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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택원(趙澤元)

예술가명
조택원(趙澤元)
활동분야
한국무용
생애(약력)
군수를 역임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 유복했던 가정환경은 그를 명랑하며 낙천적인 성격의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고등학교 때 테니스를 치기 시작하여 다니던 대학교를 그만두고 전문 선수가 될 정도로 날쌘 동작을 자랑했다. 1921년 해삼위학생음악단의 박시몬에게서 고팍 춤을 배운 적이 있었고 1926년까지 음악회나 청소년 행사에서 아마추어 사교춤을 추곤 했다. 1926년 일본인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서울 순회 공연에서 <수인>에 감동받아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춤에 입문하기로 한다.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바쿠 연구소에서 교육을 받고 공연에 출연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1934년에 <승무의 인상>(후에 <가사호접>) 을 비롯 12가지 레퍼토리로 구성된 제1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1937년 식민지 시대의 억압된 분위기를 벗어나 자유로운 서양세계를 체험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다. 많은 수의 공연을 하지는 않았으나 한국무용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공연을 펼치곤 했다. 창씨 개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총독부의 의뢰를 받아 만든 <부여회상곡>과 일본군 위문 공연단 활동은 그의 생애에 큰 오점이 되었다. 1945년 8월 귀국하여 조택원은 자신의 친일 행위를 자기 비판한 후에 조선무용예술협회의 위원장에 뽑혔다. 사석에서 이승만의 독선적 정치를 비판한 것이 화근이 되어 1960년까지 미국과 일본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조택원은 자기의 창작 춤과 한국 춤을 해외에 소개하는 작업을 하였고, 동양적 노년의 세계를 그린 <신로심불로>를 발표한 시기도 이 즈음이다. 1960년 4·19를 기점으로 귀국한 조택원은 한국무용단을 창설하여 동남아시아를 순회하였다. 이를 계기로 1969년 사단법인 한국민속무용단이 조택원의 주재로 창단되었는데 후에 이 단체는 장충동에 국립극장이 건립되자 발전적 의미에서 국립무용단에 흡수되었다.. 그의 낙천적이며 다정한 성격은 명랑하며 가벼운 터치로써 밝은 분위기의 전원적 춤으로 귀착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춤에서는 섬세하면서도 흐르는 듯한 감정, 아련하며 서정적인 멋이 부각되었는데 한국에서 신무용의 성격이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무용이란 단어보다 그 내면의 사상과 감정을 고려하여 무상(舞想)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 그의 작품은 한국의 흥과 멋에 바탕을 둔 시적 정서의 세계를 지향하였고, 이는 한국 신무용 시대 이후 심화된 무용의 낭만적이며 인상주의적인 특성과 관련이 깊다. 그가 1930년대 말에 착상하여 발표한 <춘향전>과 <부여회상조곡>의 무용 조곡 양식은 그 후 한국에서 정착된 무용극의 선구적 양식이었다. 1925년 교동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1928년 도일하여 이시이 바쿠 문하에서 무용 사사 1932년 조택원무용연구소 개설 1962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역임 1969년 한국민속무용단 설립 1972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상훈
대한민국 예술원상 / 서울특별시문화상 수상 / 금관문화훈장 수상
대표작
