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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요

개요
민요는 민중들 사이에서 저절로 생겨나서 전해지는 노래를 두루 일컫는다. 특정 개인의 창작이거나 아니거나 창작자가 문제되지 않는다. 악보에 기재되거나 글로 쓰이지 않고 구전되며, 엄격한 수련을 거치지 않고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 악곡이나 사설이 지역에 따라 노래 부르는 사람의 취향에 맞게, 노래부를 때의 즉흥성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민요는 이런 특징을 지니기에 민중의 소리이고,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함축하고 있는 예술이라고 평가된다. 민요는 민속이고, 음악이고 문학이다.민속으로서의 민요는 구비전승의 하나이되, 생업·세시풍속·놀이 등을 기능으로 하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집단적인 행위를 통하여 불리어지는 기회가 많은 점이 구비전승의 다른 영역과 다르다. 음악으로서의 민요는 일반 민중이 즐기는 민속음악에 속하는 창악(唱樂)이되, 전문적인 수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점에서 판소리·무가·시조·가사 등과 구별된다. 문학으로서의 민요는 구비문학의 한 영역이며 일정한 율격을 지닌 단형시라는 점이 설화·속담·수수께끼 등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징이다. 민요는 이러한 민속·음악·문학의 복합체로 존재할 따름이지, 그 세 측면이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민요는 인류가 집단생활의 감정을 공동으로 표현할 때부터 생겨났다. 사냥을 하거나 농사를 지으면서 같이 움직이고, 수고를 덜고, 기쁨을 나누고, 성과를 기대하는 노래가 일찍부터 필요하였다. 원시인일수록 노래 부르고, 춤추는 일이 많았다. 이런 전통은 역사가 시작되고 국가가 생긴 뒤에도 오랫동안 거의 그대로 이어졌다. 부여·고구려·삼한 등에서 국중대회(國中大會)를 하면서 남녀가 무리 지어 노래 부르고 춤추었다 하고, 농사를 시작하고 끝낼 때에도 그런 행사를 벌였다는 데서 민요가 큰 구실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그러다가 고구려·백제·신라가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예악사상(禮樂思想)에 따라 나라의 공식적인 음악문화를 이룩하자 민요의 위치가 달라졌다. 민요 중에서 일부는 공식적인 기능을 가진 궁중악곡으로 채택되고, 그 나머지는 대부분 민간에서 계속 전승되는 노래로 남았다. 앞의 것의 예로 고구려의 <내원성(來遠城)>·<연양(延陽)>, 백제의 <선운산(禪雲山)> ·<정읍(井邑)>, 그리고 신라의 <도솔가(兜率歌)>·<회소곡(會蘇曲)> 및 <삼국사기> 악지 (樂志)에서 열거한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어떤 내용인지 알기 어렵고, <정읍>만은 후대까지 전승된 사설이 국문으로 표기되었다. 민간에서 전승되는 순수한 민요의 모습은 <풍요(風謠)> 같은 향가를 통하여 짐작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오면서 상층에서는 중국문화를 적극 수용하여 문학에서는 한시(漢詩)를, 음악에서는 당악(唐樂)을 정착시키고 다시 아악(雅樂)을 들여오자 상하층 문화의 간격이 더 벌어지고 민요가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크게 제한되었다. 그런데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귀족문화의 고답적인 질서가 무너지고 상층의 이념이 재건되지 않은 기간 동안 민요가 궁중악곡으로 대량 들어가 속악정재(俗樂呈才)에서 불리어지는 속악가사(俗樂歌詞)를 이루었으니, <청산별곡(靑山別曲)>·<서경별곡(西京別曲)>·<가시리>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이런 자료는 원래의 모습과는 다르게 다듬어진 면이 있기는 하지만, 곡조와 사설 양면에서 민요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조선왕조는 성리학을 지배적인 이념으로 삼아 전대 문화를 정리하면서, 속악가사의 곡조는 계속 이용하면서 사설은 민요와는 거리가 멀게 바꾸었다. 이와 함께, 아악을 가다듬어 예악을 확립하고자 하였으며, 나라의 위엄을 상징하는 시가문학을 마련하였다. 그 결과 민요의 지위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하락하였다 하겠으나, 민심의 동향을 알고 교화의 정도를 가늠하기 위하여서 민요를 수집하여 참고하였기에 그것이 잊혀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 가운데 정치적 변화의 조짐을 알리는 참요(讖謠)가 있다고 믿어 기록하여 두기도 하였다.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문화구조가 크게 달라지면서 민요가 적극적인 구실을 하였다. 민중의식의 각성이 민요를 통해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속악이 일어나고, 국문시가는 물론 한시 또한 민요에 접근하고 민요에서 소재와 표현을 다수 차용하였다. 원래는 어느 특정지역에서, 일정한 생활상의 기능과 더불어 전승되던 민요가 본고장을 떠나 널리 전파되고, 고정된 기능에서 이탈하여 노래 그 자체로 불리어지게 된 것도 커다란 변화이다. 교통이 열리고 사람의 이동이 잦게 되자, 서울의 <아리랑>을 전국에서 부르게 되었으며, 함경도의 <어랑타령>이 남쪽지방에도 알려졌다. 무가였던 <노랫가락>, 노동요였던 <뱃노래>가 놀면서 부르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를 촉진시키는 데 전문적인 놀이패가 큰 구실을 하였다. <산타령>은 선소리패라는 놀이패가 맡아서 부르는 흥미로운 공연물로 발달하였다.전문적인 놀이패가 음악적인 세련성과 문학적 수식을 보탠 노래는 잡가(雜歌)라고 지칭되었으며, 민요의 범위를 벗어났다. 서울지방의 십이잡가(十二雜歌)를 통하여 독자적인 성격을 확립한 잡가는 종목이 계속 늘어나고 널리 불리어졌으며, 여러 차례 출판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자 ‘노래’와 ‘소리’를 구별하여야만 되었다. 정악인 가곡(歌曲)을 잡다한 공연물과 구별하고자 하는 쪽에서는 가곡만 노래이고, 그 밖의 것들은 소리라면서 격이 다르다고 하였다. 이런 구분에 의하면 민요는 모두 소리이다. 민요 자체는 원래 노래라고도 하고 소리라고도 하였는데, 새로운 종목이 다수 등장하자 전통적인 민요를 그대로 부르고 있는 쪽에서는 자기네 것은 ‘옛날 노래’라 하고, 새로운 종목은 무엇이든 ‘중년 소리’라고 일컬었다. 양쪽의 구분에서 모두 소리라는 것이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전환기에 다양하고 왕성하게 창작되었다. <경복궁타령>·<도라지타령>·<노들강변> 같은 것이 신민요(新民謠)이다.일제강점기 동안 민요는 민족의 정서를 집약하고 일제에 대한 항거의 의지를 나타내는 구실을 맡았다. 민요의 표현과 정서를 받아들여 민요시를 이룩하자는 시도가 현대시에서 거듭되었으나, 이런 경지에까지는 이를 수 없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일본에서 이식된 상업주의의 산물인 유행가 또는 대중가요가 보급되고, 또 한편으로는 농촌사회의 전통적 생활방식마저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민요는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요의 음악적 특징
민요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노동요가 많다는 것이다. 주로 놀이판이나 축제판에서 노래를 부르는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노동요가 많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특징이다. 노동요 중에서도 집단노동요가 많다. 모심기나 논매기처럼 일손이 많이 필요할 때는 보통 2-30명이 모여서 공동으로 일을 했고, 방아찧기와 같은 가사노동이라도 서너 집이 모여서 일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집단적 노동에서는 규칙적으로 일손을 맞추는 동시에 흥겨운 리듬으로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특히, <노젓는소리>나 <목도소리>처럼 노래를 하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집단노동요는 앞소리꾼이 소리와 일을 이끌어 나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정한 후렴구를 반복해 부르는 '메기고 받는 방식'이 가장 많다. 민요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반주악기, 특히 선율악기가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농업노동요의 경우 간혹 반주가 따르더라도 앞소리꾼이 북을 치면서 박자를 맞추거나 서너 명 정도의 풍물패가 반주를 하는 정도가 보통이었다. 어로요에서는 풍물악기가 자주 리듬악기로 사용되면서 때로 날라리(새납)가 선율악기로 사용되는 수도 있었다. 장례의식에서는 요령이나 북, 그리고 때로는 풍물이 사용되었다. 유흥요도 대개는 반주악기 없이 부르거나 물방구(물동이에 물을 담고 바가지를 엎어 띄운 것)를 친다든지 하는 정도에 그쳤다. 민요의 선율은 지역에 따라 다르다. 서울과 경기도의 민요들은 말 붙임새가 독특하고 선율의 굴곡이 유연하면서도 장식음이 많다. 이 노래들은 15세기 <악학궤범>에서 설명된 평조·계면조의 음계로 짜여져 있다. 즉 경기민요는 평조가락이 많아 맑고 깨끗하며 경쾌하고 분명하다. 또한 음 빛깔이 부드럽고 유창하며 서정적이다. 판소리와 산조를 키워낸 남도의 민요는 음악구조가 단순하고 가락이 서정적인 다른 지역의 민요에 비해 보다 풍부하고 극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낮은 소리는 떨어주고 중간소리는 평으로 내고 높은 소리는 꺾는 목을 쓰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서도민요는 남도민요에 비해 청(pitch)이 높고 중간 음에서 격렬하게 떨면서 숨가쁘게 몰아치다가 하강하는 창법이 마치 탄식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서도민요는 미묘한 꾸밈음이나 서도민요 특유의 조름목 등을 악기로 나타내는 것이 어려워 기악반주와 함께 노래하는 것이 드물다. 경상도민요는 지역에 따라 창법과 음계, 꾸밈음에 차이를 보인다. 빠른 장단이 많이 쓰여 흥겹고 경쾌하며 강원도 민요는 산골의 정취가 어린 소박하고 애수에 찬 노래가 많고 함경도민요는 오랜 세월 역사에서 소외되어왔던 지역의 정서를 반영하듯 탄식조나 애원조의 구슬픈 노래가 많다. 다른 지방에 비해 유난히 일노래가 많은 제주도의 민요는 특유의 사투리와 소박한 가락이 육지의 노래와는 다른 독특한 맛을 낸다.
