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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화(朴鍾和)

예술가명
박종화(朴鍾和)
전공
소설
개요
1920년대 낭만주의 시인으로 출발하였던 박종화는 역사소설을 통해 1930년대 식민지 현실에서 오는 절망과 좌절을 탈출하고자 했다. 그의 역사소설은 풍부한 고증, 해박한 역사 지식을 통해 지나간 역사 속의 인간과 풍습을 다채롭게 재현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연산군 당시의 비참한 현실에서 취재한 <금삼의 피>(1936) 이후로 연이어 발표된 장편 역사소설의 저류에는 민족주의가 흐르고 있으며, 역사 속에서 민족의 얼을 찾고, 선과 악의 대결 속에서 인간성을 탐구 개조하려는 문학관이 밑받침되어 있다. 그의 역사소설은 일제식민지 시대 민족의 역사적 주체성이나 민족혼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함으로써, 민족의식의 소설적 추구라는 점에서 그 존재의의가 명확히 인정되는 한편, 확고한 현실 인식을 기반으로 과거를 투영하지 못함으로써 역사의 사유화에 떨어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 참고: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한국근대문인대사전>, 권영민 편, 아세아문화사, 1990
생애
서울에서 출생한 박종화는 소년시절 사숙(私塾)에서 12년간 한학을 수업한 뒤 1920년 휘문의숙을 졸업하였다. 1920년 10월 문학동인지 <문우(文友)>를 발간하였고, 이듬해 <장미촌> 창간호에 <오뇌의 청춘>과 <우유빛 거리>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1922년 <백조> 창간호에 <밀실로 돌아가다>와 <만가> 등 두 편의 시와 <영원의 승방몽(僧房蒙)>이라는 수필을 발표한 데 이어 평론 <오호 아문단>과 단편 <목매이는 여자>, 시 <흑방비곡(黑房悲曲)>, <사(死)의 예찬> 등을 발표함으로써 낭만주의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1924년에는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첫 시집 <흑방비곡>을 출간, 19~23세의 약관으로 썼던 낭만파적 시편들을 수록했다. 단편 <아버지와 아들>, <여명>, <부세(浮世)> 등을 쓰면서 소설가로 전신한 이래, 카프문학에 반발하여 민족의식을 주제로 하는 역사소설들, 예컨대 <금삼(錦衫)의 피>, <대춘부(待春賦)>, <전야(前夜)>, <다정불심(多情佛心)> 등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1942년 수필집 <청태집>을 간행하였다. 일제 말기에도 끝까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고 문인보국대(文人報國隊)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해방 후에는 전조선문필가협회 부회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위원장 등으로 민족주의 진영을 이끌었다. 광복의 감격과 흥분 속에서 쓰여진 <민족>은 앞선 <여명>, <전야>와 함께 삼부작에 해당하는 작품이고, <홍경래>와 <청춘승리> 및 단편 <논개> 등에서는 작가의 민족적 울분이 잘 나타나 있다. 이후에도 역사소설의 창작에 전념하여 <임진왜란>, <벼슬길>, <여인천하>, <자고 가는 저 구름아>, <아름다운 이 조국을>, <양녕대군> 등을 발간하였다.
