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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관무

출연 / 스태프
출연 김백봉무용단 스태프 안무/김백봉
내용
예식성이 강하고 규율이 내재된 고전적 복식과 장식적 전통을 살려, 한삼과 긴소매로 엮어가는 춤사위로 유동의 멋과 아름다움을 그린 <화관무>는 태고의 태평성대를 표현한 춤이다. 김백봉의 대표적인 창작 작품으로 1947년 평양 국립극장에서 마련된 제1회 김백봉무용발표회에서 <고전형식>이라는 이름으로 초연되었던 작품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초연은 6.25 전란 후, 1954년 11월, 서울에서의 첫 발표회에서라고 말할 수 있다. <고전형식>이라 한 것은 어릴적 평양에서 사촌언니가 결혼식때 입은 활옷과 노리개장식 색동 쪽도리, 비녀 등의 맵시에 반해 그 인상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고, 그 매력과 색의 조화가 김백봉의 머리 속에서 작품을 만드는 내내 잊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기 때문이다. 초연 당시 족두리는 까만 족두리에 긴 바늘이 달린 빨간 비로도로 만든 꽃송이를 족두리에 꽂아 화려한 화관처럼 보이게 하고 그 위에 나비장식도 달아 춤을 추는 내내 살랑살랑 흔드는, 그래서 어여쁜 화관의 찬란함이 결국, 후에 <화관무>로 이름지어지게 된 것이다. 사실 그 계기는 순간적인 결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958년 가을 경, 서울에서 국제회의가 열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고전형식>도 환영예술제의 레파토리에 포함되었다. 문공부 담당직원이 전화해서 장관께서 고전형식의 영어표기인 <An Ancient Style>은 왠지 춤의 명칭 같지 않으니, 다른 이름으로 바꾸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고 하였고 생각을 해보겠으니 10분 후에 다시 전화달라고 말하자 , 지금 윤전기를 멈추고 대기 중이니 당장 생각해내라고 했던 것이다. 김백봉의 남편이자 김백봉무용단의 무용연출을 담당했던 고 안제승교수님께서 화가 나서 “화관을 머리 위에 얹고 추는 춤이니 <화관무>라고 하시구려” 한 것이 오늘날 고유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그 후에도 마음에 썩 들지 않아 <한삼에의 회정>이니 <수연>이니 하는 이름으로 공연하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때 올림픽 파견 ‘한국민속예술단’ 공연에 포함되면서 완전히 <화관무>라 불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이러한 명칭의 보편성은 친근감과 함께 사람들에게 가깝게 기억될 수 있었다는 장점도 있었으나, 때론 창무자의 존재가 모호해졌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몽두리에 화관을 쓰고 추는 대표적인 궁중무용의 하나”로 잘못 기록되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김백봉의 걱정은 내면적인 깊이나 무게보다 외형적인 화사함이나 유려함이 부각되어 분별 없는 모방과 표절로 추어질 때라고 말한다. 그렇게 된다면 <화관무>의 생명은 점점 쇠퇴되어 또 하나의 전통무용으로서 후세에 영생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1947년 초연당시에는 독무로 추어졌으며, 그 후 군무로도 발전하여 이어져, `88서울올림픽에서는 2천명이 함께 추어, 한국의 얼이 담긴 장대한 작품으로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었다. 2부로 나뉘어진 작품은 1부에서는 나라의 번영과 부모님의 사랑에 감사하여 바치는 충효지심이 깃든 춤을, 2부에서는 풍요와 수연을 축하하는 축제의 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백봉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김백봉무용단 예술총감독,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사)한국무용협회지정 명작무 <부채춤> 창무자 대표작품 <부채춤>, <장고춤>, <화관무>, <청명심수>, <선의 유동>, <광란의 제단>, <만다라>, <섬광>, <정을 남긴 채>, <웅비>, <서늘맞이>, <무용극 심청>, <우리마을 이야기>
관련도서
<한국현대무용사의 인물들>, 문애령, 눈빛출판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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