민요의 문학적 성격
민요의 사설은 한국 시가형식의 기본형을 두루 갖추고 있다. 대구(對句) 또는 문답으로 된 두 줄 형식이 있고, 몇 줄이 한 연(聯)을 이룬 다음 여음이 삽입되기도 하고, 여러 줄이 계속 이어지는 것도 있다. 이 세 가지 기본형은 각기, 이른바 사구체(四句體) 향가(鄕歌), 여음이 삽입된 고려가요(高麗歌謠), 가사(歌辭)의 형식과 같다. 민요에 근거를 두고 그런 시가형식이 생겨났을 것이다. 율격을 살피면, 민요에는 2음보·3음보·4음보가 흔하고, 음보수를 필요에 따라서 줄이거나 늘이는 변이형도 있다. 이 점 또한 시가 문학의 기저로 활용되어 왔다. 그런가 하면, 민요에는 몇 줄인지 확실하지 않고 음보구성에도 규칙성이 없는 비교적 자유로운 형식도 있어, 사설시조(辭說時調)와 상통하고, 자유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민요는 대부분 서정시이며, 서정시에 적합한 비유·상징 등의 수사법으로 소박하면서도 묘미있는 심상(心像)을 갖춘 것이 적지 않다. 일하는 사람의 신선하고 보람찬 의식을 나타내는 한편, 삶의 고달픔과 어려움을 하소연하기도 한다. 이 두 가지가 한 작품에 복합되어 긴장된 구조를 이룩하기도 한다. 지배층의 수탈에 맞서고 외적의 침입에 항거하는 의지를 비장하게 또는 풍자적인 수법으로 표출한 민요도 적지 않다. 그러나 민요는 모두 다 서정민요가 아니며, 교술민요(敎述民謠)·서사민요(敍事民謠)·희곡민요(戱曲民謠)라고 하는 것도 있다. 율문으로 된 문학 장르의 모든 뿌리가 민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을 하면서 그 절차를 열거하고, 사물에 대한 관찰을 서술하는 민요는 서정적인 맛은 적으나 그 나름대로 긴요한 구실을 하는데, 이런 것을 교술민요라고 할 수 있다. 덕담(德談)을 늘어놓는 민요도 그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동요에는 문답으로 전개되는 것이 있어, 희곡민요라는 용어를 써서 그 특징을 가려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예는 흔하지 않다. 서사민요는 이야기를 갖춘 민요이며 비교적 장편에 속한다. 주로 여자들이 길쌈하면서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부르며, 여자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를 비극적으로 표현한다.
전파범위에 따른 분류
오늘날 민요라고 부르는 음악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크게 통속민요와 토속민요로 구분한다.
통속민요(通俗民謠)
통속민요는 전문적인 소리꾼들이 부르는 노래로 전국을 무대로 순회하던 연희집단에 의하여 널리 퍼졌고, 요즈음에는 방송이나 레코드 등을 통하여 널리 보급된다. 이들 통속민요는 그 노래가 발생하거나 초기에 불리던 일정한 지역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널리 불린다는 점에서 토속민요와 구별된다. 오늘날 즐겨 부르는 통속민요는 서울·경기지방 민속음악의 특징인 경토리로 만들어진 노래가 대부분이며, 그 다음으로 판소리의 고장인 호남지방 민속음악의 특징을 따른 노래가 많이 있다. 전자는 경기명창들이 주로 부르며, 후자는 남도명창들이 부른다. 통속민요 중에는 조선 말기부터 불리던 노래도 남아 있으나, 적지 않은 노래는 개화기 이후 전문인들이 새롭게 짜서 부르는 노래가 많이 있다. 뿐만 아니라 대중가요가 보급되던 1930년을 전후하여 대중음악 작곡가들에 의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신민요(新民謠)도 있다. 널리 알려진 <아리랑>, <노들강변>, <태평가>,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한오백년> 등이 신민요에 속하며, 흔히 경상도 민요로 분류하는 <울산아가씨>나 충청도 민요로 분류하는 <천안삼거리> 등은 경기명창들이 부르는 신민요이다. 통속민요는 전문인이 부르는 노래이므로, 대부분 관현악기의 반주가 따르고, 일정한 장단에 맞추어 부르며, 음역(音域)이 넓고, 장식음과 표현이 다양하며, 노랫말은 고정되어 널리 부른는 것을 즉흥적으로 골라 붙이는 경향이 강하다. 후렴이 있는 노래가 대부분이며, 앞소리와 뒷소리(후렴)가 향토민요에 비하여 길게 짜여졌다.
토속민요
토속민요(土俗民謠)는 비전문 음악가인 일반 민중들이 삶 속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로, 일과 관련된 노동요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토속민요는 지역적인 특징이 강하여, 그 노래가 불리는 지역은 비교적 좁은 지역에 국한되며, 인접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가락이나 사설에 부분적인 변화가 생기고, 때로는 노래의 기능이 달라지기도 한다.
기능에 따른 구분
민요의 기본적인 형태는 생활에서 일정한 기능을 하는 것이고, 그 가운데 노동요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노동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면 행동통일을 할 수 있고, 흥겨워서 힘이 덜 들기 때문에 노동요는 전통적인 노동의 거의 전 영역에 걸쳐 구비되어 있었고, 노동의 방식에 따라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불리어졌다. 노동요는 최초의 민요이고, 다른 여러 가지 민요를 파생시킨 모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노동의 종류와 방식이 달라지고 생활이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어서 노동요 전승이 위기를 맞이하였다. 노동요가 제대로 불리어진 때에는 전국 어느 마을, 어떤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그 나름대로의 민요를 즐겼는데, 노동요 전승의 위기가 도래하자 국민 대다수가 노래 창조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고, 음악이나 문학 교육이 그 공백을 메우지 못하였다. 노동요는 노동의 종류에 따라서 농업노동요(農業勞動謠), 어업노동요(漁業勞動謠),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부르는 잡역노동요(雜役勞動謠)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농업노동요와 어업노동요는 대부분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하면서 부르는 집단노동요(集團勞動謠)이다. 잡역노동요는 종류가 무척 다양한데, 토목·운반노동을 하면서 부르는 것은 집단노동요이고, 수공업이나 집안 일을 하면서 부르는 것은 개인노동요(個人勞動謠)인 경우가 많다. 남자들이 하는 일은 집단노동요를, 여자들이 하는 일은 개인노동요를 필요로 하는 것이 많다. 농업노동요에는 <보리타작소리>·<모내기소리>·<논매기소리>, 어업노동요에는 <배젓기노래>·<고기후리기노래>, 여자들의 잡역노동요이자 개인노동요의 대표적인 예로는 <길쌈노래>가 있다. 노동요의 종류를 지역의 특성이나 생업의 양상에 따라 크게 나누면 평야형·산간형·해안형이 있다. 평야형은 <논매기소리>가 논매기를 세 번할 때마다 달라지는 점이 특이하다. 산간형은 밭을 갈고, 밟고 하면서 부르는 노래, 산에 가서 나무를 하면서 부르는 <초부가>(樵夫歌) 같은 것들을 갖추고 있다. 해안형에는 어업노동요가 있으며, 노를 젓고, 그물을 끌어올리고 하면서 부르는 노래가 그 주종을 이룬다. 그런데 제주도는 산간형과 해안형을 아우른 고장이어서 특이하고, 다른 데는 없는 <해녀노래>가 있으며, 갓을 만드는 일을 많이 하기에 <양태노래>가 발달되어 있다. 의식요는 사람의 일생에 따르는 통과의례(通過儀禮)와 일년 동안의 절후에 따르는 세시의례(歲時儀禮)를 거행하면서 부르는 민요이다. 통과의례는 여러 단계로 나누어져 있으며, 혼인을 할 때 교군(轎軍)들이 부르는 노래, 환갑잔치에서 부르는 노래도 통과의례 의식요라 할 수 있으나, 장례절차에 따르는 <상여소리>·<달구소리>만 다른 민요와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을 갖추고 널리 전승된다. 이들은 상여를 메고, 무덤을 다지는 일을 하면서 부르기에 노동요라고도 할 수 있지만, 망자(亡者)의 안장(安葬)을 기원하고 유족의 슬픔을 위로하는 것을 더욱 중요한 기능으로 한다. 세시의례의 의식요로서는 정월 초순에 농악대가 집집마다 돌며 지신밟기를 할 때 부르는 것이 가장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상여소리>·<달구소리>·<지신밟기소리>는 모두 선후창으로 부르고, 메기는 사람이 의식진행의 주역 노릇을 한다. 일정한 기능이 있는 민요의 또 한가지 부류는 유희요(遊戱謠)이다. 유희요는 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민요인데,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아동유희요·남성유희요·여성유희요로 나눌 수 있다. 아동들이 하는 놀이는 대부분 노래를 필요로 하며, 동요라고 일컫는 것은 대부분 아동유희요이다. 어깨동무·대문놀이·잠자리잡기 등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가 그 좋은 예이다. 그런데 성인 남성들의 놀이는 노래를 필요로 하는 것이 흔하지 않다. 술 마시고 춤추면서 부르는 노래는 특별한 절차가 없고 고정된 종목을 갖추지 않으니 유희요라 하기 어렵다. 여성유희요는 강강수월래·놋다리밟기 등을 하면서 부르는 것이 있어 남성유희요보다 형식이 구비되고 내용이 풍부하다. 강강수월래, 놋다리밟기는 그 비슷한 것이 전국 각지에 여러 가지 있는데, 세시의례이면서 여성의 집단유희이다. 노래는 선후창으로 부르면서 진행된다. 일정한 기능이 없는 민요는 놀면서 부르거나 노래 자체가 흥겨워 부르는 것이다. 위에서 든 기능요(機能謠)와 구별하기 위하여서 비기능요(非機能謠)라고 일컫는다. 비기능요는 기능요가 일시적으로 전용된 것이거나 기능요에서 파생된 것이 대부분이다. 어업노동요에서 놀면서 부르는 <뱃노래>가, <길쌈노래>에서 노래 그 자체로 독립된 <베틀노래>가 생겨났다. 본고장에서는 기능요였던 것이 다른 데로 전파되면서 비기능요로 바뀌기도 한다. 전문적인 소리패가 가담하여서 악곡이나 사설을 가다듬을 때에도 비기능요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전라도지방의 <논매기소리>가 판소리 풍의 <농부가>로 바뀐 것이 그 좋은 예이다. 고대부터 궁중악곡으로 들어간 민요, 근대에 잡가가 된 민요는 모두 이런 변화를 겪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고정된 기능을 지탱하는 생활방식이 변화를 겪어, 전통적인 민요가 비기능요로 전승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지역에 따른 구분
