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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숙 (1920.10.18~1989.10.7)

문화재관련정보
1969.7.4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 인정 1971.1.8 중요무형문화재 제40호 학무 예능보유자 인정 1989.10.7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 사망해지 1989.10.7 중요무형문화재 제40호 학무 예능보유자 사망해지
학력(계보)
1931. 한성준에게 춤 사사 1933. 조선음악무용연구소 입문
생애(약력)
1920.10.18 충북 청주에서 출생 1924. 충남 홍성군 고도면 친가에서 성장 1937. 제1회 무용발표회 공연(부민관) 1940. 일본 동경의 히비야 공회당 공연 1941. 만주일대 순회공연(조선인개척단) 1942.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한영숙고전무용연구소로 개칭 <한성준 추모공연> 1946. 한영숙고전무용연구소를 개업 1955. 김소희, 박귀희, 박초월 등과 함께 한국민속예술학원 교사로 재직 1960. 한국국악예술학교 무용지도 강사 1965. 서울예술고등학교, 서라벌예술대학 무용과 강사 1966. 수도여자사범대학 무용과 출강 1966. 한영숙 춤 35년 기념공연(국립극장) 1971. 제2회 한영숙 춤 발표회(국립극장) 1971. 제3회 문화예술상 수상 1973. 국민훈장 동백장 서훈 1974.~1975. 수도여자사범대학 무용과 전임교수 1980.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1983. 중앙국립극장 종신단원으로 위촉 1985. 무용대상(한국무용협회) 수상
리뷰
한국무용(舞踊)의 정화(精華) 승무(僧舞), 학(鶴)춤의 한영숙(韓英淑) “한국무용은 마음으로 추는 춤입니다.” 이것은 <승무>와 함께 일생을 살아온 무용가 한영숙씨가 가장 자신있게 할 수 있는 말이다. “근육의 훈련, 육신의 훈련만이 아닌 영혼에서 우러나는 멋이 있어야 비로소 한국 춤을 출 줄 안다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라는 것. 그러나 그가 이런 말을 할 수가 있게 된 것은 자신의 육체적인 훈련을 완성에 가까운 경지까지 이루고 난 후였다. 그가 춤을 배운 것은 13살 때 할아버지 한성준(韓成俊)에게서였다. 1920년 10월 18일 충북 청주(忠北 淸州)에서 태어나 5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라다가 13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춤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한성준씨는 개화의 물결 속에서 모두 우리 것을 버리고 잊어가고 있을 때 한국민속무용의 전통을 보존하고 민속춤을 집대성한 분으로 한국 신무용가(新舞踊家)들이 모두 그에게서 한국 춤을 배운 무용계의 큰 공로자이다. 조택원(趙澤元), 김천흥(金千興), 강선영(姜善泳)씨 등이 모두 그의 제자다. 한영숙씨는 그의 춤세계를 이어받은 직계상속자로서 한국무용계의 전통계승자인 것이다. “할아버님은 키가 크시고 팔이 긴 분이셨죠. 팔을 벌리고 척 들어올리면 정말 위엄이 있고 멋이 있었죠. 춤의 품위, 춤의 위엄 그리고 멋이 어울려지는 거예요. 제 <승무>가 할아버님께 배운 것이긴 하지만 그분이 갖고 있는 그런 개성의 춤을 제가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저의 개성을 갖고 다른 맛을 찾아야죠.” 그는 춤에 익은 대가(大家)의 멋만보고 섣불리 흉내를 내려다가는 오히려 지저분해지기 쉽다고 경계하는 것이다. 무용가 한영숙의 <승무>와 <학춤>은 한국무용 무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일 뿐만 아니라 <승무>는 1967년 무형문화재 27호로, <학춤>은 1971년 무형문화재 40호로 각각 지정된 한국 무용의 자랑스런 전통유산인 것이다. “<승무>는 한국민속무용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죠. 