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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별곡(關東別曲)

작품명
관동별곡(關東別曲)
저자
정철(鄭澈)
장르
가사
작품소개
1580년 정철(鄭澈)이 지은 가사. <송강가사(松江歌辭)>와 <협률대성(協律大成)>에 수록되어 있다. 작자가 45세 되는 해 정월에 강원도관찰사의 직함을 받고 원주에 부임하여, 3월에 내금강·외금강·해금강과 관동팔경을 두루 유람하는 가운데 뛰어난 경치와 그에 따른 감흥을 표현한 작품이다.
정철(鄭澈, 1536∼159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국문학사에서 윤선도·박인로와 함께 3대 시인으로 꼽힌다.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칩암거사(蟄菴居士). 어려서 인종의 숙의(淑儀)인 누이와 계림군 유(桂林君 瑠)의 부인이 된 막내누이로 인연하여 궁중에 출입,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明宗)과 친숙해졌다. 1545년 을사사화로 맏형이 죽고 부친은 유배를 당했다가 1551년에 풀려났다. 이후 부친을 따라 전라도 담양에 내려가 살았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梁應鼎)·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다. 또,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같은 큰선비들과도 사귀었다. 40세인 1575년 시묘살이복을 벗고 벼슬길에 나아가 직제학 성균관 사성,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본격화된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창평 우거시에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43세 때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하여 조정에 나아갔다. 그해 11월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였다. 그뒤 전라도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1585)에 사직,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때 <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1592년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종,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다가 58세로 별세하였다. 문집으로 <송강집> 7책과 <송강가사> 1책이 전한다. 강직하고 청렴하나 융통성이 적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성품 탓에 동서 붕당정치의 와중에 동인으로부터 간신이라는 평까지 들었다. 정치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여 국문시가를 많이 남겼다. <사미인곡>·<속미인곡>·<관동별곡>·<성산별곡> 및 시조 100여 수는 국문시가의 질적·양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현대어풀이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질병이 되어, 은거지인 창평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8백 리나 되는 강원도 관찰사의 직분을 맡겨 주시니, 아아 임금님의 은혜야말로 갈수록 그지없다. 연추문으로 달려 들어가 경회루 남쪽 문을 바라보며 임금님께 하직을 하고 물러나니, 옥절이 앞에 서 있다. 평구역에서 말을 갈아타고 흑수로 돌아드니, 섬강은 어디인가? 