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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숙(朴賢淑)

개요
박현숙이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한 것은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막희곡 <항변>이 입선하면서부터다. 이듬해인 1960년에 역시 같은 신문에 <사랑을 찾아서>가 가작으로, 그리고 1961년에는 <땅 위에 서다>가 당선됨으로써 당당한 신인극작가로 연극계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1960년, 박현숙의 등장은 김자림과 더불어 우리 연극계에 본격적인 여성작가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 두 작가가 활동을 시작하기 이전의 여성극작가라면 심재순, 나혜석, 김명순 정도를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각각 한 편씩의 희곡만을 남겼으므로 본격적인 의미의 극작가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두 여성극작가의 탄생을 기점으로 하여 우리 연극사에서도 본격적인 페미니즘 연구가 가능해졌으며, 여성 시각을 통해 본 세계가 더해졌다는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연극평론가 이미원은 “박현숙의 작품 세계는 여성작가답게, 사랑과 가정에 그 중심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봉건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부나 남녀간의 사랑이 빚는 애증을 통해 가정을 그렸으며, 결말은 항시 휴머니즘적이며 건전한 상식을 강조한다. 그러하기에 가정 내의 여성 입장을 그렸으면서도 그 시각이 항시 조심스럽고 보수적이어서, 급진적 페미니즘의 시각을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그러나 여성작가에 의해 여성 문제가 제기되었다는 의의를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현대극작가연구>, 이미원, 연극과인간, 2003) 라며 박현숙의 등장이 갖는 연극사적 의의를 강조한다. 박현숙은 20대에 6·25전쟁을 겪고 등단하여 임희재, 오상원, 이용찬, 하유상 등과 함께 활동했던 전후 작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최근까지도 신작 희곡을 발표할 만큼 왕성한 창작 활동을 벌여왔기 때문에 ‘전후 작가’라는 세대 구분은 그녀가 작품활동을 시작했던 시기에 비중을 둔 평가이다. 박현숙이 연극계에 데뷔했던 1950년대 후반은 희곡과 연극에서 사실주의 기법이 퇴조 현상을 보이면서 비사실주의 기법들이 실험되기 시작했던 시기이다. 물론 비사실주의 기법은 사실주의 희곡에 비해 양적으로는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성·신인작가를 막론하고 중요한 창작 원리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박현숙도 사실주의를 기본으로 하되 비사실주의 기법을 부분적으로 도입하면서 다양한 기법의 변화를 시도했던 작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자신이 살아왔던 시대상을 작품 속에 투영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은 일제시대, 6·25전쟁, 남북분단, 4·19혁명 등 역사적 사건을 다룬 것들이 많다. 특히 여성작가만의 섬세한 감각으로 역사적 사건을 가정으로 끌어들여와 한 가정 내의 인물들이 역사적 사건들과 어떻게 부딪치고 희생되며, 견디어 내는가 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다. 박현숙은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핵심을 관통하며 우리 사회와 정치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을 시도했던 최초의 여성극작가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생애와 약력