민요의 악곡이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양상을 민요권(民謠圈)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민요권은 방언권(方言圈)과 대체로 일치한다. 경기민요(京畿民謠)·남도민요(南道民謠)가 민요권 구분에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이밖에 서도민요·동부민요(강원도·경상도민요)와 제주도민요도 각기 독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경기민요
서울과 경기도 지방을 중심으로 불려지던 민요이다. 충청도 북부의 일부와 강원도 지방의 일부 민요들도 포함하고 있어, 중부지방 민요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여진다. 전문적인 소리꾼들에 의해 불려진 통속민요와 그렇지 않은 토속민요가 있는데, <노랫가락>·<창부타령>·<방아타령>·<양산도>·<오봉산타령>·<사발가>·<군밤타령>·<흥타령-천안삼거리>·<강원도아리랑> 등의 통속민요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선소리패 등의 놀이패가 경기민요의 몇 가지 종목을 도시의 수용층을 위한 흥행적인 공연물로 발전시켰다. <산타령>·<방아타령>·<한강수타령>·<경복궁타령>이 그런 예이다. <아리랑>·<노랫가락>·<창부타령> 등은 흥행적인 공연물이 아닌데도 전국에 널리 전파되었다. 연주형태에 따라서는 좌창과 입창, 즉 앉아서 부르는 소리와 서서 부르는 소리로 나누어지는데, <노랫가락>·<오봉산타령>·<양유가> 등이 좌창에 속하고 <양산도>·<방아타령>·<경복궁타령> 등이 입창에 속한다. 좌창은 경기 긴 잡가식의 좌창과, 입창은 경기산타령과 같은 입창과 맥이 통한다. 일반적인 음악적 특징은 남도민요에 비해 한 글자에 여러 개의 음이 붙는 일자다음식의 선율이 많아, 가락의 굴곡이 유연하면서도 다채롭고 명쾌하다. 선법은 5음음계로 된 평조선법으로 장3도와 단3도의 음 진행이 많고, 5음이 골고루 쓰이면서 주요음의 선율 골격은 완전4도를 주축으로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음조직은 같은 평조라고 하더라도 <창부타령>이나 <노랫가락>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서양음악식의 계명창법에 의한다면 솔·라·시·도·레로 불려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한강수타령>이나 <경복궁타령>에서처럼 라·도·레·미·솔로 부를 수 있는 곡들도 있다. 장단은 굿거리장단·타령장단·세마치장단이 많이 쓰이며, 흥겹고 경쾌한 맛을 풍기고 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경기민요는 서울을 포함하는 문화와 교통의 중심지에서 자라났다는 입지조건에 힘입어 두 가지 점에서 다른 지방의 민요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창법에 있어서도 급격히 떨거나 꺾거나 흘러내리는 음이 별로 많이 쓰이지 않고 있어, 명쾌한 맛을 풍기며 부드럽고 유창하며 서정적이다. 경기도 지방의 토속민요 가운데 하나인 고양군 들노래는 솔·라·시·도·레·미로 불려지다가 ‘미’음이 ‘파’음으로 바뀌어 부를 때도 있어 마치 조가 바뀌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경기도 지방의 토속민요는 일찍이 서울의 영향을 받아서 이미 많이 없어져서, 1960년대 이후 녹음에 의해 채집된 민요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 음악적 특징을 찾아내기 힘들다. 그러나 <양산도>·<방아타령>과 같은 통속화된 민요를 통해서 옛날 경기지방의 토속적인 민요도 얼마만큼 명쾌하고 흥취있는 가락과 장단으로 짜여져 있었는가를 유추할 수 있다.
남도민요
남도민요는 전라도와 충청남도의 일부지역, 경상남도 서남부지방의 민요를 가리킨다. 흔히 전라도지방의 민요를 일컬으며, 넓게는 삼남지방의 민요를 포함한다. <농부가>·<새타령>·<육자배기>·<진도아리랑>·<강강술래>·<흥타령>·<개구리타령>·<남원산성>·<쾌지나칭칭나네> 등의 통속민요와 일하면서 부르는 토속민요(土俗民謠)들이 있다. <농부가>는 원래 민요였던 것이 판소리에 삽입되고 다시 다듬어졌다. <새타령> 또한 판소리의 삽입가요가 되어 널리 알려졌다. <진도아리랑>은 멀리 진도(珍島)의 민요이지만 전라도민요 특유의 음악성을 잘 갖추어 서울의 <아리랑> 버금가는 위치를 차지하였다. 전라도민요는 흥행적인 공연물이 아니라도 음악적 표현의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선법은 거의 모든 육자배기로 되어 있다. 육자배기토리란, 편의상 서양음악의 계명창법에 의해 설명하자면‘미·라·시·도·레’의 구성음으로 이루어졌는데, ‘미’는 굵게 떨고, ‘시’는 꺾어내고, ‘라’는 떨지 않고 안정된 음으로 내며, 하행할 때는 ‘솔’음도 거치며 끝날 때는 ‘미’ 혹은 ‘라’로 마치게 되는 선율의 토리로서 전라도민요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중심음은 ‘미·라·시’가 되고 있으며, 이를 각각 떠는 음, 평으로 내는 음, 꺾는 음이라 한다. 특히, ‘레’나 ‘도’에서 ‘시’음으로 내려올 때 눌러 내거나, 흘러내리거나, 굴리는 소리를 자유스럽게 구사함으로써 슬픈 감정을 자아내게 하며, 혹은 그러한 시김새가 구성진 맛을 나타낸다. 그러나 때로는 경기소리제인 경토리가 섞여 있는 경우도 있다. 장단은 판소리나 산조의 장단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 등이 사용되고 있는데, 진양조나 중모리와 같은 느린 가락과 장단으로 불릴 때는 흥겹고 멋들어진다. 이러한 긴소리와 짧은소리는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창법은 극적이고 굵은 목을 쓰고 있으며, 심한 요성과 꺾는 음이 특징적이다. 옛날에 소고를 치며 춤추고 노래하던 소리꾼들이 벌이던 소리판은 고장마다 조금씩 달랐는데, <보렴>(報念)이나 <화초사거리>와 같은 판염불 계통의 소리를 부르고 나서 <육자배기>·<흥타령>·<개구리타령> 따위의 소리를 잇대어 불렀고, 그 끝에 가서는 <새타령>이나 <까투리타령>·<진도아리랑> 등의 여러 가지 소리를 맞추어 불렀다. 마을에 잔치가 벌어지면 술이 거나하게 취한 마을의 소리꾼들이 술상머리에서 장구장단이나 무릎장단을 쳐가면서 여러 가지 소리를 돌아가면서 메기고 받는다. 흔히 <육자배기>로 시작하여 <흥타령> 등의 민요를 부르며, <삼산은 반락>과 <자진 육자배기>에 이어서 <남원산성>·<진도아리랑>을 잇대어 불렀다. 한편, 토속적인 민요로서는 각 지방의 농요가 특이해서 초벌·두벌·세벌(만두레) 김매기에 따라서 그 가락도 다양하다. 해남·진도·장산도·함평·담양, 그리고 옥구·익산·김제 등지의 <논매기소리>는 노랫말에서는 공통적인 면이 많이 보이지만 가락에서는 서로 다르며 그 가락과 장단에서 풍기는 멋과 흥취는 뛰어난 음악적 소양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논매기소리>에서의 메기고 받는 부분은 듣는 이로 하여금 굳세고도 힘찬 느낌을 가지게 한다. 이 지역의 민요가 가지고 있는 멋과 흥취는 이 지방에서 특히 많이 배출되고 있는 한국화 명인들의 그림솜씨와 함께 이 지방 사람들이 예로부터 가지고 있었던 예술적 재질 및 심미안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민요는 판소리·산조·무가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수준 높은 음악으로 발전되어 왔다. 현재 <강강술래>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고, 진도의 농요가 <남도들노래>라는 명칭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도민요
서도민요는 황해도와 평안도의 민요를 함께 일컫는 말이다. 그곳 민요는 하늘거리는 콧노래처럼 들리고, 어딘지 모르게 한탄스러운 느낌이 맺혀 있어 특이하다. 그런 느낌이 복받쳐 올라 울음 울듯하기도 하고, 떨어지는 듯 내질렀다가 입안으로 끌어들여 앓는 것처럼 웅얼거리기도 한다. 이런 특징은 서도민요를 대표할 수 있는 <수심가>(愁心歌)에서 잘 나타난다. <수심가>는 일정한 장단이 없고, 그 밖의 다른 노래는 도들이·세마치·굿거리 등의 장단으로 불리어진다. 한탄스러운 느낌은 함경도민요에서도 보이고, 강원도민요의 특징과도 연결된다.
