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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100]드넓은 영토를 개척한 광개토대왕

한민족의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확장 시켰던 광개토대왕에 대해 알아본다. ------------------------------------------------------------------------------------------- Na 이곳은 충북 충주에 위치한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전시관에는 고구려가 만주부터 남한강 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던 한국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중요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바로 우리나라의 유일한 고구려 비석, 충주 고구려비이다. int 박경애 / 충주 문화관광 해설사 한반도의 유일한 (고구려) 석비라는 사실 만으로도 굉장히 큰 역사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비 비문에 나오는 내용을 통해서 그때 당시에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넘어서 이곳 충주지역까지 진출했었던 확실한 증거자료입니다. Na 한민족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고구려의 장수왕 시대의 기록이 남아 있는 충주 고구려비, Na 고구려가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까지 그 기초를 닦아 놓은 왕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장수왕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이다. Na 어느 나라나 어느 민족이나 자랑할 만한 왕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여러 가지 업적 가운데 나라를 키우고 영토를 확장하는 왕만큼 존경받는 왕이 없을 것이다. Na 그래서인지, 광개토대왕을 가리키는 완전한 이름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인데, 이 이름은 땅을 넓게 차지하고 나라를 잘 다스린 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int 고운기 /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에는 주로 중국 쪽 나라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광개토대왕비에는 그뿐만 아니라 신라 백제와의 관계 그리고 또 바다 건너 일본과의 관계 이런 것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보면은 광개토대왕은 북쪽으로는 중국에 여러 나라들과 활발한 외교전을 벌였는가 하면 또 남쪽으로는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면서 남진정책의 시발점도 바로 광개토대왕 때 부터 이루어졌고, 광개토대왕은 동서남북을 통틀어서 고구려의 영토를 최대한 확장시켜 나갔던 그런 왕이었고, 이런 기록들이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해집니다. Na 중국 지린 성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경기도 구리시에서는 후손들에게 고구려의 진취적인 기상과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고자 실제 크기의 광개토대왕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그 비문의 내용을 일부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Na ‘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Na 왕위에 올라 20여년의 기간 동안 나라를 부국하게 만들기 위해 쉴 틈없이 달렸던 광개토대왕은 39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게 된다. int 고운기 /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고구려의) 국경이 확대가 되고, 또 그 확대된 국경 속에서 나라가 온전히 이어나갈 수 있게끔 그 틀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 언제 드러나냐면 그의 아들인 장수왕 때 드러나요. 장수왕은 왕위에 무려 70년을 넘게 있었어요. 그리고 이름도 장수왕이에요. 장수왕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고구려가 있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정말로 잘 물려받았던 것이 뭐냐면, 이렇게 큰 나라를 지키고 유지해 나가는 데에는 전쟁만 가지고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무력에 의한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서 70년을 고구려를 끌고 갔거든요. 그것이야말로 사실 우리가 고구려의 역사 속에서 특히 5세기에 광개토대왕에게 배워야 하는 가장 훌륭한 역사적 교훈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죠. Na 우리민족을 일컫는 말 중에 배달의 민족이라는 말이 있다. 배달의 뜻은 고구려의 기상과 뜻을 널리 펼쳤던 우리 민족을 높게 나타내는 말이다. 단순히 군사력으로 영토를 확장한 것이 아니라 주변국가와 백성을 아우르는 통솔력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확장시켰던 광개토대왕, 그는 서양의 정복 왕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비견되는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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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5-10-20

[한국문화100] 생명의 흙, 황토

황토는 한국인의 정서적 감흥에 가장 잘 부합되는 색깔과 느낌이다. 가치를 알아보고 상징적인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황토 대본) 나레이션 중국 최고의 지리서 산해경, 세계기록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 최고의 의학전서 동의보감. 황토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문화와 역사에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황토는 구들방, 초가집 등 주거문화를 시작으로 조상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재산이었다. 또한 예로부터 살아있는 생명체라 하여 많은 약성을 가져 무병장수의 흙으로도 불려 왔다. 인터뷰 노희명/서울대학교 응용생물학부 교수 황토란? 황토는 말 그대로 누런 흙을 뜻합니다. 영어로 보면 loess로 독일어 어언을 갖고 있는데, 나일강 유역에서 처음으로 발견 됐음에 이러한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나레이션 생명의 흙 황토, 황토는 학술적으로 바람에 의하여 운반되는 쌓인 황색의 광물질을 의미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암석이 풍화되는 과정에 생긴 토양’을 총칭하여 황토라 한다. 황토는 단순한 흙이라는 범주를 뛰어 넘어 주거와 식생활뿐 아니라 다양한 생활 제품으로 이용되고 있다. 전라북도 고창, 황토로 유명한 이곳은 지하 6미터 아래에 있는 입자가 작고 색이 짙은 황토를 채굴 하는 곳이다. 고창황토를 연구하시는 박영택 선생님께 우리 고유의 황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인터뷰 박영택 /황토 명인 황토분말이나 건축자재를 만드는 황토의 채취장입니다. 산의 1미터정도 깎고 그 밑의 황토를 채취를 해서 황토를 가공해 황토제품을 제작합니다. 황토는 예로부터 조상들에게 꼭 필요한 삶의 일부였지만 현재는 황토를 일상생활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충남 /계족산 하지만 이곳 계족산에서는 현대인들이 황토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다. 도심 속에 위치한 황톳길을 맨발로 걸으며 황토를 느끼고 상쾌한 기운도 얻어 갈 수 있는 곳이다. 최희주/ 신세대유치원 교사 저희 유치원의 슬로건이 자연생태 활동위주입니다. 자연 생태 활동 위주로 교육을 하다 보니 자연 황토가 건강에 도움이 많이 되고, 황토의 촉감놀이도 느낄 수 있으며 시멘트에서 사는 아이들보다는 자연에 어울러져 사는 아이들이 좋을 꺼 같아 오게 됐습니다. 흙과 우리 민족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흙을 어머니라고 부를 만큼 다양한 흙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이렇듯 황토의 유용성은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우리 전통 흙 문화로 지키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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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가정교육의 지혜를 배워보자, 한석봉과 어머니

