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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100] 한민족의 성산, 백두산

우리나라 최고 높은 산, 정상에 위치한 천지는 한민족의 성지이다.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한 한민족의 발상지인 백두산에 대해 알아보자. 백두산나레이션 높이 약 2,750m 총 면적 8천평방 킬로미터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산,백두산이다. 백색의 부석이 얹혀 있는 모습이 마치 흰머리와 같다 하여 백두산이라 부른다. 이민부/한국교원대 지리학과 교수Q. 백두산이란?백두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2744m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동북아시아 대륙에서도 가장 높은 산지이고 특이하게도 화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깨끗하게 잘 만들어진 층층이 쌓인 성층화산으로 이루어져 있고, 화산채의 크기가 용암이 흘러내린 면적까지 하면 2만2천평 정도에 달하며 한반도의 10분의 1에 이르는 거대한 화산재입니다. 자막백두산 봄백두산의 봄은 6월 즈음에 돼서야 찾아온다. 장대한 백두 폭포로부터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해발 2000미터, 백두산의 고산화원에 냉랭한 찬바람을 이겨내고 백두산의 영기를 받은 꽃들이 피어오른다. 자막백두산 여름백두산의 연평균 기온은 영하7.3도고 최저 기온은 영하44도에 달한다. 7월 중 잠시나마 짧은 여름이 찾아온다. 수면 10미터 깊이 있는 돌이 마치 잡힐 듯 천지의 물은 맑다. 자막백두산 가을한반도에서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9월 초, 백두산에는 일찌감치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 가을이 시작되는 것이다. 곱게 물든 가을풍경은 백두산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이점수/ 사진작가Q. 백두산 등산 당시 모습?처음 백두산을 올랐을 때 웅장함과 장엄함의 기상적인 백두산의 느낌은 숨이 멈출 정도로 감개무량했습니다. 그리고 또 (백두산의 매력으로는) 가을에 백두산을 촬영 하다보면 온도가 내려가고 날씨가 추워지면 눈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10월이나 9월 하순에 백두산 등반 시 가을과 겨울이 공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막백두산 겨울눈으로 뒤덮인 백두산의 설경이 장관인 이때. 바로 백두산의 겨울이 찾아온 것이다. 계곡 위로 두껍게 쌓인 눈은 이듬해 7월까지도 녹지 않는다. 하지만 한겨울에도 50도가 높은 뜨거운 물이 솟아오르는 백두산 온천의 신기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백두산은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일찍이 한민족의 발상지였으며,숭배되어 왔던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수난을 같이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민족의 영산(靈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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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본 고구려인의 삶

당시 고구려인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의미에 대해 나타낸 영상(대본)내레이션 고대 사회를 이해하고자 할 때 그림은 문자 이상의 많은 이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그림은 기호보다 쉽게 눈에 들어오고 마음속으로 읽히기 때문일 것이다.무덤 속에 그려진 벽화를 통해 고구려인의 삶과 생각을 담았던 고구려 고분벽화,찬란한 고구려의 역사가 담긴 고분벽화를 만나보자 내레이션 고구려 사람들이 언제부터 무덤 속에 벽화를 그렸는지 확실하게 밝혀진 건 없다.안악 삼호분 고분 벽화가 고구려 초기벽화의 모습을 나타내는 귀중한 자료로 전해지고 있다.고분벽화는 고구려가 도읍으로 삼았던 평양과 지안 지역을 중심으로 그리기 시작해점차 주변으로 퍼져 나갔고, 약 천삼백 년 뒤인 이십세기 초,고구려 멸망 후 소문으로만 떠돌던 벽화에 대한 이야기가평안남도 강서군수를 지내던 이우영이라는 사람에 의해 다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내레이션 무덤 속에 잠들어 있던 고분벽화,벽화 속에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과 생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인터뷰 고구려 고분벽화는 주로 고구려 사람들이 죽은 뒤의 세계에 대해서그들의 생각이 나 소망을 펼쳐놓은 그런 작품입니다.그래서 초기의 작품에는 현세에 살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는 데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고구려인들이 그 당시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사진 찍듯이 그대로 옮겨 놓아서우리가 그 시대로 여행할 수 있는 좋은 매개체가 되기도 합니다.그래서 기본적으로 고분벽화라고 하는 것이 내세관의 표현이다.죽은 뒤 세계관에 대해 소망과 꿈을 담은 표현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내레이션 국내외의 역사가, 문화예술 전문가들에게 역사적 상상력,문화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현재 백이십여개의 벽화가 발견되어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생기를 전해주고 있다.한국 문화의 원형을 담은 고구려 고분벽화,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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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대한민국 국화, 무궁화