동부민요
동부민요는 강원도와 경상도의 민요를 말한다. 강원도민요에는 구슬프면서 염불하듯이 이어지는 곡조가 많은데, 그런 것을 메나리조(調)라 부르기도 한다. 강원도민요의 대표적인 예인 <정선아리랑>는 일정한 장단이 거의 없이 시작되어서 감정을 점점 고조시킨다. 자유로운 변이를 통해 긴장과 이완을 교체시키는 우수한 표현법을 사용한다. 강원도민요에는 중모리나 엇모리 같은 규칙적인 장단을 사용하는 것도 있다. 강원도와 인접한 경상도 지역에는 강원도민요의 영향이 짙으며, 메나리조도 발견된다. 경상도민요의 고유한 특징은 빠르고 힘찬 장단을 사용하는 데 있고, 음악적으로는 다듬어지지 않았다.
제주민요
제주도는 흔히 바람과 돌과 여자가 많다고 하여 삼다도라고도 한다. 직업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 민요도 많이 전해지고 있어 민요의 보물창고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제주도에서 불려지는 토속적인 민요와 통속적인 민요는 민요를 부르는 사람들의 직업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농사짓기소리, 고기잡이소리, 일할 때 부르는 소리, 의식에서 부르는 소리, 부녀요와 동요, 통속화된 잡요로 나눌 수 있다. 농사짓기소리로는 <사대소리>, <밭밟는소리>가 있고, 고기잡이소리로는 <노젓는소리>, <멸치후리는소리> 등이 있다. 일하면서 부르는 소리로는 <고래소리>, <가래질소리>, <방앗돌굴리는소리> 등이 있으며, 의식요에는 <행상소리>, <달구소리>, <꽃염불> 등이 있다. 부녀요와 동요로는 <시집살이노래>, <애기흥그는소리>, <원님노래> 등이 있다. 잡요로는 <오돌또기>, <이야홍타령>, <서우젯소리> 등이 있다. 제주민요는 일하면서 부르는 노동요가 많고 부녀자들이 부르는 민요가 흔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노랫말도 특이한 제주도 사투리를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경기지역 민요보다 구슬프다. 제주민요는 한스러운 느낌을 푸념하듯이 나타내어 색다른 정취를 자아낸다.
예천통명농요
예천통명농요는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통명리에 전승되고 있는 토속민요로써, 중요무형문화재 84호이다. 통명농요는 1979년 제2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고, 1985년 11월 고성농요와 함께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통명동의 문화적 배경과 민요
(1) 통명동의 사회적·역사적 배경 통명농요는 경북 예천군 통명동에서 전승되는 민요 가운데 논농사 관련 노동요만을 한정해서 일컫는다. 통명농요가 중요무형문화재 제84-나호로 지정된 것은 그 가창방식이나 후렴구, 음악적 가락 및 농요로서 기능 등이 다른 고장의 농요와 다른 독자성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농요와 같은 한 지역의 특정 문화 현상은 우연하게 형성된 것이 아니고 다른 문화와 연관성 속에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전승된 것이라 본다면, 통명농요의 민요적 특성을 구체적으로 살피기 전에, 통명농요의 전승 현장인 통명동의 문화적 기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통명동은 경북 북부지역에 속하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안동과 점촌, 영주를 연결하는 삼각형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예천읍에서 보문면 가는 길로 약 4Km 정도 가면 이를 수 있는 가까운 거리지만, 읍내 또는 장터 문화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과거에는 열두 통명이라 하여 자연마을이 12개였고 가구도 200호가 넘었으나, 현재는 약 150 가구 정도 되는 제법 큰 마을로서 노티기, 웃마, 동쪽마, 골마, 황계골, 땅골 등 6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웃마 주위에는 안씨들이 많이 살고 황계골에는 처음에 황씨들이 살다가 지금은 구씨들과 김씨들이 살고 있다. 생업은 이 지역 농촌이 다 그러하듯이 벼농사를 주로 하되 잎담배와 고추 등 경제작물도 많이 경작하고 있다. 통명(通明)이라는 지명은 마을 주변의 지형을 고려하여 지었다고 한다. 마을 안에 작은 시내가 흐르는데, 이 시내가 마을 가운데로 통하고 있기 때문에 ‘통할 통(通)’자를 따오고, 그 시내 좌우로 형성되어 있는 산의 모습이 동쪽으로 월(月)자 형국을 이루고 서쪽으로는 일(日)자 형국을 이루고 있어서 이 두 형국을 합하여 ‘밝을 명(明)’자를 따와서 통명동(通明洞)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통명동의 역사는 고려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사>에 이미 통명동의 지명이 등장한다. 이 책에 의하면 통명역은 상주도(尙州道) 소속으로서 보주(甫州) 동쪽 7리로 되어 있는데, 이때 보주는 예천의 옛이름이다. <세종실록지리지>와 <경국대전> 등에도 통명이 예천의 동쪽 7리에 있으며 창락도(昌樂道) 소속의 역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마을은 고려 이래로 줄곧 통명역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농촌마을의 성격과 역마을의 문화적 성격이 함께 전승된다고 할 수 있는데, 통명동 농요는 앞의 성격에 해당되는 문화이다. 통명동 농요가 독자성을 지니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문화적 특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마을을 처음 개척한 사람은 해주 오씨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의 입향시조인 해주 오씨는 고려가 망한 뒤에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왕위에 오르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충절의 마음 때문에, 조선 왕조의 벼슬살이를 거부하고 이 마을에 들어와서 다래넝쿨을 치고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 오씨들은 대대손손 외동으로 내려오게 되었고, 통명동을 떠나서 객지생활을 하면 생활형편이 좋지 않게 되어 다시 통명동으로 돌아와 살았다고 한다. 현재는 입향시조의 21대손인 해주 오씨 한 가구가 살고 있다고 하니, 약 6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셈이다. 통명농요는 논농사 노동요로서 벼농사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특히 모내기 소리와 논매기 소리는 모두 이앙법에 의한 벼농사가 시작된 이후에 형성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밭처럼 물을 대지 않는 마른 논을 고르고 종자를 뿌려서 경작하는 직파(直播) 재배가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통명농요도 우리 나라에 모내기에 의한 벼농사 경작법이 시작된 이후에 비로소 생겨났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통명농요의 생성 시기는 이앙법이 보급된 조선중기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강원희 선생의 조사에 의하면, 이 농요를 부른 사람으로는 통명동을 개척한 해주 오씨 가운데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생존했던 오만석(吳萬石)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2) 문화적 배경과 ‘마당굿’ 마을에는 여러 가지 전통문화가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다. 통명농요 외에 두드러진 것이 천지제(天地祭), 마당제(馬堂祭), 마당놀이, 통명유기, 풋굿, 통명민요 등이다. 천지제는 통명동의 동제나 다름없다. 정월 열나흗날 밤에 ‘천지들’이라고 하는 들녘의 ‘천제등’에서 동민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천신과 지신께 올리는 일종의 동제인데, 역마을의 성격 때문에 서낭신이나 동신이 아닌 천지신께 제사를 올린 것이 아닌가 한다. 돼지를 익히지 않고 제물로 썼으며, 제관들은 제사 도중에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한지로 입을 바르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특징이다. 천지제와 마당제, 그리고 마당놀이로 하는 풍물과 판굿, 광대놀이, 지신밟기 등은 사실상 마당굿의 일환이다. 다른 마을에 비하여 마당을 중심으로 제의가 베풀어지고 놀이와 판굿이 있는 것은 역마을의 독특한 성격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역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하여 규모가 클 뿐 아니라, 마당을 섬기는 제의와 함께 대규모의 집단놀이가 이루어졌는데, 통명동의 경우는 마당제와 마당굿이 그러한 구실을 담당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3) 통명동의 민요 전승과 농요 통명동은 역마을이기 전에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농촌마을이다. 역마을로서 마당굿 문화의 전통이 강한 것 못지 않게 농촌마을로서 민요가 아주 발달했다. 논농사 노동을 중심으로 한 통명농요 8가지 외에, 집터 다지는 소리로서 ‘지점소리’가 있고 장례의식요로서 상여소리와 술렁수소리, 덜구소리가 현재까지 전승된다. 술렁수 소리도 일종의 상여소리인데, 평지가 아닌 가파른 언덕이나 산비탈을 오를 때 부른 소리이다. 평지에서는 후렴구가 “오호오 오호오 에헤이야 오호오”로서 4음보격으로 부르는데, 오르막에서는 ‘술렁-수여’라고 하여 1음보격으로 부른다. 이들 남성들의 민요는 한결같이 선후창으로서 앞소리의 메김소리와 받는 소리의 후렴구로 이루어져 있다. 통명농요가 한결같이 선후창으로 노래되는 것도 이러한 가창방식의 경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성민요로는 ‘시집살이 노래’와 ‘삼삼기 노래’, ‘베틀 노래’ 등 길쌈 노동요가 있는가 하면, 정혼한 동무를 놀리는 ‘근친 노래’, 신세타령의 일종인 ‘밭매기 노래’, ‘과부타령’ 등이 있다. 놀이 노래도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다. 안동의 놋다리밟기와 유사한 ‘재애밟기’와 ‘그네노래’, ‘도해따기’, ‘꼬리따기’, ‘송아지따기’ 등이 있다. 재애밟기는 ‘다리밟기’라고도 하는데, 안동 ‘놋다리밟기’와 비슷한 놀이로서 여성들이 앞사람의 허리춤을 두 팔로 껴안고 땅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면, 재애를 밟는 사람이 좌우 두 사람의 보조를 받으면서 등을 밟고 지나간다. 재애는 기와를 일컫는 말이다. 노래의 양식도 놋다리밟기와 같이 문답형식의 교환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소리의 ‘재아 한쌍 밟아보세’와 뒷소리의 ‘밟아보게 밟아보게’를 한 연마다 되풀이하는 점은 독자성을 지닌다. 도해따기는 여성들이 두 편으로 갈라서서 각 편별로 다시 둘로 나뉘어 줄을 선다. 둘 가운데 한 줄은 서고 한 줄은 앉는다. 선 줄 가운데 힘이 제일 센 사람이 앞에서 나무를 껴안고 서면 나머지는 뒤로 앞사람의 허리를 껴안고 늘어선다. 앉은 줄은 앞사람의 허리를 껴안고 앉아 있는다. ‘이 도해가 누 도핸고’하고 앞소리를 하면, ‘나라님의 옥도핼세’하고 받는 소리를 한다. 