가정교육의 지혜를 알아볼 수 있는 한석봉과 어머니 이야기를 들어보자.---대본---나레이션가정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한석봉과 어머니의 일화를 통해 참 된 교육의 가치를 발견해보는 건 어떨까요?떡 장사를 하며 아들 뒷바라지를 하던 한석봉의 어머니는 글 공부를 위해 아들을 전라남도 영암의 중림정사로 떠나보냅니다.어머니는 10년 동안 학업에만 매진하라며 보고 싶어도 찾아오지 말라고 당부를 하는데요, 한석봉은 어머니의 큰 가르침을 받아 굳은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서죠.3년이 지나고 어머니가 그리웠던 한석봉은 한밤에 집으로 돌아옵니다.한석봉은 반가운 마음에 어머니께 달려 들어가지만 어머니는 갑자기 찾아온 아들의 모습에 많이 놀랍니다. 어머니는 집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물었고 한석봉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글 솜씨를 자만하며 글방을 나와도 된다고 어머니께 말합니다.그의 말에 어머니는 참 된 가르침을 주기 위해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됩니다.불을 끈 상태로 한석봉은 종이에 글을 쓰고, 어머니는 내일 장에 내다 팔 떡을 썰어내자는 것이었습니다.불을 끈 상태에서 누가 더 예쁘게 쓰고, 써느냐에 대한 대결이었던 것이죠.어머니는 한석봉이 이기면 공부를 그만하고 지금 집으로 돌아와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한석봉이 진다면 지금 바로 다시 공부를 위해 죽림정사로 떠나야 된다고도 하셨죠.칠흑같이 깜깜한 방안에서 어머니는 떡을 썰고 한석봉은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그리고 한참 후 어머니가 다시 불을 켰습니다.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어머니가 썬 떡은 하나같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 반면 한석봉이 쓴 글씨는 삐뚤빼뚤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습니다.어머니는 한석봉의 글씨를 보고 다시 돌아가라고 냉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그 후 한석봉은 어머니의 뜻을 헤아리고 더욱 공부에 매진하겠다고 다짐합니다.결국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킨 한석봉은 훗날 서도의 명인이자 한문의 본고장인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명필가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자막도산서원 전교당석봉 한호 (1543~1605)나레이션조선의 명필가인 한석봉의 서체는 당시 많은 이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퇴계선생이 세운 도산서원 전교당의 현판 역시 한석봉의 작품이지요.우리가 주로 한석봉이라고 알고 있는 그의 정식 이름은 ‘한호’입니다.‘석봉’은 그의 호입니다.추사 김정희 선생과 쌍벽을 이룬 그의 서예실력은 조선중기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는데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국의 주요 문화재들에서 그의 글씨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한석봉의)글씨는 중국의 왕희지체(중국 최고의 서예가인 왕희지의 글씨체)를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에 왕희지체의 서법을 계속 학습하고 이 것을 자기화 시켜서 조선시대의 많은 서예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한석봉의 글씨체는)방정하고 단정한 서체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나레이션가정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한석봉과 어머니의 일화를 통해 참 된 교육의 가치를 발견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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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질서이자 삶의 지혜, 풍수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조화롭게 계승시켜온 조상들의 삶의 지혜 풍수에 대해 알아본다. ---------------------------------------------------------------------------------------------------------- 자막 : 풍수(風水) 내레이션 : 풍수,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바람’과 ‘물’이라는 뜻입니다. 동아시아만의 땅과 공간을 해석하고 활용하는 고유한 사상인 풍수는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국가의 자연관을 잘 나타내고 있고, 실제로 조경과 건축 등에 영향을 미쳤던 사상인데요. 자막 :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국가의 자연관을 잘 나타내고 실제로 조경과 건축 등에 영향을 미쳤던 사상, 풍수 내레이션 : 풍수 사상은 중국 전국 시대 말기 이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 시대 이전에 전래되었는데, 일반적으로는 주로 묘지나 주택, 명당과 같은 터를 잡을 때 풍수가 쓰였습니다. 자막 : 풍수사상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 이전부터 시작,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이전에 전래됨. 내레이션 : 우리나라에 풍수이론이 수용된 시기를 추정하면, 역사적 문헌에 8세기임을 나타내고 있는데요. 도선이라는 사람이 풍수지리설의 시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막 : 풍수의 이론은 중국에서 비롯되었으나 8세기경 우리나라에 도입된 뒤 우리 나람의 생각과 가치가 더해짐. 자막 : 도선(道詵, 827~898) 도선은 신라 말기의 승려이자 우리나라 풍수설의 대가. 통일신라시대 김천 지역의 청암사를 창건한 승려로 도선 국사로 널리 알려짐. 내레이션 : 풍수는 땅의 질서와 이치를 이해하는 전통적 지혜이자 지리과학으로서, 현재까지 한국의 취락입지 및 조경, 공간배치와 구성, 건축 등에 널리 활용되고 되고 있습니다. 인터뷰 : 이공원 / 서경대학교 경영대학원 풍수지리 교수 풍수지리는 장풍득수의 준말로서 바람을 감추고 물을 얻는 원리가 풍수지리인데, 대부분 사람은 풍수를 미신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풍수지리라는 것은 태양과 지구가 어떤 관계인지를 설명하는 이론이 되기 때문에 합리적이고, 특히 우리나라 한민족이 오천 년간 살아오면서 누리고 있는 문화의 많은 부분이 풍수에 깃들여져 있기 때문에 풍수지리는 우리 생활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내레이션 : 풍수지리의 이론은 매우 상식적이고 본능적이며 자연발생적인 것이 많은데요. 대표적인 예로 잠자리는 우리가 무의식, 무방비 상태에 있기에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데, 잠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안정감이 있으면서 편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막 : 풍수지리의 이론은 매우 상식적이고 본능적이며, 자연발생적인 것이 많음. 내레이션 : 잠자리를 편안하게 하기 위해선 물론 방위에 따라 기운이 달라지지만, 우선적으로 머리를 방문에서 먼 곳에 두고 그 다음 창문에서 먼 곳에 두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요. 자막 : 잠자리를 편안하게 하기 위한 풍수 인테리어 - 머리를 방문에서 먼 곳에 두면 좋음 - 그 다음에는 창문에서 먼 곳에 두면 좋음 내레이션 : 풍수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대각선 시야가 가장 커야 외부 침입에 대한 불안감을 많이 덜 수 있고, 또한, 화장실도 침대에서 멀어야 좋다고 합니다. 자막 : 잠자리를 편안하게 하기 위한 풍수 인테리어 - 대각선 시야가 가장 커야 외부 침입에 대한 불안감 감소 - 화장실도 침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좋음 자막 : 조상들이 오랜 시간 땅과 자연을 세심한 관찰을 바탕으로 만든 삶의 지혜, 풍수(風水) 내레이션 :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조화롭게 계승시켜온 풍수, 우리 조상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땅에 대한 깨달음과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만든 삶의 지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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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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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9