대한민국의 나라꽃[국화(國花)]이며, 예부터 한반도를 부르는 ‘근역(槿域)’의 유래이기도 하다. 한국문화100 무궁화편 대본 대한민국의 국화, 무궁화 내레이션 옛날 옛날에 장미와 행복하게 살고 있는 어린왕자가 있었습니다. 그 행성 옆에는 저 어린공주가 외롭고 쓸쓸하게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함께할 친구를 찾았죠. 자막 안녕, 무궁화 내레이션 아무도 찾지 않는 행성이지만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었어요. 궁금해진 저는 그 친구에게 말을 걸었지요. 넌 누구니? 안녕, 난 한국의 국화 무궁화라고 해. 오, 그래? 그럼 넌 어떤 꽃이니? 나는 한국인과 무려 오천년을 함께한 민족의 꽃으로 고조선 이전인 신시시대부터 한화로 불리며 한국인과 함께해왔지. 자막 무궁화는 고조선 이전인 신시시대부터 한화로 불린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내레이션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내 품종은 수 백 종으로 배우 다양해. 대표적으로 배달계, 홍단심계, 백단심계 등이 있지. 자막 무궁화의 품종은 수 백 여종으로 매우 다양함 대표적으로 배달계, 홍단심계, 백단심계가 있음 내레이션 이름만으로는 잘 모르겠는데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니? 물론이지. 자막 배달계 흰색을 좋아하는 배달민족을 닮았다해서 배달계로 불리며 단심이 없는 순백의 무궁화 내레이션 우선 배달계 무궁화는 흰색을 좋아하는 배달민족을 닮았다고 해서 배달계라고 불려. 그리고 무궁화 중에 품종 수가 가장 많은 홍단심계는 붉은색 계통의 꽃잎과 단심으로 가지고 있어서 홍단심계로 불리지. 자막 홍단심계 붉은색 계통의 꽃임에 가운데 붉은 단심이 있으며 무궁화 중에 품종수가 가장 많음 내레이션 또 백단심계는 흰 꽃잎 가운데 붉은 단심이 있는 무궁화야. 자막 흰 꽃잎에 가운데 붉은 단심이 있음 재래종과 도입종의 교잡에서 선발한 무궁화 내레이션 아 그럼 넌 백단심계 무궁화구나 오, 똑똑한데? 아 그리고 꽃잎에 무늬가 있는 아사달계나 외국도입품종인 청단심계 무궁화도 있어 자막 청단심계 아사달계 아사달계는 꽃잎에 무늬가 있는 무궁화이며 청단심계는 외국도입품종이다. 내레이션 또한 나는 황실이나 귀족들에 의해서 국화가 정해진 다른 나라들과 달리 민중들에 의해서 나라꽃으로 정해졌단다. 오, 멋있다. 근데 왜 난 너를 한 번도 보지 못 했을까? 그건 한국인들이 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사실 나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거의 멸종될 뻔 했었어 일본인들이 민족정신을 말살 시킨다고 나를 보기만 해도 눈병이나고 진드기가 많이 꼬이는 꽃으로 매도했거든. 그 바람에 현대의 한국인들은 나에 대해 오해를 갖게 되었지 아, 그랬구나. 자막 일제강점기시대 때 무궁화는 일본의 민족정신 말살에 의해 거의 멸종 될 뻔 했다. 진드기가 많은 꽃, 눈병을 옮는 꽃 내레이션 하지만 이제 8월 8일을 무궁화의 날로 제정할 만큼 나에 대해 관심이 많아져서 괜찮아. 그런데 왜 하필 8월 8일이야? 그 이유는 8월에 내가 제일 만개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숫자 8을 옆으로 보면 무한대 기호가 되지? 응, 그렇네. 그 기호는 끝없이 반복되고 무궁하다는 뜻으로 내 이름의 뜻과도 같아 그리고 나는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는 걸 100일 동안 매일 반복해 이러한 나의 영원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한국인의 정신에 반영되어 있지. 너 정말 대단한 꽃이구나. 그런데 해가 지면 널 다시 볼 수 없는 거야? 아니야, 한국에 가면 날 다시 볼 수 있어 아 한국? 한국은 어디에 있어? 저기 있는 별 보여? 안녕, 무궁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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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9

[한국문화100] 비무장지대 DMZ, 비극의 땅에서 희망의 땅으로

비극의 땅으로 인식되고 있는 비무장지대의 생태이야기 --대본-- 내레이션- 비무장지대를 처음 방문하고자 했을 때 나는 왠지 모를 설렘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 민간인에겐 철저히 통제되어진 이 땅을 직접 밟을 생각에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 세계 유일의 분단 보존 지역이자 민족상잔의 비극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땅. - 영어로 DMZ라고도 불리는 이 곳의 첫 모습은 나에게 생각보다 평화롭고 차분하게 다가왔다. - 한반도 휴전의 상징이자 자연생태계의 보고로 각광받고 있는 비무장지대, 나는 지금부터 이 곳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한다. - 비무장지대의 시작은 1953년 진행된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 남과 북은 직접 충돌을 막고자 한반도 중심인 북위 38도에 휴전선을 긋고 위 아래로 각각 2KM씩 철조망을 친 완충지대를 만들었다. - 이때부터 민간인의 출입을 철저히 막아온 비무장지대는 약 2억 7천만평에 달하는 광대한 범위의 지구에서 유일한 특수지대로 탄생하게 된다. - 비무장지대가 군사적 완충지대이기는 하나 여전히 충돌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 그래서 민간인이 들어 올 수 없도록 휴전선 남쪽으로 5~20km정도를 통제구역으로 지정해놓았다. - 이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는 사람이 살 수는 없지만 농사를 짓기 위해 농부들이나 안보관광을 위한 관광객들의 출입은 허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 비무장지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생태계가 아주 잘 보존 되어있다. - 60여년 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으니 자연은 당연히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 한반도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동식물들이 많이 살고 있어 최근엔 생태학자들에게 연구가치가 높은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 나는 오랜기간 비무장지대 내의 생태계 연구에 힘써 온 김계성 작가를 만나봤다. 인터뷰 - 여기 민통선에서만 보이는 꽃으로 말씀드릴 수가 있는데, 이게 지느러미 엉겅퀴입니다. 왜 그런지 자세히 보시면, 이 줄기에 고기 지느러미 같은 모양이 있단 말입니다. 엉겅퀴의 종류에는 고려엉겅퀴 그리고 그냥 엉거퀴, 지느러미 엉겅퀴, 가시 엉겅퀴, 흰 엉겅퀴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건 고기지느러미를 닮아서 특별합니다. 민통선에 많이 자생을 하고 있습니다. - 이게 단풍잎돼지풀입니다. 외래종인데, 국가에서 유해종으로 지정된 열두종의 식물 중 한 종입니다. 이 단풍잎돼지풀은 사실 우리나라에 도래한것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한국전쟁 무렵 그때 도래된 것으로 알고있거든요, 그게 어떻게 들어왔냐면 다국적군의 군용베낭 거기에 씨앗이 묻혀서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의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한국전쟁 후부터, 특히 민통선 인근의 미군부대가 많았잖아요, 그래서 퍼져나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 일반 국수나무가 별도로 있어요, 이건 나도국수나무입니다. 나도국수나무는 민통선에서만 보이고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내레이션 - 비무장지대는 식물뿐만 아니라 곤충, 조류, 포유류 등 다양한 천연기념물 및 멸종위기 종 들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특히 철새들의 서식지 및 이동경로가 되고 있어 국제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인터뷰- 지금 비무장지대에서 아주 주목해서 봐야 될 부분이, 멸종위기 동물입니다. 특히 멸종위기 1급이 8종이나 있거든요, 저희들이 조사하면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렁이 같은 1급서부터 두루미, 재두루리 등의 조류, 그다음에 포유류 중에서는 삵 살쾡이가 멸종동물 2급인데, 이런 멸종위기 동물 1급과 2급 전체를 합하게 되면, 약 30종정도가(비무장지대에)있어요. 이 좁은 지역에 법적으로 보호해야 될 멸종위기 종이 30종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다른 의미에서는 멸종위기 종들이 다른 지역에서 살 수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피난처라고도 생각이 되지요. 이 부분이 비무장지대가 가지고 있는 생태적인 가치라고 생각이 됩니다. 내레이션 - 남과 북이 서로를 미워하면서 만들어진 인위적인 땅. - 그러나 60여년 간 인간의 발길이 끊이면서 이 곳은 그 어디보다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으로 탈바꿈해갔다. - 이 아름다운 천혜의 자연 환경을 계속 지키고 보전한다면 아마도 한반도의 평화는 저절로 이루어 질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 평화와 통일의 밝은 미래가 오는 그날까지 비무장지대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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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3