때로는 문답 형식으로, 때로는 댓구 형식으로 교환창으로 노래를 부른다. ‘도해’는 도해(豚孩)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노래가 끝나면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서 나무를 잡고 서 있는 상대편 줄에 달려가서 맨 뒤에 있는 사람의 허리를 잡고 한 사람씩 따온다. 먼저 나무를 잡고 있는 사람까지 따오면 이긴다. ‘꼬리따기’와 흡사하되, 나무를 붙잡고 서 있으며 따내는 사람과 붙들고 서 있는 사람의 역할이 구분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여성 민요는 크게 두 가지 가창 방식을 이룬다. 길쌈노동요나 시집살이 노래처럼 독창 또는 제창(齊唱)으로 부르거나 아니면 교환창으로 부른다. 여성들의 놀이 노래들은 남성들의 농요와 달리 선후창보다 교환창 양식의 노래문화를 이루고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여성들의 놀이 전개는 대부분 두 편으로 나뉘어져서 겨루기를 하는 가운데 노래의 내용과 함께 진행되므로, 남성들이 획일적으로 하는 노동요 동작과 달리 선후창이 아닌 교환창이 적격이다. 남성들의 농요는 일꾼들의 정서를 표현하는 서정민요가 대부분이지만 여성들의 놀이노래는 놀이의 진행을 나타내는 문답 형식의 교환창이므로 희곡민요에 속한다. 통명동이 이처럼 많은 민속문화와 민요 유산을 가지게 된 것은 농촌마을로서 문화적 자산과 역마을로서 인적 물적 자산이 결합된 결과로 볼 수 있다. 농촌마을이라도 가구수가 적고 논이 적으면 논농사 노동요가 제대로 형성될 수 없다. 그리고 가구수가 많아서 인적 자원이 확보되고 경제적 기반이 확충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농촌이 아닌 읍촌에서는 각종 민속문화와 함께 농요 유산이 생성 전승되기 어렵다. 그런데 통명동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서 공동노동의 관행이 두루 정착되어 있을 뿐 아니라, 역마을로서 열두 통명을 하나의 공동체로 아우를 수 있는 구심점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수 동민들의 참여로 민요적 역량이 축적되고 넓게 확보된 논들의 경제적 기반이 농요의 창조적 전승을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통명농요의 자리매김
(1) 통명농요의 민요적 특성 통명농요 가운데 모내기 노래는 경북의 다른 고장의 모내기 노래와 달리 교환창으로 부르지 않고 선후창으로 부르는 가창방식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앞소리 사설이 특히 길고 유장하게 이어지는가 하면, 뒷소리 후렴구도 독특하여 다른 고장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후렴구는 지역에 따른 차이가 크지 않고 상투적인 전형성을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통명농요는 모내기 노래처럼 한결같이 독자적인 후렴구를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도움소’라든가 ‘캥마쿵쿵 노세’와 같은 것이 좋은 보기이다. 통명농요의 음악적 특징은 경북민요 일반이 그러하듯이 그 선율이 메나리토리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반주가 없기 때문에 일정한 장단이 없고 그 리듬도 자유롭다. 한 배가 느린 소리는 범패와 닮은 데가 있다. 범패의 짓소리는 길고 규모가 크고 장엄하며, 발성은 억세고 꿋꿋하다. 논매기 소리의 긴소리는 이러한 범패의 특징과 흡사하다. 범패가 종교의식의 노래이므로 사설을 어휘 차원으로 표현하지 않은 것처럼, 논매기의 긴소리도 뜻이 없는 소리로만 이루어져 있다. 긴소리의 음들을 정리해보면 메나리토리의 음계와 일치한다. 그러나 통명농요는 메나리조와 구별되는 독자성이 있다. 메나리토리의 음계는 대개 ‘라’나 ‘미’로 끝을 낸다. ‘미’로 진행하는 선율은 반드시 ‘라-(솔)-미’의 틀을 지니고 있다. ‘라’와 ‘미’의 완전 4도 사이에 짧은 시가의 ‘솔’이 꼭 끼어야 메나리토리의 맛이 난다. 그러나 통명농요의 긴소리는 이와 달리 ‘솔’에서 끝을 낸다. 그리고 ‘미’에서 끝을 낼 때는 반드시 ‘도-미’로써 ‘미’가 한 옥타브 위로 배치된다. ‘도’ 소리는 길게 점점 센 소리를 내다가 강한 소리 ‘미’로 나아간다. 따라서 메나리토리의 애잔함보다 장대한 느낌이 나며, 산간 지방의 아기자기한 정서보다는 들녘의 꿋꿋한 기상이 긴소리를 통해 전해진다. 그러므로 통명농요는 메나리토리와 미묘한 차이를 보이면서도 경북의 다른 고장 들노래와 같은 개성을 지니므로, 이를 경상도 조(調)로서 특징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긴소리뿐만 아니라 앞소리 사설에서도 나타난다. 이를테면 ‘ㅎ'을 강조해서 부르는 것도 이러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를테면 ’먼데 사람 듣기 좋게‘를 ’먼데헤 사라함 듣기히좋게헤‘라고 하여 경쾌하고 힘있게 부르는 것이다. 통명농요의 또 다른 특징은 가창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경북지역의 모내기 노래는 “상주함창 공검못에 연밥따는 저처녀야/연밥줄밥 내따줌세에 내품안에 잠들어라‘와 같이 교환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통명농요는 앞소리꾼이 앞소리 사설을 메기면 뒷소리꾼들이 후렴구를 받는 방식, 곧 선후창으로 불려진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선후창의 방식도 특이하여 앞소리의 끝에 뒷소리의 일부분이 이어져 불리어진다. 그리고 앞소리가 끝이 날 때는 뒷소리가 이어지는 부분이 쉬는 대목 없이 그대로 이어져서 두 소리가 한데 어울리도록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다시 말하면 앞소리의 메김 사설과 뒷소리의 후렴구가 겹치면서 2중창과 같은 화음을 낸다는 것이다. 뒷소리 가운데에 ‘꼴뚜’라고 하는 대목이 설정되어 있는 것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앞소리꾼이 사설을 메기다가 잊어버렸거나 사설이 막혔을 때, 그리고 숨이 차서 소리를 제때 메기기 곤란할 때, 뒷소리꾼들이 이를 메꾸어주느라 뒷소리 중에 사설을 넣어서 ‘이팔청춘 소년들아’하고 부르는 대목을 ‘꼴두’라고 한다. 그러한 역할을 하는 일꾼도 ‘꼴두’라 일컫는다. 통명농요는 모내기 노래 ‘아부레이 수나’로부터 시작해서 모내기를 끝내고 나오면서 부르는 ‘도움소’, 논매는 소리인 ‘애벌매기’, ‘긴 상사듸여’, 다 매갈 무렵의 ‘방애소리’ 논 밖으로 나오면서 부르는 ‘에이용’ 소리, 장원질 소리인 ‘캥마쿵쿵 노새’와 잘개타작 소리인 ‘봉헤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볍씨 담그기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나 모를 찌면서 부르는 노래는 없다. 모두 집단적인 노동을 할 때 부르는 노래로서, 모내기와 논매기, 타작 등 실제적인 논농사 노동 외에, 일을 마치고 나서 또는 논둑으로 나오거나 집으로 돌아오면서 부르는 노래들이 발달되어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통명농요는 메나리토리와 유사하면서도 경상도 조로써 독창성을 지니며, 경북농요로써 보편성을 지니면서도 통명농요로서 개성을 지닌 후렴구와 가창방식을 통해 그 독창성을 확보하고 있어 문화재로서 특히 주목된다. (2) 논농사 노동요와 두레 통명농요는 크게 8가지 노래로 이루어져 있는 논농사 노동요다. 여는 민요에 비하여 농요는 특히 집단적으로 불려진다. 자연히 두레 노동의 진행과 더불어 전승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두레 노동은 주로 논농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통명농요도 주로 논농사와 관련되어 불려지는 것으로서 논농사 일의 진행에 따라 노래가 구성되어 있다. 논농사 일은 볍씨 담그기로부터 시작된다. 볍씨 담그기 다음은 못자리를 하고, 못자리의 모가 자라면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 모를 찐다. 따라서 논농사 노동요는 볍씨 담그기 노래에서, 못자리노래, 모찌는 노래로 이어진다. 그러나 통명동에서는 볍씨 담그기 노래나 모찌기 노래 등은 전하는 것이 없다. 본밭에다 모내기를 할 때부터 비로소 농요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모내기 이전의 노동은 소규모로 하는 가족 노동이다. 소규모 노동활동에서 농요가 널리 불려지기 어렵다. 그러나 모내기부터는 여러 사람이 더불어 참여하는 집단적 두레 노동이다. 논매기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므로 통명농요는 두레 노동과 같은 집단적 농업 노동을 기반으로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내기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가 ‘아부레이 수나’이다. 대체로 모노래 또는 모숭기 노래라고 하는데, 후렴구가 독특하기 때문에 이제 노래 제목으로 굳어졌다. 모내기를 마치고 논둑으로 나오면서 부르는 노래로 ‘도움소’가 있다. 이동 중에 부르는 노래는 특별한 기능이 없으므로 으레 후렴구가 있으면 후렴구가 노래 제목 구실을 한다. 쾌지나 칭칭이 대표적인 보기이다. 논농사에서 모내기 다음으로 가장 큰 일이 논매기이다. 논을 매면서 논매기 소리로 ‘애벌매기’를 부르고, 논매기를 끝내고 나서는 ‘상사듸여’를 부른다. 고장에 따라서는 아이논매기·두불논매기·시불논매기 소리가 별도로 있으나 여기는 애벌논매기 소리뿐이다. 논매기를 끝내고 나서 모를 세워가며 논둑으로 나오면서 ‘방애소리’를 부른다. 모를 다 세우고 나면 논 밖으로 나와서 다음 논으로 이동한다. 이때 부르는 소리가 ‘에이용 소리’이다. 저녁 나절에 논들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캥마쿵쿵 노세’를 부른다. 일종의 행진곡인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작 소리로 ‘봉헤야’를 부른다. 이로써 논농사 일은 일단락 진 셈이다. 이상 여덟 가지 소리를 살펴본 결과 통명농요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일노래 자체가 아니라, 일을 마치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부르는 노래의 비중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레 일을 하는 일꾼들은 그냥 이동하는 법이 없다. 풍물을 잡히면서 이동을 하거나 아니면 노래를 부르면서 열을 지어 이동을 한다. 통명농요 8가지 소리 가운데, 모내기 소리인 ‘아부레이 수나’, 논매기 소리인 ‘애벌매기’, 그리고 타작 소리 ‘봉헤야’를 제외하면 사실상 ‘도움소’ 소리나 ‘상사뒤여’, ‘방애소리’, ‘에이용 소리’, ‘캥마쿵쿵 노세’는 모두 이동 중의 소리이다. 모내기와 논매기 때만 농요를 부른 것은 아니다. 일을 마치고도 농요를 부른다. 논매기가 모두 끝나는 음력 7월 중순 무렵이면 농가도 제법 한가하다. 논매기뿐만 아니라 풀베기와 길닦기도 마친다. 논농사 관련 큰 일이 모두 끝나면 그 동안 수고한 일꾼들을 쉬게 하는 머슴날을 정한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7월 백중 전후이다. 통명동에서는 7월 3일이 머슴날이다. 머슴날이라고 하지만 머슴만 노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 논다. 풀을 다 베었다고 풀굿 곧 ‘풋굿’이라고도 하며, 논매기를 끝내고 호미를 씻어서 보관한다는 뜻으로 ‘호미씻이’라고도 한다. 이 때도 일꾼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풍물을 치고 농요를 부른다.
