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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

작품/자료명
무애
구분
정재
개요
무애는 ‘구애됨이 없다’는 제목의 정재이다. 제목에서 풍기는 분위기도 불교적인 색채가 진하며, 실제로 불교와 관련이 깊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의 무애 주석에는 “무애라는 연희는 서역(西域)에서 나왔다. 그 가사는 불가(佛家)의 말이 많이 씌여져 있고 또 방언이 섞여 있어서 그것을 기록하기 어렵다. 우선 그 절주만을 적어서 당시 사용하던 악을 갖추어 둔다.”라고 하였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권3>에 따르면 원효대사(元曉大師)가 항상 목이 구부러진 표주박(葫蘆)을 어루만지며 시장에서 노래하며 춤추었는데, 이를 무애라 이름하였다. 그런 뒤에 호사가(好事家)가 금령(金鈴)을 달고, 아래에는 채색 비단을 늘어뜨려 장식하고, 이를 두드리며 진퇴(進退)하니 음절에 맞았으며, 경론게송(經論偈頌)을 노래하니 무애가라 불렀다고 전한다. 따라서 무애무의 연원을 퍽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1434년(세종 16) 8월에 예조(禮曹)에서는 무애정재가 불가의 가사를 써서 탄망(誕妄)하기 때문에 모든 사악(賜樂)에서 무애 정재를 없애도록 의견을 올렸고, 임금의 허락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 무애무는 다시 연행되었다. 1829년(순조 29)의 <기축진찬의궤(己丑進饌儀軌)>에 무애무의 기록이 나오는데, 이때 가사는 효명세자가 지었다. 1901년 <고종신축진연의궤> 에 따르면, “여기(女妓) 2인이 호로(葫蘆)를 잡고서 서로 마주하거나 서로 등지면서 춤춘다. 후대(後隊) 10인은 악절(樂節)에 맞추어 서로 바꿔가며 춤춘다. 창사는 한문과 한글이 서로 섞여 있으므로 싣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내용
<악학궤범(樂學軌範) 권3>의 '고려사악지 속악정재'에 기록된 정재의 진행순서는 아래와 같다. 무대(舞隊), 악관(樂官) 및 여기(女妓)의 의관과 행차는 앞의 의례와 같다. 여기 두 사람이 먼저 나가 북쪽을 향해 좌우로 갈라서서 손을 여미고 족도하고 절을 하고 부복했다가 머리를 들고 무애사를 창한다. 끝나면 그대로 꿇어앉아 있고, 여러 여기들은 그것에 따라 화창(和唱)한다. 향악기로 그 곡을 연주하면, 두 여기는 음악의 1강(一腔)이 끝나기를 기다려 무애를 잡고는 소매를 치켜들고 앉아서 춤춘다. 음악의 2강(二腔)이 끝나면 일어나서 춤추고 족도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음악의 3강(三腔)이 끝나면 무애를 희롱하며 음악의 절차에 따라 나란히 앞으로 나갔다 뒤로 물러났다 하면서 춤춘다. 악이 끝나는 것을 기다려 두 여기는 앞서와 같이 손을 여미고 족도하고는 절하고 부복했다가 일어나서 물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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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도서
<한국음악학자료총서3 무자진작의궤>, 은하출판사, 1989 <정재무도홀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여령정재홀기>, 인남순·김종수 공역, 민속원, 2001 <한국무용개론>, 장사훈, 대광문화사, 1992 <한국전통무용연구>, 장사훈, 일지사, 1977 <고종신축진연의궤 권1, 한국예술학과 음악사료강독회>, 한국예술종합학교, 2001 <신역 악학궤범>, 이혜구 역주, 국립국악원, 2000
연계정보
-향악정재
-파한집(破閑集)
-고려사악지(高麗史樂志)
-악학궤범(樂學軌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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