[한국문화100]한반도의 중심 산줄기, 백두대간

NA : 이곳은 강원도 태백시 철암역, 나는 이번학기 백두대간에 관해 레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백두대간을 알아보러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 백두대간은 어떤 것일까? 막연하게 다가오는 궁금증을 안고 백두대간의 협곡을 지나는 V-train을 따라 아름다운 우리강산을 감상했다. ? (자막) 백두대간 협곡열차(V-train) 강원 태백 철암역 ↔ 경북 봉화 분천역 구간을 운행하는 KORAIL 관광 열차. ? (자막) 백두대간 협곡열차(V-train) 좁은 협곡 사이 절벽과 바위산이 보이는 창밖의 풍경을 자연 그대로 오감으로 느끼며, 힐링으로 이어지는게 특징. ? NA : 도시를 떠나 좁디좁은 산골짜기 협곡을 달리는 기차 속에서 백두대간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속에 벅차오르는 감정이 느껴졌다. 한반도를 이루는 뼈대! 백두대간은 무엇인지 이번 여행을 통해 알아보려 한다. ? 먼저 찾아간 곳은 국민들이 백두대간에 대해 올바로 알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백두대간 생태교육장이다. ? int 유경희 숲해설가 / 조령산자연휴양림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자연적 상징으로 우리 민족 고유의 지리인식 체계로 여겨졌고, 한반도의 모든 물줄기를 잉태한 생명력이 시작되고 이어지는 중심지입니다. ?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1개의 정간, 13개의 정맥 10개의 강이 있습니다. 백두대간을 경계로 하여 동쪽은 영동지방, 서쪽은 영서지방, 지방마다 독특한 언어와 음식, 주거환경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 NA : 생태교육장을 둘러보며 백두대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 (자막) 백두대간 생태교육장 우리나라 중심 산줄기인 백두대간의 역사, 문화, 생태 정보를 다양한 전시 체험매체로 구성하여 보전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 ? NA : 백두대간은 언제부터 이 땅을 이해하는 지리인식체계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성호사설 등을 통해 길게는 천여 년, 짧게는 수백 년간 백두대간으로 불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우리 선조들은 산맥을 표기할 때 땅 위에 실제로 존재하는 산과 강을 그려 산에서 산으로만 이어지도록 하였고, 실제 지형과 일치하는 지리학적으로 자연스러운 선을 표현했다. ? 반면, 일제의 침략을 받은 일제 강점기 때는 땅속의 지질 구조를 기준으로 산맥을 표기했고, 그리하여 산맥은 강에 의해 여러 차례 끊기고 실제 지형에 일치하지 않는, 인위적인 선으로 표현되었다. ? 현재까지 우리들에게 백두대간을 태백산맥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현실의 안타깝게 느껴졌다. ? 현재 백두대간은 어떻게 보전되고 있는지 이를 위해 힘쓰고 있는 보전회를 찾아갔다. ? int 김경한 사무국장 / 백두대간보전회 (백두대간 보전회는)크게 5가지 활동을 하고 있는데, 야생동물 보호활동, 생태 숲 조성운동, 백두대간 생태 체험 학습, 산불 조심 홍보 활동, 백두대간 산림 정화운동, 5가지를 우선 크게 볼 수 있어요. 백두대간을 말하면, 즐길 수도 있어야 하고, 보전도 해야 하고, 양면성이 있어요. 건설 쪽 활용방안 말고, 국민들이 정서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끔 등산도 하고, 체험도 하고, 산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방안을 찾아서 활용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 NA : 보전회 에서는 백두대간의 보전을 위해 국가 그 이상의 활동을 하고 계셨다. 과거 나라를 구하기 위해 활동했던 독립 운동가들만이 애국자가 아니라 보전회 회원들에게도 한반도의 산줄기를 지키고픈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20년이상 해발 1,000m의 산을 꾸준히 올랐다는 보전회 사무국장님께 백두대간은 어떤 의미로 다가 오는지 여쭤봤다. ? int 김경한 사무국장 / 백두대간보전회 처음 제가 백두대간 보전회에 들어왔을 때 저는 사실 백두대간에 대해 아는 게 없었어요. (보전회에) 들어와서 백두대간에 대해 뭘까 고민을 하고 찾아보고 하다 보니까 저 역시도 백두대간 하면 지금도 울컥하는 마음이 있어요.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가 있는데, 백두대간 하면 저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먹는 물의 근원이 백두대간에서 떨어져서 각 강으로 지리로 다 흘러가거든요. 물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물이 없으면 필요가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물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백두대간 하면 물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 NA : 나는 백두대간을 몸소 느끼기 위해 산을 걷기로 했다. 산줄기를 경계로 고개를 넘어가며, 동쪽 서쪽 마을 사람들이 서로 왕래하고, 지역과 문화가 구분되어 교류를 이룬 백두대간! 세계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강을 통해 발전 했듯 우리의 문화는 이 백두대간을 따라 발전해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자막) 백두대간(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의 가장 크고 긴 산줄기 백두대간은 1의 대간과 1개의 정간 및 13개 정맥 체계로 되어 있다. ? NA : 산 정상에 올라 백두대간을 바라보니 처음 기차를 타며 느꼈던 마음 속 벅차오름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 (자막) 함백산(咸白山) 함백산은 강원도 태백시와 정선군 고한읍의 경계에 있는 해발 1,572,9m의 산으로 우리나라에서 6번째 높은 백두대간의 고봉 가운데 하나. ? NA : 한반도 중심산줄기 백두대간 우리민족에게 백두대간은 문화의 울타리였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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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3