통명농요의 유형과 후렴구
통명농요의 개성은 후렴구에서 두드러진다. 다른 고장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독자적 후렴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모내기를 하면서 부르는 ‘아부레이 수나’ 또는 ‘도움소’노래는 그 후렴구가 특히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후렴구는 노래의 음악적 가락을 유지하는 구실만 하나, 통명농요의 경우는 문학적 사설로서 노랫말의 뜻까지 담고 있다. ‘아부레이 수나’는 논에 심은 모가 흩어지지 말고 어울려서 가지를 잘 뻗어달라는 뜻을 담고 있다면, ‘도움소’는 모내기의 바쁜 일손을 도와 달라거나 또는 서로 일손을 도와서 일을 잘 하자는 뜻을 지니고 있다. ‘상사디여’나 ‘방애소리’ 또는 ‘타작소리’의 후렴구는 다른 고장의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논매기 소리 후렴구로 ‘어허 룰루 상사디여’라고 곧잘 할 뿐 아니라, 방애소리의 경우도 ‘오호로 방해야’라고들 한다. 타작소리의 경우에는 ‘옹해야’라고 하여 ‘봉헤야’와 음운은 달라도 가락은 거의 같다. 그러나 ‘캥마쿵쿵노세’는 후렴구가 독특하다. 두레패들이 이동 중에 부르거나 마당놀이를 할 때 춤을 추며 부르는 소리로 ‘쾌지나칭칭 나네’와 같은 기능을 하는 셈인데, 경상북도 북부지역에서는 이를 ‘치야 칭칭 나네’로 후렴을 붙이기도 한다. ‘캥마쿵쿵노세’는 ‘쾌지나칭칭’처럼 징과 장구, 북, 꽹과리 등의 악기 소리를 의성어로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한다.
남도들노래
남도들노래는 전라남도 진도지방 농요의 하나이다. 진도는 전라남도의 서남단 다도해상에 위치하는 섬이지만, 중앙에 첨찰산(尖察山)이라는 얕은 산을 제외한 나머지가 넓은 평야로 주민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 들노래는 그 형식과 내용으로 볼 때 지산면을 중심으로 한 유형과 임회면을 중심으로 한 유형이 있는데, 이것은 진도의 지리적 조건에서 오는 현상이다. 즉, 과거의 교통사정으로 볼 때 지산면은 목포로 통하고, 임회면은 해남으로 통하기 때문에 서로 거리로는 가까우나 교류가 없는 상태에 있었다. 지산면의 들노래는 임회면의 들노래에 비하여 노래곡 수가 조금 많고, 음악적인 면에서도 약간 세련되어 있다. 지산면의 노래를 바탕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논일을 하면서 부르는 모뜨는 소리에 <모뜨는 소리>·<자진 모뜨는 소리>가 있고, 못소리에 <못소리>·<잦은못소리>가 있으며, 절로소리에 <긴절로소리>·<중절로소리>·<자진절로소리>·<길꼬냉이>가 있다. 다음에 밭일을 하면서 부르는 소리로는 콩밭노래와 미영밭노래로 나눌 수 있다. 노래의 형식은 작업요(作業謠)이니만큼 선소리꾼이 독창으로 메기면 여러 사람들이 합창으로 받는다. 사설내용은 이 소리 저 소리에서 끌어내어 사용한다. 봄철에 논을 갈고 못자리에 모가 자라면 농민들은 품앗이로 여럿이 못자리에 나가 모를 찐다. 모를 찌면서 목청 좋은 이가 선소리꾼이 되어 모찌는 소리를 길고 구성진 가락으로 부르면, 여러 사람이 제창으로 후렴구를 받는다. 모찌는 소리를 이 고장에서는 ‘모뜨는 소리’라 부르며, 중모리 장단에 맞춘다. 모판의 모를 다 찔 무렵에 자진 모뜨는 소리를 부르는데, 빠른 중중모리 또는 자진모리장단에 맞춘다. 모를 다 쪄서 물을 댄 논에 흩어놓으면 농민들이 꽹과리·장구·북·징 등의 풍물을 두드리며 온다. 농민들은 일렬로 늘어서서 모를 심고 북잡이는 논에 들어서서 왔다갔다 하며 북을 두드리는데, 이것을 ‘모북’ 또는 ‘못방구’ 친다고 한다. 북을 치는 사람은 그 복식이 다른 사람과 달라 머리에는 길다란 수건을 감고 그 위에 삿갓을 쓴다. 이 삿갓은 굉장히 커서 그대로 쓰고 있으면 앞이 안 보일 정도의 크기이고 거의 팔꿈치까지 덮는다. 이 삿갓을 쓰고 다른 지방과는 달리 북채를 양손에 쥐고 북을 친다. 이 때 좌우로 몸을 움직이면 삿갓이 물에 잠기게 되고, 이 물을 좌우로 뿌리면서 흥겹게 북을 친다. 이 모양은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못방구가 둥딱 둥딱궁 흥겹게 중모리장단을 치는 가운데 못소리를 한다. 이 지방에서는 모심는 소리를 ‘못소리’ 또는 ‘상사소리’라 부르는데 그 가락은 모뜨는 소리와 같다. 자진 모뜨는 소리는 모뜨는 소리에 잇대어 부르는데, 간식(진도방언으로는 ‘술참’)을 차려놓았다든가 점심을 이고 오는 아낙네가 가까워 온다든가, 또는 그 날의 모심기가 거의 끝날 무렵이라든가 할 때에는 자진모리장단으로 빠르고 흥겹게 부른다. 모심기가 끝나고 벼가 자라면 김을 매게 된다. 김매기는 초벌·두벌·세벌 만두레와 같이 여러 차례를 매게 되는데, 농민들은 ‘두레’라 하여 김매기 공동노동조합을 만들고 집단작업을 하게 된다. 두레에는 반드시 꽹과리·징·장구·북 등을 사용하고, 농기·영기 등 울긋불긋한 깃발을 만들어 들고, 아침 일찍 논으로 나갈 때에는 마을 어귀에서 악기를 두드려 일꾼을 모아 <길군악> 가락을 행진곡 삼아 부르며 논으로 간다. 논에 이르면 논두렁에 농기를 꽂아놓고 김을 맨다. 쇠잡이 몇 사람이 풍장가락을 치는 가운데 농민들은 느린 진양조 장단에 맞추어 김매기소리인 ‘절로소리’를 부른다. 김매기 소리를 ‘절로소리’라고 한 것은 후렴구의 끝이 모두 ‘하 절로로야’로 끝맺고 있기 때문이다. ‘긴절로소리’에서 차차 흥이 무르익으면 ‘중절로소리’로 넘어가는데 중모리장단에 맞춘다. 중절로소리를 부르다가 간식이 나온다든가 점심때라든가, 또는 그날 논매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일손을 빨리 놀리기 위하여 자진모리장단에 맞추어 자진절로소리를 신나게 부른다. 이 자진절로소리를 일명 ‘풍장소리’라고도 부른다. 세벌 김매기(진도에서는 ‘만물’이라 하고, 육지에서는 ‘만두레’라고 한다.)가 끝나면 그 마을은 날을 받아서 술과 고기를 장만하여 즐기며 길꼬냉이를 부른다. 이 노래는 지춘상의 발굴로 1971년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다.
