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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

작품명
만다라
저자
김성동(金聖東)
구분
1970년대
작품소개
개요 1978년 <한국문학>에 연재된 김성동의 장편소설. 이 작품은 1978년 <한국문학> 신인상 당선작으로, 인간의 구원과 수도승의 성불에 관한 문제를 종교적 색채와 배경으로 그려낸 자전적 소설이다. 한국문단에 보기 드문 ‘불교소설’로 주목된 이 작품은 불법을 지키는 것이 수도가 아니라 인간 세상과의 만남 속에서 진정한 수도와 성불이 이루어짐을 강조한다. 이 작품의 문제성은 삶의 문제를 종교적 명상 속에서 해소하고자 하는 정통 불교의 참선과는 달리, 현실 속에 뛰어들어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어 가는 구도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이른바 ‘종교적 실천’의 문제는 기존 불교의 참선 방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출간 당시부터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92년 개작·출간되었는데, 이 작품의 개작과정에서 초판과 내용이 달라진 부분을 보면, 결말에서 주인공 법운이 피안행 열차표를 찢고 속세로 달려가는 장면을 피안행 열차표를 들고 정거장으로 걸어가는 것으로 처리한 대목이 눈에 띈다. 그리고 이야기의 내용 속에서 불교세계에 대한 성찰을 깊이 있게 형상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욕망과 해탈의 근원적인 문제를 깨닫기 위해 부심하는 주인공의 고뇌가 개작과정에서 한결 깊이 있게 그려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내용 법운의 아버지는 6·25 때 공산주의자로 처형당하고 충격 받은 어머니는 가출해 버린다. 어머니 가출 후, 종조모 집에 잠시 의탁하고 있던 그는 종조모댁 산장에 요양 중인 지암 스님을 만난다. 지암 스님의 설법이 계기가 되어 입산 수도의 길을 택하여 출가한다. 출가 후, 6년 동안 법운은 견성 성불의 원(願)을 이루기 위해 기를 쓰고 도를 닦지만 쉽지가 않아 그는 바람처럼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게 된다. 떠돌다 만난 지산은 자칭 땡땡이 중으로, 불교의 계율을 어기고 술과 여자도 거침없이 범하는 파계승이었다. 그의 성장 과정 역시 법운만큼 기구했다. 처음에는 파계승에 대한 호기심으로 지산 곁에 머물던 법운은 점차 그에게로 경사(傾斜)되어 간다. 두 사람은 벽운사를 떠나 철저한 일숙주의자가 되어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다. 법운의 이상은 지산처럼 ‘대승 세계를 살고 있는 자유인’ 혹은 ‘번뇌 즉 보리(煩惱則菩提)’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지만 지산처럼 대담한 파계(破戒)를 감내하지는 못한다. 법운은 지산과 함께 오대산 산록(山麓)에 있는 암자에 거처를 정하나 지산은 법운과 함께 암자 아래 술집에서 만취한 채 돌아오다가 산중에서 동사(凍死)하고 만다. 법운은 자신의 수도가 피안에 도달하는 데만 급급한 쪽이었다는 것을 뉘우치게 된다. 자신의 피안(彼岸)보다는 먼저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해야 함을 깨닫고 거리의 인파 속으로 뛰어든다.
저자
김성동(金聖東, 1947~) 1947년 11월 8일 충남 보령 출생. 서라벌고를 중퇴했다. 1966년 입산하였다가 1976년 환속하였다. 1975년 <주간 종교> 현상모집에 소설 <목탁조>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1978년 중편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피안의 새>(1981), <하산>(1981), <침묵의 산>(1982), <왕장승 딸-사바세계>(1984)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주요 작품집으로 <만다라>(1979), <피안의 새>(1981), <하산>(1985), <붉은 단추>(1987), <길>(1994) 등이 있다. 그리고 수필집 <부치지 않은 편지>(1987), <떠도는 넋은 언제 잠드는가>(1989) 등을 발간하였다. 그의 자전적 소설은 <만다라>, <집>, <길> 3부작으로 이어진다. 이 소설들은 불교세계의 근원적 구도 방식인 화두를 토대로 “인간이란 무엇이며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 질문에 접근하려는 작가정신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그의 작품에 대한 열정은 곧 <만다라>에서 던진 ‘병 속에 든 새’의 화두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와 탐색의 과정이기도 하다. 병 속에 든 새는 곧 자신이자 중생이며, 여기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과정이 곧 문학의 과정이기도 하다. 1983년 소설문학작품상을 수상했으며, 1985년 신동엽창작기금을 수상한 바 있다.