[한국문화100]마을 신앙의 중심 서낭당

민중의 염원과 기원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마을 신앙의 중심 서낭당의가치를 재조명한다. 제목 : 마을 신앙의 중심 서낭당 내레이션 성황은 서낭당에 모신 신을 뜻하는 것으로 성황당과 서낭당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지금은 산업화와 도시화로 많이 사라졌지만 마을 어귀나 산허리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돌무더기, 오래된 나무, 작은 당집 그리고 나무와 당집이 같이 있는 형태 등으로 서낭당은 존재했다. 서낭당에는 오방색을 뜻하는 오색띠가 매어져 있거나 금줄이 쳐져 있는데 이러한 것은 복을 부르고 사악함을 쫓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은 서낭당을 개인적 혹은 마을공동체 신앙의 수호신 삼아 섬겼다. 인터뷰 김창호 /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서낭당이 지금은 많이 없어졌습니다. 남아있는 서낭당들도 무형문화재라는 입장에서 보존되고 있는 차원인데요. 사실, 서낭당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마을 공동체의 표상과도 같은 것입니다. 서낭제를 통해서 마을 사람들이 하나가 되기도 하고 그 안에서 다음세대에 대한 마을의 전통을 교육하는 것도 일어납니다. 굉장히 순기능적인 여러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마을이 옛날 같지 않고 아파트와 같은 분할된 가구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공간으로 변해서 옛날에 한마을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하나가 되었던 모습은 찾기가 힘든데,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것이라는 입장 이외에도 한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뜻을 모을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서낭당을 통해서 주어졌던 것인데요. 그런 부분들이 오늘날에도 꼭 필요하고 없어졌기 때문에 아쉬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막 성황당 1937년 발표된 정비석의 단편소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토속신앙과 인간의 삶을 신선하고 조화롭게 묘사 내레이션 우리의 문학과 노래에는 서낭당이 자주 언급되었다. 그만큼 우리 민중들과 가까웠던 것이 서낭당이다. 정비석의 소설 성황당은 후미진 평안도 산골에서 숯을 구워먹고 사는 순이 부부와 그녀를 노리는 사내들의 이야기를 원초적이고 관능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특히, 성황당과 순이의 관계를 통해 토속신앙과 인간의 삶을 신선하고 조화롭게 묘사했다. 자막 깊은 산중에서 숯을 구워 생계를 꾸려가는 현보의 아내 순이는 모든 일을 성황님의 은덕으로 여기며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 현보를 도와 숯가마에 불을 때던 순이가 더위를 참지 못하여 옷을 벗고 개울에서 목을 할 때, 예전부터 순이를 노리고 있던 산림간수 긴상이 그녀의 옷을 감추고 협박을 한다. 순이는 이에 단호히 대항하고 앙심을 품은 긴상은 순이의 남편 현보를 산림법 위반으로 고발하여 감옥에 가둔다. 이때, 순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칠성이 찾아와 긴상과 칠성은 순이를 사이에 두고 격투를 벌인다. 며칠 뒤, 다시 칠성이 나타나 순이에게 현보가 3년은 감옥에서 지내야 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같이 도망칠 것을 종용한다. 그가 가져온 분홍 항라적삼과 수박색 목메린스 치마에 마음이 끌린 순이는 칠성을 따라나선다. 그러나 30리쯤 갔을 때 산을 떠나 살아야 한다는 사실과 현보에 대한 그리움, 무엇보다도 성황님의 벌에 대한 무서움 때문에 순이는 칠성에게서 도망쳐 집으로 돌아온다. 순이가 “성황님 ! 성황님 !” 을 외며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방안에서는 “에헴” 하는 현보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이날 밤 따라 접동새와 부엉새 소리는 순이의 가슴을 파고드는 듯이 정다운 것이었다. 자막 경상북도 안동시 하회마을 내레이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민속적 전통과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에서는 두 가지 형태의 서낭당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하회마을 가장중앙에는 삼신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가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하회마을이 조성될 때 심은 것으로 여겨지는 나무의 수령은 6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신목을 서낭당 삼아 정월대보름에는 제를 올리며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과 공동의 소망을 빌기도 한다. 인터뷰 손주호 / 대구광역시 지금 만나고 있는 연인과 안 싸울 수는 없겠지만, 싸우더라도 서로 잘 잡으면서 이 운명 끝까지 꼭 가져가고 싶습니다. 김명숙 / 서울특별시 저를 비롯해서 제 가족과 친지, 주위의 분들, 다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김문배 / 서울특별시 곧 아이가 태어납니다. 아이가 무사히 잘 태어나고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그것을 빌러 왔습니다. 내레이션 특히, 삼신당은 자식을 귀하게 여겨 후손이 잉태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잘 들어주어 마을 전체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하회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앞산의 중턱에는 또 다른 서낭당인 중당이 조성되어 있다. 서낭당과 같은 마을제당은 주민들의 종교심성을 공유할 수 있는 신성한 영역이다. 이 곳에서 사람들은 마을의 신을 중당에 모셔와 제사 지내고 서로의 안녕을 기원한다. 해설사 인터뷰 박순화 / 안동문화관광해설사 중당은 국신당을 모셨어요. 국신당은(공민왕의 모신 것으로) 공민왕이 안동으로 70여일을 몽진을 오셨어요. 홍건적의 난을 피해서, 그래서 안동에는 공민왕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아마 그 때문에 조성되었지 않나 싶습니다. 풍산류씨들이 하회마을에서 많은 인재가 특히, 영의정 서애 유성룡 대감 같은 명재상이 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자막 국신당은 신격화된 고려의 공민왕을 의미하며 특히 안동지역에서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신앙되고 있다. 자막 강원도 강릉시 내레이션 강원 강릉시에서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강릉단오제 기간 동안 대관령산신을 모셔와 서낭제를 지낸다. 자막 학산서낭당 강릉단오제의 주신 대관령국사성황 범일국사가 태어난 학산의 서낭당으로 매년 음력 4월15일 머물러 굿과 제례를 올린다. 내레이션 강릉고을을 지켜주는 대관령 산신께 제사하고 험준한 대관령 산길의 안전을 기원하며 풍작과 풍어 집안의 태평 등을 기원한다. 제를 시작으로 진행되는 강릉단오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축제로 신과 인간이 자연스럽게 만나 하나가 되는 만남의 공간이다. 서낭당에서 마을의 수호신을 섬기는 것은 단순히 기원의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식, 심적인 유대, 연대감을 강화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민중이 가깝게 여기는 마을제당이자 개인제당이었던 서낭당. 앞으로도 소중히 지켜야할 우리민족의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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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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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 대한민국의 국기, 태극기