치악산이 여기로구나. 소양강의 흘러내리는 물이 어디로 흘러든다는 말인가? 임금 곁을 떠나는 외로운 신하가 서울을 떠나매 백발이 많기도 많구나. 동주의 밤을 겨우 새워 북관정에 오르니, 임금 계신 서울의 삼각산 제일 높은 봉우리가 웬만하면 보일 것도 같구나. 옛날 태봉국 궁예왕의 대궐 터였던 곳에 까막까치가 지저귀니, 한 나라의 흥하고 망함을 알고 우는가, 모르고 우는가. 이곳이 옛날 한(漢)나라에 있던 ‘회양’이라는 이름과 공교롭게도 같구나. 중국의 회양 태수(太守)로 선정을 베풀었다는 급장유의 풍채를 이곳 회양에서 다시 볼 것이 아닌가? 감영 안이 무사하고, 시절이 3월인 때, 화천(花川)의 시냇길이 금강산으로 뻗어 있다. 행장을 간편히 하고, 돌길에 지팡이를 짚고, 백천동을 지나서 만폭동 계곡으로 들어가니, 은같은 무지개 옥같이 희고, 고운 용의 꼬리 같은 폭포가 섞어 돌며 내뿜는 소리가 십리 밖까지 퍼졌으니, 멀리서 들을 때에는 우렛소리 같더니, 가까이서 보니 눈이 날리는 것 같구나! 금강대 맨 꼭대기에 학이 새끼를 치니 봄바람에 들려오는 옥피리 소리에 선잠을 깨었던지, 흰 저고리 검은 치마로 단장한 학이 공중에 솟아 뜨니, 서호의 옛 주인 임포를 반기듯 나를 반겨 넘나들며 노는 듯하구나! 소향로봉과 대향로봉을 눈 아래 굽어보고, 정양사 진헐대에 다시 올라 앉으니, 여산같이 아름다운 금강산의 참모습이 여기서야 다 보인다. 아아, 조물주의 솜씨가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저 수많은 봉우리들은 나는 듯하면서도 뛰는 듯도 하고, 우뚝 섰으면서도 솟은 듯하니, 참으로 장관이로다. 또, 연꽃을 꽂아 놓은 듯, 백옥을 묶어 놓은 듯, 동해를 박차는 듯, 북극을 괴어 놓은 듯하구나. 높기도 하구나 망고대여, 외롭기도 하구나 혈망봉이 하늘에 치밀어 무슨 일을 아뢰려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굽힐 줄 모르는가? 아, 너로구나. 너같은 높은 기상을 지닌 것이 또 있겠는가? 개심대에 다시 놀라 중향성을 바라보며 만 이천 봉을 똑똑히 헤아려 보니, 봉마다 맺혀 있고, 끝마다 서린 기운, 맑거든 깨끗하지 말거나, 깨끗하거든 맑지나 말 것이지, 맑고 깨끗한 저 산봉우리의 빼어남이여! 저 맑고 깨끗한 기운을 흩어 내어 뛰어난 인재를 만들고 싶구나. 생긴 모양도 각양각색 다양도 하구나. 천지가 생겨날 때에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이제 와서 보니 모두가 뜻이 있게 만들어진 듯하여 정답기도 정답구나!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에 올라 본 사람이 누구이신가? 동산과 태산의 어느 것이 비로봉보다 높던가? 노나라가 좁은 줄도 우리는 모르거든, 하물며 넓거나 넓은 천하를 공자는 어찌하여 작다고 했는가? 아! 공자와 같은 그 높고 넓은 경지를 어찌하면 알 수 있겠는가? 오르지 못하는데 내려감이 무엇이 괴이할까? 원통골의 좁은 길로 사자봉을 찾아가니, 그 앞의 넓은 바위가 화룡소(化龍沼)가 되었구나. 마치 천 년 묵은 늙은 용이 굽이굽이 서려 있는 것같이 밤낮으로 물을 흘러 내어 넓은 바다에 이었으니, 바람과 구름을 언제 얻어 흡족한 비를 내리려느냐? 그늘진 낭떠러지에 시든 풀을 다 살려 내려무나. 마하연, 묘길상, 안문재를 넘어 내려가 썩은 외나무 다리를 건너 불정대에 오르니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을 공중에 세워 두고, 은하수 큰 굽이를 마디마디 잘라내어 실처럼 풀어서 베처럼 걸어 놓았으니, 산수도경에는 열 두 굽이라 하였으나, 내가 보기에는 그보다 더 되어 보인다. 만일, 이백이 지금 있어서 다시 의논하게 되면, 여산 폭포가 여기보다 낫다는 말은 못 할 것이다. 내금강 산중의 경치만 매양 보겠는가? 이제는 동해로 가자꾸나. 남녀를 타고 천천히 걸어서 산영루에 오르니, 눈부시게 반짝이는 시냇물과 여러 소리로 우짖는 산새는 나와의 이별을 원망하는 듯하고, 깃발을 휘날리며 오색 기폭이 넘나드는 듯하며, 북과 나팔을 섞어 부니 바다구름이 다 걷히는 듯하다. 