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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

개요
풍물은 상고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종교의식, 노동, 향토오락, 행진 등에 쓰여서 우리 민족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고 발전되어 온 연희음악이다. 풍물은 상고시대의 농경의례의 악(樂)으로 발달하여 마을단위의 군대조련의 방편으로 연주되기도 했는데 은산별신(恩山別神)굿에 신목봉영(神木奉迎)의 절차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풍물의 일반적 유래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 파종과 추수를 축복하고 그 해 농가의 매귀안택(埋鬼安宅)을 신에게 기원한다는 뜻에서 문자 그대로 매구굿이라고 한다. 둘째, 농군을 훈련 양성하는 방안의 하나로 전시용 진법 전수를 목적으로 진법을 악무로써 지휘 훈련하게 한 것이 점차 풍물로 발전했다는 군악설이다. 셋째, 고려시대 불교융성과 더불어 사찰건립, 중수, 사답 마련을 위해 모금의 방법으로 화주승이 따른 사승 수십 인이 한패를 지어 머리에 불두화를 단 고깔을 쓰고 대금, 소금, 쇄납, 북, 저 등의 악기를 사용하여 민가를 건립하던 굿중패가 생기자 민간에서도 이를 본따 오늘의 풍물로 발전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풍물의 형태는 농사안택 축원형식에서 군악적 형식과 불교적 예능형식으로 변천하였으며 일반적 이론은 축원형태의 풍물에서 시작되어 농경적인 노작풍물, 걸립풍물, 연예적 형태의 풍물 등으로 변해 왔다는 것이 지배적인 경향이다. 이는 초기에는 무격(巫覡)들이 그 행위를 하여 두레패나 농민, 승려 그리고 직업적인 풍물패로 그 행위자가 변해왔기 때문이다. 풍물이 변화를 거듭하여 발달함은 농경생활과 풍물간의 필요조건에 의한 밀접한 관계 때문으로, 두레가 발달한 곳 특히 농사지역인 넓은 평야지대에 발달되었으며 풍물이 없는 두레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걸립풍물은 고려시대 팔관회와 연등회의 국가적 축제를 통해 성행하였으나 역귀를 쫓는 종교의식보다는 관중을 즐겁게 하는 구경거리, 즉 가무백희의 성향을 보였으며 우일, 창우로 불리는 직업적 예능인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남 해남군 대흥사에는 응송 스님이 소장한 설나규식(設儺規式)이라는 책과 범어스님이 소장했다고 하는 고인구본편차(故因舊本編次)라는 책에 의하면 동쪽 풍속에는 매굿, 소나, 금고, 걸립 걸공이라는 칭호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나례의 별칭이라 기록되어 있다.풍물이 군사적인 성격을 갖추게 된 시기는 삼국시대로써, 고구려는 고적이 있어 사호로 썼으며 백제의 요고는 각과 함께 군대사호용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고려 때에는 대륙을 통해 군악기가 들어옴으로써 전립대가 편성되어 진풀이나 호신술 신호 또는 군사적 시위로 기능을 가진 판굿이 있었을 것으로 보여지며,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군악적 형식이 첨가되어 농군들이 연희함으로써 진법이 나오게 되어 군악적 형태의 풍물이 형성되었다고 추정된다.일반 백성들에 의해서 전승된 풍물은 구전으로 전승된 것이며 문헌적 근거의 결핍 때문에, 음악사에서 시대마다 구체적으로 다루기 힘들다. 풍물은 전문적인 놀이꾼에 의해서 연주된 것이 아니고, 일반 백성들에 의해서 생활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민중의 음악문화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뚜렷한 창작자를 알 수 없으며 연주자 자신들이 비전문가라는 특징이 있다. 풍물이 민속악의 다른 장르보다도 오랜 역사성과 전통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시대의 변천에 따른 음악양식의 변화가 풍물에서는 그리 심하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풍물의 개념
풍물은 농부들이 두레를 짜서 일할 때 치는 음악이다. 넓은 의미로는 꽹과리·징·장구·북과 같은 타악기를 치며, 행진·의식·노동·판놀음 등을 벌이는 음악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다. 굿·매구·풍장·금고(金鼓)·취군 등으로도 불린다. 굿은 흔히 무당이 노래와 춤을 벌이며 소망을 신에게 비는 의식을 가리키지만, 풍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풍물 치는 것을 ‘굿한다’고 하고, 또 당산굿·샘굿·성주굿과 같이 굿패들이 풍물을 치며 벌이는 민간신앙의식을 가리키고, 길굿·삼채굿과 같이 풍물가락을 가리키며, 오방진굿·도둑잽이굿과 같이 풍물패들이 판놀음으로 벌이는 판굿의 놀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풍장은 두레풍장·장풍장·배치기풍장과 같이 풍악으로 벌이는 고장(북장단)이라는 뜻이다. 금고는 징·꽹과리와 같은 쇠붙이로 된 악기와 북이 합주하는 음악이라는 뜻이며, 취군은 행진음악을 연주하는 악대라는 뜻이다. 매구는 섣달그믐에 잡귀를 몰아내고 북을 불러들이고자 치는 매굿, 또는 꽹과리를 꽹매기·매구라 하듯이 꽹과리를 가리키는 말로도 풀이된다.
풍물의 종류
풍물을 공연하는 목적·계기·방법에 따라 종류를 나누어 보면, 당산굿·마당밟이·걸립굿·두레굿·판굿이 있고, 그밖에 기우제굿·배굿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당산굿
당산굿은 굿패들이 마을굿을 하며 치는 풍물을 가리킨다. 마을굿에는 무당의 가무, 제관의 독축헌잔, 굿패들의 풍물이 따르는데, 풍물에서는 마을굿에서 치는 풍물을 ‘당굿’ 또는 ‘당산굿’이라 한다. 호남지방을 비롯한 남쪽지방의 마을굿에 풍물이 따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당제, 광산군 대촌면 칠석리 당제와 같은 마을굿이 당산굿 풍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당산굿을 치는 순서와 가락은 고장에 따라 다르나, 굿패들이 영기(令旗)·농기·서낭기 따위를 앞세우고 풍장을 치고 당에 가서 제물을 차리고 제를 지내기도 하고, 바로 풍물을 치며 절을 하고 당마당에서 한바탕 판굿을 벌이고, 풍물을 치며 마을에 내려와 도청이나 우물을 돌고, 그리고 집집마다 도는 집돌이를 하는 경우가 많다. 집돌이 끝에는 줄다리기와 같은 마을사람들의 경기나 놀이가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마당밟이
굿패들이 마을 수호신인 당(서낭)을 모시고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는 집돌이 의식을 하며 치는 풍물을 가리키며, 지신밟기·뜰밟이·답정굿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당밟이는 마을굿의 집돌이의 일종인데, 당산제를 모시는 마을굿이 아니고 정초에 집가심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마당밟이는 마을굿의 집돌이와 공연형식이 같으나 집돌이에 더욱 치중한다. 먼저 당에 가서 당굿을 치고 당(서낭)을 모시고 샘굿·도청굿을 치고 집집마다 들러서 집굿을 치는데, 집굿치는 순서는 고장마다 다르나 흔히 문굿·샘굿·마당굿·성주굿·조왕굿·터주굿·장독굿·마굿간굿·측간굿 순으로 치는 경우가 많다. 마당굿에서는 작게 판굿을 치고, 성주굿에서는 마루에 고사상을 차리고 상쇠나 소리꾼이 <고사소리> 또는 <고사반>이라 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는 노래를 부른다. 마당밟이 풍물로는 부산의 ‘동래지신밟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걸립굿
걸립패들이 마을마다 돌며 집집마다 들러서 고사를 지내고 돈과 쌀을 거두며 치는 풍물로 일명 ‘걸궁’이라 한다. 걸립패의 의식과 풍물은 마당밟이 풍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없다. 다만 마당밟이는 마을굿패가 하는 경우가 많고, 걸립굿은 직업적으로 고용된 풍물패로 조직된 걸립패가 하는 경우가 많다. 걸립은 목적에 따라 절에서 시주를 걷는 절걸립, 다리를 짓기 위하여 돈을 걷는 다리걸립, 서당걸립·나루걸립 등이 있다. 또, 재인들이 하는 신청(神廳)걸립이 있고, 단순히 돈을 구걸하기 위하여 걸립하는 낭걸립, 구경꾼들에게 돈을 받을 목적으로 하는 포장걸립 따위가 있다. 신청걸립패와 같은 큰 걸립패는 마을굿패가 하는 마당밟이보다 규모나 형식이 훨씬 확대되어 있다. 걸립패가 마을에 들어오기 전에 문굿을 크게 치며, 집돌이에서도 마당굿과 <고사소리>를 크게 벌이고, 밤에는 따로 마을사람들을 위하여 판굿을 벌인다. 따라서, 풍물이 오늘날과 같이 발전한 것은 걸립패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두레굿
농부들이 두레를 짜서 김매러갈 때나 김맬 때, 그리고 김매고 돌아올 때, 또한 호미걸이와 같은 축제를 벌일 때 치는 풍물로, 일명 ‘두레풍장’이라 한다. 두레를 짜게 되면 두레기를 세우고 농신(農神)을 받는데, 이 두레기는 흔히 농기라 하며, 그밖에 용기(龍旗)·용당기·용둣기·덕석기·농상기 등으로 불린다. 두레패들은 농신에게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농기를 앞세우고 김매러 갈 때, 그리고 김매고 돌아올 때 풍장을 치는데, 고장에 따라서는 흥을 돋우고 피로를 덜기 위하여 김맬 때에도 친다. 전라북도 정읍·김제 지방에서는 두레패들이 김매러 갈 때 치는 풍물은 들풍장, 김맬 때 치는 풍물은 풍장·장풍장 또는 지심풍장, 밭에서 나올 때 치는 풍물은 날풍장, 김매기가 끝나고 마을에 들어가며 장원질놀음을 벌일 때는 ‘꽃나부선다’하여 무동을 세우고 치는 꽃나부풍장 등으로 나누고 있다. 김매기가 끝나면 두레패들이 농신을 모시고 풍년을 비는 축제를 벌이는데, 이것을 호미걸이·호미씻이·두레먹기·질먹기·풋굿·술메이쉬는날 등으로 부르며, 백중 무렵에 논다 하여 백중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호미걸이 의식은 대개 풍물을 치고 술먹고 노는 것으로서 고장에 따라 다르나, 모든 고장의 의식을 종합하여보면 농신맞이(당제)·기 절받기·농사풀이·농사순방·판굿 등으로 구성된다.
판굿
굿패나 걸립패·두레패와 같은 풍물패가 마당에서 마을사람들에게 구경시키기 위하여, 온갖 구색을 갖추고 순서를 짜서 노는 풍물을 가리킨다. 판굿은 당굿·마당밟이·두레굿 등 모든 풍물의 기예를 동원하여 한판 놀 수 있게 짠 것이며, 노는 순서는 고장에 따라 다르나 흔히 여러 가지 도형으로 도는 진놀이를 먼저 벌이고, 여러 가지 솜씨를 보여주는 구정놀이를 나중에 벌인다. 진놀이에는 나선형으로 도는 멍석말이(방울진·고동진), 멍석말이를 5방(五方)에서 차례로 벌이는 오방진(五方陳) 등이 있으며, 구정놀이에는 장구놀이·상쇠놀이·법고놀이·무동놀이·동고리(무등타기)·열두발채상 등이 있는데, 근래에 설장고놀이 등 개인놀이가 발달하고 있다. 판굿에는 농사풀이·도둑잽이·수박치기·콩동지기와 같은 놀이를 곁들이기도 한다. 풍물은 판굿뿐만 아니라 당산굿·마당밟이·걸립굿·두레굿 등 모든 종류의 풍물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풍물공연은 여러 풍물의 종류 가운데 판굿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풍물경연대회에서 겨루는 것도 판굿이며,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인 농악의 공연도 판굿이다.
풍물에 쓰이는 악기
풍물은 좁은 의미에서 풍물에 쓰이는 기물(器物), 즉 악기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꽹과리·징·장구·북·소고·호적·나발이 있다. 풍물악기는 대부분 타악기이며, 호적과 나발은 관악기이다. 그리고 호적만이 선율악기이다. 악기는 지방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 경기 북부에서는 바라를 쓰고, 영동지역에서는 소고를 다시 소고와 법고로 나누기도 한다. 영남지방에서는 땡각[令角]이 쓰이기도 한다. 풍물은 꽹과리가 주가 되며, 꽹과리 제1주자인 상쇠가 풍물패를 지휘한다. 호적의 선율은 꽹과리가락에 조주(助奏)하는 구실에 그치므로 없어도 괜찮다.
풍물패의 편성
풍물을 치는 악대를 쇠꾼·치배·군총·취군이라 한다. 또, 풍물의 종류에 굿패·굿중패·걸립패·걸궁패·중매구패·두레패라 부르기도 한다. 걸립패나 굿중패를 ‘뜬쇠’라 하고 두레패를 ‘둥렁쇠’라 하는데 이것은 곁말(은어)이다. 풍물패의 편성은 지역에 따라 다르나 기를 드는 기수, 악기를 연주하는 잽이[樂手], 탈[假面]을 쓰고 여러 가지 배역으로 분장하여 춤추는 잡색(雜色)으로 편성되는 경우가 많다. 풍물패는 고장에 따라 기수가 앞서고 다음에 잽이, 맨 뒤에 잡색이 따르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호남풍물에서는 잽이를 ‘앞치배’라 하고 잡색을 ‘뒷치배’라 한다.
풍물에 쓰이는 기
기(旗)에는 영기(令旗)와 대기(大旗)가 있는데, 요즈음은 대기를 농기로 통칭하고 있다. 대기는 농기·용기·용당기·용둣기·덕석기·서낭기·농상기 등으로 부른다. 영기는 작은 기이며 창이나 삼지창으로 깃봉을 달고, 네모 또는 세모로 된 기쪽에 영자(令字)를 쓴다. 대기, 즉 농기는 영기에 견주어 매우 큰 기이다. 긴 대나무로 깃대를 만들고 끝에 꿩장목이라 하여 꿩꼬리로 깃봉을 달고 매우 큰 기폭을 다는데, 기폭에는 기의 종류에 따라 용을 그리기도 하고 정방형의 도안을 그리기도 하고, 신상(神像) 또는 신위(神位)를 쓰는데, 이를 ‘신농유업’(神農遺業)이라 한다. 근래에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쓰는 경우가 많다. 기폭의 가에는 지내발을 달고 끝에는 오색 깃발을 단다. 깃봉 밑에는 방울이나 종이술을 달며, 그 밑에는 무명으로 길게 버레줄 또는 붓줄이라 하는 긴 줄을 서너 가닥 달아서 사방에 늘어놓아 넘어지지 않게 한다. 굿패나 걸립패의 대기에는 서낭신을, 두레패의 대기, 즉 두레기에는 농신을 각각 받는다. 신을 받은 기는 쓰러뜨리지 않고, 풍물패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는 먼저 음식을 바친다. 호남지역 걸립패에서는 대기 대신에 영기를 신기(神旗)로 쓰는 경우도 있다.
잽이
풍물은 꽹과리잽이·징잽이·장구잽이·북잽이·소고잽이 순으로 서서 행렬하며, 소고와 법고가 나누어지는 지방에서는 소고잽이가 앞서고 법고잽이가 뒤에 선다. 나발수는 영기 앞에 서며 호적수는 농기 뒤에 서는데 일정하지 않다. 잽이들의 복색(服色)을 쇠옷이라 이르는 곳도 있다. 꽹과리잽이는 더그레를 걸치고 색띠를 띠고 부포상모를 단 전립(戰笠)을 쓰는 곳이 많다. 징잽이·장구잽이·소고잽이·북잽이는 더그레를 걸치고 색띠를 띠고 채상모를 단 전립을 쓰는 지역이 많고, 고깔을 쓰는 지역도 있다. 두레풍장을 칠 때에는 따로 복색이 없이 농복차림이다. 꽹과리잽이는 2-5명으로 편성되는데, 상쇠·부쇠·종쇠·사쇠·끝쇠라고 부르는 지방이 많다. 상쇠는 꽹과리잽이 우두머리일 뿐 아니라 풍물패 전체의 음악을 지휘하는 우두머리 구실을 하며, 고장에 따라서는 상공운·설쇠라 부르기도 한다. 상쇠가 춤을 출 때에, 또는 상쇠가 허튼가락이라 하여 자유자재로 변주된 가락을 칠 때에는 부쇠가 풍물패의 쇠가락을 주도한다. 징잽이는 하나 또는 여럿을 쓰는데, 수징·부징·종징·끝징 등으로 부른다. 수징은 고장에 따라 설징·상징으로 부르기도 한다. 장구잽이는 둘에서 다섯 명 정도로 편성되는데, 설장구·부장구·종장구·사장구·끝장구로 부른다. 설장구는 고장에 따라 상장구 또는 수장구라 부르기도 한다. 북잽이는 하나 또는 여럿을 쓰는데, 수북·부북·종북·사북·끝북 등으로 부른다. 수북은 설북 또는 상북이라 부르기도 한다. 소고잽이는 대개 여덟 명쯤으로 편성되며, 수법고·부법고·종법고·종법고·사법고·끝법고 등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수법고를 설법고 또는 상법고라 하는 고장도 있고, 끝법고를 꼬리법고라 부르기도 한다. 호적잽이는 하나를 쓰기도 하나 쌍호적이라 하여 둘을 쓰는 경우가 많다. 호적수와 나발수는 더그레를 걸치고 전립을 쓰거나 따로 복색이 없는 경우가 많다.
