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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폰

개요
1930년대 활동한 프로연극단체. 프롤레타리아 극은 공산주의 계급의식을 연극이념으로 삼고 있는 연극을 뜻한다. 이 같은 연극이념은 자연스럽게 정치 성향을 띠었으며, 결과 우리나라의 프롤레타리아 극은 한국공산주의 운동과 비슷한 궤적을 밟았다. 염군사, 불개미극단, 산유화회, 화조회 등의 단체들로부터 1920년대 프로연극이 시작됐으며, 1930년대 메가폰에 이르면 본격적인 프롤레타리아 극 운동이 이뤄졌다.
해설
메가폰은 바로 전에 활동한 프롤레타리아 극단 이동식 소형극장의 멤버들이 창립한 단체이다. 극단 창단에 관련해서는 다음의 기사가 있다. 이 극단의 전신은 이동식 소형극장이다. 이 이동식 소형극장은 북선지방 공연에서 상당한 성과를 엇고 귀경하자 그 극단의 지도자격에 잇든 악명 높은 김유영은 드디어 숨길수 없는 반동의 마각을 드러내게 되엿다. 그리하여 동극단의 멤버는 이에 반대하여 그를 내여쫓고 다시 좌중을 정돈하고 나온 것이 극단 메가폰인 것이다. 이 극단은 당초부터 현재 조선에 잇어서 프로레타리아연극의 실천을 짐지고 잇는 캅프동극장과는 하등의 연락이 업시 결성되엇든 것이다. 캅프연극부의 동지 신고송이 거기에 손을 대기 시작하게 된 것은 동 극단의 제1회 공연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공연한 후 내부의 경제적 사정에 의하여 소멸되고 말엇든 것이다. - <조선일보>, 박태양, 1933년 1월 29일 메가폰은 ‘좌익극 운동의 동반자적 위치’의 작품 활동을 보여주었다. 격렬한 계급투쟁을 묘사한 내용이라기 보다는 근로자, 또 기층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의 삶의 곤궁을 묘사한 작품들을 올렸다. 메가폰의 1회 공연은 조선극장에서 1932년 6월 8일에 이뤄졌다. <메가폰>(문예부 작, 1장), <깨어진 장한몽>(문예부 작, 1장), <지옥>(김형용 작, 1막 3장), <박첨지>(유진오 작, 1장), <호신술>(송영 작) 등 다섯 편을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3일 만에 일본 경찰의 방해로 공연을 중지하고 지방순회공연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메가폰은 인천행과 제2회 공연을 계획하지만, 그 이후 활동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유진오 (1906~1987)
1929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했다. 재학시절 동인들과 문우회를 조직하고, <문우>와 시집 <십자가>를 펴내는 한편 경제연구회라는 서클을 조직했는데 이 연구회 회원 가운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가입한 사람이 있었다. 이효석과는 선후배 사이로 창작에 몰두해 <조선지광>, <현대평론> 등에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1936년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 법학과 교수가 된 뒤 1952~1965년까지 총장을 역임했다. 1948년 대한민국헌법 기초위원과 법제처장을 지내며 대한민국헌법을 기초했다. 법학과 정치가로 활동했던 그는 소설가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20년대에는 당시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소속된 작가들과 비슷한 경향의 작품을 발표했으나 카프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 대표작품 <5월의 구직자> <성군 남매와 나> <여직공> <김강사와 T교수>
관련도서
<한국근대연극사>, 유민영,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한국소극장연극사 6’, 차범석, <예술계> 48호, 1988년 12월
연계정보
-석공조합대표
-창랑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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