강강술래
강강술래는 전라남도 서남해안지방에 전승되는 추석의 민속놀이로써,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이다. 주로 해남·완도·무안·진도 등 전라남도 해안일대에서 성행되어 왔다. 노래와 무용과 놀이가 혼합된 부녀자들의 놀이로 주로 추석날밤에 행해지며 정월 대보름날밤에 하기도 한다. 명칭은 ‘강강수월래’ 또는 한자로 ‘强羌水越來’로 표기하는 일도 있으나 ‘강강술래’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진양조로 느리게 노래를 부를 때는 ‘강강수월래’로 길게 발음된다. 강강술래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전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이순신(李舜臣)과 관련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해남 우수영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적군에 비하여 아군의 수가 매우 적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마을 부녀자들을 모아 남자차림을 하게 하고, 옥매산(玉埋山) 허리를 빙빙 돌도록 했다. 바다에서 옥매산의 진영을 바라본 왜병은 이순신의 군사가 한없이 계속해서 행군하는 것으로 알고, 미리 겁을 먹고 달아났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근처의 마을 부녀자들이 서로 손을 잡고 빙빙 돌면서 춤을 추던 관행이 강강술래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강강술래>의 기원은 이순신의 창안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 있으며, 한자로 ‘强羌水越來’라고 표기하고,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해석은 바로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강강술래>는 원시시대의 부족이 달밤에 축제를 벌여 노래하고 춤추던 유습에서 비롯된 민속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대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달의 운행원리에 맞추어 자연의 흐름을 파악하였고, 따라서 우리나라 세시풍속에서 보름달이 차지하는 위치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즉, 달이 가장 밝은 추석날이나 정월 대보름날이면 고대인들은 축제를 벌여 춤과 노래를 즐겼고, 이것이 정형화되어 <강강술래>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전승된 <강강술래>를 이순신이 의병술(擬兵術)로 채택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널리 보급되고 더욱 큰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추석이 가까워지면 소년들에 의하여 <강강술래>가 시작된다. 이른바 ‘애기 강강술래’이다. 소녀들이 수명 또는 10여명이 모여 손과 손을 잡고 마당에 원을 그리면서 빙빙 돌며 노래하고 춤을 춘다. 이렇게 며칠을 계속하다가 음력 8월 14일 밤이나 15일 밤에는 어른들에 의해 본격적인 <강강술래>가 벌어진다. 동쪽 산 위에 만월이 솟아오르기 시작하면 젊은 아낙네와 큰애기들이 마을의 넓은 마당이나 평지에 모여든다. 20-30명의 젊은 부녀자들이 모이고 달이 뜨면 아낙네들은 손과 손을 잡고 오른쪽으로 돌면서 <강강술래>를 시작한다. 목청 좋고 소리 잘 하는 여인이 맨 앞에 서서 메기는 소리를 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강강술래’하고 받는 소리를 한다. 노래는 처음에는 진양조의 느린 가락으로 부르다가 중모리·중중모리로 차츰 빨라져서 마지막에는 자진모리로 매우 빠르게 부르며, 이에 따라 춤도 빠른 속도로 추게 된다. 한바탕 뛰고 노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고, 맨 앞에서 노래를 선창하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다. ‘강강술래’ 소리는 구절마다의 후렴이며, 가사는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가창자에 따라 즉흥적으로 얼마든지 길게도 짧게도 부를 수가 있으며, 가락 또한 완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집살이노래>나 <베틀가>가 중간중간에 삽입될 수도 있고, 타령이나 노랫가락의 구절이 삽입되는 수도 있다. 가락은 육자배기와 마찬가지로 미·라·시·도·레의 전형적인 남도음악의 계면조로 되어 있다. -진양조- (선창) (후렴) 술래술래/강강술래 강강술래 술래좋다/강강술래 강강술래 달떠온다/달떠온다 강강술래 동해동창/달떠온다 강강술래 팔월이라/한가위날 강강술래 술래술래/강강술래 강강술래 각시님네/놀음이라 강강술래 (중략) -중모리·중중모리- 오동추야/달은밝고 강강술래 우리임생각/절로난다 강강술래 임아임아/노이나마라 강강술래 너줄라고 해온보신 강강술래 너안주고/누구를줄까 강강술래 -자진모리- 술래술래/강강술래 강강술래 강강좋다/술래돈다 강강술래 앞에가는/군사들아 강강술래 발맞춰서/뛰어가세 강강술래 곁에사람/보기좋게 강강술래 먼데사람/듣기좋게 강강술래 억신억신/뛰어가세 강강술래 (하략) <강강술래>의 춤은 우리나라 춤 가운데서 유일하게 손을 잡고 추는 집단무용으로 원무(圓舞)를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중간에 여러 놀이가 삽입된다. 왼손을 앞으로 하고 오른손을 뒤로 돌린 자세에서 왼손으로 앞사람의 오른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뒷사람의 왼손을 잡아 원형을 만든다. 잡을 때는 손가락을 오므려서 상대방의 손가락과 얽어쥐게 된다. 선창자의 노래에 맞추어 서서히 발을 옮겨 원을 그리면서 왼쪽으로 돈다. 처음에는 진양조로 느린 가락에서 시작하는데, 이를 ‘늦은강강술래’, 또는 ‘긴강강술래’라고 한다. 그러다가 중모리·중중모리장단의 ‘중강강술래’에서는 보통 걸음보다 약간 느린 걸음으로 돌다가 가락이 차츰 빨라지면서 가볍게 어깨놀림이 시작되고, 손의 잡음도 넓어지면서 원이 넓게 벌어진다. 자진모리장단의 ‘자진강강술래’에서는 가락이 급해지며 춤도 여기에 맞추어 빨라진다. 발디딤은 ‘하나’에 왼발 무릎을 굽혀 올리면서 원주상으로 양발을 뛰고, ‘둘’에는 왼발을 오른발 앞으로 교차하여 힘차게 왼발로 마당을 밟는다. 이러한 동작을 반복하면서 원주상을 돌아가다가 속도가 아주 빨라지는 마지막에는 손을 힘차게 흔들면서 1박에 두발을 연달아 뛰면서 돈다. 그래서 아낙네들은 ‘한바탕 뛰자.’고 한다. 이렇게 원무를 추다가 흥이 나면 중간에 다른 놀이들이 삽입된다. 예컨대 <남생이놀이>·<멍석말이>·<고사리꺾기>·<청어엮기>·<문열기>·<기와밟기>·<쥔쥐새끼놀이>·<가마등>·<도굿대당기기>·<수건찾기>·<품고동>·<봉사놀이> 등이 잇달아 놀이를 한층 즐겁게 만든다. <남생이놀이>는 원무의 원 안에 두세 사람이 자유롭게 뛰어들어 가락에 맞추어 손을 위로 들거나 춤추면서 뛰어다니다가 제자리로 들어가면, 다음에 다른 사람이 뛰어들어 같은 모양의 춤을 추게 되는 것을 말한다. <멍석말이>는 마치 멍석을 말 듯이 맨 앞의 선두가 작은 원으로 춤형태를 바꾸고 모두 한덩어리가 되면, 속에서부터 풀며 나오는 춤이다. <고사리꺾기>는 춤추는 사람들이 모두 앉고 맨 앞의 선두가 일행을 끌고 앉은 사람의 팔 위로 차례로 넘어가서 모두 일어서는 동작이며, <청어엮기>는 어깨 밑으로 빠져나가는 동작, <문열기>는 모두 허리를 굽혀서 앞 사람의 허리를 두 팔로 끌어안고 두 사람이 팔을 들고 만든 문 밑으로 빠져나가는 동작이다. <쥔쥐새끼놀이>는 꼬리따기놀이와 같은 동작으로 상대방의 꼬리를 잡으려고 한다. <가마등>은 가마타기놀이의 모의희(模擬戱)로 두 사람이 손을 잡아 정자형(井字型)으로 가마모양을 만들어 그 위에 한 사람을 태우고 마당을 돌아다닌다. 이 놀이는 편을 갈라 일정한 거리까지 갔다오는 경주를 벌이기도 한다. 이와같은 놀이들에는 동요풍의 노래가 삽입되어 불려진다. <강강술래>에 이처럼 여러 유희가 혼합되는 것은, 1년에 한번 맞이하는 만월의 명절에 흥겨운 판이 벌어져 여러 놀이가 한 마당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놀이나 노래에 일정한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끌어가는 사람에 의하여 얼마든지 신축성 있게 놀이가 진행될 수 있다. 또한 한 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초저녁부터 시작하여 밤이 깊도록 놀기 때문에 선창자도 교체되고 이에 따라 놀이도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1965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 계승되고 있으며, 기능보유자로 창(唱)에 양홍도(梁紅道)와 김길임(金吉任)이 인정되었는데, 양홍도가 사망한 뒤에 최소심(崔小心)이 인정되었다.