잡색
풍물에 쓰이는 잡색은 고장에 따라 다르다. 영동지역에서는 무동을 쓰고, 경기지역에서는 무동·사미(중애)·양반광대를 쓰며, 남쪽 지역에서는 대포수(大砲手)·조리중·양반·할미·각시·창부(倡夫)·무동 등 여러 가지를 쓰기도 한다. 두레풍장에는 잡색이 없다. 대포수는 철릭에 관을 쓰거나 더그레에 벙거지를 쓰고 조총(鳥銃)을 메고 망태를 든다. 조리중은 장삼을 입고 송낙을 쓰고 바랑을 멘다. 창부는 창옷을 입고 초립을 쓴다. 양반은 도포를 입고 띠를 띠고 관을 쓴다. 할미광대는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각시는 붉은 치마에 노랑 또는 녹색 저고리를 입는다. 원래 잡색은 탈을 쓰는 것이나 쓰지 않는 고장이 많다. 무동은 붉은 치마에 노랑 또는 녹색 저고리를 입고 남쾌자를 걸치는데, 고장에 따라서는 고깔을 쓴다. 사미는 흰 장삼에 흰 고깔을 쓴다. 잡색은 춤을 추는 것이 구실이지만 때로는 재담도 하고 놀이도 한다.
음악
풍물의 음악은 타악기의 리듬 음악이 주가 되고, 호적의 선율은 풍물가락의 조주(助奏)에 그친다.
장단
풍물의 주된 악기가 꽹과리이므로 풍물장단은 흔히 꽹과리가락으로 나타내며 쇠가락이라 부른다. 풍물에는 여러 가지 쇠가락, 즉 장단이 있고 이는 고장에 따라 다르다. 쇠가락에는 3분박 4박자, 즉 8분의 12박자가 가장 많이 쓰이고, 빠른 3박과 2박이 섞인 혼합박자도 더러 쓰이며, 드물게 2분박 4박자, 즉 4분의 4박자도 쓰인다. 풍물에 쓰이는 장단은 가짓수도 많고 또 고장에 따라 이름도 다르게 되어 있으나, 흔히 알려진 것은 길군악·길군악칠채·오채질굿·굿거리·덩덕궁이·다드래기와 같은 것이다. 덩덕궁이는 일명 덧베기라 하며, 3분박 보통 빠른 4박자(8분의 12박자)이며 자진모리장단에 맞는다. 이 장단의 경우 옛날에는 징을 3점 쳤기 때문에 삼채 또는 삼채굿이라 하였다. 삼채는 다시 느린삼채와 자진삼채로 나누어진다. 느린삼채는 3분박 보통 빠른 4박자이며 느린자진모리장단에 맞는데, 일명 긴삼채라고도 부른다. 꽹과리는 ‘갠지갱, 갠지갱, 갠지갱, 갯깽-’(진한 글자는 징을 치는 자리임) 하고 치며, 징은 제1·2·3박의 강박에 1점씩 쳐 모두 3점을 친다. 자진삼채는 3분박 좀 빠르기에서 빠른 4박자이며, 빠른자진모리 장단에 맞는다. 꽹과리는 ‘갠-지, 갠-지, 갠-지, 갯깽-’하고 치며, 징은 제1·2·3박의 강박에 1점씩 쳐 모두 3점을 친다. 마을 풍물에서는 삼채에 징을 3점씩 치나, 직업적인 풍물패에서는 징을 자주 치는 것이 시끄러워 1점 또는 2점만 치는 경우가 많다. 덩덕궁이는 풍물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쇠가락(풍물장단)으로서, 매우 흥겨운 느낌을 준다. 굿거리는 3분박 좀 느린 4박자(8분의 12박자)이며, 호남풍물에서는 풍류굿·외마치걸굿이라 부른다. 꽹과리는 ‘갠지갱, 갱개개개개, 갠지갱, 갯깽-’ 하고 치며,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징은 제1·2박에서 강박에 1점씩, 제3박에서 강박, 그리고 제2부박(副拍)에 1점씩 모두 4점을 치며, 전라도나 경상도에서는 첫박에 1점만 친다. 이 장단은 행진과 춤의 반주에 주로 쓰이며 유장하고 흥겨운 느낌을 준다. 다드래기는 3분박 빠른 4박자(8분의 12박자)이나 2분박 매우 빠른 4박자를 가리키며, 이러한 박자를 호남풍물에서는 세산조시라 하고, 경기도에서는 자진가락이라 부른다. 경기도 자진가락에서 꽹과리는 ‘갱-, 개개, 으개, 갱-’ 하고 치며, 징은 첫박과 둘째박에 1점씩 치는데, 요즈음은 첫박에 1점만 치는 경우가 많다. 다드래기는 경쾌하고 격렬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풍물에서 가장 빠른 가락이다. 길군악장단은 대개 매우 빠른 3박과 2박이 섞인 혼합박자로 이루어진다. 가장 간단한 것은 매우 빠른 3박과 2박이 2+3+3+2, 즉 8분의 10박으로 짜여지는 것인데, 이것을 경기풍물에서는 ‘마당일채’라 한다. 꽹과리는 ‘갱-, 갠지갱, 갱-갱, 깽-’으로 치며, 징은 첫박에 1점만 친다. 이 장단은 전국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행진가락이다. 길군악은 매우 빠른 3박과 2박이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짜여져서 그 종류가 매우 많으나, 이 가운데 길군악칠채와 오채질굿이 가장 널리 알려진 장단이다. 길군악칠채는 경기풍물에서 행진 및 판굿의 멍석말이에 쓰는 장단으로, 매우 빠른 3박과 2박이 3+2+3+2, 3+3+3+2, 3+2, 2+3+3+2로 짜여진 8분의 36박자 장단이며, 꽹과리는 ‘갠지갱, 깽-, 갠지갱, 깽-, 갠지갱, 갠지갱, 갠지갱, 갠지갱, 깽-. 갠지갱, 깽-, 갠지, 갠지갱, 깽-깽, 깽-’하고 치며, 징은 7점을 친다. 징을 7점 치는 행진가락이라는 뜻으로 길군악칠채라 부른다. 이 가락은 생동하고 꿋꿋한 느낌을 준다. 오채질굿은 호남우도풍물의 판굿 첫머리에서 치는 장단으로, 매우 빠른 3박과 2박이 2+3+3+2, 2+3+3+2, 3+2+2+3, 3+3+3, 3+3+3으로 짜여져 8분의 48박자로 된 장단이다. 꽹과리는 ‘갱-, 갠지갱, 갠지갱, 깽-. 갠지, 갠지갱, 지갱깽, 깽-. 개깽-, 개(르)갱, 개(르)갱, 갱깽-, 개깽-, 갱-개, 갱-개, 개깽-, 갱-깨, 개(르)갯깽’하고 치며, 징은 5점을 친다. 징을 5점 치는 행진음악이라는 뜻으로 오채질굿이라 한다. 이것도 꿋꿋하고 생동하는 느낌을 준다.
채와 마치
풍물이나 무악에서 채 또는 마치라는 말은 장단·가락·박이라는 뜻으로 두루 쓰인다. 즉, 풍물 장단에서는 징의 점수에 따라 일채·이채·삼채·오채·칠채 또는 한마치(외마치)·두마치·세마치·열두마치와 같이 수치를 매겨 부른다. 이 가운데 마당일채·삼채(세마치)·외마치질굿·오채질굿·길군악칠채가 널리 알려져 있다. 호남좌도풍물에서는 판굿의 첫머리에 채굿이라는 순서가 있다. 1점·2점·3점 이렇게 일련의 수치대로 징을 치는 장단을 자의적으로 짜서 치는 것인데, 일채(외마치)에서 십이채(열두마치)까지 짜서 치는 것이지만, 점수가 많으면 연주하기가 까다로워 대개 칠채까지만 친다. 십이채가 널리 알려지니까 진주 삼천포농악에서는 판굿의 순서를 12종으로 갈라서 12차(十二次)라 부르기도 하나, 이것은 근래에 자의적으로 만든 것이다. 한편, 한 장단이 길게 계속될 때 한 리듬형만 계속 반복되는 것을 외가락이라 하는데, 이는 단순한 느낌을 주므로 어떤 지역에서는 리듬형에 상대적인 리듬을 교대로 쳐서 강약을 다르게 하여 변화를 주기도 한다. 이를 암채숫채라 하기도 하고 대삼소삼이라 하기도 한다. 외가락이나 암채숫채의 교대는 리듬이 단순하므로 호남풍물에서는 단순한 가락을 내드름, 즉 제시하는 가락으로 내고, 이것을 길게 달고 가면서 리듬감을 고조시키다가 가락을 변화시켜 굴리고 나서 맺는 가락이라 하여 종지형 리듬으로 끝맺는 리듬기교를 잘 구사하는데, 이를 맺고 푸는 가락이라고 한다.
지역적 분류와 특징
풍물은 전승과정에서 전승지역에 따라 의식구성, 악기편성, 음악, 춤사위, 판굿의 구성 따위 여러 가지 향토적인 특색이 다르게 되어 있다. 풍물을 향토적인 특색에 따라 지역별로 구분한다면 경기풍물, 호남풍물, 영남 영동풍물로 대별할 수 있다. 경기풍물은 다시 충청풍물과 경기 영서풍물로 구분되고 호남풍물은 호남좌도풍물과 호남우도풍물로 구분되며 영남 영동풍물은 경남풍물, 경북풍물, 영동풍물로 구분할 수 있다.
경기풍물
경기도, 강원도 영서지방, 충청도 북부지역에 전승되는 풍물을 가리키며, 안성·평택 등지가 중심이 된다. 평택농악이 중요무형문화재 제 11호로 지정되었다. (1) 편성과 복색 영기·농기·나발·호적·상쇠·부쇠·종쇠·징1·징2·설장구·부장구·삼장구·북·상법고·부법고·종법고·사법고·오법고·육법고·칠법고·꼬리법고(끝법고)·상무동·종무동·삼무동·사무동·오무동·육무동·칠무동·중애(사미)·탈광대 등으로 편성된다. 상쇠를 비롯한 잽이들은 흰 바지 저고리에 밤색 더그레(덧저고리)를 입고, 나비상이 달린 벙거지를 쓰고, 가사(색띠)를 맨다. 무동은 붉은 치마, 노란 저고리에 남쾌자를 걸치고 가사를 맨다. 중은 흰 장삼을 입고 붉은 가사를 걸치고 흰 한삼을 매고 흰 고깔을 쓴다. 탈광대는 흔히 양반으로 분장한다. (2) 장단 쇠가락에는 길군악칠채·쩍쩍이·자진가락·마당일채·덩덕궁이(삼채)·양산다드래기(연풍대)·굿거리 따위가 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하여 가락이 분명하다. (3) 판굿 돌림법고·오방진·올림법고·당산벌림 1·당산벌림 2·절구댕이법고·사통백이·좌우치기·가세벌림·가세좌우치기·돌림법고·쩍쩍이·연풍대·소리굿·동리 따위로 구성된다.
영동풍물
강원도 대관령 동쪽지방에 전승되는 풍물으로, 강릉·삼척 지방이 중심이 된다. (1) 편성과 복색 농기·쇄납(호적)·상공운(상쇠)·부쇠·삼쇠·징·장구1·장구2·큰북1·큰북2·상소고·부소고……팔소고·상법고·부법고……칠법고·끝법고·상무동·부무동·삼무동……칠무동·끝무동·화동(花童)으로 편성된다. 꽹과리잽이는 바지저고리에 남색 동지기를 걸치고, 삼색띠를 띠고, 상모가 달린 벙거지를 쓴다. 징수·장구수·큰북수·소고수는 바지저고리에 색띠를 띠고 (동지기를 걸치지 않고) 고깔을 쓰거나 상모를 달지 않은 벙거지를 쓴다. 법고잽이는 바지저고리에 색띠를 띠고 긴 상모가 달린 벙거지를 쓴다. 무동은 붉은 치마, 노란 저고리에 남색 쾌자를 걸치고 색띠를 띠고 고깔을 쓴다. 화동은 장삼을 입고 가사를 걸치고 한삼소매를 걸치고 흰 고깔을 쓴다. (2) 장단 쇠가락에는 일채(천부당만부당)·이채·삼채·길놀이·굿거리·구식길놀이·오채 따위가 쓰인다. 옛날에는 길군악칠채를 치는 경우도 있었으나 드물었고, 지금은 치는 이가 별로 없다. 다른 지역에 비하여 속도가 빠른 가락이 많고, 외가락을 써서 맺고 푸는 변화가 없어 단조롭다. (3) 판굿 멍석말이·발맞추기·황덕굿1(소고놀이)·황덕굿2(법고놀이)·황덕굿3(무동놀이)·진놀이·지신밟기·농사풀이·동고리·열두발채상모·뒷굿으로 구성된다. 농사풀이에는 논갈이·모찌기·모심기·김매기·벼베기·타작·방아찧기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것은 요즘 꾸민 것이라 한다. 영동풍물은 소박하고 단순하며 향토적 특색이 짙다.
호남우도풍물
전라도의 김제·정읍·고창·영광·장성·화순·보성·고흥 등 서남지방에 전승되는 풍물으로, 정읍·장성 지방이 중심이 된다. (1) 편성과 복색 영기·농기·나발·쇄납·상쇠·부쇠·종쇠·수징·부징·수장구·부장구·종장구·수북·부북·수법고·부법고·종법고……칠법고·끝법고·대포수·창부·조리중·양반·할미광대·비리쇠·무동 등으로 편성된다. 꽹과리잽이는 바지저고리를 입고 색드림을 하고 색동이 달린 홍동지기라는 붉은 덧저고리를 입고, 부포상모가 달린 벙거지를 쓴다. 징잽이·장구잽이·북잽이·소고잽이는 홍동지기에 고깔을 쓴다. 대포수는 철릭과 같은 대포수 옷을 입고 커다란 대포수 관을 쓰고 조총을 메고 망태를 든다. (2) 장단 쇠가락에는 오채질굿·외마치질굿·느린삼채·자진삼채·두마치·세산조시·호호굿·풍류굿·다드래기 등이 있다. 다른 지방에 비하여 느린 가락이 많으며, 맺고 푸는 가락을 써서 리듬의 변화가 다양하다. (3) 판굿 우질굿·좌질굿·을자진(乙字陣)·오방진·쌍방울진·호호굿·다드래기·미지기·짝두름·일광놀이·영산다드래기·개인놀이·잡색놀이·소리굿·도둑잽이·부넘기·탈복굿으로 구성된다. 호남우도풍물은 쇠가락·춤사위·판굿놀이의 변화가 다양하고 흥겹다.
호남좌도풍물
호남좌도풍물은 전남 곡성 구례지방 그리고 전북 남원 임실 순창 전주 진안 장수 무주 등 전라도 동북지방에 전승된다. (1) 편성과 복색 영기·농기·나발·쇄납·상쇠·부쇠·끝쇠·수징·부징·수장구·부장구·끝장구·수북·부북·수법고·부법고·종법고·칠법고·끝법고·대포수·창부·조리중·양반·할미광대·농구·각시·무동으로 편성된다. 꽹과리잽이와 징잽이는 바지저고리에 홍동지기를 걸치고 부들 부포상모가 달린 벙거지를 썼으나, 요즈음은 홍동지기를 걸치지 않고 색띠만 띤다. 장구잽이·북잽이·법고잽이는 상쇠와 같되 채상모가 달린 벙거지를 쓴다. 잡색의 복색은 호남우도 풍물과 같다. (2) 장단 쇠가락에는 굿거리(풍류굿)·삼채굿(자진모리)·휘모리·채굿(일채-칠채)·질굿·짝두름·호호굿 등이 있다. 호남우도풍물과 경상도풍물의 중간적인 성격을 띠어 생동감 넘치는 가락이 많다. (3) 판굿 채굿·쌍방울진·미지기·잡색놀이·영산·소리굿·호호굿·돌굿·수박치기·등지기·도둑잽이·탈머리 등으로 구성된다. 호남좌도풍물은 우도풍물과 경남풍물·경기풍물의 특색을 고루 지녀, 음악·춤사위놀이가 완벽한 짜임새를 가진다.
경남풍물
경상남도 지방에 전승되는 풍물으로, 함안·진주·삼천포 등지가 중심이 된다. (1) 편성과 복색 나발수·영기·대기·양반·집사·상쇠·부쇠·끝쇠·수징·부징·설북·중북·끝북·설장구·목장구·끝장구·수법고·목법고·삼법고·사법고·오법고·육법고·칠법고·끝법고로 편성된다. 꽹과리잽이와 징잽이는 바지저고리에 색띠를 띠고, 종이로 만든 부포상모가 달린 벙거지를 쓴다. 북잽이·장구잽이·법고잽이는 바지저고리에 색띠를 띠고 채상모가 달린 벙거지를 쓴다. 양반은 호남풍물과 복색이 같다. (2) 장단 쇠가락에는 홑다드래기·겹다드래기·삼차다드래기·잔다드래기·덧뵈기·길군악·오방진가락 등이 있다. 가락을 내어 빨리 몰아가므로 매우 씩씩한 느낌을 준다. (3) 판굿 어림굿·오방진놀이·다드래기놀이·덧뵈기놀이·쌍진풀이·덧뵈기법고놀이·자진얼림굿놀이·군악놀이·앉은법고놀이·삼차다드래기·웃물놀이·영산다드래기·양반포수놀이·덧뵈기놀이·연풍다드래기·먹법고웃놀이·삼채법고놀이·자진다드래기·다듬이품앗이놀이·재삼차법고놀이·반법고웃놀음·연풍대얼림굿놀이·앉은법고놀이·운봉대놀이·사거리놀이·중거리놀이·달거리놀이·별거리놀이·호호굿놀이·날진풀이·허치자놀이로 구성된다. 경남풍물은 자진가락이 많으며 씩씩하고 활기차다.