긴 장단인 염불, 도드리과정으로 시작해서 타령, 허튼타령과 정 굿거리, 잦은 굿거리과정에서 북치는 과정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당악(唐樂) 굿거리로 연결되는 5개 과정을 거치면 북은 빼고도 30분이 걸리죠.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전신을 움직이는 한국 춤의 모든 기본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그는 매일 <승무> 한바탕으로 무용훈련시간을 시작한다. “요즈음도 하루 4시간 이상씩 무용시간을 갖게 돼요. 그 맨 처음 시작이 <승무>가 되는 겁니다.” 그는 발레에서 바를 잡고 기본동작을 한 후에 연습에 들어가듯이 <승무>를 한국 춤의 기본동작 훈련의 첫걸음으로 삼는다. 13살에 춤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56세가 된 지금까지 동란 중 4년간을 빼놓고는 <승무>를 추지 않고 지나간 날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그는 15살 때 당시 부민관(府民館, 현 시민회관 별관)에서 한성준 무용발표회로 첫 무대를 밟았다. 해방 전 일본(日本) 만주(滿洲) 북지(北支)는 물론 전국의 수많은 무대를 밟았고 1942년 조부 별세(祖父 別世) 후에는 무용 연구소도 이어받아 운영하면서 제자를 길러냈다. 그동안 개인발표회는 3번뿐이었지만 국립무용단 삼천리가무단 혹은 해외파견문화사절단으로 수많은 무대에서 수없이 춤을 췄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회초리 앞에서 배운 춤의 재현이라는 수준에서 한 예술가로서 깨달음을 얻어 내 춤을 추게 된 것은 40이 넘어서였다는 고백이다. <승무>가 보는 사람에게나 추는 사람에게 모두 화려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요소가 있는 반면에 “<학춤>은 보기는 쉬워도 기교가 무척 어려운 춤” 이라는 것이다. 발을 떼고 들어올리는 동작, 목을 움직이고 허리를 구부려 학모양을 내는 것이 자세 하나만 완숙하게 하려 해도 무척 힘이 드는 것이다. “서양 무용은 발이 중심이고 한국 무용은 팔이 중심이라는 일반의 통념은 한국 무용을 보는 가장 그릇된 눈입니다. 나는 한국 무용의 기본은 오히려 발동작에 있다고 봐요. 발을 떼는 법을 완전히 익히고 나면 팔과 전신이 거기에 따라 저절로 움직여 지는 거죠.” 그는 현재 <학춤>에 김응화(金應花), 이흥구(李興九), <승무>에 박재희, 이향재 등 전수자를 기르고 있으며 이애주(李愛珠), 정재만(鄭載滿) 등은 이수증을 줘 독립시킨 전수자들이다. <승무>와 <학춤> 외에도 <태평무(太平舞)>, <살풀이>, <춘앵무>, 불교의 <식무> 등을 가장 아름답게 출 수 있는 무용가로서 그는 내년 가을 생애 최대의 결정무대를 준비하겠다는 의욕을 갖고 있다. “<승무>는 완전히 정리가 끝난 춤이죠. 나는 한국민속무용 중에서 잊혀져 가는 가락을 찾아 또하나의 완성된 춤을 이룩해놓고 싶어요.” 그래서 그는 3년 전부터 ‘경기도 무악(巫樂)’을 수집연구하고 있다. ‘경기도 무악’중에서 일반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무용계에서도 쓰지 않았던 좋은 가락을 발견해냈다는 것. 그것을 무대에 정착시켜보려는 것이다. <도살풀이>라는 그 음악은 장고, 징, 꽹과리 등 타악기를 주로 한 시나위조의 음악인데 가락과 박의 강약이 <살풀이>와는 전혀 틀린 것이다. ‘경기 무악’은 15박에서 30박까지 혹은 10박에서 8박, 6박까지 모두 어려운 박으로 이뤄져 발동작이 무척 어렵다. 그는 요즈음 젊은 무용가들이 갖고있는 연구하는 자세를 높이 평가하면서 앞으로의 한국무용이 그런 연구와 훈련을 기초로 세계 속에 꽃피게 될 것을 기원하는 것이다. <일간스포츠>, 구히서, 1976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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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
-한영숙 (1920.10.18~1989.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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