[한국문화100]우리의 문자, 한글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과 가치에 대해 알아본다. --------------------------------------------------------------------------------------- 내레이션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담아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딱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깨우쳐 날로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내레이션 조선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말은 할 수 있어도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리하여 세종대왕은 우리의 고유문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되었다. 내레이션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양반 사대부들은 한글이라는 문자의 출현을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젖어 있어, 한자에 비해 한글을 낮잡아 보는 태도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내레이션 세종대왕은 한글이 점차 보급되면 서민들이 생각과 뜻을 글로 적을 수 있게 되고, 이로 인해 일상생활에서 한글이 활용되어, 서민들의 생활 개선과 의식 성장을 가져올 것이라 굳게 믿었다. 인터뷰 정희원 /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한글의 창제정신은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 창제 시에 쓰셨던 어제 서문에 나타나 있는데요,우리가 보통 자주, 실용, 애민 이렇게 세 가지로 정리를 할 수 있겠습니다.자주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말이 중국말하고는 다르다. 그래서 우리만의 독자적인글자가 필요하겠다고 말씀하신 부분에 자주정신이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고요.실용정신은 쉬운 글을 만들어서 사람마다 널리 편안하게 쓰게 하겠다고 하신 데서우리가 실용정신을 엿볼 수 있고요.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게 애민정신인데,어리석은 백성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혹은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글을 몰라서 나타내지 못하니까 이것을 매우 안타깝고 가엾게 여겨서 새 글을 만들겠다고 하셨죠.그래서 자주정신, 실용정신, 그리고 애민정신 이렇게 3가지가 한글창제의 동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레이션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은 우주의 원리를 담고 세상 모든 소리를 담을 수 있는 문자를 만들고자 했다. 하늘과 땅, 사람의 모습을 담은 현대의 한글은 자음과 모음 24자를 조합하여 무려 11,172자의 글자를 만들 수 있다. 내레이션 한글의 글자형태는 발음하는 소리에 근거하여 사람의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보고 만들었다. 예를 들어 미음은 ‘ㅁ’, ‘ㅁ’, 미음에서 발음이 더 세어지면 비읍으로 ‘ㅂ’,‘ㅂ’, 다시 비읍에서 발음이 좀 더 세어지면 피읖으로, ‘ㅍ’, ‘ㅍ’, 이처럼 글자의 형태와 소리 나는 구조가 일치하면 기억하기 쉬워져 처음 접하는 외국인도 한 시간 정도 배우면 문자 시스템을 이해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글은 배우기 쉽게 만들어졌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슬기로운 자는 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깨칠 것이오, 어리석은 자는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 라고 전해지고 있다. 내레이션 한글 사용을 확대하는 데에는 여성들의 역할이 컸다. 양반 사대부 계층에서는 여성도 한문 교육을 받는 일이 많이 있기는 했지만, 여성들끼리, 또는 여성과 남성이 편지를 주고받을 때에는 주로 한글을 많이 사용했던 기록들이 남아 있다. 내레이션 우리 민족의 글에 ‘한글’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붙여서 사용한 사람은 주시경이다. 주시경은 개화기에 우리말과 글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교육과 연구에 힘쓴 사람인데, 그 후로 ‘한글’이라는 명칭이 일반화 되었다. 내레이션 백성들이 쉽고 편리하게 문자 생활을 도모하도록 만든 한글, 세계에서 유일하게 만든 사람과 창제시기, 창제 원리까지 알고 있는 신비한 문자 한글은 교육을 통해 세계 속에 알리는 것뿐 아니라 한글을 활용한 디자인 제품을 통해서도 세계적으로 그 모습을 알리고 있다고 한다. 인터뷰 이건만 / 이건만 CEO 가장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유산이 뭘까 하다가 우리의 자연 발생적인 문화의 대표성을제가 고민해 보고 연구를 해본 결과 한글이라는 주제가 가장 한국을 대표하는 주제 같아요. 내국인들도 좋아하지만 특히 외국인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거 같아요.다른 데 가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문양이고, 특히 한글이 디자인적인 요소로 완벽하거든요. 굉장히 모던한 스타일이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적 요소로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한글이 들어간 제품들을 보면 훨씬 더 선호하고, 굉장히 좋아들 하는 거 같습니다. 내레이션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만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와 얼이 담겨 있으며, 고유 언어를 잃은 민족은 더 이상 민족이라 말하기 어렵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은 우리말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역경을 헤치고 ‘한글’을 지켜내어 민족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앞으로도 한글을 잘 보존하고 발전 시켜 나감으로써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널리 알리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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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0