경북풍물
경상북도지방에 전승되는 풍물으로, 김천·청도·영주 등지가 중심이 된다. (1) 편성과 복색 서낭기·나발수·쇄납수·양반·포수·각시·상쇠·부쇠·종쇠·끝쇠·징수1·징수2·상북·이북·삼북·……팔북·설장구·이장구·삼장구·설소고·이소고·삼소고……칠소고·끝소고 등으로 편성된다. 꽹과리잽이·징잽이는 흰 바지저고리에 남쾌자를 걸치고 색띠를 띠며, 종이부포가 달린 벙거지를 쓴다. 북잽이·장구잽이는 흰 바지저고리에 남쾌자를 걸치고 색띠를 띠고, 채상이 달린 벙거지를 쓰거나 고깔을 쓴다. 소고잽이는 흰 바지저고리에 쾌자를 걸치고 색띠를 띠고, 채상이 달린 벙거지를 쓴다. 양반은 도포를 입고 띠를 띠고 정자관을 쓴다. 포수는 두루마기를 입고 감투를 쓰고 조총을 손에 든다. (2) 장단 쇠가락에는 굿거리·부정굿·조름쇠·살풀이·자진마치·덩덕궁이·다드래기·길군악 등이 있다. 외가락으로 빨리 몰아가는 경우가 많아서 소박하고 씩씩한 느낌을 준다. (3) 판굿 굿거리·춤굿·부정굿·차츰걸음·연풍기굿·호호딱딱·자진머리막조으기·물레굿·진굿·농사풀이(논갈이·모내기·김매기·타작)·조름판굿·오방진굿 등으로 구성된다. 경북풍물은 꿋꿋하고 향토적인 고박함을 간직하고 있다.
풍물춤
무춤으로는 악기를 가지지 않고 연희하는 무동들의 사위춤(일정한 틀을 가진 동작)이 있다. 경기풍물의 쩍쩍이춤(깨끼춤)과 좌우치기·찍금놀이, 강원풍물의 쾌자자락의 춤, 충청풍물의 꽃나부춤, 호남풍물의 나비춤 등이 있는데, 공통적인 것은 쾌자자락을 쥐고 춤추는 것이라 하겠다. 쇠꾼들이 행하는 부포놀이로 경기풍물에는 외사·양사·찍임상, 강원풍물에는 외사·양사·꼭두상모, 충청풍물에는 외사·양사·세마치, 경상도풍물에는 외사·사사·팔사·꽃이상모, 호남풍물에는 외사·양사·사사·팔사·퍼넘기기·전조시·꾀꼬리상모·산치기·배미르기·돗대치기·복판치기·이슬털이·연봉놀이 등이 있다. 이러한 부포놀이는 한쪽으로만 돌리는 사위와 좌우로 번갈아 가면서 돌리는 사위, 그리고 부포를 앞뒤로 꺾는 사위 등이 기본이다. 또한, 호남지방 풍물춤의 유형이 다양한 이유는 가락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어느 지방을 막론하고 공통적인 것은 소고의 앞뒷면을 번갈아 가며 스쳐치는 것, 소고를 밑에서 위로 올리며 꼬아서 가슴 앞에 가져오는 동작, 원형선상(圓形線上)을 빨리 회전하는 연풍대와 공중에서 몸을 틀어 회전하는 자반뒤집기 등이 있다. 또한 지방에 따라 독특한 사위춤이 있다. 예를 들어 경기풍물의 말법고·엎어백이·삼채법고·칠채법고·마당일채가락 등과 호남풍물의 물푸기·사채와 사사· 나비상·두루거리·맺는 상·지계북·앉은상·가래들고 앉은상 등이 그것이다. 설장구춤은 판굿에서 볼 수 있는데, 이 가운데서도 호남풍물(특히 우도풍물)에서 한결 돋보인다. 예를 들면 숙바더듬·고갈더듬·통돌림·채밖음치기·사채·궁굴채던지기·접시돌리기·태돌림·발림·학걸음 등이 있다. 북춤은 두레풍물에서는 ‘모방구’라고 하며, 모내기 할 때와 판굿에서 춘다. 대체로 경상도형과 호남형의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경상도 북춤은 철저하게 덧배기 가락의 원박(原拍)에 맞추어 북판과 북통을 번갈아 치면서 남성적인 배김새춤을 추는데, 배김새춤은 어느 방향으로 몸을 던져 정지하고 제자리에서 얼렀다가 긴장을 풀어주는 춤이다. 반면에 호남지방의 북춤은 북판과 북통을 번갈아 치면서 유연하게 잔가락을 만들어 추는데, 특히 진도지방에서는 양손에 북채를 가지고 추는 것이 특징이다. 1) 경기·충청 풍물춤 판굿의 진행에서 가세벌림과 당산벌림이라 하는 ㄷ자형이나 사각형의 대형(隊形)놀음이 있다. 쇠가락은 쩍쩍이 가락처럼 빠른 가락이 발달되어 있으며, 무동춤과 놀이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다양하게 발달되어 있다. 춤으로는 경기풍물의 깨끼춤·좌우치기·적금놀이 등과 충청풍물의 2층무등타기인 ‘동리’, 3층무등타기인 ‘삼동’, 3층과 양 옆으로 두 사람을 올려 노는 ‘동고리’, 그리고 3층무등타기라 할 수 있는 ‘맞동리’ 등이 있다. 2) 영동풍물춤 가락은 외가락이거나 2박가락으로서 비교적 빠른 가락 위주로 되어 있고, 춤은 무동춤으로 쾌자자락을 좌우로 흔들면서 추거나 양손을 벌린 채 손바닥을 안으로 향하게 하고 그 손을 흔들어 춘다. 소고나 법고춤은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고 뛰면서 대형변화(隊形變化)를 주는데 앞으로 전진하는 춤이 많고, 소고는 몸 앞에서 한번 치거나 밑에서 머리 위로 올리는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 주된 동작이다. 장구춤은 장구를 머리 위로 올려서 좌우로 흔들거나 외방망이치기·양방망이치기 등을 한다. 상쇠는 꽹과리를 들고 채를 8자(양상치기)로 돌리거나 상모놀이로 외상모·양상모·꼭두상모 등을 하는데, 12발상모는 뒤에서 손을 합치고 외상모로 하는 것, 양상모로 하는 것, 땅에 엎드려 외상모로 하는 것 등이 있다. 그 밖에 소고나 법고가 하는 농사풀이가 있는데, 그 놀이는 가래질·논갈이와 논삼기, 못자리 누르기·모찌기·모심기·논매기·낫잡기·벼베기·벼광이기·태치기·벼모으기·방아찧기 등이며, 즉흥적으로 놀이를 줄이기도 하고 늘이기도 한다. 무동타기는 2층으로 만든 단동고리와 3층으로 만든 삼동고리,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3층을 만들고 4층에 어린 무동을 올려 상모놀이(외상모)를 하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3) 호남우도풍물춤 쇠꾼의 부포놀이에서 부들상모를 이용한다는 것이 호남우도풍물과 다르며, 부포놀이는 외사·양사·사사·팔사·퍼넘기기·좌우치기·이슬털이 등이 대표적인 동작이다. 또한, 우도굿에 비하여 장구놀이가 좀 뒤지나 북춤이 돋보이며, 상모돌리기를 위주로 한 동작이 발달되어 있다. 예를 들면 외사·양사·사사·팔사·앉은 상·나비상·연풍대·자반뛰기·차고앉은 상·지계북 등의 묘기가 있다. 또한 판굿을 할 때 멍석말이를 하게 되는데, 이때 빠른 가락으로 몰아서 전투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특이하며, 군영(軍營)놀이·도둑잽이 같은 전쟁놀이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놀이
잡색들의 놀이와 소고잽이들이 하는 농사굿, 무동들이 하는 무동놀이가 있다. 잡색들이 하는 놀이는 대포수·각시·조리중·양반 등의 배역자가 풍물패를 따라 다니면서 재담과 동작으로 풍자적인 연극놀이를 하게 되는데, 이 가운데서도 호남풍물의 경우 그 형식이 한층 구체적이고 배역도 다양하다. 또한, 지방에 따라서는 목가면(木假面)이나 종이가면을 착용하는 수도 있다(경상남도의 서남지역 풍물에도 가면이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전라남도 영광지방의 풍물을 보면, 포수(중개역)·양반·참봉(공술을 좋아함)·창부(중개하는 종)·조리중(각시를 희롱하는 중)·비리(말뚝이역)·홍잡삼(술꾼)·할미·각시 등이 있는데 모두 가면을 쓰고 있고, 진도지방의 풍물에서도 종이가면을 쓰는데 이러한 잡색들의 놀음은 재담과 몸짓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판굿을 할 때 도둑잽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는 상쇠와 잡색들 사이에 군영놀이가 전개된다. 강원풍물과 경상도풍물에는 농경적인 동작을 연희하는 농사굿이 있다. 그 내용은 씨뿌리기를 비롯하여 모찌기·모내기·김매기·벼베기·타작·벼끌어모으기·풍로부치기 등이다. 그밖에 무동들이 하는 놀이로 강원풍물인 경우 단동고리·상동고리가 있으며, 경기풍물에는 외동타기·곡마당·맛동리·동고리 등의 놀이가 있는데, 이는 일종의 곡예적인 놀이이다.
진주삼천포농악
진주삼천포농악은 1966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으며 지역적으로는 영남풍물에 든다. 진주삼천포농악의 편성법은 경상북도풍물과 호남풍물의 중간형태이다. 농기수와 영기수(2), 긴나발(2), 쇄납, 쇠(상쇠·목쇠·끝쇠), 징(수징·목징), 북(설북·목북 등), 장구(설장구·목장구·끝장구), 법고(수법고·목법고·삼법고 등), 그리고 양반과 포수 등으로 편성된다. 치배들은 모두 흰 바지저고리에다 삼색띠만 매며 전립모자(쇄잽이와 징수는 부포상모, 북·장고·법고잽이는 채상모)를 쓴다. 고깔을 쓴 치배가 없고 채상놀음이 뛰어나며, 무동이 없다. 쇠가락은 거의 3분박 3박자이며 혼합박자가 쓰이지 않는 것도 호남좌도풍물과 비슷하다. 그러나 덧배기와 다드라기 그리고 호호딱딱을 쓰는 것은 경상북도풍물과 유사하다. 판굿은 다음과 같이 12차로 짜는데 1.오방진(반덧배기 가락) 2.얼림굿(느린덧배기 가락) 3.덧배기 법고놀음 4.길군악 5.영산다드라기(자부랑깽이) 6.멋 법고놀음(빠른 삼채가락) 7.등맞이굿(쇄잽이들이 쇠를 땅에다 놓고 일어나 춤을 추고 잡색들은 '용개통통') 8.풍류굿 9.호호굿 10.개인 영산놀이 11.별굿놀이(사모잡이가락) 12.팔진 해무진굿(허튼굿)이다. 판굿에서는 팔진해식진(八陣解式陣) 굿이 특이하다. 빠른 가락을 모는 경우가 많아 힘차지만, 맺고 푸는 기교가 약하여 구성진 흥이 덜하나 경상북도풍물보다 가락이 다채로워 흥겹다. 지금은 보편화되었지만 연풍대, 자반뒤집기 같은 묘기는 진주삼천포농악의 특기이다. 반면에 북놀음이 두드러지지 않은 것은 진주삼천포를 비롯한 서부 경남풍물이 영남풍물 가운데서도 밀양이나 경북풍물과 다른 점이다. 1) 특색 (1) 무용적 특색 치배들 전원이 전립을 쓰고 상모놀이를 하며 상모놀이에는 외상모, 양상모, 사사, 우물놀이 등이 있다. 법고놀이에 돌아앉기, 한발로 법고차기, 연풍대와 자반뛰기가 있으며 설장고놀이에 있어서 연기가 다양한 가락치기와 연풍대가 있다. 또한 달거리굿과 같은 노래굿이 있다. (2) 음악적 특색 악기에 있어서 소고와 법고를 구분되지 않고 징과 북을 3~4개 쓰는 경북풍물과 호남풍물의 중간 형태이다. 쇠가락은 거의 3/3박자이며 혼합박자는 잘 쓰이지 않는다. 또한 품앗이 가락과 굿거리를 별로 쓰지않고 덧뵈기와 다드래기, 호호딱닥을 쓴다. 빠른 가락이 많아 힘은 있으나 맺고 푸는 기교가 약하여 구성진 흥이 덜하다. 반면 가락이 다채로와 흥겨운 느낌을 준다. 2) 내용 1차-느린 덧뵈기가락으로 구경꾼에게 인사굿을 한 다음 오방진 가락을 반삼채로 치면서 동서남북 중앙에 나선형으로 고도진을 친다. 다드래기 가락에 풍물패는 오른편으로 둥글게 돌고 법고잽이들은 연풍대를 한다. 2차-풍물패들이 둥근 원을 만들어 오른편으로 돌면서 춤추고 그 가운데서 상쇠가 덧뵈기가락으로 옷놀음을 하고 춤을 춘다. 끝에는 다드래기가락을 치며 빠른 속도로 소고잡이들은 자반뒤집기를 한 다음 풍물패는 두 패 사이로 빠져 나온다. 이어서 덧뵈기가락으로 둥글게 늘어선 대열 안으로 법고놀이를 한다. 3차-홑다드래기가락을 치며 어르고 논 다음 삼차길군악을 치며 둥글게 돈다. 이어서 삼차다드래기가락을 치면서 오른편으로 돈 다음 삼차다드래기가락을 벙어리가락으로 치면서 왼편으로 돈다. 4차-삼차길군악을 빠르게 치면서 둥글게 돈 다음 영산다드래기가락을 치며 상쇠와 고스들이 외상파놀음, 양상파놀음, 사사웃놀음, 전치기웃놀음, 쌍전웃놀음, 등 웃놀음을 하고 영산다드래기로 몰아가며 계속된다. 5차-자진얼림굿도드리에 이어 굿거리를 한 다음 양반, 포수, 기타 잡색들이 가운데 들어와 굿거리장단에 흥겹게 춤추고 익살스런 구경꾼들을 웃긴다. 6차-상쇠가 가운데 들어가 덧뵈기가락을 치고 풍물패 전원은 오른편으로 원진한다. 이어서 소고잡이들의 안을 들어가 둥글게 돌며 다드래기가락에 연풍대놀이를 한 다음 모두 둥글게 늘어서서 자진다드래기가락을 친다. 징은 치지않고 모든 법고장이와 상쇠가 하는대로 갖가지 상모놀음을 한다. 7차-삼채가락을 치며 법고잽이가 안에서 둥글게 서서 법고놀이를 한 다음 자진다드래기가락에 법고놀이가 이어 진다. 이어서 상쇠와 목쇠가 서로 품앗이값을 주고 받으면 풍물패원은 전원 좌우로 진퇴한다. 8차-상쇠는 제3차 가락을 치며 둥글게 돈다. 제삼차가락 둘째 박에 무릎을 굽혔다가 일어나서 회전한다. 이어 상쇠가 다드래기가락을 치면서 양상피놀음을 하면 법고잽이들도 양상피놀음을 한다. 다시 법고잽이가 두 줄로 마주보고 다드래기가락에 맞추어 상모놀이를 하다가 덧뵈기가락에 전후좌우 발 맞추어 진퇴한 다음 다드래기가락에 일제히 생피지를 돌리며 연풍대와 자반뒤집기를 한다. 9차-법고잽이들이 둥글게 둘러선 다음 상쇠가 치는 얼리굿가락에 법고잽이들의 가운데로 둥글게 앉았다가 덧뵈기가락에 천천히 일어나면서 상모놀이를 한다. 상쇠가 산치기놀음을 하면 법고잽이들도 생피집 물체를 세워서 산치기놀음을 하고 끝에는 다드래기로 연풍대와 자반뒤집기를 하며 오른편으로 돈다. 이어 다드래기가락에 전후좌우 일제히 진퇴한다. 10차-풍물패가 굿가락을 치면서 '아하- 아하야'라고 사거리를 부른 다음 굿거리 가락에 중거리노래를 함께 제창한다. 이어 풍물패는 둥글게 늘어서서 '아하 아하 밝은 달아'하고 달거리노래를 부른다. 11차-다드래기가락을 치다가 상쇠의 신호로 '별따자 별따자 하늘 얼러 별따자'하고 구호를 외치고 나서 다드래기가락을 친 다음 호호굿거리가락을 치며 '호호'하고 구호를 부른다. 이어 굿거리가락에 법고놀이가 계속된다. 12차-다드래기가락을 치고 '허치자 허치자 구경가락 허치자'라는 구호를 부르고 다드래기가락을 친다.'어서치고 술먹자. 부포끌러 술먹자'하고 부르기도 한다. 3) 진주삼천포농악 12차 36가락 삼천포는 정원 초하루(설날) 지내기가 무섭게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동리마다 일어난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전승놀이의 하나인 풍물은 상고시대 전쟁 때 진군악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한 것이라는 전설도 있고 12차 36가락을 전쟁놀이라 한다. 그러나 차차 농사일에 다른 노고를 덜고 능률을 올리기 위해 이 전승놀이는 유구한 역사를 지니면서 이어 온 것이다. 이러한 풍물놀이가 매굿이 되어 민속신앙으로서 지신밟기 행사로 되기도 하였다. 이 지신밟기는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하여 대보름까지 이어지고 혹은 정월 한달 동안 행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민속신앙에 쓰이기도 하면서 다양하게 길흉사 간에 풍물은 등장한다. (1) 풍물패 구성 1차에 3가락 12차 36가락으로 나팔 앞잡이 1명, 포수 1명, 기수 1명, 영기 9명, 집사 1명, 양반 1명, 호적 2명, 꽹과리 4명, 징수 3명, 대북 4명, 장고 4명, 소고 12명 등 기본 풍물패의 인원은 36명이다. 늘어서는 순서는 나팔, 포수, 기수, 영기, 집사, 양반, 호적, 꽹과리, 징, 대북, 소고의 순이다. (2) 풍물패의 복색 양반은 8관을 쓰고 도포를 입고 등에는 한문으로 '9대진사 3대봉우직'이라 쓴다. 버선은 안 신고 옥양목을 찢어 감발을 하고 그 위에 짚신을 신어 발꿈치는 흰살이 보인다. 긴 담뱃대를 물고 점잖은 빼지만 화장을 하지 않는다. 꽹과리가 모든 명령을 내리는데 집사는 그 명령을 받아 집행한다. 집사의 차림은 양반과 같으나 등에 글자판을 안 붙이고 담뱃대 대신 (채)를 든다. 포수는 탕건을 쓰고 총은 나무로 만듯것에 먹칠을 했고 망태를 떼었다. 검은 항칠을 하는데 그것은 짐승을 잡기 위해 위장을 한 것이다. 검은 항칠을 하는데 그것은 짐승을 잡기 위해 위장을 한 것이다. 호적은 일명 (날나리) 또는 (새남)이라고 하며 집사와 같으나 도포는 안 입고 두루마기 위에 습수를 입고 전립을 썼다. 나팔수는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한복을 입는다. 집사가 꽹과리의 명령을 받아 (채)를 옆으로 내 저으며 행사를 거행하라는 구령을 내리면 풍물패는 12차 36가락으로 들어가게 된다. 대기는 옥양목을 사서 동리에서 만드는데 크기는 깃대가 참대로 5미터 정도이고 기폭은 흰 바탕에 검은 천으로 테두리를 했고 옥양목 1마폭의 가로에다 3자 길이의 세로에 먹글씨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썼다. 영기는 세로 가로 3자 3치의 정사각형에 깃대는 2미터 50센치 길이다. 검은색 광목에 밀가루 등으로 글자는 희게 령(令)자를 쓴다. 대기 꼭대기에는 약 30센치 길이의 다이야몬드형의 나무로 만들거나 쇠로 만든 꼭지를 달았다. 영기는 암수 두개가 특징인데 영기끝은 산자와 같은 쇠스랑을 달았고 숫영기는 대기 끝과 모양이 같다. 영기가 암수로 구분된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살아가자면 한 쌍으로 사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한다. (3) 가락 전쟁놀이 또는 진놀이인 12차 놀이는 차마다 3개의 가락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12차 36가락으로 구성되고 있다. 여기서 풍물을 알기 위해 12차 36가락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차-얼림굿놀이 가락, 진풀이 가락, 고동진풀이, 덧뵈기놀이 가락 2차-다드래기놀이 가락, 삼자다드래기 가락 3차-우물놀이 가락, 지다드래기 가락, 영산다드래기 가락 4차-재심차다드래기 가락, 덧뵈기놀이 가락, 삼자굿놀이 가락 5차-삼자버꾸놀이, 재얼림굿놀이 가락, 영산도놀이 가락 6차-자질굿거리 가락, 덧뵈기놀이 가락, 삼자굿거리 가락 7차-풍대놀이 가락, 얼림굿놀이 가락, 자진다드래기 가락 8차-호호대문놀이 가락, 사거리 가락, 중거리 가락 9차-달거리 가락, 별따기 가락, 가락명 모름 10차-허사가락, 운봉대놀이 가락, 진풀이 가락 11차-점호굿 가락, 굿거리 가락, 자진굿거리 가락 12차-날짐풀이 가락, 다드래기 굿놀이 가락, 파방놀이 가락
