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목수 아바이

작품명
목수 아바이
저자
박용숙(朴容淑)
구분
1970년대
작품소개
결핵으로 누워있는 나는 부모님이 싸우는 소리를 듣는다. 이제는 쓸모없게 된 아버지의 연장을 어머니가 엿장사한테 팔려 했던 것이다. 환갑의 퇴물 목수지만 아버지는 매일 연장을 손질하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무능을 탓하기만 할 뿐이다. 소학교 시절 나는 아버지의 직업을 자랑스러워 했었다. 하지만 중학교 때 친구 아버지가 바이올린을 켜는 것을 본 후 아버지의 직업이 부끄러워졌다. 거제도 피난 시절에는 목수가 귀해서 ‘목수 아바이’라고 불리며 대접을 받기도 했던 아버지지만 이제는 나의 열등감의 근원이 된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차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연장을 팔고 쇠고기와 나를 줄 한약 꾸러미를 들고 나란히 들어오신다.
저자
박용숙(朴容淑, 1934~) 1934년 9월 5일 함남 함주 출생. 중앙대학교를 졸업했다. 1959년 <자유문학>에 소설 <부록>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순례자>(1971), <우리들의 초상>(1976), <천궁>(1986) 등을 발간했다.
리뷰
(……) 이 작품들(<목수 아바이>, <강원도 달비장수>, <감비 천불붙이>) 모두가 민중들의 생활현장에서 직접적으로 그 제재를 취한 것임은 이미 제목에서 감지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작품들에 등장하는 이들 모두가 극심하게 가난한 민중이라는 공통점이 두드러집니다. 우선 이 작품들의 발표 시기 또는 작품 내의 시간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어느 시기냐에 따라 가난의 문제 역시 독특한 성격을 띠기 때문입니다. <강원도 달비장수>가 1967년에, <목수 아바이>와 <감비 천불붙이>는 각각 1973과 1974년에 발표됐습니다. (……) <목수 아바이>와 <감비 천불붙이>는 모두 함경도 출신 작가들이 쓴 함경도(출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두 작품의 시간·공간 배경은 완전히 다릅니다. <목수 아바이>의 ‘나’의 가족은 해방 직후에는 흥남에 살았지만, 한국전쟁 이후 월남하여 남쪽에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이 작품은 꽤나 오랜 시간의 흐름 가운데에서 아버지에 대해 아들이 느끼는 심적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주된 줄거리로 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직업이 목수라는 걸 창피하게 여기던 소년이 어른이 되어 아버지의 솜씨에서 심오한 예술혼마저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 전개가 자연스럽고 감동적입니다(나이가 들면서 점차 아버지를 이해하고 긍정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우리 소설의 한 줄기를 이룹니다. 몇 년 전 요절한 작가 김소진의 작품들이 우선 떠오르는데, 공교롭게도 그 역시 함경도 ‘아바이’를 둔 사람입니다). 이 작품이 발표된 때이자 작중 시간배경이 되고 있는 1970년대 초엽이 산업화·도시화에 의해 현대식 건물이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질 때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목수 아바이는 급속히 퇴장하던 전통적 장인들의 모습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 ‘이데올로기와 근대화의 그림자’, 이은아·정홍섭, <천승세 방영웅 외>, 창비, 2005
작가의 말
(……) <견우와 직녀>는 일상성을 의식한 나의 최초의 작품이다. 그러나 이때의 일상성은 습관화된 그런 맥풀린 일상성이 아니라, 좀더 긴장감이 있는 일상성, 이를테면 일상성의 주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견우와 직녀>가 전설적인 주제의 패러디로 이루어진 것은 그 때문이다. 요컨대 일상성을 팽팽한 느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노동의 문제이다. 노동의 문제가 숨겨지면 일상성은 긴장감을 잃고 따라서 그것은 진실성을 잃는다. 우리가 민속을 그릴 때 위태로운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소경 아즈바이>나 <목수 아바이>는 긴장되어 있는 우리 자신의 민속이다. 이때의 긴장은 물론 노동 때문이다. 노동이 산다는 행위에서 소외될 때 일어나는 긴장은 하나의 엘레지가 되며, 반대로 <집 짓기>에서와 같이 그러한 노동이 삶에서 소외되지 않았을 때, 즉 하나가 되었을 때, 그것은 기쁨이요, 보람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일상성을 그릴 때, 또다시 제기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역시 틀이라는 문제다. 틀이라는 것이 분명치 않기 때문에 우리가 안고 있는 노동의 문제는 유럽의 경우와는 딴판이다. 그 쪽의 노동은 개인과 틀(완결구조)에 직접 연결되므로 그것이 원만해진다. 그로써 그들의 일상성은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우리의 노동은 오직 가족과 연결되어 있다. 마튜가 실직했을 때 그가 의지할 곳은 그들 자신들이다. 그러나 이쪽에서 실직했을 때, 의지할 곳은 어딘가? 그것은 막연한 곳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미국이거나 일본이거나, 아니면 남미의 어느 곳이거나……. 아무튼 요행으로 끝판이 나는 그런 오리무중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의 노동은 분명히 말해서 가족에 의지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한 사람이 실직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같은 식구 한 사람이 그 상처를 대신 치료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성은 결국 가족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이때의 가족은 핵가족이 아니라, 보다 더 한국적인 가족 제도여야 한다. 그럴 것이 가족의 구조가 크고 잘 짜여져 있을수록 그 일상성은 적어도 우리들의 현실적인 여건에서 의젓하게 생동한다. 내가 가족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다. 물론 제1부에 실린 작품들이 벌써 가족의 냄새를 풍기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순히 일상성이라는 풍경에 우연히 잡힌 가족에 불과한 것이다. 즉, 가족이야말로 한국적인 진실이며 또한 그것이야말로 소설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 작품은 그 뒤에 씌어진다. <밀감 두 개>, <우리 며느리>, <우리들 세 사람의 점심 식사>, <백날> 등은 바로 그 예에 속한다. (……) 결국 나의 소설은 유교적인 전통에 되돌아온 것 같다. 그러나 과거의 유교 체계를 그대로 되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물론 그렇게 되려고 해도 결코 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다만 중요한 점은 그러한 유교적 전통이 낳은 가족 제도가 오늘의 우리들 민중의 삶을 지탱하게 만들었으며 틀이 시원치 않은 우리들의 조국을 또한 그런대로 이끌어온 힘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바로 그 힘의 원천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 힘은 인식의 주체 쪽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자연스러운 가족의 구조 속에서 탄생된다는 사실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들, 며느리, 손자들, 그것들은 마치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돌처럼 보이지만 서로가 서로의 홈(요철)을 이용하여 얼기설기 엮어짐으로 해서 하나의 단단한 구조물을 형성하는 것이다. 가장 헐벗고 힘이 없는 민중이 최후에 의지하는 힘은 바로 그러한 가족의 힘인 것이다. 즉, 가장 힘이 없는 것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힘, 그것이 바로 일상성의 정체이며 또한 일상성의 의미이다. <우리들의 초상>, 박용숙, 일지사, 1976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20세기 한국소설: 천승세·방영웅 외>, 창작과비평사, 2005 <우리들의 초상>, 박용숙, 일지사, 1976
관련멀티미디어(전체2건)
이미지 2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