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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외다리로 서다

내용
1950년대 전라도와 거리가 멀지 않은 충청도의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몰락한 양반 지주인 김노인은 가문의 명예와 양반으로서의 체통을 중시하고 언제나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족보를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인물이다. 육순을 넘긴 김노인이 명문 집안의 후손으로 30여년 동안 수절해 왔다는 서울댁과 재혼하려 하자 둘째 아들 동혁이 김노인의 첩 때문에 친모가 자살한 것을 떠올리며 반대한다. 작곡 공부를 하는 동혁은 자신의 선산을 사서 벌목으로 부자가 된 삼봉의 딸 미애를 사랑한다. 하지만 김노인은 상놈의 딸이라며 학처럼 고귀한 양반 집안에 미애를 데려올 수 없다며 반대한다. 김노인은 동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댁을 집에 들이고 동혁은 집을 나간다. 한편 막내딸 동희는 집안일을 돌보는 어멈의 동생 명호와 사랑에 빠져 김노인의 노여움을 산다. 처녀시절 토목기사와 연애를 했다가 김노인이 강제로 다른 곳에 출가시켰던 큰 딸 동숙은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온다. 상심한 김노인은 말벗인 서영감에게 실상 동희도 자신의 딸이 아니라 누이 동생 순임이 서울에서 유학하던 중에 어느 남학생과의 사이에 낳은 자식으로, 동혁의 모친이 자살한 것은 바로 자신이 고집하여 서울로 유학시켰던 시누이의 사단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편, 동혁이 5백만환 현상 오페라 공모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이 신문을 통해 전해진다. 동혁은 상금으로 선산을 사서 아버지에게 드리겠다고 다짐한다. 마을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인 가운데 동혁이 작곡하고 미애가 부르는 아리아가 라디오를 통해 나오다가 그만 미애가 졸도하여 죽음에 이르고 만다. 딸이 죽은데다 다른 사람의 중개에 넘어가 김노인에게 산을 팔은 삼봉은 홧김에 서울댁이 무당 출신임을 폭로한다. 김노인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삼봉의 난동에 쇼크를 받아 쓰러진다. 그는 죽어가면서 서울댁의 고운 심성을 칭찬하고 서영감에게 동희의 일을 비밀로 할 것을 당부한다. 동숙에게는 재혼을, 동희에게는 명호를 허락한다. 생전에 동혁을 가장 아끼고 사랑했음을 밝히며 불필요한 족보는 무덤 속에 같이 묻어달라고 유언한 후에 숨을 거둔다. 김노인의 장례를 치른 후, 큰 딸 동숙은 역시 이혼하고 돌아온 옛 애인인 이기사와 다시 맺어진다. 한편 며느리인 서울댁을 차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이를 눈치챈 서울댁이 스스로 떠나려 하자 동혁이 서울댁을 모시고 살겠다고 나선다. 서영감은 동혁에게 그의 어머니의 죽음이 아버지와 첩 때문은 아니었다는 사실만을 밝혀둔다. 참고 : <한국 현대극 연구> 김미도, 연극과인간, 2001
예술가
하유상 (1928~ ) 충남 논산 출생의 극작가. 본명은 동렬. 1955년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영화사 연출부 등을 거쳐 월간 <민족문화> 취재부장(1957~58), 월간 <시나리오문예> 편집인 및 주간(1958~61), 극단 산하 운영위원장(1964년), 학교극연구회 회장(1970~74), 한국극작가협회 이사(1971~1978), 서라벌예대 강사, 극단 희극 대표 등을 역임했다. 장막극 <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1957년)가 국립극장 장막희곡 제1회 모집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작품의 폭은 리얼리즘에 입각한 작품에서 상징적인 작품까지 다채롭다. 대표작품 <야화> <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 <학 외다리로 서다> <꽃상여> <무녀도> 이해랑 (1916~1989) 서울 출생. 1934년 일본대학 예술과를 졸업하고, 1946년 극단 신협을 창립하였다.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과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미국 국무성 초청 뉴욕 브로드웨이 연극계를 시찰하고 왔다. 1959년부터 1982년까지 동국대학교 연극영화 교수로 재직했으며, 1962년 드라마센터 극장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작품상을 수상했으며, 1964년 5월 문예상 본상을 수상하였다. 1965년 이해랑 이동극장을 창립하고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1967년부터 1973년까지 예총 회장을 맡았다. 8대, 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국정활동을 펼쳤으며, 대한민국 예술원 부회장과 회장을 역임하였다. 1984년 호암아트홀의 <햄릿>공연 연습 중 과로로 쓰러져 서울 남현동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일생동안 200여편의 연극을 연출하였으며, 국민훈장 모란장, 5.16 민족상 등을 수상했다. 1991년 12월 문화부 선정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대표작품 <인생차압> <밤으로의 긴 여로> <학 외다리로 서다> <햄릿>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여성만세> <목격자> <광야>
평론
실제로 김노인은 우리들에게 가장 친숙한 한국적인 아버지 상이다. 그는 대대로 이어 내려온 가문의 전통을 십자가처럼 짊어지고 새로운 세대로부터의 도전을 감당하면서 그들의 과오까지를 자신의 책임으로 감수해야 하는 과도기적 시대의 속죄양이다. 겉으로는 자식들에게 엄격하고 완고한 고집불통의 늙은이지만 실상은 집안의 모든 재난과 불행을 혼자서 다스려야 했다. … 학처럼 고고하게 살기를 원했으나 가슴을 온통 찢기고 할퀴인 채 죽음을 맞이한 김노인은 생전에 가장 애지중지했던 족보를 무덤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이는 불합리한 전통적 인습으로부터의 해방과 새로운 세대에 의한 새로운 가치관의 도래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그와 함께 무덤 속에 묻힌 전통은 영원히 사장되는 것이 아니라 뒤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가치로 남아 그들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정신적 지주가 된다. 김노인은 뜨거운 사랑을 내면적으로 승화시키는 동양적 영혼의 화신이자 굳은 지조와 자존심을 지켜 가는 고유의 선비 정신을 육화한 우리 모두의 그리운 아버지이다. (“하유상론” <한국 현대극 연구> 김미도, 연극과 인간, 2001)
관련도서
<한국현역극작가론 Ⅱ>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예니,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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