강릉농악
1) 강릉농악의 형성 과정과 성격 강원 지역의 풍물은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영서풍물과 영동풍물으로 구분된다. 원주·횡성·춘천 등지의 영서풍물은 경기풍물과 같으나, 강릉을 중심으로 한 영동풍물은 특유의 향토적 특색을 지니고 있다. 이 지역은 태백산맥으로 가로막혀 있고, 지역적으로 험준한 산악이 첩첩하여 각기 지역 나름의 고유한 형태와 멋을 가진 민속놀이, 민요, 민속신앙 등과 함께 풍물이 전승, 발전되어 왔다. 영동풍물은 강원도 동해안 일대의 강릉, 삼척, 울진, 정선, 평창, 동해, 양양, 고성 등지에서 성행하고, 경북 동해안 일부 지역과 함경도 지역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강릉풍물은 영동지역 풍물을 대표해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이전에도 활발한 활동을 보여 왔다. 강릉풍물의 형성 발자취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와 강릉단오제 풍물경연대회에서 엿볼 수 있고, 이러한 활동들이 바탕이 되어 ‘판굿’이 ‘중요무형문화재 제11-라호 강릉농악’으로 지정되었다. 강릉농악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제2회(1961년), 제3회(1962년), 제4회(1963년) 연속 3회 참가하여 그 기량을 뽐내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영동지역의 평창백옥포풍물이 1977년 제18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평창풍물이 1978년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이때 평창풍물을 지휘한 상쇠는 평창출신이 아니고 강릉 홍제동 풍물의 상쇠 박기하였다. 그는 현재 강릉농악의 기능보유자이다. 강릉지역에서는 예로부터 마을마다 각기 풍물패가 있었으나, 점차 하나 둘씩 사라지고 1980년 초에는 박기하가 이끄는 홍제동 풍물 한 패만 남게 되어 강릉농악의 존립에 심각한 위기가 닥쳤다. 이런 상황에서 1981년 많은 사람들이 강릉에는 놀거리와 볼거리가 없다고 당시 시장(市長)에게 건의하게 되었고, 시장은 풍물패가 있었던 마을에 풍물 장려금을 50만원씩 지원하여 활성화하도록 했다. 그 해 제1회 강릉시 풍물경연대회를 개최하였는데, 19개 마을이 출전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그 이후 강릉시에서는 풍물경연대회를 매년 개최하여 강릉지역 풍물의 활성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같은 해 제2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강릉 대보름농악’이 출전하여 장려상을 받았다. 1983년 해체 과정을 걷고 있던 홍제동풍물을 이끌던 박기하와 사천면 하평풍물을 이끌던 김용현이 연합하여 강릉농악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85년 제2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명주 하평 ‘2월 답교농악’으로 출전하여 문화공보부장관상을 타게 되고, 같은 해 12월에 음악종목으로서 강릉농악의 판굿이 ‘중요무형문화재 제11-라호’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강릉농악의 저변에는 예로부터 각 마을에서 농사지으면서 전승해 온 풍물이 뿌리가 되어 시작되었고,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와 강릉시 풍물경연대회 등으로 계속해서 갈고 다듬어진 ‘대보름 농악’과 ‘2월 답교농악’ 등의 내용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즉 강릉농악의 판굿은 어느 한 마을 풍물의 내용이 아니라 강릉지역 전체 내용을 포괄하여 연출한 것이다. 강릉농악의 조직과 운영은 다른 지역과 차이가 있다. 우리가 보통 ‘**풍물’하면 보통 하나의 풍물패가 있고 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쉬우나, 강릉농악은 다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1-라호 강릉농악’은 두산동 풍물패, 월호평동 풍물패, 저동 풍물패, 사천답교 풍물패 등 4개 마을 풍물패를 아우르는 말이고 보유자, 보조자(보유자 후보, 조교, 보조자 등) 등은 이들 풍물패에서 각 한 명씩 골고루 포진하고 있다. 강릉농악의 주축을 이루는 이들 4개 풍물패는 농기, 풍물, 풍물패, 운영조직 등을 독자적으로 갖추고 있고 평상시에 각기 마을을 중심으로 개별적으로 운영되지만 ‘중요무형문화재 제11-라호 강릉농악 보존회’ 산하에서 상호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운영된다. ‘강릉농악’이라는 이름으로 외부에 공연 나갈 때는 각 마을의 혼성으로 풍물패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고, 매년 5월 열리는 강릉 단오제 풍물경연대회에서 뽑힌 풍물패가 그 해 일년 동안 대외적인 정기발표회나 공연을 하게 된다. 매년 경연을 해보면 이들 4개 풍물패의 실력이 서로 엇비슷하지만 그래도 순번식으로 돌아가면서 뽑는 것이 아니라 그 해 그 해의 실력에 따라 선발된다. 결국 외부에서 우리가 만나는 강릉농악은 문화재관리국에서 지정한 보유자, 보조자와 단오제 풍물경연대회에서 선발된 풍물패이다. 강릉농악의 저변은 다른 지역에 비해 굉장히 넓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타지역의 풍물은 그 단체와 단원이 단일팀이지만 강릉농악은 이처럼 4개의 마을 풍물패가 주축되어 활동하고 이외에도 강릉지역에서 활동하는 풍물패는 10여개 이상이 된다. 이들도 광의의 강릉농악이 되는 것이다. 1997년에 열린 강릉 단오제의 행사 중에서 ‘제16회 KBS사장기농악경연대회 및 제4회 어린이 농악경연대회’에는 14개 풍물패가 참가했다. 강릉지역의 마을풍물패, 초·중·고·대학의 학교 풍물패, 동호인 풍물패 등 그 단원들의 성격이 다양하다. 이들 풍물패는 개별적으로 활동을 하다가 강릉 단오제 행사에 모두 모여 기량을 자랑한다. 참가한 각 풍물패가 하는 연행 내용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마당굿으로 거의 동일하다. 그래서 매년 똑같은 것을 보게 되었던 문제점으로 인해 1997년부터는 각 풍물패의 특성을 살려 약간의 변화를 주어 연행하도록 하였다. 강릉농악 보존회가 순회를 하면서 풍물을 가르치는 곳은 관동대학교, 강릉농공고등학교, 초등학교 6개가 있으며, 단지 전수만 받는 곳은 명륜고등학교와 율곡중학교가 있다. 초등학교의 경우 특활시간에 학교로 보존회 회원들이 직접 방문해서 가르쳐 주고 강릉단오제에 출전시키고 있다. 중학교는 율곡중학교, 고등학교 중에서는 명륜고등학교를 1996년부터 지정하여 가르치고 있다. 율곡중학교와 명륜고등학교의 경우 가락을 치는 것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가르쳤지만 아직 풍물패는 구성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처럼 강릉지역의 풍물은 강릉농악이라는 이름 하에 튼튼한 저변을 가지고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활발한 전승력 못지 않게 강릉농악은 그 형식과 내용에서도 타지역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영동의 풍물은 강릉 문화권에 속한 지역에서 그 특색이 두드러진다. 그 특징은 마을굿으로서 당굿은 없고 지신밟기가 있는데, 그 사설이 길고 다양하다. 정초의 지신밟기, 정월 대보름 달맞이굿·다리밟기와 2월 좀상날의 다리밟기·횃불놀이, 걸립굿, 화전놀이, 단오날 대관령 성황제의 길놀이, 두레풍물이라 할 수 있는 못질·김질먹기, 못질과 김질을 마친 후 뱃놀이 등은 타지역에서 볼 수 없는 강릉농악만의 전통이다. 풍물 대원의 수는 사물(四物), 소고, 법고, 무동이 각각 같은 수로 편성되며, 그들이 착용하는 복색은 벙거지와 상모가 독특하고, 고깔이 이색적이다. 가락은 전국에서 가장 빠르며 법고와 소고의 구분이 분명하다. 또한 무동춤과 농사풀이가 이색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강릉농악 중에서 ‘판굿’이다. 이 판굿의 연행 내용도 한 풍물패의 것만이 아니라 각 마을 풍물패의 내용이 한데 어우러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강릉농악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강릉지방의 사회·문화사적인 입장에서 각 풍물패의 역사 그리고 연행 형식과 내용을 총체적으로 접근해야 온전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2) 강릉농악의 형태와 내용 (1) 편성과 복색 ㄱ. 악기와 기구 강릉농악에 쓰이는 악기는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 법고, 호적(날라리, 쇄납)이 있고, 타지방에서는 소고, 법고의 구분이 없어졌으나 이곳에서는 크기가 달라 구별된다. 농기는 타지방 농기와 같으나 다소 작다. 흰 바탕에 검은색으로 글씨가 쓰여져 있고, 옆은 검은색 삼각술을 달고, 밑은 청, 황, 홍의 삼색 술을 길게 달았다. 강릉농악은 농기가 두 가지 이다. 하나는 강릉농악을 대표하는 농기이고, 또 하나는 각 풍물패를 대표하는 농기이다. 어떤 풍물패가 강릉농악을 대표해서 대외적 활동을 할 때는 강릉농악 대표기와 마을 대표기 2개의 농기를 가지고 나간다. 농기의 모양은 4개의 풍물패가 거의 유사하다. 강릉농악을 대표해서 나가는 농기는 각 풍물패가 소유하고 있는 농기보다 색깔이 더 하얗고 크기는 약간 작으며 ‘강릉농악 보존회’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고 가장자리는 검정색의 수술이 달려 있다. 꽹과리는 경기풍물 꽹과리와 같으며 상공(상쇠), 부쇠, 삼쇠로 구분된다. 보존회 차원에서 대외적인 활동을 할 때 꽹과리는 보유자인 박기하와 김용현이 상쇠, 부쇠가 되고, 각 단위 풍물패 상쇠가 그 다음인 삼쇠가 된다. 북과 장고는 경기풍물에 사용되는 것과 같다. 징은 경기풍물의 징과 같으나 끈을 다는 법이 다르다. 전두리에 뚫린 구명에 끈을 달고 길이 한뼘 정도의 막대기에 끈을 길게 매고 어깨에 메고 친다. 소고는 소구라고도 부르며, 작은 법고와 구별된다. 통의 지름이 26cm, 높이 6cm 정도이며 양쪽에 개가죽을 대고 등나무 줄기로 얽어맨다. 길이가 9cm 가량 되도록 자루를 달되 얇은 철판 5장을 겹쳐 꿰어 매달아서 소고를 치면 ‘철철’하고 소리가 나게 되어 있다. 소고채는 길이 30cm쯤 되며 손잡이 끝에 명주로 40cm 정도의 수실을 달고, 잽이는 상소고에서 끝소고로 구분해서 부른다. 법고는 소고보다 작고 흔히 ‘미지기’라 부른다. 법고통은 지름이 18cm, 높이 4cm 가량 되며 개가죽을 대고 등줄기를 얽어맨다. 소고에는 자루를 달지만, 법고는 자루를 달지 않고 길이 26cm 가량 되는 끈을 달고 왼손목과 손가락에 끈을 꿰어든다. 법고채는 매우 가는 막대기를 쓰며, 잽이는 상법고에서 끝법고까지 구분해서 부른다. ‘날나리’라고도 하는 쇄납[瑣吶]은 경기풍물과 같다. 그 세부적 명칭으로 벌렁이는 ‘나포’라 하고 촉꼬지는 ‘꼭도’라 하며, 서는 ‘주레’라 한다. 쇄납은 각 풍물패마다 있는 것이 아니고, 전체 보존회 차원에서 한 사람만이 담당한다. 상모는 상모지가 달린 벙거지를 상모라 부른다. 원래는 털로 벙거지를 만드는 것이지만 흔히 문종이를 붙여서 만들고 짚으로 엮어서 만들기도 한다. 예전에는 종이를 많이 구해서 식기를 하나 엎어놓고 그 모양대로 맞추어서 풀을 계속 발라 만들었다. 즉 겹겹이 발라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그 꼭대기에 거멍(꺼멍-솥 밑에 묻어 나는 검정색 탄화물)을 발라서 만들거나 마지막에는 먹을 바르기도 했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에는 검은 물이 흘러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짚으로 만든 벙거지는 색을 드릴 수 없기 때문에 그 색 그대로 사용했다. 꼭대기에는 나무로 깎아 만든 꼭지를 다는데, ‘우늘’또는 ‘꼬두마리’라고 부른다. 꼬두마리에는 4가닥 실로 꼬거나 8겹실로 만들어 여기에 2겹실로 여러 번 감아서 쭉 훑어 휘어서 꼬두마리 고리를 만들고, 고리 끝에 10여개의 구슬을 꿰는데 구슬이 없으면 율무를 쓴다. 구슬을 꿴 끝에는 굵은 실을 1척가량 길게 다는데 ‘채’라 부른다. 채의 끝에는 넓이가 손가락 셋 정도, 길이 90cm 가량 되는 백지를 다는데 ‘상모지’라 부른다. 상모지 끝에는 제비초리와 같이 가운데를 잘라 낸다. 구슬이 없으면 찬 치 가량 되는 종이를 가늘게 썰어 빽빽하게 다는데 ‘퍽’이라 한다. 상모는 상모지가 달린 것과 상모지가 달리지 않는 방망이 상모 두 가지가 있다. 마지막으로 고깔은 한 변이 30cm 쯤 되게 문종이를 네모로 접어서 만드는데 얇은 종이를 백, 청, 황, 적 여러 색으로 물들여 만든 꽃을 30-40개 가량 빽빽하게 단다. 요즘은 털실로 꽃을 만들기도 한다. 고깔에 달린 꽃의 수가 40개나 되어 우리나라 풍물 중에 꽃의 수가 가장 많다. ㄴ. 편성과 복색 강릉농악은 농기수1, 호적수1, 꽹과리수3, 징수2, 장고수2, 큰북수3, 소고수8, 법고수8, 무동8명으로 편성된다. 옛날에는 화동(花童)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열두발 상모수가 따로 포함되기도 한다. 강릉농악의 편성과 복색은 지신밟기, 걸립풍물, 정월 대보름 달맞이굿·다리밟기, 이월 좀상날 다리밟기·횃불놀이, 화전놀이 등을 할 때는 일정하다. 다만 김질·못질 풍물 때는 풍물패 복색보다는 일반적인 일복에다 풍물만 딸린다. 농기수는 한복에 청·홍·황 삼색 띠를 양어깨와 허리에 두르고 고깔을 쓴다. 농기수는 각 풍물패마다 있다. 쇄납수의 복장은 농기수와 같다. 각 풍물패마다 쇄납을 부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강릉농악을 통틀어서 1명뿐이다. 상쇠는 상공(상쇠)이라고도 한다. 보존회 차원에서 대외적인 활동을 할 때, 꽹과리는 보유자인 박기하와 김용현이 상쇠, 부쇠가 되고, 각 단위 풍물패 상쇠가 그 다음인 삼쇠가 된다. 한복에 남색 등지기를 걸치고 삼색 때를 매고, 상모가 달린 벙거지를 쓴다. 그리고 부쇠·삼쇠는 한복에 삼색 띠를 매고, 상모지를 단 벙거지를 쓴다. 징수는 한복에 삼색 띠를 매고 상모지가 달리지 않은 길이가 짧고, 폭이 넓은 방망이 상모를 단다. 상모놀음은 하지 않는다. 장고수와 북수의 복장도 징수와 같다. 소고수는 징수와 같은 복장이고 수건을 머리에 쓰며, 퍽을 단 벙거지를 쓴다. 법고수는 한북에 삼색 띠를 매고 긴 상모지가 달린 벙거지를 쓴다. 또 무동은 붉은 치마와 노랑 저고리에 남색 쾌자를 걸치고 색띠를 매고 고깔을 쓴다. 손에는 수건을 든다. 잡색은 예전에 포수[두루마기, 꿩 털, 총]와 화동[담배대, 도포, 장삼]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다. (2) 가락 ㄱ. 쇠가락 강릉농악에 쓰이는 쇠가락에는 일채, 이채, 삼채, 사채, 길놀이(신식행진가락), 굿거리, 구식 길놀이 따위가 쓰인다. 일채, 이채, 삼채, 사채, 길놀이, 굿거리 등이 주축을 이루며, 이중에서 길놀이 가락은 근래에 와서 행진곡 풍으로 창작한 것이 특이한 점이다. 그러나 쇠치는 소리와 가락은 옛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다. 리듬은 빠르면서도 무두 3분박, 4분박으로 단조로우나 7-8조의 가락으로 구분된다. 대부분의 쇠가락은 외가락으로 길게 반복하는 것이 다른 지역과 차이가 있다. 일채(한마치)는 마당굿(판굿)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쇠가락이다. 