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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당퐁당

개요
1927년에 작곡되었다가 1931년에 발간된 홍난파의 동요작곡집 ≪조선동요100곡집≫ 상권을 통하여 발표되었다. 4분의 2박자 라장조의 경쾌한 동요곡으로서 오늘날까지 꾸준히 애창되는 곡이다. 참고: <한국동요음악사>, 한용희, 세광음악출판사, 1987
해설
홍난파와 윤석중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다. 윤석중이 양정고보에 다니고 있을 무렵 홍난파로부터 엽서를 받았다. 내용은 <조선동요 100곡집>을 내야겠는데 작품이 모자라 그러니 된 것이 있으면 갖다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홍난파는 이름난 작곡가였고, 파고다 공원 건너편에 있는 덕원빌딩 3층에 있는 <연악회>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사무실로 찾아간 윤석중이 외우고 있던 시 몇 편을 자리에서 적어내자 그걸 보고 바로 홍난파가 곡을 붙였다고 한다. 이미 마련한 곡조에 윤석중의 노랫말을 넣어서, ‘마치 구두 가게에 가서 만들어진 신을 신어보고 사듯’ 노래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그때 윤석중이 내놓았던 시가 <퐁당퐁당>, <낮에 나온 반달>, <꾸중을 듣고>, <꿀돼지>, <휘파람> 들이었다. 참고: <동요 70년사>, 한용희, 세광음악출판사, 1988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냇물아 퍼져라. 멀리 멀리 퍼져라 건너 편에 앉아서 나물을 씻는 우리 누나 손등을 간질여주어라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냇물아 퍼져라. 퍼질 대로 퍼져라 고운 노래 한 마디 들려 달라고 우리 누나 손등을 간질여주어라
작사가
윤석중(1911~2003) 1911년 서울에서 태어나 1924년 동요 <봄>이 <신소년>에, 동요<오뚜기>가 <어린이>지에 입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1930년 양정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3년 <어린이> 주간, 1934년 <소년중앙> 주간, 1936년 <소년> 주간을 역임했다. 1944년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신문학과를 마치고 <조선일보> 편집고문, <소년조선일보> 고문, 서울시 문화위원, 한국문인협회 아동분과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중앙대학교,성신여자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1953년 '새싹회'를 창립해 회장에 취임하는 한편, 1960년 3·1문화상 예술부문 본상과 문화훈장을 포상한 바 있다. 윤석중은 전통적 정형률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형식 및 반복과 대구를 사용해 율동적 표현을 구사하는 등 새로운 형태의 동시와 동요를 써서 한국아동문학 발전에 이바지했다. 한국 최초의 창작 동요집인 <윤석중 동요집>(1932)에서부터 <아기꿈>(1987), <윤석중 전집>(1988)에 이르기까지 천 편도 넘는 동요와 동시, 동화를 발표했다. 대표작으로는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기찻길 옆 오막살이>, <어린이날 노래> 등이 있다.
작곡가
홍난파(1898~1941) 본명은 영후(永厚). 경기도 수원군(현 남양군) 남양면 활초리 출생. 1912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를 졸업한 그는, 1913년부터 3년 동안 음악학교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다님으로써 바이올린 연주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21세가 되던 1918년에 일본 동경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학했다. 일본 유학 시절인 1919년 음악, 미술, 문학의 3종 예술을 주체로 한 순예술잡지인 <삼광>(三光)을 창간하여 편집인 겸 발행인을 역임했다. 1922년 음악연구기관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하여 본격적인 작곡 및 연주활동과 평론활동을 시작하였다. 1925년에는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고, <세계명작가곡선집>을 편저로 발행했다. 192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27년 동경신교항악단(NHK교향악단의 전신)의 제1바이올린주자가 되었고, 1929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 중앙보육학교 교수를 거쳐 1931년에 조선음악가협회 상임이사가 되었다. 1931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의 셔우드음악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하다가 1933년에 귀국하였다. 그 후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고, 홍성유, 이영세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트리오를 조직하여 연주활동을 하였다. 1934년에는 빅터레코드사의 음악고문이 되었고, 1936년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가 되어 경성방송관현악단을 조직, 지휘자로 활약했다. 1938년 경성음악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였으며, 1941년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대표작으로는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봄처녀> 등 민족적 정서가 담긴 노래와 <낮에 나온 반달> 등의 동요가 있다. 작품집으로는 <조선 동요 100곡집>, <바이올린 독주곡> 등이 있다.
리뷰
나라의 기틀을 다져온 50년 동안 여러 분야에서 적잖은 사람들이 나눠 맡은 소임을 다하여 지워지지 않는 이름을 남겼다. 윤석중 선생 또한 '빛나는 이름'으로 우리들 가슴에 새겨져야 할 한 분이다. 필리핀의 라몬 막사이사이재단이 주는 막사이사이상을 윤석중 선생이 1978년에 받은 것은 국제사회도 이를 인정하는 징표이다. 우리들 후학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나라 아동문학사상 첫 동시집인 <잃어버린 댕기>가 1933년에 나왔다는 사실이다. 동요에서 동시로 '나라의 고유한 정서를 담아내는 틀'이 바뀌게 된 새로운 기점이다. 이후 30년간 윤석중 식 동시형식이 지속된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 다른 이도 아닌, 필자가 조용히 탈바꿈을 시도, '동시도 우선 시여야 한다'는 기치를 들고 동시의 격상운동을 벌인다. 이에 대해 윤석중 선생님은 일체 말씀이 없다. 아마 자신의 1930년대를 회상하실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으면 싶다. 비록 표현수단은 동요 동시이며 표현기법은 쉬운 낱말 선택과 구사일지라도, 사람의 마음 가운데 기장 아름다운 사랑을 값진 보석으로 노래하는 인본주의 시인이 윤석중 선생이시다. 한결같이 어린이의 마음과 같은 순수한 인성에서, 세상 모든 이치와 사람의 일을 평가하고 재발견하신다. 이러한 아흔 한평생에 대해, 우리는 '김소월, 윤동주 못지않게 윤석중에게도 한국의 서정은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해야 옳겠다. 우리 사회는 정치적인 국면 또 사회적인 현상에는 빈틈없는 눈길을 보내면서도, 우리 사회 의식의 밑바닥을 구축하는 정서의 밑돌 놓기에는 편식적인 조명을 비출 뿐이다. 이런 시각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 아동문학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설익은 과일처럼 떫은 편이다. 언제나 그 향기를 모두가 알게 될까? ‘윤석중 선생님의 조용한 미소’, 유경환, <월간문학> 2001년 5월호
관련음반
<꿈꾸는 동요>, 가람미디어, 2005 <3학년 교과 음악>, 2005 <어린이 동요 100곡>, 서울음반, 2003 <신나는 동요나라 135곡>, 블루마인드, 2005
관련도서
<동요 70년사>, 한용희, 세광음악출판사, 1988 <윤석중 동요집>, 윤석중, 신구서림, 1932 <어깨동무: 동요집>, 윤석중, 박문서관, 1940 <윤석중 아동문학독본>, 윤석중, 을유문화사, 1962 <윤석중 동요집>, 윤석중, 민중서관, 1963 <한국아동문학전집 제4권 윤석중 작품집>, 윤석중, 민중서관, 1963 <홍난파 자료집>, 민경찬 편저,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1995 <난파 동요 100곡집>, 난파기념사업회 편, 교학도서, 1964
연계정보
-윤석중(尹石重)
관련사이트
한국동요음악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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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음악교육연구회
관련사이트
한국음악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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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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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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