리뷰
이른바 ‘소설의 시대’라 불리었던 1970년대가 다 저물어 가던 무렵, 특이한 소재로 무장한 두 편의 장편소설이 우리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김성동의 <만다라>(1979)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1979)이 바로 그것인데, 각각 불교와 기독교라는 장대한 관념체계를 바탕으로 한 이 두 작품은 흡인력 있는 문체와 독특한 감수성으로 인해 당대의 독자들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받은 바 있다. 이들의 등장을 두고 ‘형이상학적 상상력의 복권’을 운운하며 흥분했던 당시의 일반적인 분위기는, 분단문제나 산업화, 노사문제 등을 중심으로 풍요로운 성과를 일구어 왔던 1970년대의 민중문학이 이 시기에 이르러 서서히 일정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던 사실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형이상학적 상상력 혹은 종교소설이라는 범주가 <만다라>와 <사람의 아들>이 성취해 낸 진정한 가치를 포착할 수 있는 적절한 기준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엄밀히 말해 이 두 작품에 나타난 불교와 기독교의 관념체계는 본격적인 수준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견성(見性)을 향한 젊은 영혼의 격렬한 방황이 <만다라>의 전편에 넘쳐흐르고,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독특한 구성과 현학적인 문체가 <사람의 아들>을 빛내고 있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종교소설 범주와는 무관한 것이다. (……) 한 신진작가가 젊은 날의 고뇌와 방황을 아무런 꾸밈없이 작품으로 그려 냈고, 그것이 당대 독자들의 정신을 온통 사로잡아 버렸다. 이처럼 희귀한 문학사적 사건은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 작가의식과 당대 독자들의 기대지평 사이에 일종의 동족성이 성립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다. <만다라>가 등장했던 1979년이 바로 그러했던 것인데, 우리는 작가와 대중 사이의 행복한 만남을 이끌어 낸 공동의식의 기본항을 ‘고아의식’ 또는 ‘부성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고아의식은 우리 근대소설사 전반에 걸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 물론 공동체의 질서를 배후에서 규율하는 아버지의 상실로 인한 고아의식, 그리고 사라진 부성을 향한 그리움은 작가 김성동의 개인사적인 것이자 동시에 님이 침묵하고 있는 당대의 보편적인 정서이기도 했다. 그 같은 그리움과 목마름이 <만다라>의 주인공 법운과 지산으로 하여금 입산하게 했고, 풀리지 않는 화두를 품고 황야를 헤매게 했으며, 마침내는 눈구덩이에서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어찌 그들뿐이겠는가. 이 땅의 모든 진지한 젊은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현장에서 실종된 아버지를 찾아 방황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모습은 각자의 처지와 입장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폭력적인 정치권력을 대신할 합리적 이성이기도 하였고, 역사의 진정한 주체가 되어야 할 풀뿌리 민중이기도 하였으며, 혹은 급진적 이데올로기의 모습만 띠고 나타나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존재가 사라지고 그에 대한 그리움만이 남아 있는, 그러나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은 너무나 막막하여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태, 이는 산문적인 모색을 불가능하게 하는 시적 시대정신을 낳는다. (……) 김성동의 <만다라>는 이처럼 시적인 정서가 지배적이었던 시대의 산문이다. 때문에 장편의 분량을 지니고 있는 이 작품에는 장편소설적인 성격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의미의 소설적 요건조차 매우 약화되어 있다. 