3분박 매우 빠른 4박자(8분의 12박자)이다. 꽹과리는 ‘갱-개, 갱-개, 갱-개,-갱-개’하고 징은 첫째, 셋째 박에 1점씩 친다. 2박을 한 장단으로 꼽고 징을 2박에 한 번 친다 하여 일대 또는 한마치라 부르는 것 같다. 이채는 2분박 좀 빠른 4박자(4분의 4박자)이며, 꽹과리는 아래와 같이 치며 징은 첫째, 셋째 박에 1점씩 친다. 이 가락은 그렇게 많이 쓰이는 것은 아니며 상모가락에 연결지어 쓰기도 한다. 삼채는 어느 고장이나 널리 쓰이는 쇠가락이다. 3분박 좀 빠른 4박자(8분의 12박자)이고 꽹과리는 ‘갱-개 갱-개 갱-개 갯깽-’하며 치고 징은 첫째, 둘째, 셋째 박에 치는 것이 원칙이나 첫째 셋째 박 또는 첫 박에만 치는 경우도 있다. 사채는 3분박 빠른 4박자(8분의 12박자)로 꽹과리는 아래와 같이 치며 징은 첫 박과 넷째 박에 1점씩 친다. 행진에는 길놀이 가락을 친다. 그러나 최근에는 행진에 2분박 좀 빠른 4분박(4분의 4박자)으로 친다. 꽹과리는 ‘갠-지 개개, 갠-지 개개, 개개갱 개개갱, 갠-진 개개’하고 두 장단을 치며 징은 첫 장단에는 첫째, 셋째 박에 한 점씩 치고 둘째 장단에는 첫째, 둘째, 셋째 박에 한 점씩 친다. 원래는 행진에는 느린 굿거리형 길놀이 가락을 치는 것이었으나, 근래에 이 가락으로 바뀐 것 같다. 굿거리는 춤출 때 치는 가락으로 3분박 좀 느린 4분박(4분의 12박자)이다. 징은 첫박에 한점 친다. 이 가락은 경기풍물의 굿거리보다 좀 빠른데, 이곳에서는 ‘8채’라고도 한다. 또, 12채(구식 길놀이가락)는 행진할 때 치는 가락으로 3분박 보통 빠른 4박자(8분의 12박자)이다. 경기풍물의 굿거리와 같은데, 이곳에서는 12채라 하고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밖에 쓰이는 가락으로는 구식 행진가락, 빠른 굿거리(3채), 맺음가락(연결가락), 칠채(멍석말이가락) 등이 있는데, 그 중 맺음가락은 최근에 쇠가락의 변함을 예고하고 새로운 가락으로 연결됨을 알리기 위해 박기하씨에 의해 만들어진 가락이라고 한다. 강릉농악의 쇠가락이 다른 지방에 비하여 비교적 빠르고, 그 가락은 경기도와 충청도 풍물의 가락과 유사한 점이 있고, 채는 육채와 구채, 십채를 뺀 나머지 일채, 이채, 삼채, 사채, 오채, 칠채, 팔채, 십이채가 있으나 주로 일채부터 오채까지 치고 논다. (3) 내용 강릉농악에는 정초의 지신밟기, 정월 대보름날의 달맞이·다리밟기, 2월 좀상의 다리밟기·횃놀이, 걸립굿, 봄농사가 끝난 뒤의 화전놀이, 모질·김질먹기, 단오날 대관령 성황제의 길놀이 풍물, 못질과 김질을 마친 후 뱃놀이가 있다. ㄱ. 지신밟기 정월 보름부터 3-4일간 풍물패들이 집집마다 풍물을 치며, 덕담고사의 지신밟기를 한다. 지신밟기를 하기 전에 당에 서낭굿을 친다. 서낭굿은 ‘서낭님 서낭님 동구바까에 서낭님’이라는 사설과 그것에 맞는 가락을 친다. 굿패들이 서낭기를 들고 풍물을 치고, 지신밟기를 원하는 집에 들러 먼저 문굿을 치고, 고사반하고, 마당굿을 한다. 대가댁에서는 마당굿에서 멍석말이, 황덕굿, 진놀이, 농사풀이, 자매놀이 등 갖가지 놀이를 한 다음, 마당굿, 조왕굿, 성주굿, 측간굿, 우물고사, 장독굿 등을 하며 집안을 구석구석 돈다. 그렇지만 규모가 작은 집에서는 고사만을 지낸다. 고사반(사설)은 그 내용이 안택(安宅)을 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홍제동 풍물의 지신밟기는 14일 밤에 뒷산에 있는 여성황사(女城隍祠)에서 미리 서낭굿을 치고, 15일 밤부터 집집마다 들러 지신을 밟는 차례로 행해진다. ㄴ. 정월 대보름-달맞이·다리밟기(횃불놀이) 강릉지역에는 달맞이와 다리밟기를 하는 마을이 많이 있다. 강릉에서는 일년 한해 첫 둥근 달이 떠오른 정월 대보름이면 각 마을의 풍물패들이 지신밟기를 하고 놀다가 대보름달이 뜨면 달맞이와 다리밟기를 하러 간다. 예전에 강릉지역에서는 달이 뜨기 전에 풍물과 횃불을 들고 산에 올라가 제사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다. 그런 다음 횃불을 들고 풍물을 치며 마을로 내려온다. 마을로 내려와서 마을 앞 냇가에 있는 다리를 밟는다. 그런 다음 마을로 돌아와서 풍물을 치며 술을 마시고 밤새도록 논다. 주문진읍 향호 2리 괴남동 사람들은 정월 대보름날 망월이산에 올라가 달맞이제를 지낸다. 정월 대보름 낮에 풍물을 앞세워 집집이 다니며 지신밟기를 해준 다음 달이 뜰 무렵 사람들은 마을 앞에 있는 산에 홰를 들고 풍물을 앞세우고 올라간다. 그곳 제단에 제물을 차려 놓고 달을 향해 제사를 올린다. 신위는 없고 다만 동쪽을 향한다. 제물은 삼실과, 주과포, 어물을 쓰고 메와 육을 쓰지 않느다. 헌관은 3헌관인데 초헌관은 차지, 아헌관, 종헌관은 연장자 순으로 맡는다. 제물 비용은 차지가 자기 돈으로 준비하며, 차지는 매년 돌아가면서 맡는다. 제사를 지내고 음복을 하고, 횃불을 들고 풍물패를 앞세우고 마을로 내려온다. 마을로 내려와 웃다리에 와서 풍물을 앞세우고 다리밟기를 하고, 아랫다리에 가서 횃불을 끄고 달을 향해 두 번씩 적을 한다. 이렇게 다리밟기를 하고 마을 사람들은 차지집으로 와서 술을 마시며 즐겁게 논다. 달맞이제에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은 집 앞에 삼꼬리, 머리카락을 태우는 ‘귀신달기불’을 해놓고 잡귀의 침입을 예방했다. 이렇게 달맞이제를 하고 나면 동네에 질병이 돌지않고 풍년이 든다고 한다. 어떤 마을은 내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이웃마을과 다리를 먼저 밟기 위해 싸움을 했다. 다른 동네보다 다리를 먼저 밟고, 싸움에 이기면 마을에 풍년이 들고 질병이 창궐하지 않는다고 한다. 강릉시내를 관류하는 남대천을 사이에 둔 오봉리와 구산리, 금산리와 회산, 또 섬석천을 사이에 둔 납돌과 어리미, 월호평과 청량이의 다리밟기 싸움이 유명했다. 다리밟기 싸움을 경쟁심과 적극성이 가미되기 때문에 가끔 흥분을 야기시킨다. 싸움이 치열하고 과열되어 이웃마을과 후유증도 생긴다. 그래서 이웃과 혼담이 파기되기도 한다. 이것은 1981년 제2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강릉 대보름 농악’이란 이름으로 박기하 등이 출전하여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강릉지역에서 이 다리밟기(횃불놀이)는 1년에 두 번 정월 대보름과 2월 좀상날(음력 2월 6일)에 연행했다. 2월 좀상날에 행하는 다리밟기·횃불놀이는 주로 사천 하평리에서 전승되어 내려오는 풍속으로 달과 별과의 거리를 살펴보고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것이다. ㄷ. 2월 답교농악-좀상날의 다리밟기·횃불놀이 강릉 지역에서 2월 좀상 행사가 가장 활발하게 전승되는 곳은 사천답교 풍물패이다. 사천은 강릉시로 편입되기 전에는 명주군 사천면 진리였고, 강릉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8km 떨어져 있는 해안 농촌마을이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허균의 외가인 애일당(愛日堂) 김참판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마을에 일년 내내 우환이 생기지 않고 풍년들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음력 2월 초엿새 좀상날이 되면 다리밟기와 횃불놀이를 즐겼다. 저녁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다리에 횃불을 들고 모여 그 해 농사가 잘되기를 빌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다리밟기 풍물을 즐겼다. 사천 하평에서 행하는 다리밟기·횃불놀이는 여타 강릉지방과 다를 바가 없다. 가락과 판굿의 형태가 강릉농악과 거의 유사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좀상’은 음력 2월 초순에 좀생이별을 보아 1년 동안 농사일과 신수를 점치는 풍속이다. 좀생이는 묘성(昴星)으로 여러 개의 작은 별이 모여서 성군(星群)을 이루게 되는 바, 이것을 보아 점을 친다. 예전부터 별이 달을 따라가는 것을 살펴보고 점을 쳤다. 좀생이 별이 배가 부르면 멀리 따라가고 배가 고프면 가까이 따라가는데, 거리가 멀면 그 해 풍년이 드는 거시이고 거리가 가까우면 그 해 흉년이 든다는 것이다. 때로는 좀상이 앞서가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도 풍년이 든다. 예전에는 소를 키우는 도구 중에서 ‘장바’라는 것이 있었다. ‘장바’라는 것은 긴 밧줄인데 길이가 10m 정도였다. 이 ‘장바’ 한 지장의 거리를 두고 별이 따라가면 가장 좋은 징조로 여겼다고 한다. 좀생이 보기에 있어 별이 인간의 운명은 물론, 농사일의 풍작·흉작 등을 예조하는 것으로까지 확대 해석되어 왔다. <열양세시기>에는 2월 6일조에 기록하고 “징험해 보니 제법 맞는다”고 부기하고 있다. 지금도 민간에서 음력 2월 6일 저녁에 좀생이보기를 하는 관습은 전국적으로 많이 전승되고 있으며, 그 역사가 오래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자연환경상 강릉은 여간 가물어도 물 걱정이 없어 전국적으로 풍흉의 차이가 제일 없는 곳이다. 비가 많이 와도 산이 경사져서 빗물이 빨리 내려가고 산 전체가 수목으로 둘러쳐져 있어서 빗물이 그 속으로 스며들기 때문에 물에 대한 걱정이 거의 없다. 그러니 2월 초엿새 좀상날은 강릉지방의 농사의 풍흉을 예측할 수 있는 제일 중요한 날이 되는 것이다. 예전에 좀상날에는 마을에 ‘좀상주’라고 부르는 막걸리는 준비해서 풍물패에게 주었다. 이 좀상주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쌀을 거두어서 그것으로 동네 전체가 만든 술이다. 옛날에는 ‘초군방’ 또는 ‘도방’이라고 하여 풍물패가 모여서 노는 방이 따로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마을회관과도 같은 곳이다. 좀상주는 부잣집에서 주관해서 만들고, 이 집에서 좀상주를 먹었다. 또한 이날은 겨울 동안 영좌가 마을 머슴들에게 할당한 농사 준비를 위한 과제를 검사하는 날이기도 했다. 겨울 동안 새해 농사에 사용될 새끼, 가마니, 멍석, 짚신 등을 만들어 이날 영좌 앞에서 검사를 받는 것이다. 좀상날 다리밟기·횃불놀이를 하게 되면 마을의 꼬마들이 지게를 메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장작을 모아서 횃불을 만든다. 저녁을 일찍 먹고 풍물을 울리면 온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횃불을 밝힌다. 사천 앞에 놓인 다리에서 행하는 답교놀이·횃불놀이는 여러 마을에서 참가한다. 아래 윗마을에서 횃불을 밝히고 준비를 하고 있다가 “떴다”라는 신호가 떨어지면 마을에서 힘 좋은 사람이 다리에 먼저 도착하기 위해서 달려간다. 그래서 먼저 도착한 사람이 다른 마을 사람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장작으로 때리고 몸으로 밀치면서 그 다리를 점유하려 한다. 이렇게 치열하게 몸싸움을 하면서 다리를 차지하려는 것은 풍년을 기원하는 세시행사의 하나로 종교적인 측면과 놀이적 측면이 결합된 것이다. ㄹ. 걸립굿 지역사회의 공공기금을 거두기 위해 걸립패를 구성해서 걸립굿을 치는데, 그들은 ‘글립굿’이라고도 발음한다. 전에는 절[사찰(寺刹)]걸립도 하고 서낭걸립, 다리걸립, 서당걸립도 했지만, 절걸립은 거의 없어지고 다리걸립이 많이 남았다. 걸립을 하게 되면 먼저 영좌(領座), 대방(大房), 청수 등 임원을 정하고 이들이 상쇠에게 굿패의 조직을 일임한다. 걸립을 하기 전에 서왕을 모신다고 한다. 서낭기[농기(農旗)]를 앞세워 풍물을 치며, 서낭당에 가서 서낭기를 세우고 주과포(酒果鮑)로 제상을 차려 잔을 올리고 풍물을 치며 절을 두 번 하고 서낭굿을 친다. 서낭굿은 마당굿과 같이 멍석말이, 황덕굿, 진놀이, 농사풀이, 자매놀이 등을 하고, 다음날부터 마을마다 돌며 걸립을 시작한다. 다른 마을에 걸립패가 들어갈 때는 특별한 의식이나 허가 과정이 없다. 어느 곳에 다리걸립을 한다고 하면 그 다리를 이용하는 마을에 먼저 통보가 되거나 미리 알고 있다. 걸립패가 마을에 들어가면 풍물패가 있는 동네는 굿을 치면서 동구로 나와 서로 인사를 나누는 인사굿을 한다. 인사굿을 마치면 걸립패들은 그 마을 서낭당에 들러 서낭굿을 친다. 동네에 들어가 집집마다 들러 지신밟기와 같은 고사굿을 친다. ㅁ. 화전놀이 풍물 여름 농사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모심기 전에 봄농사를 마무리 지어놓고 화전놀이를 갔다. 2월 좀상 이후 시작된 봄농사는 4월 하순경 거의 마무리된다. 그러면 동네에서 하루를 정해 봄농사의 품삯을 계산하고 계산이 끝나면 경포대나 경치 놓은 곳으로 풍물을 갖초고 화전놀이를 간다. ㅂ. 못질·김질먹기 모심기와 김매기에 두레를 짜는 것을 강릉지방에서는 ‘질을 짠다’고 하며, 모심기가 끝나면 못질을 먹고, 김매기가 끝나면 김질을 먹는다‘하여 날을 받아서 음식을 장만하고 온갖 풍물을 잡히면서 하루 종일 논다. 못질·김질 등 일할 때의 풍물 구성은 농기, 날라리, 꽹쇠2, 징1, 장고1, 큰북1로 편성되며, 소고, 법고, 무동은 딸리지 않는다. 농사철의 풍물은 들에 나가고 들 때, 모를 심을 때, 김을 맬 때 풍물을 친다. 강릉지방에는 여러 가지 농사일에 따른 노동요가 많이 전승되고 있다. 예를 들면, 강릉농악 판굿의 농사풀이에는 김매기 소리와 모내기 소리가 있다. 풍물과 모내기 소리, 김매기 소리를 하면서 못질과 김질일을 끝내면 ‘질먹기’를 했다. ‘못질’은 2-3일 정도를 먹고, ‘김질’은 5-6일 정도를 먹고 논다. 힘든 농사일을 끝내고 좋은 음식을 차린 큰상을 받아서 먹고 즐겁게 노는 것이다. 이때는 장가갈 때 큰상을 받는 것처럼 진수성찬을 받았다. 이때 차린 음식을 ‘질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전에는 머슴들이 질상을 차려 주는 것을 살펴보고서 그 집에 머슴일을 하러 간다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질 먹는데 필요한 음식은 마을 풍물패의 회장이 농사일을 한 규모와 논 주인의 형편을 고려해서 적당한 양의 술과 음식을 가져오도록 한다. 각자 집에서 질꾼과 머슴들을 위해 정성껏 음식을 차려온다. 술 같은 경우, 50마지기를 지을 때 마지기당 1되의 술을 내놓기로 하면 50되의 술을 내 놓아야 하는 것이다. 질먹기는 마을에서 장소를 정해 놓고 한 군데에 모여서 먹고 노는데, 회장이 영좌부터 시작해서 연령순으로 기준을 잡고 각각의 상을 차려 올리는 것이다. 회장이 “영좌님 상 드려라”, 또는 “공손 드려라”라고 하면 각 집에서 질상을 순서대로 올린다. 각자가 상을 받아 준비가 다된 상태에서 회장의 신호에 따라서 음식을 먹게 된다. 이때 회장은 모내기와 김매기 때 동원된 사람들에게 품계산이 확실하게 다되었는지도 확인한다. 그리고 회장은 어느 집이 ‘질상’을 잘 차렸는지 확인하고 다음 해 농사일에 참고하기도 했다. 질상에 차려진 음식은 그날 다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라 회장과 총각대방이 돌아다니면서 며칠 동안 놀면서 계속 먹을 수 있는 일정량의 음식을 거둔다. 뱃놀이는 못질과 김질 등 여름농사가 마무리 된 후 7월 이후에 배 위에서 마지막으로 풍물을 잡히고 노는 것이다. 못질과 김질을 마치고 질상을 받아 노는 것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뱃놀이를 하게 되면 질짠 것이 해체된다고 볼 수 있다. (4) 강릉농악의 마당굿 마당굿은 질먹을 때, 걸립굿 중에서 대가댁 마당놀이 때, 봄철 화전놀이 때에 갖가지 예능과 재주를 보여주는 것이다. 마당굿 진행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외가락을 반복하면서 제자리춤 없이 앞으로 저진하는 것이다. 그 행진법은 정방형이라든지 체조대형, 그리고 ㄷ자형 멍석말이와 오방진 같은 것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진풀이를 보면 다른 지역과는 달리 마치 기마민족들이 수렵을 하는 것처럼, 농군이 전투에 임하는 것처럼, 혹은 소나 말이 논밭을 갈고 있는 것처럼 거칠고 전투적인 면이 보인다. 이것은 영동이 지역적으로 산악지대가 많기 때문에 지신밟기를 할 때, 마을을 돌기 위해선 산을 넘어야할 경우가 많았으므로 바쁘게 많이 걸어야 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 추정된다. 형식에 있어 특징적인 것은 지신밟기를 할 때 행하는 고사소리가 타지방에 비해 길고 다양하다는 점, 단체적인 놀이를 위주로 한 무동들의 춤과 동고리, 농사일을 모의(模擬)하는 연극적 놀이인 농식풀이다.