고성농요
고성지방은 옛 소가야의 도읍지이다. 고성농요는 하지 무렵부터 시작되는 농사소리가 주축을 이루며, 등지라고도 한다. 등지란 모내기소리를 뜻하는 경남지방의 사투리이다. 고성지방 농민들은 힘든 일을 할 때 땀방울과 고달픔을 농요를 부르면서 씻어왔고 농요를 통하여 단결심을 강조하여 일의 능률을 올려 왔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경상감사가 고성 들판을 지나다가 모내기하는 농민들의 등지 소리에 도취되어 행렬을 멈추고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마을에서 밤을 새웠다 한다. 고성농요는 하지무렵의 모내기 이후 그 15일 뒤의 아시논매기 및 맘논까지 약 두 달 사이에 불리워지는 노래들과 부인네들이 주로 겨울철에 하던 베짜는 작업에 관한 노래들로 엮어져있다. 모판에서 모를 찌면서 부르는 <모찌기등지>·<조리자>, 모를 심을 때 부르는 <모심기등지>·<더디다>·<해그름소리>, 보리타작하며 부르는 <도리깨질소리>, 김맬 때 부르는 <상사소리> 및 <방아타령> 등으로 이밖에 부녀자들이 삼을 삼으면서 부르는 <삼삼기소리>, 물레질하며 부르는 <물레타령> 등이 있다. 고성농요를 마당놀이로 공연할 때는 <모찌기소리>, <모내기소리>, <도리깨질소리>, <삼삼기소리>, <논매기소리>, <물레질소리>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등지는 모낼 때의 긴소리로, 경상도 교창식 모노래의 고성형이다. '조리자'와 '더디다'는 멕받형식의 잦은 소리이며 서로 선율이 같다. 조리자란 모판을 줄여 들어가자는 의미이며 진양·함안·창녕·양산·울주·밀양·경주·칠곡·금릉군에서도 발견된다. 더디다는 전파범위가 좁지만 진주시에서도 수집된다. 삼삼는 소리와 베틀노래의 선율도 서로 동류이다. 고성농요의 노랫말엔 이 고장 농민들의 생활감정이 풍부하게 담겨 있으며 향토적인 정서가 물씬 풍긴다. 그리고 투박하고 억센 경상도 특유의 음악성을 간직한 경상도 노래이지만, 지리적인 영향으로 음악적인 면에서는 전라도의 계면조 선율구조로 되어 있다. 고성농요는 경상도의 모내는 소리와 논맴소리(상사, 방애)를 전라도의 민요 창법으로 부르는 점, 모내는 소리에 아침·점심·저녁노래의 구별이 있는 점, 각종의 받음구 및 삼삼는 소리 등이 모두 경상도 모노래권의 서남지역적 특징을 말해준다. 고성농요는 <모찌기노래>·<모심기노래>·<김매기노래>를 비롯하여 <도리깨타작소리>·<삼삼기노래>·<물레질노래>를 노동의 동작으로 입체화해서 놀이로 엮은 농사민요인데, 다섯 마당으로 구성된다. 첫째 마당에서는 모찔 때에 <긴등지소리>와 <짜른등지소리>인 <조리자>가 불려지며, 모심을 때는 <긴등지소리>인 <조리자>가 불려지며, 모심을 때는 <긴등지소리>와 <점심등지소리>인 <더디다>가 불려진다. 그리고 해질 무렵 <해거름등지소리>가 따로 있어 시간과 일의 내용에 따라 장단과 노랫말이 다르다. <모찌기노래>는 여러 명의 남녀 농부들이 덧뵈기가락에 춤을 추며 나와 모찌기작업을 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작업이 지루할 때 부르는 <긴등지>와 일손을 재촉 독려할 때 부르는 <짧은등지>가 있다. <모심기노래>도 모내기가 지루할 때 부르는 <긴등지>, 점심을 기다리는 <점심등지>, 해가 기울었을 때 부르는 <해거름등지>가 있다. <해거름등지>에는 모꾼들이 지루함을 잊고자 부르는 <긴등지>와 모내기가 거의 끝날 무렵 일을 빨리 마치고자 하여 부르는 <빠른등지>가 있다. 둘째 마당의 <도리깨소리>는 고성 특유의 메어 때리기식 도리깨질을 하면서 상도리깨의 지시에 따라 메기고 받는 소리에 힘이 저절로 솟음친다. 셋째 마당의 <삼삼기>는 한올 한올의 삼을 허벅다리에 비벼가면서 두레로 삼삼기를 하면서 조상을 공경하고 집안의 태평을 기원하거나 그들의 한을 표출하는 노래를 한다. 넷째 마당에서는 <논매기 노래>를 하는데 오전에 상사소리, 오후에 <방애소리>를 하며 논매기를 다 마치고, 큰 머슴을 괭이자루에 태우고 풍년을 기원하면서 <치기나 칭칭>으로 한바탕 즐긴다. <논매기노래>에서는 삼베 등지게를 걸치고, 머리에는 흰 수건을 메고 어떤 이는 푸른 나뭇가지를 등이나 허리에 끼운 10여명의 논매기꾼이 들어와 논을 맨다. 고됨을 달래기 위해 오전에는 상사소리, 오후에는 방애소리를 부르는데, 묵묵히 농사일에 충실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나라에 충성하자는 내용이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 마당의 <물레노래>는 여러 명의 부녀자가 직접 물레로 실을 뽑으면서 시집살이의 고달픔을 노래한다. 고성농요는 1972년 김석명 회장이 채집 발굴하여 제19회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 출전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수상하였으며, 1980년 3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가 1985년 12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고성농요는 50여 명의 회원이 보전에 힘쓰고 있으며 후계자 전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제주민요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은 1423년부터 조선말까지 정의현(靜義縣)의 현청이 있었던 곳으로, 성읍 민속마을로 알려져 있다. 성읍민요로는 밭김 매는 소리인 <홍애기>, <아웨기>와 <맷돌노래>, <방아 찧는 소리>(남방아, 연자매), 마소로 하여금 조발을 밟게 할 때 부르던 <발 밟는 노래>, <타작노래>와 같은 제주도적인 향취가 진한 노동요가 전해옴과 동시에 <봉지가>, <산천초목>, <동풍가>, <중타령>, <질군악>, <관덕정앞계화타령>, <삼아둥둥 내사랑>, <오강산타령>, <오돌또기> 등의 창민요(唱民謠)도 공존한다. 대개의 창민요는 500년 가까이 현청이 있었다는 정치, 문화적인 환경 탓에 본토로부터 영향을 받아 재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창민요의 장구장단은 2분박 또는 3분박의 두 종류 뿐으로 육지민요와는 다른 소박성을 띤다. 성읍민요는 선법과 가창방법이 다양하다. 구성음의 순열(順列) 그대로의 2도, 3도, 동도(同度) 진행곡의 예로는 <홍애기>, <아웨기>, <맷돌>, <연자매소리>가 있고 하강선율곡으로 <방아 찧는 소리>, <봉지가>, <산천초목>, <밭 밟는 노래>, <맷돌노래> 등을 들 수 있다.
전승자 정보
민요는 민중들 사이에서 저절로 생겨난 노래이며 주로 일노래이기 때문에 예술인을 지적하기 어렵다. 다만 현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민요들은 기능보유자가 있어서 그들을 중심으로 알아본다. 통명농요의 기능보유자는 통명동 주민 모두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모두 통명농요를 지키는 소리꾼들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 통명농요 앞소리꾼이자 소리패를 이끌었던 쇠잽이 이대봉과 앞소리꾼의 역량이 두드러진 이상휴는 기능이 가장 탁월하다고 인정되었다.통명농요를 알리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강원희가 처음으로 농요를 채록할 때 앞소리를 부른 사람은 함봉준이었다. 함봉준 이전에는 윤씨 할아버지와 안씨 할아버지 등 이 마을에 유명한 앞소리꾼들이 있었다. 함봉준은 18세 무렵부터 안근암(安根岩)으로부터 농요를 배우고 윤주만으로부터 풍물을 배웠다고 한다. 현재는 함봉준, 이대봉에 이어서 이상휴에게 앞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최근의 전승을 확인해 보면 안근암-함봉준-이대봉-이상휴의 순서로 계보를 이루고 있다.이미 고인이 된 기능보유자인 이대봉(李大鳳)은 1921년 2월 15일 예천군 용문면 사부리에서 4형제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어려서 형제들을 여의고 13세 때는 양친까지 사별하여 외톨이가 되자, 고향을 떠나 통명동으로 옮겨와 머슴살이를 하였다. 이대봉은 줄곧 어른들을 따라 농사일을 하며 농요을 익혔다. 풍물가락과 앞소리 솜씨가 탁월하여 말년에 농요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활동하던 중 1994년에 별세하였다.현재 기능보유자인 이상휴(李相烋)는 1933년 10월 28일생의 이 마을 토박이 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 간 서당에 다니면서 한학을 익혀 국한문을 두루 해독할 뿐 아니라 마을에서는 식자층에 속한다. 전형적인 농가에서 자라 철이 들면서부터 줄곧 농사일을 했으며, 그런 가운데 통명농요를 익히게 되었다. 목소리가 맑고 좋을 뿐 아니라 음악적 재능이 탁월하여 앞소리꾼의 자질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두 사람 이외에도 윤주만(尹周萬), 권오환(權五煥), 안용충(安龍忠) 등 40여명의 마을 어른들이 통명농요를 전승하고 있다. 전승은 삶의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익히고 터득하여 대대로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전승이 불가능할 정도로 농촌마을이 크게 바뀌었다. 왜냐하면 인위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전수활동에 의하지 않으면 민요의 전승이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을 정도로 논농사의 방식이 크게 바뀌었고 두레와 같은 집단 노동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연계정보
재구성개정판 국악통론, 서한범, 태림출판사, 1995.국악개론, 장사훈·한만영 공저, 사단법인 한국국악학회, 1975.국악대사전, 장사훈, 세광음악출판사, 1984.예천통명농요,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전통음악개론, 김해숙·백대웅·최태현 공저, 도서출판 어울림, 1997.최신국악총론, 장사훈, 세광음악출판사, 1995.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91.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일조각, 1984.한민족음악론, 권오성, 학문사, 1999.http://nongyo.com/ 고성농요http://urisori.co.kr/main.html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http://preview.britannica.co.kr/spotlights/paldosori/ 팔도소리http://www.kmusic.org 풍류마을http://www.ncktpa.go.kr 국립국악원http://www.koreandb.net 디지털한국학http://www.ocp.go.kr 문화재청
관련도서
개정판 국악통론, 서한범, 태림출판사, 1995. 국악개론, 장사훈·한만영 공저, 사단법인 한국국악학회, 1975. 국악대사전, 장사훈, 세광음악출판사, 1984. 예천통명농요,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전통음악개론, 김해숙·백대웅·최태현 공저, 도서출판 어울림, 1997. 최신국악총론, 장사훈, 세광음악출판사, 199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91. 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일조각, 1984. 한민족음악론, 권오성, 학문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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