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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봉(金白峰)

예술가명
김백봉(金白峰)
활동분야
한국무용
생애(약력)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수제자이다. 1927년 평양 기양군 초리면에서 출생했다. 7남매 중 맏이로 자라난 그가 어린 시절부터 무용가의 꿈을 키우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6살 때 아버지가 밤 늦게 들어와 잠자는 그를 깨워 보여준 것은 최승희의 무용사진이었다. 그 이후 무용가에 대한 꿈을 키우며 14세가 되던 해, 아버지와 함께 진남포의 최승희 무용공연장을 찾아가 제자 되기를 청하고 승낙을 받는다. 그 해 6월 최승희를 찾아 일본 도쿄[東京]로 갔고 ‘최승희무용연구소’의 제자로 기본훈련을 받은 후 조금씩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1943년 명목상으로는 연구소를 졸업했지만 그는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남아 일본·만주·중국·동남아시아 각국을 순회공연하며 최승희의 춤맥을 잇게 되었다.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안필승)과 김백봉의 남편인 안제승은 형제간이었는데, 이들 최승희·안막, 김백봉·안제승 부부는 1946년 6월 월북하였다가 김백봉 부부는 탈출하여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돌아왔다. 그뒤 김백봉은 박기홍에게서 승무를, 이동안에게서 태평무와 승무를 전수받았다. 월남 후 그는 서양무용의 기본을 배우고 우리 정서의 춤을 만들어온 스승 최승희의 작품세계를 그대로 이어 가면서 거기에 자신의 세계를 창조해 가는 한 사람의 무용가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1953년 서울에 ‘김백봉무용연구소’를 설립하였고 1965년∼1992년 경희대학교 무용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1981년∼1985년, 198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92년 경희대학교 무용과 교수를 정년 퇴임한 뒤 명예교수가 되었다. 직접 무대에 올라 춤을 추는 활동 외에도 1958년 한국예술사절단 동남아 순회공연의 안무를 시작으로 1962년 파리 세계민속예술제 참가단 안무, 1985년과 1991년 두차례 김백봉무용단 미주공연 안무, 1986년 아시안게임 축하공연 <신천지> 안무, 제24회 서울올림픽 개막식 <좋은 날> 안무 등을 통해 민족적 색채를 띤 한국무용을 세계에 알리는 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95년 김백봉춤보존회가 결성되었고, 1996년에는 예악당에서 최승희의 춤만을 재현하는 대공연을 열어, 최승희가 추었던 <초립동>, <격(格)>, <연인도>, <보살춤>, <낙천(樂天)> 등을 재조명하기도 하였다.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뽑은 ‘20세기를 빛낸 예술인’으로 선정되었다. 1950년 최승희 무용연구소 졸업 1953년 수도여사대(首都女私大) 강사 1954년 김백봉 무용연구소(한국예술무용연구소) 운영 1959년 서라벌예술대학 강사 1964년 한양대학교 강사 1965년 경희대학교 교수 1981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1983년 미국 유니온대학 명예이학박사
상훈
서울시문화상(1962) / 캄보디아문화훈장 1급(1964) / 대한민국 예술원상(1975) / 보관문화훈장(1981) / 제 18회 무용대상(1987) / 예총예술문화대상(1990)
출연작
1958년 한국예술사절단 동남아 순회공연 1962년 ‘파리 세계민속예술제’ 참가 및 로마·아테네·앙카라 순회공연 1985년 김백봉무용단 미주공연 1986년 아시안게임 축하공연 <신천지(新天地)>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좋은 날> 1988년 캐나다 민속예술제 및 밴쿠버 공연
안무작
1948년 <화관무> <춘광> <효> 1949년 <반야월성곡> 1954년 <부채춤> <밤> 1956년 <우리 마을의 이야기> 1958년 <고향> 1959년 <선의 유동> <고향> 1960년 <산조(散調)-내마음> 1975년 <심청> 1984년 <강(江)> 1993년 <청명심수> 1997년 <만다라> <최승희-어제와 오늘>
주요저서
<봉산탈춤무용>(1976) <무용교육의 이념과 지도원리>(1980)
창작노트