대한민국의 국기, 태극기 내레이션 나는 1882년에 태어났습니다. 중국 청나라에 의해 강제로 태어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아버지 고종의 꿋꿋한 의지로 대한민국의 태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영원한 대한민국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자막 나는 태극기입니다. 최초의 태극기 (1882) 내레이션 나는 네 번의 변화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자막 1890: 고종황제가 조선정부 외교 고문이었던 미국인 데니(O.N.Denny)에게 하사한 태극기 데니태극기(1890) 독립신문 제호에 도안된 태극기(1896) 프랑스에서 열렸던 파리박람회장 내 한국관에 게양되었던 태극기 파리만국박람회에 걸린 태극기 내레이션 지금의 완성된 나의 모습은 1949년 정부에서 42인 국기 제정위원회를 구성, 제정된 것입니다. 나는 평화를 사랑합니다. 밝고 순수한 민족을 사랑합니다. 따뜻한 기운과 차가운 기운을 한데 모아 대자연의 진리를 형성합니다. 자막 따뜻한 양의 기운, 차가운 음의 기운, 하늘 건, 땅 곤, 물 감, 불 리 내레이션 건괘는 하늘을, 곤괘는 땅을, 감괘는 물을, 이괘는 불을 상징합니다. 태극을 중심을 통일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가 태어난지 130년이 지났습니다. 사람들은 나와 함께 울기도 했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자막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잊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유관순 3.1운동 당시 나는 각자 마음에 담겨져 있는 다양한 모습으로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남상락 태극기(1919) 충청남도 당진군 대호지면에서 3.1운동을 지위한 남상락이 만세시위 당시에 사용하고 죽을 때까지 간직한 태극기 태극기 목각판(1919)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어내기 위해 만든 목각판 김세영 태극기(1919)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읍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세영이 보관한 태극기 각자 모양이 다른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했지만 조국 광복과 민족독립의 염원만은 하나였습니다. 한국광복군 서명 태극기(1945) 광복직후 안후이성 푸양에서 주둔하던 한국광복군 제 3지대 제 2지구대 대원들이 광복의 소감과 환국 이후 소망을 기록한 태극기 김구서명 태극기(1941)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께서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 내소원은 오직 대한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백범 김구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도 나는 당신과 함께 싸웠습니다. "아빠, 우리는 잘 몰라요. 엄마도 간혹 말씀해주셨지만 아직도 우리는 왜 아빠가 그때 총탄에 맞아 돌아가셨는지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아빠, 어린 우리들을 끝까지 보살펴주세요" 5.18 민주열사의 자녀 내레이션 하지만 울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민족의 가장 행복한 순간인 조국의 해방의 순간에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며 열린 88서울 올림픽에도 대한민국을 외쳤던 붉은 악마의 응원에도 나는 대한민국과 함께 했습니다. 인터뷰 왜 태극기는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었나요? 김보람 / 독립기념관 해설사 우리나라 태극기는 현재 그 모양과 보관방법, 처리방법이 법으로 정해져 있지만 이 법은 1949년에 발표가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우리나라에 정해진 양식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씩 다른 모양의 태극기가 만들어질 수 있었는데요.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하던 때에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종류의 태극기가 사용되었습니다. 태극기를 보존하기 위한 마음가짐? 김보람 / 독립기념관 해설사 태극기는 (일제강점기) 당시 사람들에게는 빼앗겼던 나라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태극기에) 자신의 소망을 적거나 꿈을 적고 태극기를 죽을 때 까지 보관하시는 분도 계셨을 거예요. 그랬던 것처럼 태극기는 어떤 그림이나 나라를 상징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꿈과 희망을 같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조금 더 소중하게 생각해주시고 조금 더 친숙하고 가깝게 생각해 주시면 더욱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내레이션 치열했던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 정부수립, 시민항쟁, 그리고 2002년 월드컵까지 국민들이 슬프고 기쁜 순간에 언제나 내가 함께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한과 기쁨이 서려있는, 나는 당신 안에 언제나 살고 있습니다. 나는 태극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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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9

