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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개요정보

작품/자료명
인사동 개요정보
장르구분
인사동 문화지구
인사동길의 역사
인사동은 삼청동에서 시작한 개천이 흐르는 길을 따라 생긴 동리의 이름이다. 관훈동, 인사동을 거쳐 광통교로 흐르던 이 개울은 상업과 문화를 아우르는 서울의 역사를 껴안은 중심의 길이 된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관인방(寬仁坊)과 견평동(堅坪洞)으로 나뉘었으나, 1914년 4월1일 경기도 고시 제7호로 방계명(坊契名)을 동(洞)으로 개칭하면서 관인방(寬仁坊)의 ‘인(仁)’과 대사동(大寺洞)의 ‘사(寺)’를 조합해 지금의 명칭을 얻었다. 그 후 1936년 4월1일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인사정(仁寺町)으로 개명되었다가 해방 이후 1946년 10월 1일 다시 인사동(仁寺洞)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는 북쪽으로 관훈동, 동쪽으로 낙원동, 남쪽으로 종로2가와 적선동, 서쪽으로는 공평동과 접해있다. 인사동은 조선 초기부터 조선 미술 활동의 중심지로 형성되었다. 현재의 견지동에 화가들을 양성하는 국가기관인 도화서가 있어 중인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 미술은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문화 산업의 핵심이었으며 이는 지금의 인사동을 있게 한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종로와 인사동은 조선의 세도가들이 밀집해 살던 주요 거주지였다. 그들은 문화의 가장 든든한 지지세력이었으며, 당연하게도 그들의 주요 거주지 주변은 다양한 장인들의 거점지가 되었다. 조선 말 세도가들의 몰락은 인사동 태생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문화 비즈니스의 장소로서 인사동이 부상하게 된 것이다. 값진 골동품이 이곳으로 흘러 들어왔으며, 1930년대 인사동 주변은 골동품의 비즈니스 거리가 된 셈이었다. 인사동 주변에 서적 및 고미술 관련 상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해 골동품 거리로 자리잡게 된다. 일본인들에 의해 주로 매매되어 왔던 골동품들은 1945년 해방으로 내국인에게 매입되어 이어진다. 그 대표적인 곳이 통문관이다. 1909년생인 이겸로 옹은 9살 때 점원 생활을 시작해 1934년 통문관을 연다. 3대째 고서적만을 취급하는 곳으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1930년대에는 병원과 고가구점들도 많이 있었지만 한국전쟁 후 사라지게 되고, 지금의 낙원상가 아파트 자리에 낙원시장이 형성되어 평양떡집이 들어선 이후 현재와 같은 떡집골목이 생겨난다. 1950년대 말부터는 요정과 한정식집 등의 유흥업소가 증가하기 시작한다. 골동품을 사고 파는 데 빠질 수 없는 것이 술자리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 1970년대에는 출판사들도 모이기 시작했다. 1970년 이후 한국 최초의 상업화랑인 현대화랑(1970년)을 시작으로 인사동에 갤러리들이 하나 둘 생기고 본격적인 상업화랑, 기획화랑의 시대가 열린다. 현대화랑과 더불어 한국 화랑계의 3대화랑이라 불리던 동산방화랑과 선화랑 이외에도 관훈갤러리, 공갤러리, 노화랑 등은 30년이 넘는 세월을 인사동에서 보내며 한국미술시장과 성장을 같이 한다. 1974년 골동품에 대한 중과세 조치와 가짜 고서화 사건 등으로 골동품 상가들이 빠져나가면서 인사동은 화랑과 갤러리를 중심으로 1980년대까지 현대미술의 중심거리로 알려지게 된다. 1980년 이후 골동품, 고미술, 화랑, 고가구점, 화방, 민속공예품 판매점들이 다시 들어서면서 인사동은 전통문화의 거리로 자리잡게 된다. 1990년대 이후 고가의 고미술품의 공급이 한계에 다다르고 고미술품을 즐기는 이들도 줄어들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미술품에 대한 양도소득세가 종합소득세로 전환되면서 그 수요가 더욱 줄게 된다. 이러한 배경 하에 대중과의 교감을 위해 1997년부터 차 없는 거리 행사가 시작된다. 차 없는 거리 행사의 영향으로 인사동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된다. 특히 기존에 인사동을 찾던 중·장년층보다도 20~30대의 젊은이들이 많아지면서 인사동은 연령과 세대의 차이를 넘어 모든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새로운 미술품 구매자층의 형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젊은 세대를 겨냥한 국적불명의 소품 상점들과 커피숍, 오락실, 노점상들이 늘어났고, 한편으로는 인사동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이용한 전통찻집이나 음식점, 생활 한복 판매점 등이 생겨나게 된다. 이제 혹자들은 인사동이 더 이상 국적도 특색도 없는 묘연한 거리가 되었다고 걱정한다. 외국인들이 와서 무엇을 보고 가겠냐며 인사동에는 더 이상 한국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지금의 인사동에는 많은 것이 혼재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부딪히고 있다. 그러나 그 변화 속에서 쇠락을 거듭하면서도 일관되게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바로 인사동의 문화다. 문화는 고체로 정체되는 순간 멈춰버리고 후퇴하는 독특한 특성을 지녔다. 많은 걱정 속에서도 인사동은 가장 한국적인 거리 실험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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