모랫길에 익숙한 말이 취한 신선을 비스듬히 태우고 해변의 해당화 핀 꽃밭으로 들어가니, 백구야 날지 마라, 내가 네 벗인 줄 어찌 아느냐? 금란굴 돌아들어 총석정에 올라가니, 옥황상제가 거처하던 백옥루의 기둥이 네 개만 서 있는 듯하구나. 옛날 중국의 명장(名匠)인 공수가 만든 작품인가? 조화를 부리는 귀신의 도끼로 다듬었는가? 구태여 육면으로 된 돌기둥은 무엇을 본떴는가? 고성을 저 만큼 두고 삼일포를 찾아가니, 그 남쪽 봉우리 벼랑에 ‘영랑도 남석행’이라고 쓴 붉은 글씨가 뚜렷이 남아 있으나, 이 글을 쓴 사선은 어디 갔는가? 여기서 사흘 동안 머무른 뒤에 어디 가서 또 머물렀던고? 선유담, 영랑호 거기나 가 있는가? 청간정, 만경대를 비롯하여 몇 군데서 앉아 놀았던가? 배꽃은 벌써 지고 소쩍새 슬피 울 때, 낙산사 동쪽 언덕으로 의상대에 올라 앉아, 해돋이를 보려고 한밤중쯤 일어나니, 상서로운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듯, 여러 마리 용이 해를 떠받치는 듯, 바닥에서 솟아오를 때에는 온 세상이 흔들리는 듯하더니, 하늘에 치솟아 뜨니 가는 털까지 헤아릴만큼 밝도다. 혹시나 지나가는 구름이 해 근처에 머무를까 두렵구나. 이백은 어디가고 시구만 남았느냐? 천지간 굉장한 소식이 자세히도 표현되었구나. 저녁 햇빛이 비껴드는 현산의 철쭉꽃을 즈려 밟고, 우개지륜을 타고 경포로 내려가니, 십 리나 뻗쳐 있는 얼음같이 흰 비단을 다리고 다시 다린 것 같은, 맑고 잔잔한 호수가 큰 소나무 숲으로 둘러싼 속에 한껏 펼쳐져 있으니, 물결도 잔잔하기도 잔잔하여 물 속 모래알까지도 헤아릴 만하구나. 한 척의 배를 띄워 호수를 건너 정자 위에 올라가니, 강문교 넘은 곁에 동해가 거기로구나. 조용하구나 경포의 기상이여, 넓고 아득하구나 저 동해의 경계여, 이곳보다 아름다운 경치를 갖춘 곳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과연 고려 우왕 때 박신과 홍장의 사랑이 호사스런 풍류이기도 하구나. 강릉 대도호부의 풍속이 좋기도 하구나. 충신, 효자, 열녀를 표창하기 위하여 세운 정문이 동네마다 널렸으니, 즐비하게 늘어선 집마다 모두 벼슬을 줄 만하다는 요순 시절의 태평 성대가 이제도 있다고 하겠도다. 진주관 죽서루 아래 오십천의 흘러내리는 물이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가니, 차라리 그 물줄기를 임금 계신 한강으로 돌려 서울의 남산에 대고 싶구나. 관원의 여정은 유한하고, 풍경은 볼수록 싫증나지 않으니, 그윽한 회포가 많기도 많고, 나그네의 시름도 달랠 길 없구나. 신선이 타는 뗏목을 띄워 내어 북두성과 견우성으로 향할까? 사선을 찾으러 단혈에 머무를까? 하늘의 맨 끝을 끝내 못보고 망양정에 오르니,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가? 가뜩이나 성난 고래를 누가 놀라게 하기에, 물을 불거니 뿜거니 하면서 어지럽게 구는 것인가? 은산을 꺾어 내어 온 세상에 흩뿌려 내리는 듯, 오월 드높은 하늘에 백설은 무슨 일인가? 잠깐 사이에 밤이 되어 바람과 물결이 가라앉기에, 해 뜨는 곳이 가까운 동해 가에서 명월을 기다리니, 상서로운 빛줄기가 보이는 듯하다가 숨는구나. 구슬을 꿰어 만든 발을 다시 걷어 올리고 옥돌같이 고운 층계를 다시 쓸며, 샛별이 돋아오를 때까지 꼿꼿이 앉아 바라보니, 저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흰 연꽃같은 달덩이를 어느 누가 보내셨는가? 이렇게 좋은 세상을 다른 사람 모두에게 보이고 싶구나. 신선주를 가득 부어 손에 들고 달에게 묻는 말이, “옛날의 영웅은 어디 갔으며, 신라 때 사선은 누구더냐?” 아무나 만나 보아 영웅과 사선에 관한 옛 소식을 묻고자 하니, 선산이 있다는 동해로 갈 길이 멀기도 하구나. 소나무 뿌리를 베고 누워 선잠이 얼핏 들었는데, 꿈에 한 사람이 나에게 이르기를, “그대를 내가 모르랴? 그대는 하늘의 신선이라, 황정경 한 글자를 어찌 잘못 읽고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 우리를 따르는가? 