이리농악
이리농악은 전라북도 이리지방에서 전승되는 풍물이며 호남 우도풍물에 해당한다. 호남 우도풍물은 옛 전라 우도 지역인 전라도 서부의 평야지역에 널리 전승되고 있으며,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 악대의 짜임, 옷차림, 연기 따위가 조금씩 다른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인 가락이나 내용은 서로 비슷하다. 1) 이리농악의 형성과정 호남 우도풍물을 잘 이어받은 전라도 서부의 평야지역은 김제 만경의 애밋들이라는 기름지고 드넓은 평야가 있어 옛날부터 농산물이 풍부하고 식량이 넉넉하여, 매굿을 비롯하여 모노래, 논매기 노래, 육자배기 같은 놀이와 민요, 판소리에 의한 농민 공동체문화가 다른 지역에 비해 뛰어나게 발달하였다. 특히, 해방 뒤 김제, 정읍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정읍농악단은 최고의 기술과 예능을 가졌었다. 기량을 자랑하던 잽이들이 작고하거나 고향을 떠나 정읍풍물이 쇠퇴하자, 김제의 백구농악단이 성행하였으나, 여성농악단이 나온 뒤 백구농악단도 없어지게 되었다. 옛날부터 마을굿이 잘되던 이리의 새실 마을에서는 김제, 정읍 등지에서 전문적으로 우도굿을 배운 잽이들을 받아들이면서 풍물단이 발전하게 되었다. 1950년대에 상쇠 강기팔(姜基八), 설장구 이동원, 수징 백원기 등이 이리농악단을 전문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1960년대 후반에 상쇠 이수남, 설장구 김형순, 수징 백원기, 설벅구 김방현 등이 이리농악단을 이끌다가, 1980년대에 설장구 김형순을 단장으로 한 이리농악단이 전국 여러 곳에서 열린 풍물과 민속예술경연대회 등에서 장원을 하는 등 꾸준히 활동하여 우리나라에서 으뜸가는 풍물단체의 하나로 발전시켜 1985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11-다호로 지정을 받게 되었다. 2) 이리농악의 악기 편성 꽹과리(3-4)·징(2-3)·장구(3-4)·북(1-2)·소고(6-8)·호적(1-2)·나발(1-2) 등의 악기가 쓰이며, 그 편성은 먼저 영기가 있고 대포수·호적수·쇠잡이(상쇠·부쇠·종쇠·끝쇠)·징(수징·부징)·장구(수장구·부장구·종장구·끝장구)·북(수북·부북)·법고(수법고·종법고·부법고·끝법고)·창부·조리중·무동·양반 등으로 되어 있다. 3) 이리농악의 음악적 특색 쇠가락에는 일채·이채·삼채·외마치질굿·풍류굿·오채질굿·좌질굿·양산도가락·호호굿·오방진가락 등이 있다. 이리 우도굿의 특징은 상쇠의 부포놀이가 매우 다양하고, 장구의 가락과 춤이 매우 발달되어 있으며, 소고춤의 기법이나 진풀이가 다양하다. 비교적 느린 가락을 많이 쓰며, 가락 하나 하나를 매우 치밀하게 변주하여 소리가 다채롭다. 풍류굿과 덩덕궁이(삼채굿)에서는 악절마다 맺고 푸는 기법을 쓴다. 이리농악은 유장하며 매우 구성진 느낌을 주는데, 특히 오채질굿은 호남 우도풍물에서만 보이는 것이다. 호남 좌도풍물에서 보이는 영산과 짝두름은 적다. 4) 굿의 짜임 (1) 문굿 달어치기-영기잽이 두 사람이 영기를 가위형으로 엮은 채 서 있고, 잽이들이 마을에 들어가기 위해 두 줄로 서 있다. 상쇠는 부포놀이를 하는 등 흥을 돋구다가 달어치기를 시작한다. 그 마을에서 갈퀴를 내보이면 마을로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이고, 대비(큰 빗자루)를 내보이면, 그 마을로 들어올 수 없다는 신호이다. 상쇠가 부쇠를 이끌어 영기를 꾀어 앞으로 나가 한 바퀴 돌고, 오른쪽 영기 뒤에 세운다. 이어서 끝쇠를 이끌어 영기를 꾀어 앞으로 나가 한 바퀴 돌고, 왼쪽 영기 뒤에 세운다. 같은 방법으로 징, 장구, 북, 소고 순으로 잽이 모두를 좌우 영기 뒤에 세우고, 다음은 상쇠가 좌우에 있는 잽이들 사이를 다니면서 영기, 쇠, 징, 장구, 북, 소고 순으로 이끌어 둥글게 원을 돌며 춤을 추는 원진무로 들어간다. 멍석말이(덕석몰이, 똘똘말이진, 달팽이진) - 상쇠는 시계 도는 쪽으로 둥글게 돌며, 원을 점점 좁혀 들어갔다가 도는 쪽을 바꾸어 원을 넓히면서 원진무를 되풀이한다. (2) 샘굿 마을의 샘에 가서 두마치질굿을 치면서 샘을 한 바퀴 돌고, 일채를 치며 잔지르고 "동해바다 용왕신, 서해바다 용왕신, 사해바다 용왕신 명강수 철 철 청가수 철 철 아따 그 물맛 좋다 아들 낳고 딸 낳고 미역국에 밥말아 먹세"라고 축문(비나리, 고사, 덕담)을 읊고, 샘에 두 번 절을 하고, 된삼채를 치면서 마을로 간다. (3) 들당산굿 걸립패들이 집집을 찾아가 마당밟기를 할 때 하는 것이다. 평상시의 치배 짜임과는 반대로 잡색, 소고, 북, 장구, 징, 쇠, 영기의 순으로 대문 안으로 들어간다. 요즈음은 문의 구조가 바뀌어 평상시와 같은 배열 순서로 들어가기도 한다. 질굿-벙어리 일채를 치면서 빠르게 당산으로 뛰어가 당산을 한 바퀴 돈다. 고사굿-당산 앞에 한 줄로 서서 된삼채를 치고 절을 한다. 안바탕-상쇠가 잽이들을 한 줄로 원을 만들고, 이어 쇠와 장구가 원의 가운데로 들어가, 다시 원을 만들어 두 겹의 원이 되게 하여 가락을 몰아 안바탕을 한다. 미지기굿-잽이들은 한 줄로 원을 만들어 서 있고, 쇠줄과 장구줄이 원의 가운데서 두 줄로 서서 마주 보고 밀고 밀리는 것을 되풀이하는 미지기놀이를 한다. 개인놀이-소고놀이, 설장구놀이, 쇠놀이, 열두발 상모놀이 등이 차례로 판 안에 나와서, 신명나게 흥을 돋구며 한바탕 논다. 인사굿-벙어리 삼채를 치면서 당산 주위를 돌며 빠져나간다. (4) 마당밟기 마당굿-일채, 이채를 치며 마당 주변을 돌면서 설장구춤, 오방진풀이 등을 한 다음, 영기를 마당 양옆에 꽂아 놓는다. 샘굿-마을의 샘굿과 마찬가지로 집 안의 샘에서 샘굿을 한다. 조왕굿-잽이들이 부엌에 들어가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제물(쌀이나 돈을 올려놓음)을 차려 놓고, 된삼채를 치면서, "방구석도 네 구석 부엌구석도 네 구석 구석 구석 네 구석"이라고 축문을 읊고, 절을 하고 늦은 삼채를 치면서 장독대로 간다. 철용굿(장독굿)-잽이들이 장독대에 가서 된삼채를 치면서, "쥐들어간다. 쥐들어간다. 장광밑에 쥐들어간다."라고 축문을 읊고, 절을 하고 노적(곡식을 넣어두는 곳)으로 간다. 노적굿-잽이들이 노적가리(쌓아둔 곡식 더미)에 가서 된삼채를 치면서 한 바퀴 돌고, "앞노적 뒷노적 좌우노적 웃노적 어서치고 술먹세 두부국 짐(김)나가네."라고 축문을 읊고, 절을 하고 집 안마당으로 간다. 고사굿(성주굿)-마루에 소반(밥상)을 차려 놓고, 소반 위에 헌 징을 뒤집어 두고, 징 속에 쌀을 담아 촛불을 켜고 성주풀이, 액맥이타령, 떡타령, 나락타령 따위의 축원 노래를 부른다.