[한국문화100] 전통잠수문화 상징, 해녀

해녀는 몸에 아무런 장치 없이 맨몸으로 잠수해서 전복ㆍ소라ㆍ미역ㆍ우뭇가사리 등 해산물을 직업적으로 채취하는 여자를 말한다. 해녀의 본고장인 제주에서는 이들을 ‘잠녀(潛女)’ 혹은 ‘잠수(潛嫂)’라 부르는데, 이들 잠녀는 전통적 잠수문화의 상징이자 제주여인의 강인한 삶과 독특한 문화를 상징하는 결정체이다나레이션-----------------------------------------------------------------------------------------------평화로운 잔잔한 물결과, 때로는 거센 파도가 치는 낭만의 바다, 이 곳은 그녀들의 삶과 직결된 곳이다. 바닷물이 빠지는 썰물 때에는 제주바다에서 물질하는 해녀들을 볼 수 있다. 기계장치 없이, 맨 몸과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의한 호흡 조절로 바다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성을 해녀라 부른다. 인터뷰해녀의 유래?(해녀의 시초의 역사적 자료는 없지만) 추정해본다면 제주도의 토질이 척박하고 땅에서보다는 바다에서 생산되는 것 들이 많기 때문에 (물질이 시작되었고) 옛 당시에는 남녀가 모두 바닷물에 들어가(해산물을)채취하는 일을 했지만, 남성들도 있었지만 남성들은 조선시대에 규모가 줄어들며 여성들이 그 빈틈을 채우며 지금까지도 여성들이 물질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해녀들은 수중장비 없이 물옷을 입고 물질준비를 한다.물안경, 태왁망사리, 빗창 등 물질도구를 챙기면 모든 준비는 끝이 난다. 특별한 재능과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다, 생계를 지키다보니 해녀가 돼 있었다고 한다.빈손으로 물속에 들어가 망사리 가득 해삼물을 따왔고 어머니들은 그것으로 자식들을 키웠다. 인터뷰고천혜자/ 제주도 해녀누구한테 배우긴~, 스스로 하다 보니 배워진 거지~다른 사람들 하는 거 보고 나도 하게 됐지, 장광자/제주도 해녀나는 건넛마을 바다에 있는 해녀인데, 우리 할머니도 어머니도 해녀였고,우리는 학교 갈 생각은 안 하고 어머니 따라가 놀다 보면 배우게 됐고,어머니 따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해녀가 됐지 예전에는 관광손님도 없다 보니깐, 바다 물건을 잡아서 팔대도 없었던 거 같아. 그래서 바다 해초 따서 밭에 거름을 주고, 돈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미역, 우리가 어른이 돼서 보니깐 우리 어머니들이 미역을 팔아서 자식들 시집도 보내고 우리 어머님들이 이렇게 우리를 키워주셨지~ 나레이션옛 부터 지금까지 바다는 늘 아낌없이 내어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또한 해녀들에게 불턱은 돌담의 바람을 막고 불을 지펴 추위를 녹여주는 사랑방 역할을 한다 자막불턱해녀들이 바닷가 양지뜸에서 불을 쬐는곳수련,교육, 위계질서 등 해녀 공동체의 상징 인터뷰이승훈/ 제주해녀박물관 관장과거에 해녀 분들이 바닷가에서 물질을 하면 체온이 낮아지면 체온을 올리기 위해서 불을 피워놓고 몸을 녹이는 장소인데요, 그 장소에서 여러 해녀들이 몸을 녹이고 어린 해녀에게는 해양의 지식을 가르치고 경력이 많은 해녀 분에게는 노하우를 배우며마을의 행사가 있을 때는 민주적으로 결정을 해서 모든 마을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나레이션 물속에 들어가면 해녀들은 아픈 몸도, 나이도 잊는다고 한다또한 해녀들은 채취기간과 금채기간 등을 규약으로 정해놓고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자생적인 공동체가 이루어진다. 해녀들은 바다밭을 단순 채취의 대상이 아닌 끈임없이 가꾸며 자연과의 공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터뷰 장광자/제주도 해녀그렇게 힘든 점은 없는데 소라를 채취하던가, 그러면 수심 깊은데 가면 전복도 따고 소라도 잡고 오다 저 쪽에 있는(소라를) 보고는 아까워서 그것까지 가지고 오려면 숨이 깔딱 넘어갈 때가 있지, 그 (숨비)소리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고, 자연으로 쉬익~소리가 나와. 호이~ 허이~ 숨 돌아오는 숨비소리지! 또 물건 많이 잡는 날이면 그날 기분도 좋고 피로도 풀리고, 못 잡은 날은 힘도 많이 들고 죽을 거 같고 (그래) 이들 해녀는 전통적 잠수문화의 상징이자 여인의 강인한 삶과 독특한 문화를 상징하는 결정체이다. 바다 속 깊은 곳에는 그녀들의 신비한 삶이 담겨있다. 진취성과 더불어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공동체 문화. 바다의 어멍, 해녀는 우리 소중한 문화유산이다------------------------------------BGM - 해녀, 이름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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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 그리운 그 곳, 금강산

