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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인곡(思美人曲)

작품소개
정철(鄭澈)이 1588년 고향인 창평에서 지은 가사. 정철은 50세 되던 해인 1585년 동인이 합세해 서인을 맹렬히 공격하는 바람에, 사간원과 사헌부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고 부득이 조정에서 물러난다. 이때, 고양(高陽)을 거쳐 창평(昌平)으로 내려가 한가하게 지내면서 마음속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그때 지은 것이다. 2음보 1구로 126구이며, 음수율에서는 3·4조가 주조를 이룬다.
정철(鄭澈 1536∼159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국문학사에서 윤선도·박인로와 함께 3대 시인으로 꼽힌다.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칩암거사(蟄菴居士). 어려서 인종의 숙의(淑儀)인 누이와 계림군 유(桂林君 瑠)의 부인이 된 막내누이로 인연하여 궁중에 출입,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明宗)과 친숙해졌다. 1545년 을사사화로 맏형이 죽고 부친은 유배를 당했다가 1551년에 풀려났다. 이후 부친을 따라 전라도 담양에 내려가 살았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梁應鼎)·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다. 또,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같은 큰선비들과도 사귀었다. 40세인 1575년 벼슬길에 나아가 직제학 성균관 사성,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본격화된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창평 우거시에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43세 때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하여 조정에 나아갔다. 그해 11월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였다. 그뒤 전라도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1585)에 사직,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때 <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1592년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송,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다가 58세로 별세하였다. 문집으로 <송강집> 7책과 <송강가사> 1책이 전한다. 강직하고 청렴하나 융통성이 적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성품 탓에 동서 붕당정치의 와중에 동인으로부터 간신이라는 평까지 들었다. 정치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여 국문시가를 많이 남겼다. <사미인곡>·<속미인곡>·<관동별곡>·<성산별곡> 및 시조 100여 수는 국문시가의 질적·양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현대어풀이
이 몸이 태어날 때에 임을 좇아서 태어나니, 이것은 한평생을 함께 살 인연이며, 어찌 하늘이 모를 일이던가? 나 오직 임만을 위하여 젊어 있고, 임은 오로지 나를 사랑하시니, 이 마음과 이 사랑을 견줄 곳이 다시없다. 평생에 원하되 임과 함께 살아가려 하였더니, 늙어서야 무슨 일로 외따로 멀리 두고 보고 싶어 하는가. 엊그제는 임을 모시고 달나라의 궁궐에 있었더니, 그동안에 어찌하여 속세에 내려왔는가. 내려올 때에 빗은 머리가 헝클어진 지 삼 년일세. 연지와 분이 있네마는 누구를 위하여 곱게 단장할까. 마음에 맺힌 근심이 겹겹으로 쌓여 있어서 짓는 것이 한숨이요, 흐르는 것이 눈물이라. 인생은 한정이 있는데, 근심은 한이 없다. 무정한 세월은 물 흐르듯 흘러가는구나. 더워졌다 서늘해졌다 하는 계절의 순환이 때를 알아 지나갔다가는 이내 다시 돌아오니, 듣고 보고 하는 가운데 느낄 일도 많기도 하구나. 봄바람이 문득 불어 쌓인 눈을 녹여 헤쳐 내니, 창밖에 심은 매화가 두세 가지 피었구나. 가뜩이나 쌀쌀하고 담담한데, 남몰래 풍겨오는 향기는 무슨 일인가. 황혼에 달이 따라와 베갯머리에 비치어, 흐느껴 우는 듯도 하고 반가워하는 듯도 하니 이 달이 바로 임이신가, 아니신가. 저 매화를 꺾어 내어 임 계신 곳에 보내고 싶구나. 그러면, 임이 너를 보고 어떻다 생각하실까? 꽃이 떨어지고 새 잎이 나니, 푸른 잎이 우거져 나무 그늘이 깔렸는데, 임이 없어 비단 포장은 쓸쓸히 걸렸고, 수놓은 장막 속도 임이 없어 비어 있다. 부용꽃 무늬가 있는 방장을 걷어 놓고 공작 병풍을 둘러두니 가뜩이나 근심 걱정이 많은데 날은 또한 지루하게 그리도 길던가. 원앙새 무늬의 비단을 베어놓고 오색실을 풀어 내어, 금으로 만든 자로 재어서 임의 옷을 만들어 내니, 솜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격식도 갖추어져 있구나. 산호로 만든 지게 위에 백옥으로 만든 함에 옷을 담아 얹어놓고, 임에게 보내려고 임 계신 곳을 바라보니, 산인지 구름인지 험하기도 험하구나. 천만 리나 되는 머나먼 길을 누가 찾아갈까. 가거든 이 함을 열어놓고 나를 보신 듯이 반가워하실까. 하룻밤 사이에 서리 내린 무렵에, 기러기가 울며 날아갈 때에 높은 누각에 혼자 올라서 수정알로 만든 발을 걷으니, 동산에 달이 떠오르고 북쪽 하늘 끝에 별이 보여 임이신가 하고 반가워하니 눈물이 절로난다. 저 맑은 달빛를 쥐어내어 봉황루(임 계신 곳)에 부쳐 보내고 싶구나. 그러면, 임께서는 그것을 누각 위에 걸어두고 온 세상을 다 비추어, 깊은 두메 산골짜기까지도 대낮같이 환하게 만드소서. 천지가 겨울의 추위에 얼어 생기가 막히고, 흰 눈이 일색으로 덮여 있을 때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날짐승의 날아다님도 끊어져 있다. 소상강 남쪽 둔덕과 같이 따뜻한 이곳 호남의 창평도 추움이 이와 같거늘, 하물며 북쪽 임 계신 곳이야 말해 무엇하랴. 따뜻한 봄 기운을 활활 부치어 일으켜내어 임 계신 곳에 쬐게 하고 싶어라. 초가집 처마에 비친 따뜻한 햇볕을 임 계신 대궐에 올려 부치고 싶어라. 붉은 치마를 여미어 입고 푸른 소매를 반쯤 걷어올려 해는 저물었는데 밋밋하고 길게 자란 대나무에 기대어 서니 이것저것 생각이 많기도 하구나. 짧은 해가 이내 넘어가고 긴 밤을 꼿꼿이 앉아, 청사 초롱을 걸어둔 옆에 자개로 꾸민 공후를 놓고, 꿈에나 임을 보려고 턱을 받치고 기대어 있으니, 원앙새를 수놓은 이불이 차기도 하구나. 아, 홀로 지내는 이 외로운 밤은 언제나 샐 것인가.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잠시라도 임 생각을 말고 이 시름을 잊으려고 하여도 마음 속에 맺혀 있어 뼈 속까지 사무쳤으니, 편작 같은 명의가 열 명이 오더라도 이 병을 어떻게 하랴. 아, 내 병이야 내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죽어서 호랑나비가 되리라. 그리하여 꽃나무 가지마다에 가는 곳마다 앉아 있다가 향기를 묻힌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임께서야 그 호랑나비가 나인 줄 모르셔도 나는 끝내 임을 따르려 하노라.
