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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閑中錄)

작품소개
조선 정조의 생모(生母)이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빈(嬪)이었던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자전적(自傳的)인 회고록(懷古錄)으로 <한중만록(閑中漫錄)>이라고도 한다. 필사본. 6권 6책. 저자가 회갑을 맞던 해인 1795년(정조 19)에 친정 조카 홍수영(洪守榮)의 소청으로 이 글을 쓴다 하였고, 그 후 67세, 68세, 71세 등 총 네 번에 걸쳐 쓴 네 편의 글이 있다. 이 중 회갑 때 쓴 첫째 것이 비교적 한가로운 심정에서 붓을 든 것이고, 나머지 3편은 모두 아들인 정조가 승하한 직후부터 붓을 들어 어린 왕 순조에게 보이기 위하여 쓴 것으로 정치적 색채가 농후한 작품이라 하겠다.
저자
경의왕후(敬懿王后, 1735∼1815)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아들 장조(莊祖, 思悼世子)의 비(妃)로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영조 20) 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惠嬪)에 추서되었다가 1776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라 혜경궁 홍씨로 잘 알려져 있다. 1899년 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敬懿王后)에 추존되었다. 당시 왕후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홍인한(洪麟漢)은 외척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경의왕후는 세자의 참담한 운명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뒤 1795년 남편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자서전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책이 유명한 <한중록>이며, 이것은 궁중문학의 효시로 평가되고 있다.
내용
<한중록>은 총 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편은 혜경궁의 회갑(정조 19) 해에 친정 조카에게 내린 순수한 회고록이고 나머지 세 편은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친정의 억울한 죄명을 자세히 파헤친 일종의 해명서라 할 수 있다. 제1편에서는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에서부터 이듬해 입궁하여 이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중반부에서는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하여 의식적으로 사건의 핵심을 회피하고 대신 자신의 외로운 모습과 장례 후 시아버지 영조와 처음 만나는 극적인 장면의 이야기로 비약한다. 후반부에는 정적(政敵)들의 모함으로 아버지, 삼촌, 동생 들이 화를 입게 된 전말이 기록되어 있으며 화성행궁에서 열린 자신의 회갑연에서 만난 지친(至親)들의 이야기로 끝난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 1년 5월 29일 동생 홍낙임(洪樂任)이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뒤에 쓴 글이다. 제2편에서 혜경궁은 슬픔을 억누르고 시누이 화완옹주의 이야기를 서두로 정조가 초년에 어머니와 외가를 미워한 까닭은 이 옹주의 이간책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또 친정 멸문의 치명타가 된 홍인한 사건(洪麟漢事件)의 배후에는 홍국영(洪國榮)의 개인적인 원한풀이가 보태졌다고 하면서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한다. 끝으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가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는 날을 꼭 생전에 볼 수 있도록 하늘에 축원한다. 제3편은 제2편의 이듬해에 쓴 것으로 주제 역시 동일하다. 혜경궁은 하늘에 빌던 소극성에서 벗어나 13세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또한 정조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성이 지극하였는지, 또 말년에는 외가에 대하여 많이 뉘우치고 갑자년에는 왕년에 외가에 내렸던 처분을 풀어주겠다고 언약하였다는 이야기를 기술하며 그 증거로 생전에 정조와 주고받은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마지막 제4편에서는 사도세자가 당한 참변의 진상을 폭로했다. ‘을축 4월 일’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을축년은 순조 5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돌아간 해이다. “임술년에 초잡아 두었으나 미처 뵈지 못하였더니 조상의 어떤 일을 자손이 모르는 것이 망극한 일”이라는 서문이 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왕조의 나인이라 위세가 등등하였던 동궁나인(東宮內人)들과 세자 생모인 영빈(暎嬪)과의 불화로 영조의 발길이 동궁에서 멀어졌다. 때마침 영조는 병적으로 사랑하였던 화평옹주의 죽음으로 인하여 비탄과 실의에 빠지는데 그 사이 세자는 공부에 태만하고 무예놀이를 즐겼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代理)를 시켰으나 성격차로 인하여 점점 더 세자를 미워하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마침내는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762년(영조 38) 5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9일 만에 목숨이 끊어지게 하였다. 혜경궁은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홍봉한(洪鳳漢)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임오화변 이후 종래의 노소당파가 그 찬반을 놓고 시파(時派)와 벽파(僻派)로 갈라져서 세자에 동정하는 시파들이 홍봉한을 공격하며 뒤주의 착상을 그가 제공하였다고 모함하였기 때문이다. 작자는 양쪽 의론이 다 당치 않다고 반박하면서 “이 말하는 놈은 영조께 충절인가 세자께 충절인가.”라며 분노한다. 제4편에서 작자가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궁중비사(宮中秘史)의 내막을 폭로한 것은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명문가인 친정이 자기 때문에 망하였다는 죄책감으로 71세 노령에도 무서운 집념으로 써낸 것이다.
해설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지은 회고록으로 모두 4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작자가 자신의 회갑 해에 지었고, 나머지 세 편은 1801년(순조 1)∼1805(순조 5) 사이에 지었다. 필사본 14종이 있으며, 국문본·한문본·국한문혼용본 등이 있다. 사본에 따라 <한듕록>·<한듕만록>·<읍혈록> 등의 이칭이 있다. 4편의 종합본은 <한듕록>·<한듕만록>의 두 계통뿐이다. <한중록>은 역사적 인물의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이 그가 비빈(妃嬪)이라는 사실에서, 정계야화로서 역사의 보조 자료가 된다. 임오화변(壬午禍變: 사도세자의 죽음)의 이유 및 홍봉한 일가에 대한 사관을 재검토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실기문학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류문학, 특히 궁중문학이라는 점에서 궁중용어, 궁중풍속 등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한중록>은 소설로 볼 수 있을 만큼 문장이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있으며, 화려하고 품위있는 문체는 옛 귀인(貴人)들의 전아한 멋과 경어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작자를 비롯한 등장인물 가운데에서 전통사회의 규범적 여인상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연계정보
-부자유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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