금강산은 우리강산 중 가장 빼어나고 수려한 상징물이다. 특히 남북화해 및 교류의 물꼬를 튼 상징이기도 하다. 동해에 임박한 태백산맥 북부의 아름다운 명승지, 금강산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민족의식의 샘터 금강산에 대하여 알아보자. 금강산 대본 자막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 - 송나라 시인 소동파 천길 흰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섬 진주알을 홑뿌렸는가신라 문인 최치원 금강산 관광 당시 인터뷰 김두진/관광객 금강산을 왔다 가는데감개가 무량합니다. 정선영/관광객 (금강산 방문에) 오늘 너무너무 기쁩니다. 자유롭게 만나고 서로 오며 가며 불편 없이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자막 산 전체가 수정으로 만들어진 듯 빛나는 보석 그 자체이다. 그리운 그 곳, 금강산 금강산의 동서 너비는 약 40KM, 남북길이는 약 60KM, 그 면적은 약 530㎢ 8개 연못, 선녀들이 찾았다던 전설이 내려오는 이곳은 아름다운 은빛 줄기를 가진 상팔담이다. 금강산관광 당시 인터뷰 김영덕/서양화가 대단합니다. 금강산 이쪽이 원래 물 맑고. 공기 맑고 단풍이 물들었는데, 완전히 순수한 붉은 색입니다. 붉은색으로 가기 전, 노란색, 주황색 (단풍의 경치가) 대단합니다. 자막 금강산에 담긴 수천가지의 색들이 어우러져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금강산의 가을은 기암절벽과 단풍이 어우러져 한곡의 멋진 풍악을 울린다 하여 풍악산이라 불려 운다 자막 세존봉에서 본 장전항 내금강에서 외금강 해금강으로 이어지는 금강산의 웅대한 면모. 이정수/사진작가 금강산을 보지 않고는 천하의 절경를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금강산을 조명할 때 가장 감사하다고 할까,자연이 주는 보배라고 느껴질 때 또 현재도 금강산은 훼손이 안됐다는 것을 보면.. 가장 큰 매력으로 뽑을 수 있습니다. 자막 봄에는 금강, 여름에는 봉래, 가을엔 풍악, 겨울엔 개골산 여러 이름을 갖은 금강산의 천 가지의 얼굴, 만 가지의 표정을 다시 볼 수 있도록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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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6

[한국문화100]예와 의를 지킨 조선시대 순고한 정신, 선비

조선시대 선비정신을 배우고 느껴보자 ---대본---나레이션선비는 학식과 인품을 갖춘 유교적 인격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선비는 관직이나 신분의 의미보다는 지성과 실천을 겸비한 인격체로서의 추상적인 의미를 지니는 사람을 뜻합니다. 선비들은 기본적으로 양반 계층에서만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한문용어로는 사대부라고 하는데요, 유교의 도를 실현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유교의 가장 높은 가르침인 ‘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아야 합니다. ‘살신성인’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선비들은 열심히 학문을 닦았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공부한 학문을 자기 자신의 이익보다는 다른 사람들, 특히 백성들과 나누어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이 것이 바로 선비 정신입니다. - 인터뷰오늘날 시대가 필요로 하는 선비정신은 남을 배려하는 배려의 정신이 꼭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만 아는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우리 세상을 평화롭고 자유롭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나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정신이 선비정신의 밑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레이션선비정신은 의리와 지조를 중요시합니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떳떳한 도리인 의리를 지키고, 그 신념을 흔들림 없이 지켜내는지가 선비들의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인터뷰선비정신은 인의예지 그대로 마음을 다스리고 인정이 있고 또 예의가 바르고 가정을 다스리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이게 바로 선비정신입니다.글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선비)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선비들의 생활은 첫째,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공부라는 것이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위한 공부를 한 것입니다.그 다음에 일상생활을 절제 있게 했습니다.선비들은 배운 것을 실천하는 분들이었습니다.예를 들어 나라에 위급이 닥친 임진왜란 때나 일제 치하에서 나라를 빼앗길 위기 때는 목숨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서 싸운 거죠, 그러니깐 이해가 먼저가 아니고 옳고 그른 것이 먼저고 옳은 것을 위해서는 목숨도 바친다는 것이 선비정신인 거죠. 나레이션오늘처럼 혼탁한 사회에서 나라와 정의를 위해 의리와 신념을 지키는 선비의 모습!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선비에게 꼭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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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신과 인간의 만남 굿