춤 한 동작 한 몸짓이 순간이고 그냥 허공에 사라집니다. 젊었을 때는 무형인 춤을 어떻게 남길 수 없을까 참 아쉬웠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왠지 허탈감도 들었지요. 그러나 언제부터 인가 그냥 허공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란 걸 느꼈습니다. 최선을 다한 완벽한 춤은 보는 관객들의 마음에 영원히 각인되고 그 감동은 평생을 갈 수가 있는 것이지요. 육체를 움직이지만 사실은 영혼으로 추는 것이 춤입니다.” 춤이란 게 의욕만 앞선다고 해서 잘 추어지는 게 아니예요. 춤이란 한 동작 한 동작이 ‘내 마음이 가 있는 자리’입니다. 무대에 나가면 일단 아무 생각도 안나요. 무아(無我)가 돼야 하지요. 춤추는 그 자체에만 몰입하다 보면 춤이 나인지 내가 춤인지 구별이 안가는 경지까지 가지요. - <현대불교신문>, 이경숙, 1997년 124호, ‘무용가 김백봉 씨’
리뷰
무대예술 인생을 소원했던 지망생치고 한번쯤 ‘김백봉 문하생’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안 가져본 사람이 있을까. 특히 그가 추어내는 창작 화관무와 양손에 부채를 든 부채춤은 가히 환상적이다. 절도있는 각(꺾음)으로 수없는 변화를 연출해 내면서도 잎 피기 전 수양버들가지가 한들대듯 끝간 리 없이 온전한 김백봉의 춤집은 완벽에 가까운 육체언어이다. 여기에다 빼어난 미모와 고혹적인 몸매까지 어우러져 젊은 시절의 그는 ‘군중의 우상’이었다. 여자 나이 70을 넘기고도 샘솟는 정열과 젊음을 간직하고 있는 김백봉(경희대 명예교수). 한평생을 오로지 춤으로만 살아 온 그의 발자취는 근·현대 한국무용사와 맥락을 같이했다고 할 수 있다. - <춤 이야기>, 정청자, 강원대학교 출판부, 1997 그의 춤은 밝고 아름답고 경쾌하고 산뜻하다. 언제나 선명하고 뚜렷하다. 그의 춤은 한국의 대표적인 얼굴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대표성을 놓고 사람들은 우리춤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고 비판을 할 경우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신무용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화관무>가 그 이름 때문에 궁중정재의 하나로 오해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는 우리의 전통무용의 세계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자신의 작품세계의 근간으로 삼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서구의 무용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고 그것을 자신의 무용철학으로 지켜온 사람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우리춤의 호흡법, 움직이는 법 등 훈련법과 형식체계를 정리하고 정립해냈다. 그는 우리의 전통을 현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거기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끌어낸 창작예술가이다. - 구히서(공연평론가) 저자는 가장 ‘김백봉다움’을 결정짓는 춤으로 <산조춤>을 꼽는다. 김백봉의 <산조춤>은 남도문화에서 엿보이는 은근미는 없지만, 대신 북방녀의 열정과 빠른 리듬에 활달하게 전개되는 발움직임을 주시하면서(……)열정, 대중성, 변화, 위엄 등 다양한 요소들이 집합돼 있다고 보았다. 아울러 <화관무>, <장고춤>, <선녀춤>, <부채춤> 등은 단순한 궁중정재나 민속춤의 연장에 머물지 않고 극장춤으로서 장중함과 색채의 다채로움, 움직임의 황홀함에서 우리춤의 유산임을 입증해 보인다고 설명한다. 창작춤적 성격이 짙은 <새싹>, <웅비>, <선의 유동> 등은 산뜻한 구성미, 유려한 공간이동, 발레소품 같은 특징을 지녔다고 보인다. 김백봉이 영향받고 가담한 이른바 신무용이란 것이 오늘의 관점에서 단순히 ‘옛 것’으로 돌리기에는 더 새로운 것. 즉 극장예술적 균형미와 산뜻한 형식미를 담고 있다고 해석하면서 그런 측면에서 그녀를 창작춤의 제1세대로 간주할 수 있다는 논지를 펼친다. - <예술춤시대의 진동>, 김태원, 현대미학사, 1991, ‘김백봉 춤의 유산과 그 맥박’
관련도서
<한국무용의 기본동작에 대한 순환기능적 분석 - 김백봉 기본을 중심으로>, 유옥재, 대한무용학회, 1984
연계정보
-부채춤
-장고춤 (김백봉)
-무용극 심청
-화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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