[한국문화100]조선시대의 지식인의 상징, 퇴계 이황

조선시대 학자인 퇴계선생의 업적을 알아보자 ---대본--- 자막)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퇴계의 업적을 귀감 삼아 현재 우리의 삶 속에 많은 가르침과 교훈을 삼아야 할 것 같다. 나레이션청렴결백한 공직자이자 우수한 교육자, 그리고 성리학을 발전시킨 사상가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비인 퇴계이황. 퇴계 이황의 업적은 60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퇴계의 여러 업적중 가장 두드러 지는 것은 학자로서의 모습이다. 중국의 주자 이후에 동양에서 최고의 학자가 퇴계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그가 이처럼 많은 이들에 존경의 대상이 된 이유는 그가 학문을 연구한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 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퇴계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공직자로서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가 벼슬을 79번이나 사퇴했다는 이야기는 후세에 많은 귀감이 되는 좋은 일화다. 또한 도산서원을 비롯한 서원건립에 힘을 써서 많은 제자를 양성했는데, 출세를 하기 위해 학문을 닦는 안 좋은 학습 풍토를 개선하는데 퇴계 선생이 일조를 한 것이다. -인터뷰퇴계 선생이 살아 계실 당시에는 벼슬을 한다는 것이 최고의 가치였습니다.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과거 공부를 해서 벼슬 정승판서가 되면 부귀영화가 다 따라왔어요.그런데 퇴계 선생은 임금이 벼슬을 주면 사양했습니다.그 횟수가 70번이 넘습니다.명종이란 임금이 퇴계 선생을 모시려고 했는데 안 오시니깐 화공을 보내서 도산서원을 그리게 했어요.퇴계 선생이 도산을 기술한 도산기라는 글이 있는데 그 것을 (그림에)쓰게 하고, 그 다음에 신하들을 시켜서 ‘명현부지탄’이라 ‘어진선비를 불러도 안오는 것을 탄식하노라’ 하는 시를 만들어서 임금이 자기 침실의 병풍에 쳐놓고 그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퇴계 선생 이후에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대가 퇴계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가지고 많은 학자가 나오고 풍속이 순화해지고 도덕적인 수준이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퇴계 선생이 직접 기른 제자들 중에는 나라에 기둥이 되는 명신들이 많았습니다. 자막퇴계이황(1501~1570) 나레이션그는 올바른 교육 문화를 위해서 손수 교과서를 만들고 새로운 교육과정을 수립하였다. 또 항상 모범적인 태도로 바람직한 선비상을 보여 제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육자 이기도 했다. 그는 2000여편이 넘는 시를 남긴 문학자이자 효와 예법을 중시하고 실행한 인격자이며 성리학을 알린 사상가 등 다양한 방면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자막 매화시28년동안 매화에 관하여 지은 시를 모아 놓은 책이다.매화를 사랑한 퇴계 선생은 75제 107수에 달하는 많은 시를 남겼다. 무불경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조심하고 공경하여야 한다는 뜻. 도산십이곡퇴계선생이 도산의 산수를 소요하여 읊은 시조 성학십도유교철학의 주요체계 10가지를 도식으로 나타낸 것으로 68세떄에 작성하여 선조대왕께 보냄. 퇴계선생서절요퇴계선생의 중요한 서간(용건을 알리는 메모)을 모아놓은 책 퇴계선생언행록퇴계선생의 평소 언행을 기록해 둔 책으로 1613년 도산서원에서 간행함 나레이션특히 성리학의 심성론을 발전시키고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규명하는 등 조선시대 도학의 기본틀을 정립하였는데 큰 공을 세웠다. 유학의 철학적인 부분을 성리학이라고 부른다. 공자 시절 성현의 가르침들은 많았지만 이가 학문적으로 체계화 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13세기 송나라때와서 주자를 중심으로 학문적인 체계를 이루게 되는데 이를 성리학 이라고 부른다. 이 성리학을 발전시키고 널리 알린 대학자가 바로 퇴계 이황 선생이다. 자막주자(1130~1200)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성리학)을 집대성한 학자. 도산서당퇴계선생이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직접 머무르면서 제자를 가르치던 곳 인터뷰사실 퇴계 선생은 조선의 유학자이기에 앞서 일본,독일,영국 등에 알려진 세계적인 유학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퇴계 선생이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우리의 역사를 당생과 당파의 역사로 매도한 것 때문입니다. 성리학, 주자학, 유학이 폄하된 면이 있습니다.그러나 학문적으로 일본과 독일 같은 곳에서 퇴계학 연구가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레이션지금도 일본과 독일 등에서는 퇴계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퇴계의 업적을 귀감 삼아 현재 우리의 삶 속에 많은 가르침과 교훈을 삼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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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가정교육의 지혜를 배워보자, 한석봉과 어머니