1941년 황해도 해주 의정여학교 졸업 1945년 해주 도립병원 부설 간호학교 졸업 / 해주 음악전문학교 입학 1946년 서울 중앙여자전문학교 교육과 입학 1947년 학제 개편으로 중앙대학교 학부 심리학과로 전과 1948년 서울 중앙방송국(성우 2기생 수료) 취직 1950년 중앙대학교 심리학과 졸업 / 한국문화연구소 기자로 입사 1951년 부산 희망잡지사 기자 1952년 부산 문화예술신보사 기자 1963년~1967년 중앙문학인회 초대회장 1963년~1971년 제작극회 대표 1965년 전 일본부인연맹 초청 좌담회 참가 1969년 국제펜클럽 프랑스 망똥대회 참가 1970년~1982년 한국문인협회 이사 1972년 일본 문화연구 국제회의 참가 1974년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졸업 / ‘연극의 사회적 기능에서 본 한국 연극의 제문제’로 행정석사학위 받음 1974년~현재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위촉 1976년~1977년 국제극예술협회 한국본부 상임위원 1978년 한국사회복지사업종사가 자격증 취득 1979년 제3회 대한민국연극제 심사위원 1979년~1980년 한국희곡작가협회 회장 1980년 한국문인협회 감사패 받음 1980년~1984년 한국공연윤리위원회 희곡 심사위원 1982년~1983년 한국여성문학인회 간사장 1983년 서울가정법원 감사패 받음 1988년~1989년 한국연극협회 희곡분과위원 1988년 세계여성희곡작가대회 참가, 논문발표 1989년~1991년 한국여성개발원 자문위원 1991년 연극의 해 연극제 심사위원 / 한국희곡작가협회 공로패 받음 1992년 국제극예술협회 정기심포지엄에서 주제 논문 발표(세계 여성희곡작가대회 참관기) 1993년 중앙문학인회 공로패 받음 1994년~1995년 한국여성연극인협회 자문위원 1994년~1996년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1995년 서울가정법원 30년 가사조정원 감사패 수상 1996년 문학의 해 조직위원(상임위원) 199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서울서초문인협회 고문 / 한국여성연극인협회 고문 / 한국공연예술원 평생회원 1998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연극분과 심의위원 / 한국여성문학인회 희곡심의위원 1999년 한국연극협회 종신회원 2000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운영위원 / 대한민국예술원상 심사위원
상훈
1976년 제13회 한국문학상 수상 1986년 제6회 한국희곡문학상 수상 1991년 제1회 중앙문학상 대상 수상 1992년 제2회 조국문학상 본상 수상 1995년 ‘훌륭한 중앙인상’ 수상 / 화관문화훈장 수훈 2000년 국제펜문학상 수상
작품활동
1948년 중앙대학교 교내 연극경연에서 김진수 작 <코스모스>에서 순주 역으로 총장상 수상 / 한국 초연의 <햄릿>에 오필리어로 출연 1949년 연극학회 주최 제1회 전국남녀대학연극경연대회에 존 밀링톤 씽의 <계곡의 그림자> 중 노라 역으로 출연, 개인 연기상 수상 1950년 한국문화연구소 현상응모 당선, 수필 <어머니>로 문단 데뷔 1956년 제작극회 동인 1959년 희곡 <항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 1960년 희곡 <사랑을 찾아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가작 입선 1961년 희곡 <사랑을 찾아서> 제작극회 제8회 공연으로 원각사에서 공연(연출 오사량) 1962년 희곡 <땅 위에 서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땅 위에 서다> 공연(극단 청포도극회, 명동예술극장) 1963년 희곡 <언덕으로 가는 골목길> 집필 1964년 희곡 <나는 방관자가 아니다> 집필, 서울대 연극부 공연 1965년 희곡집 <여인(女人)> 발간(창조사) 1967년 희곡 <가문> 집필 1969년 희곡 <타인들> 집필 1970년 수필집 <막은 오르는데> 출간(창조사) / 장막희곡 <여인>, 일명 <너를 어떻게 하랴> 제작극회 제14회 공연(연출 김경옥, 명동예술극장) 1971년 희곡 <세상은 온통 요지경 속> 집필 1972년 희곡 <빛은 멀어도> 집필 1976년 희곡집 <가면무도회> 간행(세종문화사) 1977년 제1회 대한민국연극제 <빛은 멀어도> 공연(극단 성좌, 세실극장) 1982년 수필집 <쫓기며 사는 행복> 출간(유림사) 1986년 <한국문학> 7월호에 장막 <그 찬란한 유산> 발표 / 희곡집 <그 찬란한 유산> 발간(범우사) 1989년 <월간문학> 10월호에 장막 <여자의 성> 발표 1991년 <월간문학> 6, 8월호에 희곡 <조국의 어머니> 발표 1993년 예술가의 삶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 출간(혜화당) 1996년 희곡집 <여자의 성> 출간 1998년 <월간문학> 12월호 희곡 전2막 <태양은 다시 뜨리> 게재 1999년 충북 청주 신세대 주부극단 제1회 창단공연 <여자의 성> 공연(너름새극장) / 서울 제3회 전국주부연극제 희곡 <여자의 성> 공연(여의도 굿모닝홀) 2000년 <서울문학> 여름호 권두칼럼 집필 2001년 ‘박현숙연극제’ 대구 무천극예술학회 주최, 희곡 6작품 공연