만약 이 소설에서 일반적인 장편소설이 항용 그러하듯 당대의 현실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전체적이고도 개괄을 기대하는 독자가 있다면 단연코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품 전체가 시적인 상태에 처해 있는 <만다라>에는 현실에 대한 심층적 탐색의 여지가 별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의 성격 또한 추상화되어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작품은 법운의 관점에서 지산의 종교적 방황을 관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첫 만남의 충격이 완화되고 작품이 진행됨에 따라 두 사람은 같은 화두를 붙잡고 고뇌하며 그것의 서로 다른 양상을 대변하는 식으로 점차 동일화된다. 법운은 몇 번에 걸친 조우를 통해 파계승 지산의 삶에 공감하게 되며, 법운의 환속 역시 지산의 죽음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만다라>의 주인공은 법운이나 지산과 같은 특정한 인물이라기보다 그들이 처한 상황, 그리고 그들이 행하는 격렬한 방황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등장 인물이 아니라 작가의, 더 나아가 시대의 혼돈과 고뇌 자체가 맨 얼굴로 드러나 있는 형국인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 곳곳에 노출되어 있는 생경한 관념과 초보적인 불교용어들, 구성상의 허점에도 불구하고 <만다라>는 매우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시대의 정신이 이 작품으로 인해 비로소 그 적절한 표현형식을 얻었기 때문이다. <만다라>의 서사구조는 법운과 지산의 행로를 따라 피카레스크식으로 전개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진정한 의미의 소설적 사건과 갈등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객승의 처지에 놓은 그들의 여로는 현저히 정신적인 면에 기울어진 것이어서 세속사와 별다른 영향을 주고받지 못한다. 타락한 사찰 불교에 대한 비판이라는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제 역시 득도를 향한 두 사람의 정신적 모험에 비하면 매우 미약하게 처리되어 있다. 때문에 풀리지 않는 화두로 인한 절망과 우울의 반대편에는 젊음의 방황만이 누릴 수 있는 묘한 활기가 스멀거린다. 오대산 폐찰에서의 지산의 죽음조차 그다지 비극적이지 않은 이유는 법운의 방황이 허무의식의 산물이 아니라 무언가를 기필코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적극적 의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허무의식이 아닌 풋풋한 열정과 간절한 비원이 법운을 산으로 저잣거리로 헤매게 만들었고, 지산으로 하여금 눈구덩이 속에서 외로이 죽게끔 만들었다. 이러한 방황과 혼돈은 젊음의 특권인 만큼 한없이 치열하고 또 그만큼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 김성동의 문학세계의 바탕에는 고아의식과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존재한다. <만다라>의 화려한 등장은 이러한 고아의식과 그리움이 김성동 개인의 것이자 동시에 한 시대를 지배한 것이기도 하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으며, <만다라> 이후 김성동의 도정 또한 그러한 고아의식의 소설적 극복과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작가는 그 과정에서 분단소설의 빼어난 전범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며, 윤리적 차원에서 경도된 현실비판을 거쳐, 마침내 광대한 폭과 깊이를 지닌 생명사상의 소설적 실천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 <풍적>과 <왕장승딸> 계열의 작품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김성동은 오히려 <만다라>의 앞뒤를 연결하는 <길>과 <집>의 자전적 3부작으로 다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과정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는 1991년 연재를 시작한 대하역사소설 <국수>의 완결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부성의 회복을 위한 도정’, 진정석, <만다라>, 동아출판사, 1995
작가의 말