가정교육의 지혜를 알아볼 수 있는 한석봉과 어머니 이야기를 들어보자.---대본---나레이션가정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한석봉과 어머니의 일화를 통해 참 된 교육의 가치를 발견해보는 건 어떨까요?떡 장사를 하며 아들 뒷바라지를 하던 한석봉의 어머니는 글 공부를 위해 아들을 전라남도 영암의 중림정사로 떠나보냅니다.어머니는 10년 동안 학업에만 매진하라며 보고 싶어도 찾아오지 말라고 당부를 하는데요, 한석봉은 어머니의 큰 가르침을 받아 굳은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서죠.3년이 지나고 어머니가 그리웠던 한석봉은 한밤에 집으로 돌아옵니다.한석봉은 반가운 마음에 어머니께 달려 들어가지만 어머니는 갑자기 찾아온 아들의 모습에 많이 놀랍니다. 어머니는 집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물었고 한석봉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글 솜씨를 자만하며 글방을 나와도 된다고 어머니께 말합니다.그의 말에 어머니는 참 된 가르침을 주기 위해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됩니다.불을 끈 상태로 한석봉은 종이에 글을 쓰고, 어머니는 내일 장에 내다 팔 떡을 썰어내자는 것이었습니다.불을 끈 상태에서 누가 더 예쁘게 쓰고, 써느냐에 대한 대결이었던 것이죠.어머니는 한석봉이 이기면 공부를 그만하고 지금 집으로 돌아와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한석봉이 진다면 지금 바로 다시 공부를 위해 죽림정사로 떠나야 된다고도 하셨죠.칠흑같이 깜깜한 방안에서 어머니는 떡을 썰고 한석봉은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그리고 한참 후 어머니가 다시 불을 켰습니다.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어머니가 썬 떡은 하나같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 반면 한석봉이 쓴 글씨는 삐뚤빼뚤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습니다.어머니는 한석봉의 글씨를 보고 다시 돌아가라고 냉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그 후 한석봉은 어머니의 뜻을 헤아리고 더욱 공부에 매진하겠다고 다짐합니다.결국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킨 한석봉은 훗날 서도의 명인이자 한문의 본고장인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명필가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자막도산서원 전교당석봉 한호 (1543~1605)나레이션조선의 명필가인 한석봉의 서체는 당시 많은 이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퇴계선생이 세운 도산서원 전교당의 현판 역시 한석봉의 작품이지요.우리가 주로 한석봉이라고 알고 있는 그의 정식 이름은 ‘한호’입니다.‘석봉’은 그의 호입니다.추사 김정희 선생과 쌍벽을 이룬 그의 서예실력은 조선중기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는데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국의 주요 문화재들에서 그의 글씨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한석봉의)글씨는 중국의 왕희지체(중국 최고의 서예가인 왕희지의 글씨체)를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에 왕희지체의 서법을 계속 학습하고 이 것을 자기화 시켜서 조선시대의 많은 서예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한석봉의 글씨체는)방정하고 단정한 서체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나레이션가정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한석봉과 어머니의 일화를 통해 참 된 교육의 가치를 발견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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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농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다, 풍물 굿

농악이라 불리는 풍물 굿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대본---내레이션이때 농사꾼들의 능률을 올려주기 위해서 한데 모여 흥을 돋우는 의식을 벌였는데 이를 풍물 굿 이라고 한다.주로 농사를 할 때 행해져 농악으로도 알려져 있는 풍물 굿은 농경사회를 이뤄온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을 알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농촌문화다.풍물 굿이 주로 타악기를 이용한 흥겨운 리듬의 굿판을 벌이는 게 기본 형식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때때로 춤과 노래등의 다양한 퍼포먼스를 통해 재미를 더해주곤 한다.뿐만 아니라 서로 음식도 나누어 먹고 대화도 하는 등 다목적 기능의 종합예능 형태를 띠는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버라이어티 행사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풍물 굿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한민족이 한반도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공동노동을 하면서 노동의 애환을 달래주는 음악과 춤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한다.그러나 풍물 굿은 두레라는 강력한 조직에 힘입어 상당히 체계적으로 발달하였다. 인터뷰풍물 굿이란 농악이라고도 하는데요, 소위 풍물 꾕과리, 징, 장구, 북, 소고 등의 타악기들을 동원을 하고 여기에 음악적인 요소, 무용적인 요소, 연극적인 요소 등이 종합적으로 결합되어져 만들어지는 우리나라의 전통 공연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풍물 굿은 이른바 집단적인 신명이라고 하는 (한국인들이 신난다고 하는 것) 것을 가장 깊고 포괄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그런 역동성을 가지고 있는 공연 예술이라는 점에 가장 중요한 특징이 있겠습니다.내레이션풍물 굿의 형태와 특징은 지역마다 각기 다른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데,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참가 한 팀들을 통해 풍물 굿을 만나보자.자막이서들소리보존회 (경상북도)경북 청도군 이서면에서 전승되는 농업노동 풍물굿으로 주민들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내레이션우리선조들의 마을 공동 문화상을 알아 볼 수 있는 대표 전통 문화, 풍물 굿. 농경문화가 없어지면서 자연스레 풍물 굿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전통문화를 지키는 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한 이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는 계속되리라 믿는다.앞으로도 풍물 굿은 한국 최고의 농민예술로 우리들에게 많은 울림을 줄 것이다. 시대는 변했지만 한민족의 한과 정서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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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3