약력
1901년 서울 출생 1920년 휘문의숙 졸업 / 동학동인지 <문우> 창간 / <서광>지에 <쫓긴 이의 노래> 등의 시 발표 1921년 황석우, 변영로, 박영희, 오상순 등과 함께 시 동인지 <장미촌> 참가 1922년 문예지 <백조> 창간 1945년 전조선문필가협회 부회장 피선 1946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피선 / 동국대학교 교수 취임 / 연희대학교 강사 취임 1947년 성균관대학교 교수 취임 1948년 문교부 예술위원회 부회장 피임 / 서울대학교 대학원 강사 취임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장 피임 / 서울신문사 사장 취임 / 서울시문화위원회 위원장 피임 1950년 중앙선거관리위원 피임 1951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취임 1952년 방중 문화사절단 단장으로 자유중국 방문 / 국무총리 정책위원 피임 1953년 한국문학가협회상 제정 / 문교부 국어심의회 부회장 / 고등고시위원 1954년 유네스코 한국위원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피선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위원 위촉 / 국무총리 전례위원 피임 / 예술원 회장에 피선 1956년 문교부 교육특별심의회 위원 위촉 1957년 성균관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 수여 1961년 대한성서공회 성서개역 고문 피임 1962년 성균관대학교 정년퇴직 · 동 대학 명예교수 1963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피선 1965년 3·1문화상 재단이사 피임 / 대한적십자사 조직위원 피임 / 서울시정 자문위원 위촉 /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회장이 되어 고전 국역 사업 추진 1966년 문화예술윤리위원회 위원장 피임 / 월탄문학상 제정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 위촉 /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 예술원회장 역임 1975년 한중예술연합회 회장
상훈
1955년 대한민국예술원공로상 1962년 대한민국문화훈장대통령장 1966년 5·16민족상 1970년 대한민국국민훈장무궁화장 장편소설 <금삼의 피>(1938) <대춘부>(1938) <전야>(1942) <다정불심>(1942) <여명>(1944) <민족>(1946) <청춘승리>(1947) <임진왜란>(1957) <자고 가는 저 구름아>(1965) <제왕삼대>(1969) <아름다운 이 조국을>(1970) <월탄 박종화 삼국지>(1978) 시집 <흑방비곡>(1924) <청자부>(1946) 수필집 <청태집>(1942) <달과 구름과 사상과>(1965) <한 자락 세월을 열고>(1971) <달 여울에 낚싯대를>(1971) <화음>(1978) <역사는 흐르는데 청산은 말이 없네>(1979)
작가의 말
문학은 문학자체의 본연의 자태를 천명하기 위하여 인생과 문학과의 관계를 사색하고 탐구하고 연구하고 정리하고 부연하는 학문이요, 예술은 이 학을 기초와 토대로 하여 자아를 육성·생장시키는 동시에 인생과 학문을 경과 위로써 교착 구성하면서 잃어버렸던 우리의 진리를 예술 위에 재표현하여 예술가 자신의 독특한 개성으로써 인류를, 세계를, 역사를, 진의 세계, 미의 세계, 선의 세계로 이끌고 나아가려는 예술의 모든 행동, 곧 다시 말하면 예술의 제작과정을 종료한 결정적 표현을 예술의 가치로서 판단하여 예술적 혹은 비예술적, 또는 예술가, 비예술가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럼으로써 문학은 다만 학이 될 뿐, 행동성을 띤 문정은 될 수 없고, 예술 또한 예술 제작과정 이외의 모든 행동은 예술의 행동으로서 허여될 수 없는 것이다. (……) 우리는 학식의 연구보다도 말로만 떠들고 한몫을 보는 학자가 되어서는 아니된다. 작품을 제작하는 창작의 열의보다도 사업을 추진하려는 예술가가 되어서는 아니된다. 사업이 결코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무와 사업으로써 마이너스된 10년 예술의 공백을 메울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 허화(虛華)·허욕·허화(虛火)는 사람과 사회가 국가를 망치고야 마는 것이다. 학자나 예술가나 시인이 여기 휩쓸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학과 예술로서 자신을 수련하여 탈피해가면서 모든 민중을 이끌어나아갈 커다란 천직에 자부함이 많아야 할 것이다. - ‘오늘의 문학과 예술의 위치’, 박종화, <달 여울에 낚싯대를: 나의 인생관>, 휘문출판사, 1971
평론
