가 유전된 아들의 발병으로 비참하게 파멸한다. 이 공연은 작은 소극장에서 간소한 사실주의 무대장치로, 극을 치밀하게 해석하여 매우 성실한 무대를 보여주었다. 특히 시대적 고증에 충실한 의상이나 사실주의적 연기스타일, 정확한 발성과 인물성격 표현은 이 고전의 공연의 의의를 한층 높여주었다. ‘삶의 허위와 낡은 인습의 비극성’, 김성희, <연극의 사회학, 희곡의 해석학>, 문예마당, 1995
관련도서
<서양대표 극작가선>, 강태경 외, 새문사, 2000 <연극의 이론과 실제>, 헨릭 입센 저, 이주상 역, 예니, 2002 <유령>, 입센 저, 이경석 역, 홍신문화사, 2004 <인형의 집·유령>, 입센 저, 이경석 역, 홍신문화사, 1995
연계정보
-극단 산하
-인형의 집(Et dukkehjem)
관련사이트
PenArt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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