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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화점(雙花店)

작품소개
고려 충렬왕 때 지어진 고려가요 또는 향악곡. <악장가사>·<대악후보>·<악학편고>에 실려 있다. 또한, <고려사> 악지(樂志)에는 제2장만이 발췌되어 ‘삼장(三藏)’이라는 제목으로 한역되어 전하고, <시용향악보>에는 한시로 개작한 <쌍화곡>이 전한다. 이 노래의 제목인 ‘쌍화점’은 첫째 연 첫 구(句)에서 따온 것으로 만두가게를 의미하며, 한역가의 제목인 ‘삼장’도 제2장 첫 구에서 유래한다. ‘쌍화’는 만두를 뜻하며, 음차(音借)한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의 대표적인 노래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현대어풀이
만두집에 만두 사러 갔더니만 회회 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소문이 가게 밖에 나며 들며 하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 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난잡한 곳) 없다 삼장사에 불을 켜러 갔더니만 그 절 지주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소문이 이 절 밖에 나며 들며 하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새끼 상좌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난잡한 곳) 없다 두레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만 우물 용이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소문이 우물 밖에 나며 들며 하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두레박아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난잡한 곳) 없다 술 파는 집에 술을 사러 갔더니만 그 집 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소문이 이 집 밖에 나며 들며 하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시궁 박아지야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난잡한 곳) 없다
어휘풀이
- 만두집 : 쌍화점. 쌍화는 만두의 음차어 - 회회 : 몽고인 또는 아랍상인 - 우물 용 : 당시 금기이던 왕궁을 우물로, 제왕을 용으로 은유한 것 - 참고: <고려시대의 가요문학>, 정병욱 해설;김열규·신동욱 공편, 새문사, 1982 <고전시가강독>, 최철·박상태 공저, 한국방송통신대학출판부, 1986
해설
작자·연대 미상으로 알려져 왔으나,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한역(漢譯)되어 실려 있는 <삼장(三藏)>이라는 노래의 내용이 <쌍화점(雙花店)>의 제2절과 똑같아 연대가 밝혀졌다. 또한 충렬왕이 연악(宴樂)을 즐겨 오잠(吳潛)·김원상(金元祥)·석천보(石天輔)·석천경(石天卿) 등에게 자주 노래를 짓게 하였으므로 이 <삼장>, 곧 <쌍화점>도 그들의 작품일 것으로 추측된다. 모두 4절로 된 이 노래는 당시의 퇴폐적인 성 윤리가 잘 나타나 있으며, 유창한 운율과 아울러 봉건시대의 금기이던 왕궁을 우물로, 제왕을 용(龍)으로 표현한 점 등은 뛰어난 기교라 하겠다. 조선 성종 때는 이 노래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또는 음사(淫辭)라 하여 배척을 받았고,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는 <쌍화곡(雙花曲)>이라는 이름으로 한역(漢譯)되어 곡조와 함께 실려 있으나, 그것이 <쌍화점>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알기 어렵다. 가명(歌名)에서 ‘쌍화(雙花)’란 ‘상화(霜花)’의 음역(音譯)으로서 호떡, 즉 만두의 뜻이다. 이 노래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즉, 이것을 당시 유행하던 속요로 보는가 하면, <고려사>의 기록에 등장하는 승지 오잠(吳潛)의 창작물, 혹은 궁중에서의 다수에 의한 합작물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당시 연락(宴樂)을 즐기는 등 방탕한 기질이 농후하던 충렬왕의 기호에 부합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을 점을 감안한다면, 대체로 당시 원나라의 간섭과 왕권의 동요로 혼란스럽고 퇴폐적이 된 사회상을 반영하는 속요를 채취하여 오잠 등이 왕의 기호에 맞게 손질을 가하였을 가능성이 유력시되고 있다. 이 노래는 여느 고려가요와 마찬가지로 악무(樂舞)와 더불어 연행되었을 것인데, 독특하게 이 노래의 경우는 연극적인 성격이 강하였을 가능성도 아울러 논의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 노래는 남장별대(男粧別隊)에 의하여 불렸다. 이들은 수도인 개성과 전국 8도에서 차출된 여자기생들이 남자복색을 한 집단으로, 노래기생·춤기생·얼굴기생으로 나뉘었다. 이들은 1279년(충렬왕 5) 오잠의 지휘하에 왕 앞에서 이 노래를 대본으로 연희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희는 충렬왕의 상설무대였던 수령궁(壽寧宮)의 향각(香閣)에서 있었다고 한다. 특히, 충렬왕을 대상으로 이 연극이 행하여졌다는 점과, 충렬왕은 이미 30대에 몽고풍에 익숙한 상태였고, 그 몽고풍의 하나가 연극이었다는 점과 연관되어 이 노래가 연극의 대본이었을 가능성이 뒷받침되고 있다. <악장가사>에는 전 4장이 모두 실려있으나, <대악후보>의 <쌍화점>은 3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술집아비와 관련된 제4장이 없다. 노래 대상에 따라 장이 바뀌고 있는데. 곧, 회회(回回)아비, 삼장사의 사주(社主), 우물의 용, 술집아비에 대한 노래로 이어진다. 일어난 사건의 장소와 대상이 서로 다를 뿐, 사건의 성질은 모두 성적 불륜에 관한 것이다. 충렬왕조의 퇴폐적인 시대상을 포괄하는 노래 외적인 상황과, 이 노래 내부의 고유한 구조 사이의 관련이 밀접함은 분명하되, 그 구체적인 양상에 대해서는 좀더 고구(考究)되어야 할 필요가 있겠다. <쌍화점>의 음악적 내용은 <대악후보>에 전하는 <쌍화점>과 <시용향악보>의 <쌍화곡>이 모두 5음 음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악조를 표기한 <시용향악보>에 의하면 <쌍화점>의 선법(旋法)은 평조이다. 또한, 종지형은 궁(宮)에서 하오(下五)까지 순차적으로 하행으로 진행된다. 특히, 한글 가사를 담은 <대악후보>의 <쌍화점>과 한문가사를 가진 <시용향악보>의 <쌍화곡>은 사설을 붙이는 방식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쌍화점>은 ‘일자다음식(一字多音式, melismatic style)’의 방식으로 되어 있다.
연계정보
-고려사악지(高麗史樂志)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악장가사(樂章歌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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