(……) 월탄의 <금삼의 피>와 <대춘부>가 그의 역사소설가로서의 행보를 크게 확인시켜준 작품이라면, 세 번째 장편 역사소설인 <다정불심>은 그에게 이 나라 정통 역사소설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자리매김시켜준 작품이라고 평가되어지고 있다. (……) 월탄은 해방 조국의 난마와 같은 사회적 불안의 혼미를 겪는 가운데서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드디어 몽매에도 잊지 못할 8·15 광복을 맞아 암담했던 일제 통치에서는 벗어났으나, 뜻하지 않은 국토 분단의 비극적 사태와 함께 해방 조국의 사상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혼미와 지리멸렬하는 민족적 분열 현상을 맞은 월탄은 다시 역사의 무대를 돌이키며 민족적 교훈을 전개시켜 보이게 된 것이다. (……) 역사소설은 단순히 지나간 옛 역사를 다시 재현해 놓음으로써 단순한 역사 공부에 그치게 하지 않고, 오늘의 현실에 각도를 맞추고 조준을 해서 서로 견주어보며 깨달음을 얻게 해 주었다고도 하겠다. 뿐만 아니라, 오늘의 현실과 대등한 사건이나 인물을 찾아내어 등장시켜서 오늘과 유사한 사태 앞에서 그들은 어떻게 역사적 사건을 맞아 처리하고 처신했는가를 비추어주는 일을 월탄은 목표하고 수행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적어도 본격적인 역사소설의 경우에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역사를 해석하는 안목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안목이 있어야 역사를 오늘의 현실에 맞추고 비교 검토하여 비판해낼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된다. 그리하여 지나간 역사적 사실을 오늘에 되돌려 숨쉬게 함으로써 그 당시의 그 사건이 오늘의 일로 활성화되어 나오고 또 그 시대의 인물들이 오늘에 숨쉬면서 우리와 함께 역사를 살려나가고 역사를 헤쳐나가는 모습을 재현하는 데 뜻이 있을 수 있다. 월탄의 역사소설은 그것을 실현해 보이고 완성하고자 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하지만 월탄의 역사소설은 그런 교훈적인 시대비판에 머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민족, 이 땅에 태어난 자랑스러운 인물들이 계승시켜 놓은 이 겨레의 민족적, 역사적 정통성과 또한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빛을 발하며 연면히 이어지는 한국 문화의 위대함, 그리고 타민족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고귀한 정신의 발휘를 부각시켜 놓는 일에 월탄의 역사소설이 존재하는 뜻이 새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 흔히 현대문학 위주의 서구문학 중심적 시각에서는 마치 역사소설을 현실도피의 수단인 것처럼 잘못 인정하고 있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문학을 현실 대결의 투쟁적 자리로만 선호하는 측면에서는 자칫 그런 판단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의 방법이 다양한 수법과 문장 형태를 구사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고 할 때, 역사소설은 가장 소설 장르 가운데서 뚜렷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개척 장르의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월탄의 역사소설이 바로 그 점을 실현해 놓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리라. 월탄 역사소설을 흔히들 정사에 입각한 역사소설이라고 한다. 그것은 정통 역사에서 소재를 취재하여 소설로 옮겼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역사서를 그대로 베껴냈다는 오해가 생기게 해서는 문학으로서의 생명이 부정될 우려가 있으므로 올바른 해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월탄 역사소설이 정통 역사 사실에 입각해서 취재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단지 고담이나 야담처럼 흥미 위주, 재미 위주로 엮어내는 데 의미가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오늘 현재의 시각으로 견주어 역사적인 옛 현장을 오늘에 되살려 평가하고 재창조해놓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월탄은 우리 민족이 가장 어려운 수난을 겪을 때 이 땅에 태어났고, 우리 민족의 역사를 살아오고 이끌어낸 것이 무엇이며, 무슨 힘으로 그렇게 했는가를 추구했다. 즉, 국난 극복의 한 수단으로서 문학을 택하였고, 조국 구원의 등불로서 역사소설의 길을 닦아 온 것이다. - ‘월탄 박종화의 민족문학과 역사소설’, 김양수, <박종화의 문학과 사상>, 범우사, 2001
관련도서
<박종화의 문학과 사상>, 월탄박종화탄신100주년기념문집간행위원회 편, 범우사, 2001 <박종화의 삶과 문학>, 윤병로, 성균관대출판부, 1998 <달 여울에 낚싯대를>, 박종화, 휘문출판사, 1971 <월탄 박종화 역사소설 연구: 1950년대 이후 작품을 중심으로>, 고석호, 성균관대 박사논문, 2003 <한국 근대 역사소설 연구>, 고정욱, 성균관대 박사논문, 1993 <월탄 박종화 역사소설 연구>, 조규일, 성균관대 박사논문,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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