대표작품
<사랑을 찾아서> <땅 위에 서다> <여인>(일명 : 너를 어떻게 하랴) <그 찬란한 유산> <여자의 성>
저서
<여인>, 박현숙, 창조사, 1965 <막은 오르는데>, 박현숙, 창조사, 1970 <가면무도회>, 박현숙, 세종문화사, 1976 <쫓기면서 사는 행복>, 박현숙, 유림사, 1982 <그 찬란한 유산>, 박현숙, 유림사, 1986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 박현숙, 혜화당, 1993 <여자의 성>, 박현숙, 도서출판 대한, 1996 <박현숙 문학전집 1-7>, 박현숙, 늘봄, 2001
리뷰
(……) 박현숙 여사와 나와의 만남은 6·25전쟁 전 중앙대학교에서 내가 연출한 셰익스피어 <햄릿>의 여주인공 오필리어로 분장했을 때와 그 뒤 연극학회 주최 제1회 전국대학연극경연대회에 아일랜드 극작가 존 밀링톤 씽의 <계곡의 그림자>를 연출, 참가하였는데 그때 그녀는 여주인공 노라로 분했었다. 나는 그때 그녀의 특별한 연기력에 감탄했고, 그때부터 계속 박 여사를 지켜보게 되었다. 박 여사는 어느덧 희곡작가로 대성하여 한국문학상 희곡부문을 수상하였고, 중견 지식연극인들의 집결체인 제작극회의 대표까지 맡는 등 정력적인 중진연극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중앙대학교 문인회의 초대 회장과 한국희곡작가협회의 3대 회장 등을 역임한 문단 지도자이기도 하다. 본디 희곡이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이 희곡을 쓴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그런데 여류극작가를 불과 열 손가락에도 꼽기 힘든 이런 상황에서 박 여사가 그 지도적 위치에 있음은 더욱 놀랄 만하다. (……) - 서문, 이해랑, <여자의 성>, 박현숙, 도서출판 대한, 1996 (……) 1948년 가을, 제1회 전국남녀대학연극경연대회를 앞두고 참가 학교 연극부의 대표자 회의가 문총회관에서 열렸다. 그때 나는 연대 대표로, 그리고 박현숙은 중앙대 대표로 참석했었다. 갸름한 얼굴을 한, 턱 밑에 까만 점이 있었던 평범한 여학생은 시선을 끌 만큼의 미인도 아니었거니와 말도 없었다. 그러나 며칠 후 시공관 무대에서 존 밀링턴 씽의 <계곡의 그림자>에서 노라 역을 해낸 그녀는 완전히 다른 하나의 인간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낭랑한 음성과 여성미가 철철 넘치는 자태, 그리고 풍부한 감정의 표출은 자연인 박현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과 신비감마저 물씬 느끼게 했다. 그녀는 최우수 여자연기상을 탔고 나는 연출상을 탔었다. 이렇게 해서 만난 우리들은 얼마 후 대학극회를 조직했고 그것은 1956년 탄생한 제작극회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 요란스럽지도 않고 파란만장도 없는 변함없는 향기와 빛깔을 지닌 진한 모카의 향기. 어쩌다가 지나치던 길가의 다방을 보았을 때 지금도 그 옛날 같은 맛있는 커피를 끓여주려나 하고 무심코 들어서고 싶어지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바로 나와 그녀와의 사이에 흘러간 세월일지도 모른다. 남자와 여자가 만났으면서 독한 위스키도 텁텁한 동동주도 아닌 한 잔의 커피로 끝을 낸다면 그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는 혼탁한 세월 속에서 그녀와 나는 30여 년 전 그대로의 수줍음과 믿음과 그리고 기도로 살아가고 있다. 한 잔의 커피향처럼. - ‘한 잔의 커피향 같은 우정’, 차범석,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 박현숙, 혜화당, 1994 박현숙은 여성극작가 제1세대로서, 우리 희곡에서 여성이미지 연구를 넘어서 여성극작가 연구를 비로소 가능하게 했던 작가이다. 그녀는 봉건적 사고와 인습을 항시 의식했으면서도, 파격적인 저항을 드러내기보다는 현실적인 사회적 균형감을 잃지 않고 인고하여 승리하는 여성을 그렸다고 하겠다. 작품들은 모두 가정과 사랑의 심리에 초점이 놓여 있거나 적어도 이들 모티브를 갖고 있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여성 특유의 시각을 드러냈다고도 하겠다. 따라서 급진적인 여성 해방론자는 아니었지만, 자연히 페미니즘과 연결된다. 그녀의 여주인공들은 남성적 시각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나려 하지는 않았지만, 은연중에 가부장제 아래의 남성을 고발했다. 