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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병화(趙炳華, 1921~2003) 호는 편운(片雲). 1921년 5월 2일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에서 조두원의 5남으로 출생. 1938년 경성사범을 졸업하고, 1943년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이과에 입학하여 물리, 화학을 전공했다. 1945년 6월에 귀국한 후 경성사범, 제물포고, 서울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중앙대, 이화여대 강사를 거쳐 1959년부터 1980년까지 경희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인하대로 옮겨 1984년 정년 퇴임한 후 명예교수로 재직하였으며 2003년 사망하였다. 조병화 시인이 다작했던 비결은 삶과 죽음, 그리고 인생의 본질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를 쉬운 일상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많은 독자와 솔직한 소통을 이루어 왔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현대시가 난해하고 안 팔린다는 통념을 무너뜨린 희소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림 분야에도 일가를 이루어 15차례에 이르는 개인전을 갖기도 하였다. 아세아자유문학상(1960), 경희대문학상(1969)과 대한민국예술원상(1985), 삼일문화상, 대한민국문학상(1992) 등의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시인대회 계관시인, 세계시인회의 한국위원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리뷰
(······) 이 시대가 남긴 많은 시문학적 모험과 고뇌의 흔적 중 조병화 시인이 오늘까지 뭇 대중의 가슴을 적신 것은 혼탁한 반서정의 시대, 비인간화 세태 속에서 단 하루, 아니 한순간만이라도 위안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시에서는 사회와 세계관에 대한 고민은 추방당해 버린 시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어용적 애국문학이 공공연히 장려되었던 저 6·25 직전의 우리 지적 풍토 속에서 지식인이든 시인이든 모두가 인간다운 정당한 고민조차 사치스러웠던 것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 (······) 조병화는 가장 자신에게 충실하며 솔직하고 절실한 미학적 접근방법을 택했다. 즉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적 계급인 지식인 자신과 도시, 소시민적 고뇌를 진솔하고 호소력 있게 노래하는 방법을 선택했으며, 이 선택은 이후 일생 동안 변함이 없었고, 또한 성공했다. 어느 시인도 조병화를 흉내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대중적 공감력을 따를 수 없었다. 더구나 사회경제사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온 1960~70년대 이후의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신흥 부르주아계급이 대두된 이후에도 조병화가 노래한 소시민적 정서의 노래는 여전히 유효했다. 조병화의 시적 기교엔 특이한 비의가 있다. 모더니즘적 감각을 지닌 그는 그 표현방법에서 모더니즘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적 수학을 바탕 삼아 이를 일상생활화하기 때문에 당시의 어느 모더니스트보다도 소시민적 생활 그 자체에 밀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모더니즘이니 뭐니 하는 문학이론을 통해 문학수업을 한 것이 아니라 생활 자체를 통해 시로 접근해 갔으며, 이것이 그로 하여금 대중적 친근감을 줄 수 있는 오묘한 비의가 되었던 것이다. 지적 기교에 의한 설득이 아니라 정감적인 호소력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의 시는 시대적 제약을 벗어나 자본주의 사회가 지닌 인간소외와 이기주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고독과 인생고에 대한 위로의 형식으로 널리 사랑받은 것이다. (······) 조병화는 그 시대의 전체상보다는 자신의 계층적 입장을 보다 중요시했다. 그러나 동시대의 어느 순수시인보다도 당대적 소시민이 지닌 고뇌의 참모습을 노래하는 데 전력했으며 그 노력은 즉각적인 보답을 받은 셈이다. 물론 대중들이 그의 시에 만족했건 안 했건 이 시인의 고뇌를 더해 주거나 덜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 조병화는 영원히 어떤 속물적인 소시민에게도 만족과 행복을 모르는 교훈을 가르칠 것이며, 어떤 세속적인 만족과 행복 속에서도 방황할 줄 아는 삶의 참모습을 노래해 주기 때문이다. 그는 방황하면서도 절망을 앓으며, 슬퍼하면서도 과거를 버릴 용기를 지니고 있고, 두려워하면서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정서를 노래한다. ‘영혼의 안식을 위한 소요’, 임헌영, <조병화>, 문학사상사, 2002
작가의 말
(······) 자기 고독과 자기 위안 같은 것이 계속되어 갔다. 1946년, 1947년, 불안과 젊음의 계절을 보내고 있었다. 이 계절에 편석촌 김기림 시인과 만나게 되었다. (······) 어느날 그의 눈에 나의 시가 발각되었다. (······) 그 무렵까지 나의 꿈의, 좌절의 배설처럼, 고독의 배설처럼, 절망의 배설처럼, 외로운 단독자의 절규처럼 써두었던 시들이 장만영 시인의 손에서 추려지고 배열되어 김경린 시인의 장정으로 출판의 옷을 입고, 한국 문학사 그 한대낮에 나타나게 되었다. (······) 참으로 나를 스스로 구출하려는 하나의 방법이었으며, 이름 그대로 하나의 스스로의 먼 길의 발견이었다. 어둡고 고정 개념의 파괴로부터 다시 나의 생존을 이끌어내자는 생각이었다. (······) 그러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새로운 시의 개척자들, 그 모더니스트들 덕분에 한국 문단에 이름을 걸게 된 거다. 우선 멤버가 그러해서 기뻤다. 당당한 사람들이 연약한 나의 시의 울타리가 되어 있어 마음이 든든했다. 흐뭇했다. 마음이 푹 가라앉는 걸 실감했다. 하나의 큰 터널을 뚫고 나온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공허했다. 자기 해체 같은 기분이 들었다. 중학교 4학년 시절 머릿속에 넣었던 괴테 말이 떠올랐다. “인간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방황하는 것이다(<파우스트> 중에서)”라는, 그 방황의 말이. 실로 방황이 시작된 거다. (······) 말하자면 나의 시집들은 그 시기에 내게 있었던 그 불안, 그 모색, 그 방황,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머물지 않은 동경, 그것들이 같이 동숙하던 고독한 여숙들이라 하겠다. (······) 다음 숙소는 어디메쯤 있을까. 그곳에선 좀 신을 벗고, 옷을 벗고, 쉴 수 있을는지. ‘나의 문학적 고백’, 조병화, <조병화>, 문학사상사, 2002
관련도서
<조병화>, 문학사상사, 2002 <생명 사랑 자유의 시학>, 김재홍, 동학사, 1999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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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趙炳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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