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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저자
김상훈(金尙勳, 1919~1987) 1919년 7월 10일 경남 거창 출생. 중동중학교를 거쳐 1944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했다. 1944년 초 일제의 강제 징용에 끌려갔으나, 친구인 시인 상민(常民)의 권유로 징용으로부터 탈출하여 항일운동(협동당 별동대)에 참가했고,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가 8·15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광복 이후 조선학병동맹에 가입하여 잡지 <민중조선>을 펴냈으며, 그 창간호에 시 <맹서>와 <시위행렬>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박산운(朴山雲) ·유진오(兪鎭午)·이병철(李秉哲)과의 공동시집 <전위시인집>을 펴내면서 광복 직후 가장 촉망받는 신진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1947년에는 시집 <대열(隊列)>을, 1948년에는 서사시집 <가족>을 발간하는 등 활발한 시작활동을 펼쳤고,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 월북 이후에도 시작활동을 계속했으며, 특히 1963년에는 이용악(李庸岳)과 함께 <역대악부시가(歷代樂府詩歌)>를 공역·출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월북 전까지 김상훈의 시 세계는 봉건적인 모순에 의해 억압된 인간성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실천적 의식에 기반하고 있다. 그 노력은 일제 말기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심정을 토로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였지만, 광복 직후 구체적인 역사 현실과 만나면서 주관성의 표출을 넘어 리얼리즘시의 한층 고양된 세계를 이루었다.
리뷰
(……) 가조보통학교를 4회로 졸업하던 1993년, 상훈이 열다섯 살이 되던 해, 그는 부친의 반대로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서당공부를 계속하던 중 어린 나이에 멋모르고 장가를 든다. 신부는 가야산 너머 경북 성주군 해평리 여(呂)씨집 규수였다고 한다. (……) 이 결혼에서 그는 새로운 세상에 눈뜨게 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처가에 들렀을 때 처남들이 서울의 중학교에 유학하고 있는 선진학도들임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부잣집 아들이면서도 시골에 틀어박혀 해묵은 한문서적이나 들추고 있는 자신이 갑자기 견딜 수 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며칠을 벼른 끝에 상훈은 진학 의사를 조심스럽게 비쳤다. 예상대로 부친은 단호히 반대하고 나섰다. 부친은 구태여 신학문을 계속하겠다는 것부터가 공연한 짓으로 비쳤지만 아들이 슬하를 떠나 나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영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어린 마음에 상훈은 자신이 친자가 아닌 양자이기 때문에 부친의 애정이 외고집이 아닌가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상훈은 진학을 끝내 반대하면 자식 노릇도 거부하겠노라며 방문을 걸어 잠갔다. 식음도 전폐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간 것이다. 아들의 이런 반발에 부친은 망연자실했고 모친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후손을 낳지 못한 죄책 때문이기도 했지만, 젖먹이 때부터 품 안에 기른 총명한 자식을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애정으로 감싸오던 모친이었던 까닭이다. 그녀는 아들의 편이 되어 남편의 설득에 나섰다. 그냥 두면 귀한 자식 굶어 죽이겠다고 넋두리하며 필사적으로 남편에게 매달렸다고 한다. 그 결과 부친은 끝내 상훈의 뜻을 따르게 된다. 아내가 산역으로 죽기 얼마 전인 18세 겨울의 일이었다. 이런 소동 등을 계기로 상훈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도 지극해졌다. 그 뒤 그는 생모 권씨에게도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생모 이상으로 양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공경했던 것이다. “어머니에겐 그처럼 귀로운 내가 어느덧 눈물을 알고 고독의 친한 벗이 되어 비애를 마시고 호탄을 내뿜는 불행한 나의 겨레일 줄이야 어이 일찍부터 알았겠습니까. 어머니 얼굴의 주름살과 한가지로 그칠 줄 모르고 흐르는 날과 달이 오로지 내 마음을 집요하게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 저에겐 많은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길이 어두우나 조그만 촛불을 가지겠습니다.” 이 글은 해방 뒤 상훈이 회갑을 맞은 어머니(양모 김씨)에게 바친 <헌사십수>란 시조의 서문이다. 그는 뜻깊은 모친의 회갑연에 시인답게 헌사를 지어바쳤으나 ‘고요한 마음으로 지난 일을 돌아보고 또 오늘과 내일을 노리고 새삼스리 무능한 자신이 부끄럽고 죄스럽다’는 심경을 실토했다. (……) ‘어머니’를 소재로 한 김상훈의 시는 이 밖에도 두 편이 더 있다. 시집 <대열>에 실려 있는 두 편중, <어머니에게 드리는 노래>의 어머니는 ‘혁명가’의 어머니로 ‘혁명’의 진두에 서서 민중을 보살피는 일반적인 어머니상이다. (……) 그러나 <어머니>란 제목의 다른 한 편의 시는 항쟁의 대열에 뛰어든 아들인 상훈 자신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애정 어린 어머니 김씨의 시선이 잘 묘사되어 있는 시이다. (……) 이 어머니는 회갑을 넘긴 직후 ‘위원회패’인 아들에게 다가오는 불행의 그림자에 안쓰러워 하다가 일찍 세상을 뜸으로써 상훈의 가슴에 ‘불효의 한’을 남긴다. 단식농성 끝에 유학의 길이 열린 상훈은 1936년 봄 서울의 사립명문인 중동(中東)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입시날 시골의 소년유생인 그는 보통학교에서 기초만 건성으로 익힌 일어실력으로는 일문의 답안을 쓸 수가 없었다. 자칫 모든 꿈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서 그는 천부적인 그의 기지를 펼쳐 보였다. 즉 그는 알 만한 문제는 한문으로 ‘해량(海量)의 변(辯)’을 적어 놓았던 것이다. 시골에서 한문공부만 주력해와 일문으로 답을 못쓴다는 사연과 입학만 시켜주면 단기간에 일어를 마스터하겠다는 다짐, 그리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학생으로 성장해 보이겠다는 결의 등을 빈칸에 가득 적었다. 중동 개교 이래 처음 보는 이러한 진귀한 ‘시험답안’에 채점 교사들은 당황했으나 ‘특별입학허가’란 매우 도량 큰 조치로 김상훈을 받아 주었다. 특별입학의 배경에는 당시 한문선생(성명 미상)이 강력히 옹호했기 때문이며, 그 무렵 영어선생으로 재직 중이던 시인 김광섭(金珖燮)의 지지발언도 힘이 되었다고 한다. 김상훈의 출중한 한문실력을 기특히 여겼던 한문선생은 한시에 관해 상훈과 자주 사담을 즐겼으며, 가끔 해석이 애매할 때는 제자의 견해도 격의 없이 물어오곤 했다고 한다. 상훈과 동년배로서 혜화전문을 나와 해방 직후 ‘항쟁시’를 쓰다가 월북한 안동(安東) 출신 시인 유종대(柳鍾大)는 중동학교 입학 무렵 상훈이 느꼈던 감회를 ‘새 문하에의 경이와 갈망은 놀라운 것이었다’는 한마디로(시집 <대열>의 발문에서)요약·대필한 바 있다. (……) ‘김상훈, 변신의 일생과 갈등의 시’, 정영진, <김상훈 시연구>, 한정호, 세종출판사, 2003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김상훈 시연구>, 한정호 편, 세종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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