1929년 <어떤 움직임의 매혹> 1933년 <승무의 인상> 1935년 <가사호접> <만종> <포엠> 1941년 <춘향전> <학> 1942년 <부여회상곡> 1948년 <신로심불로> 기타 작 <아루네키노와 코름방> <세레나데> <스페인 야곡> <화려한 원무곡> <땅에 바치다> <황혼> <죽음의 유혹> <애수의 인도> <흑인의 노래> <사랑의 기쁨> <잃어버린 넋> <아리랑 환상곡> <무도회의 초대> <전원시> <집시의 무리> <봄소리> <아베마리아> <비애> <카프리즈> <작렬하는 사색> <인도의 노래> <망향> <시골처녀> <마력>
창작노트
서양의 춤은 의지의 춤, 체력의 춤, 물리학의 춤, 과학의 춤이라고 밖에 규정지을 수 없다. 그래서 서양의 춤은 결국은 하나의 메커니즘이요, 서양의 무용가는 하나의 기계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의 춤은 시초부터 흥이 나지 않으면 못 추는 춤, 즉 ‘정서의 춤’, ‘감각의 춤’, ‘피와 살의 춤’, ‘혼의 춤’이라 해야 할 것이다. 결국 ‘감정의 춤’, ‘사상의 춤’, ‘철학의 춤’이다. 동서양의 차이란 이처럼 예술의 조그마한 한 갈래인 무용에서도 뚜렷하고 엄청남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그 엄청난 거리의 저쪽에 놓여있는 서양의 무용, 발레가 내게는 차차 거의 미칠 수 없는 물건으로 보여지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 생리에 맞지 않았다. 따라서 내가 안주할 수 있는 춤, 한국 춤에의 향수가 마치 밀물처럼 내게 밀려들었다. 밝고 명랑한 우리의 예술, 우리의 춤이 내 살 속에서 피 속에서, 혼 속에서 꿈틀거리고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리뷰
귀국 후 제1회 공연에 발표된 작품 중에서 가장 경건하게 완성된 것이 이 <포엠>인가 하노니 그것은 이시이 바쿠[西洋莫]도 조선 냄새도 아니 나는 순수 ‘안젤류스’에서 볼 수 있으니 그는 밀레의 명화 <만종(晩種)>의 종작적 재현이다. 원근법과 구도와 종교적 생활감정의 표현인 거장의 원서(原書)에다가 조선바지와 치마를 바꾸어 입히고 택원 독특의 무대적 유희정신으로 밀레를 하로 종일 끌고 다니고도 조곰도 버릇이 없지 않았다. 피나-레에서는 원화를 고대로 고스란히 원작자에게 돌리고 말었으니 경건한 밀레의 에스푸리를 조금도 손상하지 않은 것은 택원의 ‘웃음’의 효용이었다. ‘웃음’은 그의 무용적 성격임에 틀림없으니 그는 가슴팍이 허리 어깨 손발로 모조리 미소한다. 그의 무용은 모든 근육세포가 율동적 통제에서 행하는 미소의 제창(齊唱)이다. 그러므로 그는 골격의 도약선수라기보다 근육세포의 소리없는 가수다. (……) <승무의 인상> : 기생이 추는 재래 승무는 얼굴이 없었다. 호흡이 미약하여 어쩐지 끊어져 들어가는 듯 하였다. 관중을 고려하지 않고 혼자 추기에 정신 없었던 춤이었던 것이 택원의 승무로 호흡이 확대되었다. 무대와 극장의 약속이 이행된 큰남자의 대승무! <땐쓰 포풀레르> : 누구든지 출 수 있을 춤. 왜 그런고 하니 조선 사람의 ‘흥’은 저절로 이러한 운동을 하게 되는 것이므로다. 다만 범속의 환희를 저으기 예술로 끌어올린 택원의 유창한 계획을 볼 것이다. <검무의 인상> : 장고는 장단을 위한 것이어늘 여기에서는 강약을 위한 타악기로 완전히 이용된다. 재래 검무의 가락이 완전히 무시된다. 관중으로 하여금 무엇인지 반성을 강요하는 춤이다. 택원 자신이 추는 것이 어떠뇨? <가사호접> : <승무의 인상>으로부터 다시 새로운 의도에 고심한 것을 볼 수 있다. 대가 이시이 바쿠의 영향을 부인하기 어려운 묵극(默劇). 주체하기 어려운 장삼이 날리는 데서 살았다. (……) (발췌글은 1936년 게재 당시 원문을 사용하여 현재의 맞춤법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동아일보>, 정지용(시인) , 1936년 12월 1일 “이 춤(만종)을 무대에서 공연할 때마다 우리나라의 평화와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춤췄다” 라는 조택원의 고백에서 소박하지만 진솔한 작품의도를 헤아리게 된다. 부부가 함께 씨를 뿌리고 밭을 일구는 평화로운 장면.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풍경과 쇼팽 음악이 가져다 주는 안온한 선율 등은 일제강점에 놓여진 억압된 현실에서 찌든 삶을 잠시 벗어나게 하는 환기적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 <전통의 변용과 춤창조>, 성기숙, 현대미학사, 1998
관련도서
<전통의 변용과 춤창조>, 성기숙, 현대미학사, 1998
연계정보
-가사호접
-포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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