[한국문화100]떡, 그 속에 담긴 한국인의 다양한 이야기

한국의 전통음식인 떡에 대한 소개영상 한국문화 100 떡, 그 속에 담긴 한국인의 다양한 이야기 나레이션 한국의 거리에서는 떡집을 쉽게 찾아볼수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음식인 떡은 예로부터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이 있을 때마다 즐겨먹던 친숙한 음식입니다. 요즘도 명절, 결혼식, 생일 등 다양한 행사에서 떡을 찾고 있는데요 왜 한국인들은 이토록 떡을 찾는 것 일까요? 쌀 농사를 주로 짓던 옛 선조들은 남은 쌀 재료와 잡곡을 섞어서 떡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정확히 언제부터 떡을 만들어 먹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발굴 된 떡시루 등을 놓고 볼 때 청동기 또는 초기 철기시대부터 먹지 않았을까 짐작이 됩니다. 한국인들에게 떡은 오랜기간동안 많은 사랑을 받는 전통음식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인공 조미료가 가미된 자극적인 음식과는 달리 쌀, 콩, 팥 등의 천연 재료만으로 만들어지는 웰빙 음식인 떡은 지금까지도 건강식으로 한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죠 먹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부터 떡은 크고 작은 행사에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음식이었습니다. 특히 결혼과 같은 집안의 경사에 떡은 필수품이었는데요 행사별 떡의 자세한 의미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인터뷰 혼례 때는 찰떡(찹쌀떡)을 가지고 인절미를 비롯한 여러 가지 떡을 만들어 이바지로 보내고 있어요. 그 우수한 떡의 세계화를 위해서 우리가 좀 더 노력하여 우수한 한국의 전통문화를 세계 속에 꽃피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백일 때는 하얀색으로 떡을 만들죠. 그건 맵쌀가루로 물을 반죽한 후 시루에 안쳐서 만드는데, 아이가 순수하게 무럭무럭 자라라는 의미로 만들고... 또 나쁜 것을 막아주고 건강하게 잘 자라라는 의미로 수수팥떡을 열 살까지 해서 먹습니다. 나레이션 과거에는 직접 집에서 떡을 만들어 이웃과 나누어 먹는 풍습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화가 되면서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웰빙 열풍을 타고 직접 떡을 만들어 먹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데요, 집에서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떡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인터뷰 이것은 단자라고 하는 떡이에요. 단자라는 것은 안에 소가 들어간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삶는 떡입니다. 경단은 소가 없는 것을 말하고 이렇게 소가 들어간 것을 단자라고 합니다. (단자는)어린아이 생일과 어르신들 생신 상에 많이 올려요. 이렇게 소를 넣고 바람을 빼줘야 해요, 바람이 안 빠지면 삶을 때 터집니다. 잘 안 터지게 꼭꼭 주물러서 동그랗게 돌려준 다음에 삶으면 됩니다. 자막 - 물이 펄펄 끓을 때 단지를 넣어준다. - 단지가 서로 달라붙지 않게 가끔 저어준다. - 물위에 단지가 뜨면 (약 6~7분 정도) 건져낸다. - 건져낸 단지는 완전히 식을 때까지 찬물에 헹구어낸다, - 찬물에 헹궈낸 단지는 자연 건조 시킨다. 이때 설탕을 조금 뿌려주면 수분이 빨리 제거된다. 인터뷰 이제는 삶은 단지에 고물을 묻히는 작업입니다. 자막 - 카스테라가루, 거피 팥, 녹차 가루 등 식성과 기호에 따라 다양한 고물을 만들어 묻히면 된다. -대추와 해바라기 씨 등으로 마무리해주면 끝. 나레이션 자 이제는 여러분도 집에서 맛있는 떡을 만들어 볼 수 있겠죠? 최근 한류열풍으로 인해 k푸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떡을 찾고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참 많아 졌는데요, 우리 전통음식인 떡에 대한 외국인들이 반응이 상당이 흥미롭습니다. 인터뷰 매우 흥미롭고, 전통적입니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배우게 돼서 즐겁습니다. 우리 떡,한과가 크고 푸짐한 것 보다는 한입에 쏙들어가는 것, 고물이 떨어지는 것보다는 그냥 먹을 수 있는 것, 이처럼 더 기능적인 식품이 들어 가야되고, 아름다워야 되고, 또 좀 두고 먹어도 굳지 않아야 되고, 이런 점들이 더 보완이 된다면 정말 훌륭한 떡, 한과가 되지 않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이)떡을 하면서 내가 먹는 떡이 아니라 나누어 먹는 떡으로, 항상 가족을 생각하고 내가 좋은 일이 있을 때에 동네사람이나 직장동료들과 나누어 먹는 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아마 떡은 사랑이고 나눔이고 우리민족성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내레이션 이처럼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떡은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즐길 수 있는 웰빙 식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 우수한 떡의 세계화를 위해서 우리가 좀 더 노력하여 우수한 한국의 전통문화를 세계 속에 꽃피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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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 김정호의 노력이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이야기와 그 비화 ---대본---나레이션대동여지도는 조선후기 김정호가 제작하였다. 고지도 중에서 유일하게 풍수사상에 기초를 둔 산줄기 표현방식과 산악투영도법으로 국토 전체를 그린 대동여지도는 한국의 고지도 중에서 가장 문화상징성이 강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인터뷰대동여지도는 조선후기 지도학의 여러 장점들, 성과들을 종합한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우리나라 지도중에서 가장 큰 지도이고요, 축척이 약 1:165,000 정도의 축척을 가진 지도입니다.남북으로는 약 6.6m 동서로 약 4.2m 정도의 크기를 가지는 지도입니다.아주 큰 축척의 지도이기 때문에 내용이 아주 풍부하고 정확하고 자세할 수 있었고요,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으로 제작 되었다는 점입니다.목판으로 제작한 것은 여러벌을 제작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그리고 그것은 지도의 보급, 대중화, 공유화를 목적으로 했다는 점이 돋보입니다. 나레이션김정호는 조선후기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지도그리기가 취미였는데, 그의 영민함은 마을 사람 모두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는 사람들이 정확한 길을 알지 못해서 사고가 나는 것을 많이 보고 정확한 지도 만들기에 인생을 바칠 것을 결심한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도 그리기에 열중한다. 산과 바다, 겨울과 여름을 가리지 않고 떠난 그의 여정은 엄청난 고난의 길이였다. 굶주림과 병마로 쓰러지기가 부지기수였으며, 확실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그가 백두산을 여 덟 차례나 올랐다는 설도 있을 정도였다. 1861년, 마침내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대동여지도가 완성됐다. 일설에 의하면 대동여지도를 본 대원군이 군가기밀 유출을 우려해 김정호를 옥에 가두었다고하는데 그 후에 그의 업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인터뷰그런데 최근에 많은 연구에 의하면 고산자 김정호 선생은 옥사를 하지도 않았고, 대원군이 옥에 가두지 않았다라는 것이 밝혀졌고요, 그리고 김정호가 딸과 함께 둘이서 굉장히 어렵게 핍박을 받아가면서 만들었다라고 일제강점기(자료)에 나와있었는데 그것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최근에 판명이 되고 있습니다.이게 대동여지도 복제본입니다. 여기 보시면 당저십이년신유 라고해서 철종12년 신유년 1861년에 간행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지도표’라고 하는 대동여지도에서 사용한 범례를 수록해 놓았습니다. 대동여지도의 가장 큰 특징중에 하나는 기호를 많이 사용해서 매우 명확하고 지도학적으로 훌륭한 지도를 만들었다는 점에 있습니다.역을 기호로 표시하고 ‘역’이라는 글자는 쓰지 않은거죠. 그래서 ‘양재’라고만 표시를 했습니다. ‘부산진’이라고 한다면 ‘부산’만쓰고 사각형으로 표시를 한거죠. 나레이션김정호는 공적인 도움 없이 개인의 의지와 재능으로 혼자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그가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며 대동여지도를 만들지 않았다는 설들이 많으나 그 사실 여부를 떠나 뛰어난 제도기술과 과학적 제도방법을 통해 가장 사실적인 지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모두 동의할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실측에 의한 현대지도가 나오기 전까지 가장 정밀한 지도였다. 이 훌륭한 문화유산이 나오기까지 한 개인이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는지를 우리는 알아야한다.그의 위대함과 노고를 한번 더 되새겨 보는 일이어야 말로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고 알리는 시작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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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마을 공동의 문화공간 정자나무