해설
작자는 50세 되던 1585년 8월에 당파싸움으로 인해, 사헌부와 사간원의 논척을 받고, 고향인 창평(昌平)에 은거한다. 이때 임금을 사모하는 정을 한 여인이 그 남편을 생이별하고 연모하는 마음에 기탁하여, 자신의 충절과 연군의 정을 고백한 작품이 <사미인곡>이다. 고신연주(孤臣戀主)의 지극한 정을 유려한 필치로 묘사하였다. 구성은 서사(緖詞)·춘원(春怨)·하원(夏怨)·추원(秋怨)·동원(冬怨)·결사(結詞) 등의 6단락으로 되어 있는데, 춘원부터 동원까지가 본사(本詞)가 된다. 서사에서는 조정에 있다가 창평으로 퇴거한 자신의 위치를 광한전(廣寒殿)에서 하계(下界)로 내려온 것으로 대우(對偶)하였다. 춘원에서는 봄이 되어 매화가 피자 임금께 보내고 싶으나 임금의 심정 또한 어떤 것인지 의구하는 뜻을 읊었다. 하원에서는 화려한 규방을 표현해 놓고, 이런 것들도 임께서 계시지 않으니 공허함을 노래하였다. 추원에서는 맑고 서늘한 가을철을 묘사하고 그 중에서 청광(淸光)을 임금께 보내어 당쟁의 세상에 골고루 비치게 하고 싶은 마음을 토로하였다. 동원에서는 기나긴 겨울밤에 독수공방하면서 꿈에나 임을 보고자 하여도 잠들 수 없음을 표현하였다. 결사에서는 임을 그리워한 나머지 살아서는 임의 곁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차라리 죽어서 벌이나 나비가 되어 꽃나무에 앉았다가 향기를 묻혀 임께 옮기겠다고 읊었다. 전체 구성은 계절의 변화를 축으로 하는 사시가(四時歌) 형태인데, 4계절의 변화에 따라 님 생각의 간절함과 짙은 외로움을 토로했다. 선조 임금을 사모하는 간절한 연군의 정을 님을 생이별하고 연모하는 여인의 마음으로 나타내 자신의 충정을 토로했다. 여성적인 정조나 어투로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으며, 사용된 시어나 정경의 묘사가 탁월하다. 애절하면서도 속되지 않은 간결한 문체로 국문시가의 가능성을 입증한 노래이다. 정철의 <사미인곡>은 <속미인곡>을 낳았으며, 그후 이를 본받아 동일한 주제와 형식을 지닌 일련의 가사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김춘택(金春澤)의 <별사미인곡(別思美人曲)>, 이진유(李眞儒)의 <속사미인곡(續思美人曲)>, 양사언(楊士彦)의 <미인별곡(美人別曲)> 등은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본받아 임금에 대한 충성을, 임을 향한 여인의 정조와 그리움의 방식을 빌려 고백한 것들이다. 이 작품들은 고전문학사에서 임금을 사랑하는 대상으로서의 임에 비유하는 문학적 관습을 자리잡게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노래에 대해 홍만종(洪萬宗)은 <순오지(旬五志)>에서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에 비길 만한 작품이며, 악보(樂譜)의 절조(絶調)”라고 평했고,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중국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에 비길 만한 것으로, 자고로 우리나라의 참된 문장은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이 셋뿐이다”라고 극찬했다. 이수광(李光)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우리나라 노래 중 정철이 지은 것이 가장 훌륭해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이 후세에 성행했다”라고 평했다. 충신이었던 굴원의 <사미인(思美人)>을 모방해 지었다고는 하나, 한 구절도 인용한 것이 없고 오히려 그 표현기교는 훨씬 뛰어나다. 국문으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한껏 살린 걸작으로 평가된다. <송강집>·<송강가사>·<문청공유사> 등에 실려 전한다.
연계정보
-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
-성산별곡(星山別曲)
-속미인곡(續美人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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