평택농악
평택농악은 경기도 평택지방에서 전승되는 풍물이다. 평택은 소샛들이라는 넓은 들을 끼고 있어 예로부터 농산물이 풍요하여 평택지방의 풍물을 이루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더욱이 평택 근처의 청룡사(靑龍寺)는 일찍부터 사당패들의 근거지가 되어 조선 말기에는 그들의 풍물이 크게 발달하였다. 평택에서는 예로부터 지신밟기나 두레굿 등이 유행하였으며 상쇠 최은창(崔殷昌)이 사망한 후 김용래를 중심으로 풍물이 행해지고 있다. 1) 평택농악의 형성과정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웃다리 지역에도 마을마다 풍물이 성행하였고 여기 저기 전문 연희패도 생겨났다. 특히 웃다리 지역에는 이러한 전문 연희패가 성행했다. 이들 전문 연희패들의 영향으로 경기·충청 지역에서는 가락과 판제가 대체적으로 통일되었다. 가락은 그 종류가 비교적 간단한 것에 비해 변주가락이 다양하고, 편제는 역동적이고 화려하게 발달했다. 또한 전문 연희패의 성행으로 마을 단위 풍물이 일찍 소멸되었다. 다양하게 전승되던 유랑 연희패 가운데 해방 이후까지 남아 있었던 것은 걸립패였다. 일제 말기 유기공출(鍮器供出) 등으로 인해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풍물패들이 행방 이후 다시 활동을 시작하면서 여기 저기 걸립패들이 생겨났다. 당시 대전 이북에서 서울까지 촌걸립·절걸립·난걸립 등의 크고 작은 연희패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고, 좁은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무명의 단체도 있었다. 그 중에는 인근에서 한다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널리 이름이 난 풍물 단체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상쇠나 장고·법고 등 종목별로 명인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함께 모이기도 하고 따로 흩어져 독립된 단체를 꾸리기도 했다. 그 구성원들 또한 출신 지역에 관계없이 이리저리 이합집산하는 경우가 흔했다. 가히 걸립패들의 전성기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근대화·산업화·도시화로 이들 걸립패들은 점차 시들해졌다. 풍물 단체의 구성원들이 많아 상대적으로 운영이 어려웠던 촌걸립·난걸립 등이 먼저 사라지고, 절걸립패는 그 구성원이 단출한데다가 불교의 후광으로 더 오래까지 남아 있다가 1970년대 이후 소멸되었다. 한편, 해방 이후 관 또는 민의 주도로 각종 풍물경연대회가 이곳 저곳에서 열렸다. 풍물경연대회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물론 기예가 뛰어난 사람들이 필요했다. 자연히 마을 단위의 비전문 풍물패보다는 현재 전문 연희패에 몸담고 있거나 한때 몸담았던 명인들에게 출연 요청을 하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 요청을 받은 명인들은 자신들의 연줄을 이용해 이곳 저곳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아 새로 단체를 구성한 다음 이들을 이끌고 풍물경연대회에 나갔다. 따라서 이러한 단체들은 한 마을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마을풍물이라기 보다는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 명인을 중심으로 하는 개인적인 단체[행중]의 성격이 강하다고 하겠다. 또 이런 단체들은 대개 한시적인 것이어서 대회가 끝나면 해체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평택농악도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현재 평택농악보존회가 자리잡고 있는 곳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평궁리이다. 이 마을 역시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두레 풍물패가 존재했다. 정초에는 지신밟기를 하고 농사일이 시작되면 두레풍물을 치면서 마을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함께 했다. 그러던 중 최은창이라는 걸출한 풍물의 명인이 출현한다. 대대로 농사를 짓던 집안에서 태어난 최은창은 일찍부터 풍물에 재주를 보여 16세에 벌써 마을 두레풍물의 상쇠를 쳤다. 성인이 되면서부터 마을 단위를 벗어나 촌걸립을 하는 전문 연희패에 가담하게 되고 절걸립패에도 몸을 담았다가 나중에는 독립하여 직접 절걸립 행중을 꾸려 나갔다. 그러면서 장고잽이로 비나리꾼으로 쇠꾼으로 이름을 날린다. 그러나 생업을 버린 것은 아니어서, 1년 중 농사철 6개월은 평궁리에 들어와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가을걷이가 끝난 뒤 6개월은 걸립패로 나서는 생활을 계속해 왔다. 또, 한편으로는 서울에서 남운형을 중심으로 옛 명인들이 다시 모여 만든 <민속극회 남사당>에서 활동을 하기도 하고, 풍물경연대회 출연 요청이 오면 참석하기도 했다. 최은창의 기억으로 “평택농악”이라는 명칭을 처음 쓴 것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해 열리는 풍물경연대회에서였다. 이때 그는 평택군의 요청으로 풍물패를 구성하여 “평택농악”이라는 이름으로 대회에 나갔다고 한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절걸립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자 이때부터는 고향 평궁리에서 농사일을 하는 한편 간간이 <민속극회 남사당>에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80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출연 요청을 받자 다시 평택농악을 구성한다. 이때의 구성원은 천안·안성 등지에서 불러온 사람들과 평택군내에서 이름이 나있던 사람 그리고 평궁리 사람들이었다. 경기도 대표로 대회에 나간 평택농악은 대통령상을 받게 되고 이를 계기로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받는다. 평택농악이 명실공히 전통적인 웃다리풍물의 가락과 판제를 이은 것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 뒤 평택농악은 웃다리풍물의 전통을 지키고 이를 다시 전승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2) 평택농악의 편성 평택농악에 사용하는 악기로는 꽹과리3, 징2, 북, 버꾸4, 호적, 나팔이 있다. 편성은 영기수·농기수·나팔수·호적수·상쇠·부쇠·종쇠·징수1·징수2·설장구·부장구·삼장구·북·상버꾸·부버꾸·종버꾸·꼬리버꾸·상무동·종무동·삼무동·칠무동·중애(사미)·양반으로 되어 있다. 평택농악은 악기에 있어서 징과 북이 타지역에 비하여 적으며 소고와 법고의 구별이 없다. 3) 평택농악의 종류 평택농악에는 평택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가지는 마을 두레패 성격과 경기·충청 지역을 넘나드는 전문 연희패들의 두 형태가 어우러져 나타난다. 마을 두레패에 의한 것으로는 정초에 주로 행해지던 지신밟기와 농사철의 두레굿이 있으며, 전문 연희패에 의한 것으로는 난장 때 장터에서 보여 주던 난장굿과 공공 건축물이나 절의 건립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걸립 등이 있었다. 걸립은 다시 촌걸립과 절걸립으로 나누어진다. 지신밟기는 형태상 촌걸립과 흡사하다. 둘 다 집집마다 돌면서 가신에게 치성을 드리고 풍물을 치며 고사를 해주고 쌀과 돈은 거두어들인다. 그러나 지신밟기가 재물을 모으는 것보다는 지신을 눌리고 잡신을 물리쳐 액을 막아 주고 복을 빌어주는 축원풍물의 성격이 강한 반면, 촌걸립은 축원풍물의 형태를 빌어 재물을 모으는데 목적이 있는 걸립 풍물이다. 지신밟기에서 모아진 재물은 마을의 공동 기금으로 쓰이지만, 촌걸립의 그것은 약정액을 제외한 나머지가 걸립패 개인의 수입이 된다. 지신밟기에는 판굿이 없거나 또는 있더라도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기 위한 것인데 비하여, 촌걸립의 경우 하루 집돌이가 끝나면 반드시 저녁에 밤굿[판굿]을 한다. 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기예를 충분히 보여주어 앞으로 걸립이 더 잘 되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촌걸립과 절걸립은 재물을 모으는데 목적이 있는 걸립 풍물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촌걸립은 주로 공공 건축물의 건립비용 마련을 목적으로 하는데, 절걸립은 절의 신축, 중수, 개축 등 절에서 소요되는 비용 마련을 목적으로 한다. 집돌이를 할 때에도 촌걸립은 수문장굿으로 시작하여 고사까지 여러 가지 굿을 치지만, 절걸립은 고사를 위주로 한다. 따라서 촌걸립에서는 기예가 뛰어난 많은 수의 단원을 필요로 하고 화려한 판굿을 보여 주는 것이 필수적인데, 절걸립에서는 고사염불을 잘하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행중 인원도 불과 몇 명 되지 않으며 판굿은 하지 않는다. 평택에서는 지신밟기나 두레굿 같은 마을 단위의 풍물이 전승되어 오다가 최은창이라는 뛰어난 명인이 등장하면서 인근 지역의 굿패에 출입하고, 직접 인근 지역의 고수들을 끌어 모아 행중을 운영하기도 하면서 전문 연희패로서의 성격도 가지게 되었다. 마을 단위의 지신밟기와 두레굿은 두레가 사라지면서 전승이 약화되다가 먼저 소멸되었다. 그러나 예능이 뛰어난 사람들끼리 모인 전문 연희패 풍물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촌걸립 등의 대규모 연희패는 50-60년대에 사라지고 소규모였던 절걸립만이 70년대까지 존속되었다. 다른 지역보다 전문 연희패의 활동이 왕성했던 웃다리 지역에서는 마을의 두레패보다 기량이 월등했던 전문 연희패의 영향으로 인해 마을 단위의 풍물이 보다 더 일찍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 4) 평택농악의 음악적 특징 평택농악의 특징은 쇠가락으로 길군악칠채가 다른 지역과 구분되며, 가락의 가림새가 분명하다. 길군악칠채는 경기풍물에만 보이는 현상이다. 그밖에, 굿거리·덩덕궁이·잦은가락 등 느리고 빠른 가락을 고르게 쓰며, 잡다한 여러 가락이 없으므로 쇠가락의 가림새가 분명하고 암채·수채의 변화를 구사한 가락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임실필봉농악
임실필봉농악은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에 전승되고 있는 풍물이다. 호남 좌도풍물의 하나로, 곡성풍물, 남원금지풍물과 함께 남원상쇠 전판이(田板伊) 계보에 속한다. 1) 임실필봉농악의 형성과정 필봉리는 전북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의 한 산간농촌마을로, 성인남자 중 풍물을 할 수 있는 이는 총동원되어 풍물패를 구성하고 있다. 필봉리는 본디 당산굿, 마당밟이 정도나 치는 단순한 풍물이 아주 옛날부터 전승되어 왔으나 오늘날과 같이 판굿과 외지 걸립굿과 같은 높은 수준의 풍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60년 전에 유명한 상쇠 박학삼을 이 마을로 초청하면서부터라 한다. 박학삼은 강진면 출생으로 유명한 상쇠였으며 그가 타계한 뒤에 송주호가 상쇠를 이었다. 송주호가 연로한 뒤에는 필봉리 출신인 양순용이 상쇠가 되어 마을 풍물을 이끌어왔다. 이 마을에 풍물을 심어 주었던 박학삼의 스승은 임실 청웅리 이화춘(李化春)이고 이화춘의 스승은 남원 전판이(田板伊)라고 한다. 호남 좌도풍물을 치는 다른 고장과 구별되는 필봉 특유의 것을 말하자면, 풍물수들 모두가 상모를 쓰지 않고 쇠잡이만 쓰며 나머지는 고깔을 쓴다는 점, 판굿 속에 수박치기가 있다는 점, 군영놀이·도둑잽이·탈머리의 진행방식에 독특함이 있다는 점, 그리고 영산가락이 가진영산·재능기영산·군영놀이영산·다드래기영산·머지기영산 등으로 매우 세분화되어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 임실필봉농악의 편성 및 복색 (1) 편성 필봉풍물패는 마당밟이·걸립굿·판굿과 같은 풍물을 칠 때에는 영기 2, 나팔수, 대포수, 창부, 조리중, 양반, 광대, 무동, 농구, 화동, 각시, 꽹과리수 3, 징수 2, 장고수 3, 대고수 2, 소고수 7∼15로 총 40여명이 되는 대편성이다. 이밖에 용기가 있으나 큰 기(旗)이기 때문에 동청에 세워 놓는다. (2) 복색 영기수는 더그래에 전립(戰笠) 또는 패랭이를 쓰며 나팔수는 영기수와 같다. 대포수는 분홍색으로 철릭처럼 만든 대포수 옷을 입고 대포수관을 쓴다. 대포수 옷은 베에 꼭또시 뿌리로 물들여 만든다. 대포수관은 토끼껍질로 만들며 여기에 가는 대나무를 두게 좌우 양편에 세우고 꼭대기에 가는 나무를 가로 연결하고 꽃송이를 드문드문 달고 양끝에 고리를 세 개씩 사슬로 꿰어 단다. 대포수는 머리에 무명으로 만든 머리 수건을 동이고 그 위에 대포수관을 쓴다. 등에는 대장군이란 글을 크게 쓰고 허리에는 대포수 망태를 매고 꿩꼬리나 토끼껍질을 매달고 손에는 나무로 깍아 만든 조총을 든다. 창부는 푸른 창옷과 같이 만든 창부옷을 입고 초립을 쓴다. 창부옷은 쪽으로 물들여 만들고 소매에는 노랑 끝동을 단다. 초립이 없으면 패랭이를 대신 쓴다. 초립에 꿩장목(꿩꼬리 깃)을 두 개 양편에 꽂고 어사화를 한 쌍 꽂는다. 이것을 어사리라 부른다. 조리중은 장삼에 송낙을 쓰고 허리에는 바랑을 진다. 장삼이 없으면 색두루마기로 대신한다. 송락은 조리라 부르며 짚으로 주저리 같이 엮어 만들며 꼭대기에 꽃을 길게 달기도 한다. 바랑에는 고깔꽃 쇠채 방망이 따위 풍물의 잡물을 여분으로 넣어두고 손에는 나탈 따위를 들기도 한다. 양반은 도포에 정자관을 쓴다. 허리에는 띠를 띠고 손에는 담뱃대와 부채를 든다. 턱에 긴 수염을 단다. 농구는 상쇠와 같이 쇠옷에 부포 상모를 쓰고 오른 손에 쇠채를 들고 왼손은 맨손이다. 각시는 붉은 치마에 노랑저고리, 녹색저고리에 붉은 치마, 남색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는다.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손에는 수건을 든다. 화동은 초립에 꿩고리를 꽂고 붉은 창옷을 입는다. 상쇠는 쇠옷에 부포상모를 쓴다. 쇠옷은 풍물복이란 뜻이다. 붉은 반소매 동고리에 소매끝은 5색 깐지동을 달았다. 등에 3색 드림을 드린다. 부포상모는 털벙거지 꼭대기에 놋쇠나 나무를 깎아 징자를 달고 징자꼭지에 적자(구슬) 여러 개를 꿰어 꼭두마리와 같은 모양으로 달고 그 끝에 부드러운 노끈을 한 뼘쯤 달고 노끈 끝에 백지로 만든 부포를 단다. 벙거지 밑에는 수건을 단다. 중쇠는 상쇠와 같으나 드림 대신 색띠를 띤다. 끝쇠(또는 종쇠)는 부쇠와 같다. 수징은 고깔에 쇠옷을 입는다. 고깔은 종이로 접어 만들며 종이꽃을 앞송이, 옆송이 둘, 뒷송이, 봉댕이송이 이렇게 다섯을 단다. 옛날에는 접시꽃을 만들어 달았으나 요새는 나팔꽃이나 작약꽃을 달기도 한다. 부징은 수징과 같다. 설장구는 고깔에 쇠옷을 입고 양어깨 허리에 색띠를 띤다. 부장구·끝장구·수북·부북도 설장구와 같다. 수벅구는 원래는 채상을 쓰는 것이지만 필봉마을에서는 고깔에 쇠옷을 입는다. 부벅구와 삼벅구·사벅구·끝벅구도 수벅구와 같다. 무동은 고깔을 쓰고 남쾌자를 입고 색띠를 띤다. 3) 임실필봉농악의 종류 현재 전승되고 있는 풍물의 종류로는 섣달 그믐날 벽사진경을 위한 ‘매굿’, 정월 초사흘이 지나 각 가구의 축원안택을 위하여 집집이 돌며 치는 ‘마당밟이’, 정월 아흐렛날 밤에 당목(堂木) 앞에서 올리는 ‘당산제’(堂山祭), 대보름날 노디(징검다리)에 금줄을 감아놓고 치는 ‘노디고사굿’, 역시 대보름날의 ‘찰밥걷기풍물’, 대보름이 지난 뒤 마을의 공공기금 마련을 목적으로 다른 마을에 가서 치는 ‘걸궁굿(걸립굿)’, 여름철 만두레(세벌김매기) 때의 ‘두레굿’, 그리고 ‘마당밟이’·‘걸궁굿’ 등 규모가 큰 풍물을 친 후 마지막날 밤에 판을 벌이고 기량을 보여주는 ‘판굿’ 등이 있다. 4) 임실필봉농악의 음악적 특징 필봉농악은 개개인의 기교보다도 단체의 협화와 단결을 중시한다. 쇠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며 가락이 힘차고 씩씩하다. 또 채굿과 짝드름·영산가락이 발달되어 있다. 필봉농악에 쓰이는 쇠가락에는 굿거리·삼채굿·휘모리와 같은 가락이 가장 많이 쓰이고 판굿에서는 채굿·호호굿 등 특이한 가락이 있다. 굿거리는 변주하여 질굿·풍류굿으로 쓰이며 삼채굿은 변주하여 자진모리·짝드름·반풍류 등으로 쓰인다. 호남우도풍물에 비하여 자진모리가 많이 쓰이고 특히 짝드름 싸잽이로 변주하여 많이 쓰고 있으며 우도풍물에 쓰이는 동살풀이·오채질굿이 쓰이지 않는다. 채굿은 좌도풍물 특유의 것이다. 소리굿의 반주음악에도 특이한 가락이 나온다. 삼채굿은 자진모리로 치며 흔히 짝드름으로 몰고 끝에는 싸잽이로 넘어가서 휘모리로 넘겨 마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우도풍물보다 빠른 가락을 많이 쓴다. 따라서 우도풍물의 맺고 푸는 기교가 덜 한 것을 알 수 있다. 필봉농악의 쇠가락은 굿거리·삼채굿 등 3분박 4박자가 많고 2분박 4박자는 휘모리로 쓰일 뿐 흔하지 않다. 채굿의 첫가락 호호굿·소리굿의 간주에 혼합박자가 쓰인다. 5) 임실필봉농악의 무용적 특징 필봉농악에서 무용적 특색은 개인놀이에서 상쇠와 소고잽이의 무용적인 춤사위와 판굿의 진법놀이에서 치배들의 군무적인 춤사위에서 특징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풍물의 무용적인 춤사위는 상쇠 및 소고의 웃놀음과 판굿의 진행형식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진주삼천포농악
진주농악으로 뛰어난 인물에는 진양군 정촌의 박경호 상쇠와 그의 뒤를 이은 김한로가 있었다. 김한로의 제자로는 진주의 황일백(상쇠), 김수갑, 정삼수와 삼천포의 문백윤이 있었으나 지정당시 황일백과 문백윤만 '농악12차'라는 명칭으로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진주풍물을 이끌어 오던 황일백 상쇠는 1976년 작고하였고, 뒤이어 1980년 양산 출신의 이영우가 이어 받았다. 삼천포 풍물의 문백윤이 1981년 작고하였으며, 뒤이어 진주 출신의 이영우도 1992년 5월에 작고하였다. 현재는 기능보유자인 삼천포 출신의 박염과 진주 출신의 기능보유자 후보인 김선욱, 그밖에 진주 삼천포 지방의 많은 풍물잽이들이 진주 삼천포농악을 이끌고 있다. 문백윤은 한일합방의 해인 1910년 남평문씨 미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다섯의 어린 나이로 풍물패를 따라 다녔으며 유독 상쇠를 잡은 사람에게 눈을 쏟았다. 8세 때에는 이미 동리 풍물패에 끼어 소고도 치고 꽹과리를 쳤다. 이 때 우연히 진주 정촌에서 이사해 온 김한로를 알게 된다. 김한로의 사부 박경호가 조선조 말의 대표적인 악사였다. 박경호가 그의 풍물패를 거느리고 유랑할 때 거제 7면 다 다녀도 산달섬이 제일이라는 민요를 남겼으며 박경호 이상의 계보는 가릴 수 없다. 농악 12차 36가락은 박경호·김한로에서 문백윤으로 전승되어 온 것이다. 문백윤이 김한로에게 6년 동안 사사하여 대성하였으나 일제가 풍물을 탄압하자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문백윤은 일본 교포촌에서도 꽹과리를 쳤으며, 32세 때는 만주로 건너가 잠시 토건업자의 꿈을 꾸기도 했다. 해방 후 다시 풍물을 치기 시작해서 1961년에는 미국공연을 가졌고 기타 해외공연을 거듭하여 널리 세계에 풍물을 소개했다. 제자로 이금주, 이성진, 박염 등이 있다. 제자 중 박염이 1991년 5월 1일에 인간문화재의 칭호를 받고 현재 농악 12차 36가락 보급에 전념하고 있다.