뿐만 아니라 인내와 화해를 통해, 용서와 관용이라는 ‘여성 가치’를 추구했기에 고발의 단계를 한 걸음 넘어섰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남성 시각을 의식하고 이를 수정하려는 의도가 결여되었기에, 이 역시 남성 시각의 재현이라는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즉 여성을 인간이기보다 어머니(성녀)와 창녀로 구분하는 남성 시각이, 작가의 여성들을 어머니화 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작가의 세계관을 지나치게 페미니즘 비평의 틀로만 해석하려는 시도라고도 볼 수 있겠다. “문화예술계의 온후한 대모”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인 작가는, 남성 시각의 여부를 넘어서 인간적으로 근본적인 용서와 화해를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오히려 ‘여성 가치’의 추구에 가까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박현숙만큼 일찍부터 남북분단 문제에 꾸준한 관심을 보인 극작가도 드물다. 이는 그녀가 어머니를 북에 두고 온 실향민이었다는 개인사에서 비롯된 만큼,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애정문제가 사회성을 띠게 되면, 이는 반드시 분단상황과 관련을 맺는다. 그러나 적극적인 논의보다는, 분단상황이 그리움으로 작품의 배경에 묻어날 뿐이다. 이는 항일운동으로 남편을 잃었던 어머니의 “급하면 해를 입기 쉽다”는 충고를 항시 가슴에 묻고 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반공’이 국시였던 그간의 세월에서, 분단문제의 제기는 극히 조심스러운 제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분단의 아픔을 그려왔음은, 어쨌든 작가의 관심이 한국현대사의 핵심을 관통하였다고 하겠다. - <한국현대극작가연구>, 이미원, 연극과인간, 2003
창작노트
(……) 1960년에는 학생혁명이 일어났고 이듬해에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과도기의 현상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고 아픔도 안겨주었다. 그 후 경제발전에 총력을 쏟아 농업국가이던 한국이 1970년대 들어서서는 신흥공업국가로 탈바꿈했고 마침내 산업사회로 변모되었다. 이러한 파란만장했던 한국의 현대사가 나의 작품 소재로 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한국의 뼈아픈 현대사가 약소 민족이었기에 당해야 하는 분노와, 정치의 잘못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하에 초기에는 정치불신을 주로 주제로 삼았다. 권력과 돈밖에 모르는 한 의원의 건강치 못한 가정생활을 묘사한 <세상은 온통 요지경 속>이 바로 그런 소재이다. 다음으로는 민족분단문제를 테마로 삼았는데 <여수(女囚)>가 그런 계열의 작품이다. 이러한 역사와 정치의 소용돌이에 시달려오는 동안 결국 남권우위의 사회와 가정에 대해서 상당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는데 부부간의 이질화를 묘사한 <타인들>이라든가 남녀 평등을 호소한 <가면무도회> 같은 작품이 바로 그런 예이다. 나 이외에도 몇몇 여성희곡작가들이 탄생되어 훌륭한 작품들을 열심히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1960년 전후로 여성극작가들은 대부분이 남성우위의 전통인습에 대해서 단순히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불의는 과감하게 부숴야 한다는 입장에서 남녀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처럼 한국여성극작가들의 주된 작품주제는 인습의 질곡으로부터의 해방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식민지 압제 분단이데올로기 대립, 처참한 동족상잔 등도 작품의 주제로 삼고 있다. 그런 면에서는 남성극작가들과 별 차이가 없다. -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 박현숙, 혜화당, 1994
관련도서
<한국현역극작가론(1)>,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편, 예니, 1987 <한국예술총집>, 대한민국예술원, 2000 <한국현대극작가연구>, 이미원, 연극과인간, 2003
관련사이트
대한민국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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