신과 인간이 만나는 소통의 장이자 제의인 굿의 가치를 재조명해본다. 제목 : 신과 인간의 만남 굿 자막 판소리, 살풀이춤과 같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의 뿌리는 남도 시나위 굿판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민속 문화 뿌리를 캐다보면, 무교로 연결되는 것이 적지 않다. -최준식 /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전통의 원형을 탁월하게 유지하여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강릉단오제의 강릉단오굿을 통해 굿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자막 강원도 강릉시 강릉단오제 인터뷰 양종승 / 샤머니즘박물관장 q. 신과 무당 대해 알려주세요. 신은 영의 존재입니다. 영은 무형적 존재입니다. 우리가 침범할 수 없고 다가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 속에 늘 함께하고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이 영을 다룰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만신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무당입니다. q. 굿의 의미를 알려주세요. 굿은 영의 세계를 기반으로 한 영을 다루는 무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악과 무의 총체적인 행위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굿을 통해서 무엇을 얻느냐 했을 때에는 우리의 슬픔, 아픔을 기쁨과 한으로 전환해주는 것이 굿이고 꼬였던 것을 풀어주는 것이 굿입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우리 삶 속에서 아주 속성적인 측면을 성성적인 측면으로 바꾸려는 것이 바로 굿이고 이것을 주도하는 것이 만신이고 또 이것을 우리문화가 우리역사가 지금까지 함께 해왔었고 이것을 기반으로 우리 한민족의 정서, 사상, 철학이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인터뷰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 강릉단오굿이수자 신희라 q. 무당에게 굿이란? 굿은 저 같은 경우도 굿을 잘 모를 때는 무서운 것 그리고 가까이가면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요. 일제강점기나 70년대에 미신타파정책으로 (민속신앙을)소멸시키려고 했던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다가가지 못한 것은 아닌가하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그때에 비해 우리 것에 대해서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고 이어가야 된다는 것도 많이 알고 있고 우리 뼛속부터 옛날부터 내려왔던 신앙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어떤 신앙, 어떤 종교가 들어오든지 꿋꿋이 지켜오고 있었거든요. 굿은 없어지지 않을 우리의 우리민족의 기본, 근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q. 굿에서 무당의 역할은? 굿에서 무당의 역할은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마음이 편해야 모든 것들이 다 편하다고 하잖아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것, 신을 기쁘게 해줌으로써 그 신이 굿을 즐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굿을 보는 사람들도 좀 더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면서 만사형통을 바라는 의미로 그런 것들이 행하여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터뷰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 강릉단오굿이수자 임선미 q. 굿을 배오는 사람에게 굿이란? 아무래도 옛날 생각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무섭다거나 이상한 사람들이라거나 이런 생각이 많으신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제가 처음에 굿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너 무당이야?’ 라고 물어봤었거든요. 저는 그때 무당이라고 이야기 했어요. 나는 무당이고 우리나라 문화를 전파하는 사람이라고 계속 주변 분들에게 설명을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오히려 주변 분들이 굿당에 찾아오시고 응원해 주시고 제가 하는 일을 좋게 바라봐 주시고 시선이 지금은 저로 인해서 제 주변 분들이 많이 변한 것 같아서 그런 점은 좋은 점인 것 같아요. q. 무당으로 굿을 할 때의 느낌은? 강릉 시민들이 오셔서 소지 한 장을 올리면서 가족들의 안녕과 기원을 하시는 것을 보면 이런 느낌이라고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말이 들어요. 여러 가지 감정들이 들거든요.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정말 제 진심을 담아서 저도 신께 이 모든 분들이 잘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빌고 있습니다. 자막 다양한 민속 문화가 담겨있는 굿은 미신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보고입니다. 앞으로도 굿이 가진 진정한 의미와 예술적인 면을 더욱 살려서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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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민족기원의 상징 단군

[한국문화100] 민족 기원의 상징 단군 한민족의 시조이자 고조선을 개국한 단군과 홍익인간 정신에 대해 알아본다. 단군대본 내레이션우리민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 고조선. 청동기 문화가 형성되던 시기, 부족들을 통합하여 고조선을 건국한 인물이 바로 한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단군이다. 자막고조선(기원전2333년) 요동과 한반도 서북구 지역에 존재한 최초의 국가단군 우리민족의 시조 내레이션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첫 기록은 고려 충렬왕 때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찾을 수 있으며 자막단군신화가 기록된 최초의 사서 삼국유사단군왕검이 아사달을 도읍으로 조선을 개국했다 내레이션특히, 고조선의 건국에는 우리 민족 시조 신화인 단군 신화가 포함되어 있다. 아주 오랜 옛날, 하늘의 신인 환인에게는 환웅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환웅은 아버지 환인에게 ‘하늘에서 살기보다 인간세계로 내려가서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고 말했고 이에 환인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라는 홍익인간 정신을 당부하며 자막홍익인간 홍 크다(규모가 거대한 모습) 성장 생산성 경쟁력 자유익 돕는다 더한다 이롭게 한가 빼앗음 착취 억압 방관사람 사이 관계 인간세상 공동체 내레이션인간세상 다스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태백산 자락으로 내려와 사람들과 함께 살던 환웅에게 어느 날, 곰과 호랑이가 나타나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빌게 된다. 곰과 호랑이의 정성을 갸륵하게 여긴 환웅은 쑥과 마늘을 주며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라’고 당부한다. 성질이 급한 호랑이는 약속한 기일을 참지 못하고 굴 밖으로 뛰쳐나와 사람이 되지 못했지만 환웅의 말을 믿고 잘 참은 곰은 결국 아름다운 여인이 된다. 사람들은 곰에서 변한 여자를 웅녀라고 불렀고 웅녀는 환웅과 결혼하여 건강한 아들을 낳게 된다. 이 아이가 고조선의 첫 번째 임금인 단군이다. 인터뷰윤명철 / 고조선단군학회장 동국대학교 교수일부에서는 곰과 호랑이의 존재 특히 곰이 웅녀로 변신한 다음에 환웅과 결혼했기 때문에 이것을 곰 토테미즘(자연물을 집단의 상징으로 삼는 형태)이라든지 아니면 신화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신화와 토테미즘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당시 곰과 연관되어 있던 특정한 집단일수도 있고요. 아니면 곰은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의 곰이 아니라 원래 우리 말, 특히 알타이어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단어가 있는데요. 그것은 우리 중앙아시아 전체에 퍼져있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바로 가미라고 불리는데요. 이 가미라는 것은 알타이어에서 무당을 뜻합니다. 감, 검, 금, 고마, 개마 이렇게 나타납니다. 이때 곰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의미의 곰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무당을 뜻하면서도 주로 밝음과 상대되는 어둠과 연관된 하늘에 대비되는 땅과 연관된 단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민족의 여러 개 지명, 산명, 인명 등에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이라는 것은 생물학적 의미의 곰 일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우리 알타이어 문화권에서 가지고 있는 감계언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한 개 집단과 땅 지역과 농경문화를 관리하는 지모신의 고마, 개마, 검 집단의 결혼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자막참성단(사적 136호)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 내레이션사적 제136호 참성단. 강화도 화도면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은 단군께서 제천의 대례를 행하고 뜻을 드높였던 곳이다. 그러한 뜻이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어, 단군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를 건국한 것을 기리는 매년 10월3일 개천절에는 여전히 중요한 제천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자막 단기 4347년 개천대제 2014년 10월 3일 마니산 참성단 인터뷰이상복 / 강화군수1년 동안에 많은 고생을 해서 곡식도 잘 재배를 했고 또 여러 가지 보람 있는 일도 있었는데 그런 것에 대한 감사의 뜻도 하늘에 올리는 뿐만 아니라 내레이션각지의 단군성전에서도 개천절에는 어김없이 민족의 시조 단군을 기리는 행사를 거행하며 그 뜻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 홍익인간,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단군 신화 속의 이념은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최고 이념으로 윤리의식과 사상적 전통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인토뷰김창환 / 국학원 사무총장우리나라 국조 단군이 나라를 건국할 때 이상적인 인간으로 생각한 것이 홍익인간입니다. 홍익인간은 말 그대로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너와 내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이고 또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사상입니다. 우리가 지금 물질문명이나 경쟁 속에 사는 우리 사회에서는 너와 내가 분리 되어 있고 너와 내가 경쟁을 해서 이겨야지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홍익인간 사상은 나뿐만 아니고 상대방, 인간뿐만 아니고 자연 모두가 행복하고 이로운 세상을 꿈꾸는 그런 사상입니다. 내레이션단군신화에는 다른 나라의 신화에서와 달리 신들 혹은 인간과의 대립, 갈등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처럼 홍익인간의 이념에는 조화와 평화를 중시하는 세계관이 담겨있다. 단군. 단군과 그의 정신은 단순히 부정확한 역사와 과장된 신화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 마다 민족의 단합을 요구하는 구심체적 역할을 해왔다. 단군의 의미와 정신은 끊임없이 기억해야 할 우리 민족의 출발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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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마을 공동의 문화공간 정자나무