[한국문화100]마을 공동의 문화공간 정자나무 예로부터 마을의 휴식과 신앙 또는 회합이 이루어졌던 정자나무의 가치를 재조명해본다. 정자나무편 대본 내레이션 바쁘게 살아가는 도시의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의 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정작, 사람들은 서로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혹시,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고 계신가요?혹시, 마을주민들과 서로 인사하며 지내시나요?혹시, 마을주민들과 모여서 어울린 적이 있으신가요? 사람은 넘쳐나도 삭막하기만한 현대의 도시. 서로가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만한 공간과 여유가 없는 것이 현실이기는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마을사람들이 정을 나누던 공간이 있었습니다. 마을 초입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모여 마을 일을 의논하거나 쉬기도 했던 오래된 고목. 우리 조상들은 편안한 그늘을 제공해주던 큰 나무를 정자나무라 부르며 사랑방처럼 함께 머물렀습니다. 정자나무는 한결같은 포근함으로 어른들에게는 휴식을 아이들에게는 놀이공간을 제공하였습니다. 정자나무의 넉넉한 규모와 수령처럼 정자나무와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인터뷰김판조그전에는 집이 초가삼간이잖아요. 늘어진 초가집인데 더워서 못살아. 그러니까 점심을 먹으면 다 나온거예요. 다 나와서 오후 세시정도 되어 조금 서늘해지면 그때 일터로 나갔는데 꽉차버려요, 여기가. 이렇게 올라가서 저렇게 늘어진 가지에다가 훈주(줄타기)도 타고 여기 나뭇가지에다가 그네도 매어놓고 그네도 타고 그랬어요. 어르신들이 나뭇가지 찢어진다고 못하게 했지. 내레이션현대의 도시들이 들어나고 사람들이 각자 바빠지면서 정자나무는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갔습니다. 하지만 다시금, 늘 정이 넘쳤던 정자나무의 모습을 기억하고 따뜻하며 푸근했던 그 순기능을 살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름지기재단과 서울디자인재단이 공동으로 기획하는 마을정자나무프로젝트입니다. 자막마을정자나무 가꾸기 프로젝트, 아름지기재단, 서울디자인재단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350세 느티나무 인터뷰장영석 / 아름지기재단 사무국장그동안 먹고 사는 문제, 급속히 산업화되고 경제적인 부분들을 쫓다가 결국은 다시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살 수 있고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를 전통에서 힌트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자나무만 하더라도 그냥 단순히 오래된 나무일뿐이지만 사람들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또 그 아래 같이 모여서 사람 살만한 동네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되거든요. 요즘 만들어지는 그 어떤 최신식의 건물이나 현대적인 공간보다도 사람들에게 더 큰 위안을 줄 수 있는 곳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정자나무 하나하나를 고쳐가는 것이 단지 자연보호 운동이 아니고 더 아름다운 삶을 만드는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김순희이런 공간이 생기니까 동네도 아름답고 공기도 좋은데 환경이 깨끗해지니까 살기 좋고 보기 좋지요. 박지훈주변에 자주 왔는데요. 정비된 후에 풍경도 더 괜찮아 진 것 같고 포근한 기분이 들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내레이션정자나무는 단순히 마을의 큰 나무가 아니라 사람, 자연, 문화가 어우러지던 마을의 상징적인 소통 공간이었습니다. 사람사이의 단절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요즘, 정자나무가 가지는 정의 가치는 우리가 다시 연결되어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인터뷰방영자안락하고 시원하고 굉장히 정서적으로 좋네요. 이혜숙(혼잡한)도심 속에 있는 느낌이 안 들고 편안하고 어느 시골에 와있는 그런 느낌이 드네요. 내레이션마을 공동의 문화 공간 정자나무, 앞으로도 소중히 지켜야할 우리의 문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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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