잠시 가지 말고 이 술 한 잔 먹어 보오.” 북두칠성과 같은 국자를 기울여 동해물 같은 술을 부어 저 먹고 나에게도 먹이거늘, 서너 잔을 기울이니 온화한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 양 겨드랑이를 추켜올리니, 아득한 하늘도 웬만하면 날 것 같구나. “이 신선주를 가져다가 온 세상에 고루 나눠 온 백성을 다 취하게 만든 후에, 그 때에야 다시 만나 또 한 잔 하자꾸나.” 말이 끝나자, 신선은 학을 타고 높은 하늘에 올라가니, 공중의 옥퉁소 소리가 어제던가 그제던가 어렴풋하네. 나도 잠을 깨어 바다를 굽어보니, 깊이를 모르는데 하물며 끝인들 어찌 알리. 명월이 온 세상에 아니 비친 곳이 없다.
해설
내용을 시상의 전개에 따라 나누면 4단으로 나뉜다. 1단에서는 향리에 은거하고 있다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관찰사에 제수(除授)되어 강원도 원주로 부임하는 과정을 노래하였다. 2단에서는 만폭동(萬瀑洞)·금강대(金剛臺)·진헐대(眞歇臺)·개심대(開心臺)·화룡연(火龍淵)·십이폭포(十二瀑布) 등 내금강의 절경을 읊고 있다. 3단에서는 총석정·삼일포·의상대(義湘臺)의 일출, 경포대·죽서루(竹西樓) 및 망양정(望洋亭)에서 보는 동해의 경치 등 외금강·해금강과 동해안에서의 유람을 노래했다. 4단에서는 꿈속에서 신선과 더불어 노니는 것에 비유하여 작자의 풍류를 읊었다. 이 작품의 전체 행수는 이본에 따라 다르다. 성주본(星州本)은 71구 145행이며, 이선본(李選本, 관북본이라고도 함)은 73구 146행이다. <협률대성>에 실린 작품에는, 앞의 두 이본의 끝에 있는 “명월이 천산만락의 아니 비쵠 倨 없다.” 대신에 “기러鑑다 다 기러鑑며 퍼鑑다 다 퍼鑑랴/兒批(아희)야 盞(잔)을 씨셔 이 술 한 盞(잔) 어다가/九重(구중)으로 도라가셔 모다 취케 悧오리라.”가 부가되어 79구 149행이다. 율격은 가사의 전형적인 4음 4보격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구체적인 음절수의 양상을 보면, 3·4조가 압도적으로 많고, 그 다음이 4·4조이다. 그 밖에 2·4조, 4·3조, 3·3조, 2·3조, 3·2조, 3·5조, 5·2조 등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관동별곡>의 진술양식은 작자가 독자에게 직접 말하기도 하고, 등장인물인 신선과의 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 작품은 감탄사와 생략법과 대구법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어 우리말을 시적으로 사용하는 작자의 뛰어난 문장력이 잘 나타나 있다. 시상은 이백(李白)의 <유태산(遊太山)>·<송왕옥산인위만환왕옥(送王屋山人魏萬還王屋)>·<여산요기위시어허주(廬山謠寄韋侍御虛舟)>, 두보(杜甫)의 <북정(北征)>,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 등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후인들은 이 작품을 매우 칭찬했는데, 김만중(金萬重)이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동방의 이소(離騷)’라고 찬양한 것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후대의 작품에 영향을 주어 <관동별곡>을 모방하여 지어진 작품도 많이 나타났다. 조우인(曺友仁)의 <관동속별곡(關東續別曲)>은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연계정보
-가사
-관동무(關東舞)
-사미인곡(思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속미인곡(續美人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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