[한국문화100]마을 공동의 문화공간 정자나무 예로부터 마을의 휴식과 신앙 또는 회합이 이루어졌던 정자나무의 가치를 재조명해본다. 정자나무편 대본 내레이션 바쁘게 살아가는 도시의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의 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정작, 사람들은 서로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혹시,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고 계신가요?혹시, 마을주민들과 서로 인사하며 지내시나요?혹시, 마을주민들과 모여서 어울린 적이 있으신가요? 사람은 넘쳐나도 삭막하기만한 현대의 도시. 서로가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만한 공간과 여유가 없는 것이 현실이기는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마을사람들이 정을 나누던 공간이 있었습니다. 마을 초입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모여 마을 일을 의논하거나 쉬기도 했던 오래된 고목. 우리 조상들은 편안한 그늘을 제공해주던 큰 나무를 정자나무라 부르며 사랑방처럼 함께 머물렀습니다. 정자나무는 한결같은 포근함으로 어른들에게는 휴식을 아이들에게는 놀이공간을 제공하였습니다. 정자나무의 넉넉한 규모와 수령처럼 정자나무와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인터뷰김판조그전에는 집이 초가삼간이잖아요. 늘어진 초가집인데 더워서 못살아. 그러니까 점심을 먹으면 다 나온거예요. 다 나와서 오후 세시정도 되어 조금 서늘해지면 그때 일터로 나갔는데 꽉차버려요, 여기가. 이렇게 올라가서 저렇게 늘어진 가지에다가 훈주(줄타기)도 타고 여기 나뭇가지에다가 그네도 매어놓고 그네도 타고 그랬어요. 어르신들이 나뭇가지 찢어진다고 못하게 했지. 내레이션현대의 도시들이 들어나고 사람들이 각자 바빠지면서 정자나무는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갔습니다. 하지만 다시금, 늘 정이 넘쳤던 정자나무의 모습을 기억하고 따뜻하며 푸근했던 그 순기능을 살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름지기재단과 서울디자인재단이 공동으로 기획하는 마을정자나무프로젝트입니다. 자막마을정자나무 가꾸기 프로젝트, 아름지기재단, 서울디자인재단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350세 느티나무 인터뷰장영석 / 아름지기재단 사무국장그동안 먹고 사는 문제, 급속히 산업화되고 경제적인 부분들을 쫓다가 결국은 다시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살 수 있고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를 전통에서 힌트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자나무만 하더라도 그냥 단순히 오래된 나무일뿐이지만 사람들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또 그 아래 같이 모여서 사람 살만한 동네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되거든요. 요즘 만들어지는 그 어떤 최신식의 건물이나 현대적인 공간보다도 사람들에게 더 큰 위안을 줄 수 있는 곳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정자나무 하나하나를 고쳐가는 것이 단지 자연보호 운동이 아니고 더 아름다운 삶을 만드는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김순희이런 공간이 생기니까 동네도 아름답고 공기도 좋은데 환경이 깨끗해지니까 살기 좋고 보기 좋지요. 박지훈주변에 자주 왔는데요. 정비된 후에 풍경도 더 괜찮아 진 것 같고 포근한 기분이 들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내레이션정자나무는 단순히 마을의 큰 나무가 아니라 사람, 자연, 문화가 어우러지던 마을의 상징적인 소통 공간이었습니다. 사람사이의 단절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요즘, 정자나무가 가지는 정의 가치는 우리가 다시 연결되어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인터뷰방영자안락하고 시원하고 굉장히 정서적으로 좋네요. 이혜숙(혼잡한)도심 속에 있는 느낌이 안 들고 편안하고 어느 시골에 와있는 그런 느낌이 드네요. 내레이션마을 공동의 문화 공간 정자나무, 앞으로도 소중히 지켜야할 우리의 문화입니다. ?

제작
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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