강릉농악
강릉농악의 저변은 넓다. 그래서 강릉농악을 이끌어온 이름난 상쇠도 여럿 있다. 박기하(朴基河)는 강릉농악의 산증인으로, 1985년 12월 1일에 중요무형문화재 강릉농악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고 현재 강릉농악 보존회 고문이다. 그는 강원도 명주군 왕산면 소현리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무동으로 풍물패를 따라 다니며 풍물을 배웠고 현재 강릉시 홍제동에 살고 있다. 15세 때 왕산면 왕산리로 이사했고, 17세 때 왕산면 농산리 상쇠 전달식(全達植) 밑에서 풍물을 배우며 풍물패의 무동으로 따라 다녔다. 24세 때 상쇠로 나섰고, 28세 때 홍제동으로 이사와 홍제동 풍물패를 이끌고, 제18·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해 입상하였으며, 그밖에 많은 풍물대회에 홍제동 풍물패를 이끌고 출전하여 입상한 강릉농악의 산증인이다. 이러한 업적으로 1985년 12월 1일에 강릉농악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김용현(金龍泫)은 사천 진리 하평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한평생 농사를 지어온 농사꾼이다. 하평에는 역사가 깊은 풍물패가 있었는데, 15살 되던 해 이 마을 상쇠였던 문덕룡씨가 상모 돌리는 맨 끝 꼬마로 입단시켰다. 상법고가 될 때 쯤 문덕룡씨는 만주로 떠나고 그 다음으로 박용신씨가 상쇠를 쳤고, 이 분도 강릉시내로 이사 나갔다. 그 뒤에 상쇠를 맡아서 지금까지 하평 풍물을 이끌면서 1985년 제2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2월 답교농악으로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수상하는 등 사천답교 풍물패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왔고, 1989년 12월 1일에 강릉농악 기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았다. 정희철(鄭喜澈)은 월호평동 풍물패의 상쇠이면서 중요무형문화재 강릉농악 기능보유자 후보이다. 최현규(崔鉉圭)는 두산동 풍물패의 장구연주자이며 중요무형문화재 강릉농악 교육보조자이다. 차주택(車柱鐸)은 저동 풍물패의 상쇠이면서, 중요무형문화재 강릉농악 조교이다. 최동규(崔東圭)는 두산동 풍물패의 상쇠이면서, 강릉 농악 보존회 전체를 통해 유일한 쇄납연주자이다. 중요무형문화재 강릉농악 교육보조자이다. 차주택(車柱鐸)은 저동 풍물패의 상쇠이면서, 중요무형문화재 강릉농악 조교이다. 최동규(崔東圭)는 두산동 풍물패의 상쇠이면서, 강릉 농악 보존회 전체를 통해 유일한 쇄납연주자이다. 중요무형문화재 강릉농악 교육보조자이다. 이외에도 권태경(勸泰卿)은 명주군 왕산면 출신으로 30세 때 권오선(勸五善)에게 풍물을 배웠다. 그는 26살 때 월호평동에 이사 왔는데, 그 당시 월호평동 풍물의 상쇠는 권오선의 선배인 이만손(李萬孫)이었고, 이후 상쇠가 되었다. 정선화(鄭善和)는 장현동 풍물 상쇠였다. 그는 21세때 신질봉에게서 풍물을 배웠다고 한다.
이리농악
이리농악은 김제, 정읍 등지에서 전문적으로 우도굿을 배운 잽이들을 받아들이면서 풍물단이 발전하게 되었다. 1950년대에 상쇠 강기팔(姜基八), 설장구 이동원, 수징 백원기 등이 이리농악단을 전문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1960년대 후반에 상쇠 이수남, 설장구 김형순, 수징 백원기, 설벅구 김방현 등이 이리농악단을 이끌다가, 1980년대에 설장구 김형순을 단장으로 한 이리농악단이 꾸준히 활동하였다. 1985년 이리농악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김형순은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동네 풍물판에 어울려 풍물에 남다른 집념을 보였다고 한다. 또한, 정읍, 김제, 부안을 중심으로 조직된 정읍농악단을 따라다니면서 체계적인 풍물가락을 익히게 되었다. 그 당시 정읍농악단은 동네에 포장을 치고 정식공연을 가졌던 최초의 전문 풍물패였다. 여기에는 단장인 이봉문, 이동원, 전사섭, 박남식, 김영철 같은 단원들이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에 풍부한 기예와 풍물에 필요한 모든 재능을 배울 수 있었다. 이처럼 좋은 환경 속에서 풍물을 익힌 김형순은 20세 때 이리시 평동으로 생활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그는 이리에 와서도 풍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급기야는 풍물패를 조직할 양으로 마을 이곳 저곳에 방을 붙여 풍물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모집했다. 그래서 1953년 3월에 명실공히 이리농악단을 조직하게 되었다. 그때의 창단 구성원으로는 이수남, 김방현, 오금석, 김병준, 김성조, 이시열, 김갑동, 서승현이었고 이들은 농악을 구심점으로 한 계모임 형태로 모였다. 또한 줄포의 박남석, 이동원, 김문달, 현판쇠, 김경천, 강기팔, 양병권 등을 모아서 숙식을 같이 하면서 풍물지도를 받아 이리농악단을 성장 발전시키게 된 것이었다. 김형순은 이때부터 이리농악단 단체장을 맡아 단원들과 함께 전국적으로 본격적인 공연활동을 시작하기에 이르러 도처에 많은 명성을 남기게 된다. 이렇게 활동하던 중에 때 마침 문화공보부에서 김형순을 전국 민속조사 대상자로 선정하여 약 5년간 년 2-3회 조사 심의하여 95년 12월 1일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 기능보유자로 지정하였다. 또한 83년 제1회 전국 풍물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85년 제26회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호남 우도풍물의 자리매김을 튼튼히 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같은 대내외적인 활약과 함께 86년 11월에는 이리농악 보존회가 문화재 관리국 인준을 받았고 91년 11월에는 전수회관의 준공을 보게 되었다.
평택농악
평택농악은 마을 두레패의 성격보다는 전문 연희패의 성격이 강하다. 이는 평택농악의 기능보유자였던 최은창이 주로 전문 연희패에서 활동했다는 점과 평택농악의 연희방식 그리고 구성원의 주요인맥에서도 나타난다. 전문연희패로의 평택농악의 인맥은 최은창을 비롯하여, 이돌천, 김용래, 이경일, 이성호, 이영옥, 김육동, 정한모, 유준 등을 꼽을 수 있다. 최은창은 1914년 4월 18일생으로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그가 평궁리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전문 연희패에 들어간 곳은 안성의 이원보 행중이었다. 이원보는 본래 충남 부여 사람으로 일찍부터 풍물에 뛰어난 재주를 보여 이를 직업으로 삼아 떠돌던 전문 연희꾼이었다. 그는 주로 안성에 살던 서상현의 집에 머물면서 서상현 행중의 상쇠를 쳤다. 최은창은 이 행중에 들어가 이원보에게서 보다 전문적인 장고와 쇠가락을 배웠다. 그 뒤 최은창은 남운형 행중에 잠깐 몸담기도 했으며, <민속극회 남사당>에서는 남운형을 비롯 최성구·양도일·송창선·지수문·송순갑·정일파 등 당대의 명인들과 함께 활동하며 가락치는 솜씨에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1980년 평택농악을 결성하여 오늘에 이르게 한 평택농악의 시조격이다. 쇠, 장고 등 사물과 빼어난 고사소리, 인근의 만신들과도 함께 했던 호적가락 그리고 묘기에 가까운 무동놀이 등 전 분야에 두루 능통했고 1984년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최은창과 함께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이돌천은 1919년 5월 26일생으로 경기도 장호원 태생이나 10대에 충남 천안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평생을 살았다. 천안시 쌍용동의 풍물패에서 풍물을 배웠다. 천안 인근의 걸립패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민속극회 남사당>에 가입하여 활동, 1980년 평택농악을 창단할 때 합류했으며 천안농악에서 상쇠로도 활동했다. 주특기는 법고로써 1985년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법고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았으나 1994년에 작고했다. 김용래는 1939년 4월 19일생으로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곳에서 살고 있다. 13세때 천안시 용곡동 마을 두레패에서 무동으로 풍물을 시작했다. 16세에 대전의 송순갑 행중에서 무동으로 2년간 활동하고, 안성의 남운형 행중에서 무동을 하기도 했다. 18세부터 이돌천으로부터 상모를 배워 천안 인근에서 같이 활동을 했다. 천안의 난장굿을 칠 때는 최은창과도 같이 활동했다. <민속극회 남사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82년 평택농악 합류했는데, 주특기는 법고로 1990년 보유자 후보로 지정받았다. 이경일은 1942년 9월 21일생으로 본래는 함경북도 태생이나 서울을 거쳐 17세에 경기도 안성으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살고 있다. 안성 서운면의 마을 두레패에서 상모를 처음 배워, 19세되던 해에 최은창과 태고사 절걸립을 같이 하기도 했다.<민속극회 남사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82년 평택농악에 합류하여 법고와 무동놀이로 1987년 전수교육교조로 지정받았다. 이성호는 1940년 11월 20일생으로 충남 공주가 고향으로 마을 두레패에서 풍물을 시작, 서울로 올라간 뒤 최성구에게서 상쇠와 부포놀이를 배웠다. 그 후 여러 행중을 전전하며 난걸립·절걸립을 했으며, 남운형 행중에서도 활동했고 최은창의 절걸립 행중에도 참여했다. 1989년 평택농악에 합류하였으며 상쇠와 부포놀이 그리고 고사소리에도 능하다. 1995년 이수자가 되었다. 이영옥(또는 세진)은 1942년 10월 28일생으로 충남 당진 순성면이 고향으로 마을 두레패에서 풍물을 시작했다. 인천을 거쳐 20세에 서울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살고 있다. 인천 율목동에 있던 강개령의 난걸립 행중에 몸담으면서 전문 연희꾼으로 성장했다. 당시 상쇠를 치던 박산옥에게서 쇠·장고·법고 등을 배웠고, 그 후 여러 행중을 다니며 걸립활동을 했다. 최은창의 절걸립 행중에도 참여했으며, 1989년 평택농악에 합류하여 장고로 1995년 이수자가 되었다. 김육동은 1928년 4월 16일생으로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웅교리가 고향이며 여기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웅교리의 두레패에서 풍물을 시작했으며 최은창과 절걸립을 함께 하기도 했다. 1980년 평택농악 창단 때에 참여하여 법고와 무동놀이로 1987년 이수자가 되었다. 정한모는 1928년 10월 30일생으로 김육동과 같은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웅교리가 고향이고 여기에서 평생을 살아 왔다. 어렸을 때부터 웅교리의 두레패에서 풍물을 치기 시작하여 안성농악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85년 평택농악에 합류하여 사물을 다 다루지만 주특기는 북으로 1987년 이수자가 되었다. 유준은 1936년 1월 15일생으로 김육동·정한모와 함께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웅교리가 고향이다. 웅교리의 두레패에서 풍물을 배워 1983년 평택농악에 합류했다. 주특기는 북과 무동놀이로 1987년 이수자가 되었다. 이밖에도 안성의 김기복, 천안의 윤인수 등이 함께 활동했었다. 마을풍물로써 평택농악을 이끌어간 사람들로는 방오봉, 손석건, 황홍엽 등을 들 수 있다. 방오봉은 1919년 11월 27일생으로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가 고향으로 16세부터 마을 두레패에서 풍물을 시작했다. 평택농악에 합류하여 1991년 전수교육조교로 지정받았다. 또 손석건은 1919년 1월 25일생으로 평택시 팽성읍 평궁리가 고향으로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어려서부터 평궁리의 두레패를 보며 자라오다가 평택농악의 창단 때부터 참여하여 평택농악이 가지는 마을 두레패 성격을 잘 보여주었다. 평택농악의 기수를 맡았으며, 각종 풍물 기구와 두레굿 등의 고증에 도움을 주었다. 황홍엽은 1937년 4월 4일생으로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평택으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살고 있다. 평택시 포승면 홍원리의 마을 두레패에서 풍물을 시작하여 19세 때 마을의 할아버지로부터 호적을 배웠다. 1982년 평택농악에 합류하여 최은창으로부터 호적가락을 다소 수정받아 오늘에 이른다. 1987년 호적으로 이수자가 되었다. 이밖에도 평택시 포승면의 이민조, 평궁리의 최종성, 손기영 등이 함께 활동했었다.
임실필봉농악
임실필봉농악이 발달한 필봉리는 본디 마을 단위의 마당밟이, 당산굿 등 풍물이 아주 옛날부터 전승되어 왔으나 판굿과 외지의 걸궁굿 같은 수준 높은 풍물굿의 모습을 갖춘 것은 115년 전 유명한 상쇠 박학삼을 초청하면서부터라 한다. 박학삼은 강진면 출생으로 걸궁굿과 마을굿의 유명한 상쇠였으며 박학삼의 타계 후에 송주호가 상쇠를 이었다. 송주호는 필봉리 출생으로 지금 살았으면 92세쯤 되며, 타계 후에는 양순용이 상쇠가 되어 지금의 풍물굿 형태를 이끌어 왔다. 현재는 양순용이 타계하고 설장구 기능보유자인 박형래가 필봉농악을 지키고 있다. 양순용은 호남 좌도풍물을 4대째로 전승한 필봉마을 양병철(梁炳鐵)의 아들로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 상필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사랑방에서 쇠를 배워 14세 때는 박학삼, 상쇠 밑에서 끝쇠를 치므로 상쇠의 자질을 인정받았다. 18세 때에는 송주호 상쇠 밑에서 부쇠를 하다 송주호가 연로하자 상쇠를 맡아보았고, 23세 때는 순창 동계의 김문숙에게서 퍼넘기기, 양사 등 부포놀음을 배웠고, 24, 25세 때부터는 순창, 임실지역에서 걸궁굿의 상쇠를 했으며 1970년 초부터는 점점 쇠퇴해가던 좌도굿을 복원하고, 풍물굿을 배우고자 하는 많은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에게 풍물굿을 전수하였다. 1988년에 임실필봉농악이 중요무형문화재 11-마호로 지정되면서, 양순용은 3년 뒤인 1991년에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으나 지금은 유명을 달리하였다. 박형래는 1927년 6월 3일 필봉마을에서 태어났다. 박형래는 장구 기능 보유자로서 좌도풍물 창시자인 박학삼과 김득풍에게 사사했고 50여년 평생을 장구와 더불어 살며 필봉농악의 전승 보존에 심혈을 기울인 인간문화재이다. 필봉농악이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대사습놀이에서 장원상 등 각종 민속경연대회에서 상을 받도록 이끌었다. 1990년 풍물 경연대회 심사위원 등 다채로운 풍물행사에 참여하면서도 성실한 농민으로 일하고 있는 참 농사꾼이며, 1989년 6월 15일 인간문화재로 지정을 받았다.
연계정보
재구성강릉농악, 국립문화재연구소, 1997.개정판 국악통론, 서한범, 태림출판사, 1995.국악개론, 장사훈·한만영 공저, 사단법인 한국국악학회, 1975.국악대사전, 장사훈, 세광음악출판사, 1984.임실필봉농악,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전통음악개론, 김해숙·백대웅·최태현 공저, 도서출판 어울림, 1997.최신국악총론, 장사훈, 세광음악출판사, 1995.평택농악, 국립문화재연구소, 1996.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91.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일조각, 1984.한민족음악론, 권오성, 학문사, 1999.http://www.ptnongak.or.kr/ 평택농악http://www.artcafe.co.kr/pungmul/pungmul_main.htm 아트카페http://knbank.co.kr/cus.hicom/town/culture/1_19.html 진주삼천포농악http://www.4000news.com/sachon/yougug/nongag.html 인터넷 사천시http://pilbong.net/ 필봉굿http://www.kmusic.org 풍류마을http://www.ncktpa.go.kr 국립국악원http://www.koreandb.net 디지털한국학http://www.ocp.go.kr 문화재청
관련도서
강릉농악, 국립문화재연구소, 1997. 개정판 국악통론, 서한범, 태림출판사, 1995. 국악개론, 장사훈·한만영 공저, 사단법인 한국국악학회, 1975. 국악대사전, 장사훈, 세광음악출판사, 1984. 임실필봉농악,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전통음악개론, 김해숙·백대웅·최태현 공저, 도서출판 어울림, 1997. 최신국악총론, 장사훈, 세광음악출판사, 1995. 평택농악, 국립문화재연구소, 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91. 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일조각, 1984. 한민족음악론, 권오성, 학문사, 1999.
용어해설
* 가무백희(歌舞百戱)가무백희는 나라의 각종 행사 때 행한 노래·춤 및 각종 기예의 총칭이다. 가무백희라는 말이 문헌에 처음 나오기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의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9년 가위 대목으로서, 6부의 여자들을 2편으로 갈라 1달 동안 길쌈내기로 겨루다가, 8월 보름에 진 편이 음식을 마련하여 이긴 편에게 사례하고 이에 가무와 온갖 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가무백희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대개 신라의 팔관회를 이은 고려시대의 팔관회에 관한 기록에서 모습을 더듬을 수 있다.신라의 가무백희는 중국의 산악백희의 영향을 받았다. 산악백희의 주요한 놀이는 대개 씨름을 이르는 각저희(角抵戱)가 대종을 이루고 있고, 그밖에 역기(力技)·장대타기[尋]·공놀리기[弄丸:跳丸劍]·줄타기[走索]·칼물기[呑刀]·불토하기[吐火]등이다. 중국에서 이르는 산악이란 정칙적이 아닌 산잡한 악(樂)이라는 뜻으로, 위에 열거한 것과 같은 골계희·모의재·환술·기기곡예 등을 음악반주로써 연출하는 일종의 원시적 경극잡희(輕劇雜戱)를 범칭하는 이름이며, 달리 백희(百戱)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이들을 한데 묶어서 산악백희라고 하였다. 가무백희가 팔관회를 끼고 전승되어 온 것은 이미 신라 때부터의 일이며, 고려시대에는 팔관회가 국가 최고의 제사의식으로서 특히 천령·오악·명산대천·용신 등을 받드는 거국적 행사이므로 이러한 배경과 여건에서 가무백희가 팔관회와 더불어 규모도 커지고 내용도 풍부해졌다. 팔관회와 함께 숭상된 연말의 나례, 즉 제야에 행하는 벽사진경의 구나시에 가무백희를 궁중에까지 끌어들인 것이 또한 가무백희의 성장과 발달에 크게 자극을 주었다. 이 시기는 서쪽 송나라의 영향을 받은 외에도, 북방의 거란·여진·몽골 등 신흥민족들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했으므로 여기에서 이른바 호악과 호희가 부수적으로 들어와서 가무백희의 내용은 더욱 풍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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