“김아무개라는 자는 프로기사가 되려다가 실패해서 중이 되었고 끝내는 중이 되지 못하여 결국은 소설가가 되고 말았다.” 어떤 급수 낮은 하늘 밑에 벌레가 이 중생을 가리켜 한 ‘악담’이라는데, 우선은 맞는 말이다. 바둑쟁이가 되어 보겠다고 입단대회에 나갔었고, ‘그 무엇’을 찾아보겠다고 불볕의 산야(山野)를 헤매며 시줏밥만 도적질하였으며, 그리고 시방은 이야기를 팔아 밥을 먹는 이른바 작가가 되었으니. 입단대회에 나갔던 것은 열여덟 살 때였다. 그 도(道)를 깨쳐 국수(國手)가 되고자 함에서도 아니라 다만 배가 고파서였다. 돌멩이라도 깨물어 먹고 싶고 흙이라도 파 먹고 싶었으며 그리고 잠자리라도 잡아 구워 먹고 싶었을 만큼 언제나 배가 고팠다. 육신의 배고픔은 그러나 두 번째였고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리움이었다. 이 중생이 태어나서 갓 돌도 되기 전에 장총을 맨 순사한테 끌려가신 채로 상기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 계신데, 외로웠던 것이다. 맨 처음 집을 나갔던 것은 고등공민학교 이학년 때였다. 5·16이 일어났던 해 여름이었다. 대전발 영시 오십 분 차를 ‘빠방틀어’ 갔던 곳은 목포였다. 땅의 끝으로 가 보고 싶었다. 그 끝의 끝에 서 보고 싶었다. 끝의 끝에는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기차와 마찬가지로 ‘빠방틀어’ 타고 끝의 끝으로 가보고자 했던 외항선은 그러나 아스라히 먼 바다 한복판에 섬처럼 막막하게 떠 있었고, 거기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첫 절망이었다. 출가(出家)라는 이름의 ‘위장입산’이었던 그 가출(家出)은 열아홉 나던 해 찔레꽃머리였다. 졸업을 몇 달 앞둔 고등학교 삼학년 때였다. 1965년, 분명하게 이 중생은 알아 버렸던 것이다. 팔천 원 내고 ‘야미’로 들어간 학교에서 월사금을 대기 벅찼지만 고등학교를 마치고 어떻게 또 간신히 대학을 나온다고 하더라도 공무원이 될 수 없고, 군대를 가더라도 장교가 될 수 없으며, 그리고 소위 ‘고등고시에 패스’를 한다고 할지라도 임관이 안 된다는 것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해 나갈 수 없는 출신성분임을 알게 된 열아홉 살짜리 소년이 꿈꾸어 볼 수 있는 길이 무엇이었겠는가. 입단대회를 통과해서 그 가진 바 실력만큼 밥을 벌 수 있는 승부사(勝負師)가 되든지,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진실로 진정한 ‘밥’을 벌 수 있다는 중이 되든지, 꾸며낸 이야기로되 진실로 진정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또한 밥을 벌 수 있는 소설가가 되는 것 가운데 하나일밖에. 어린 시절 할아버지한테 행마법(行馬法)을 배운 바둑은 그러나 그 재주가 땅불쑥하게 빼어나지 못하였고, 진실로 그 이름에 값하는 납자(衲子)가 되기에는 맺혀 있는 것이 너무 많은 중생이었으니, 이야기를 팔아 밥을 먹게 된 것 또한 그러므로 지극히 마땅한 귀결로 된다. 문학잡지사에서 현상모집하는 신인문학상에 응모를 하기는 하였으나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중생이 이를 악물고 써 본 그것이 이른바 ‘소설’이라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당최 자신이 없는 것이었다. 요컨대 이 중생은 ‘학력별무’였으니까. 이 세상은 모두가 정상적인 삶의 조건 아래 태어나 정상적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정규과정을 거쳐 유치원과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와 대학교와 그리고 대학원을 나옴으로써 이른바 ‘쯩’을 소유하게 된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서- 연애를 해도 자기들끼리만 하고, 혼인을 해도 자기들끼리만 하고, 친구들 사귀어도 자기들끼리만 사귀고, 세상을 씹어도 자기들끼리만 씹고, 술을 마셔도 자기들끼리만 마시고, 하다 못해서 불륜을 저질러도 자기들끼리만 저질러서 세세생생(世世生生)을 두고 대를 물려 가며 이 세상을 지배하고 나누어 갖고 즐기게끔 조건지워져 있으니까. 그것이 이른바 기존의 질서이며 기득권일 터이니까. 시장도 마찬가지지만 그때에 이 중생은 소설책을 읽더라도 맨 먼저 작가의 약력란을 읽고는 하였는데, 하나같이 모두가 모모하는 대학교의 국문과와 영문과와 불문과와 독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들뿐이었던 것이다. 물론 어쩌다가 가뭄에 콩 나기로 학력 같은 것을 쓰지 않고 곧바로 처음 쓰게 된 시 작품 이름을 쓰는 작가나 시인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쓸쓸한 것이었다. 문학이라는 것이 맴돌아 혼자서 개척하고 혼자서 걸어가야 하는 고독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알고 있었다. 따로국밥처럼 문학 따로 삶 따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 곧 삶이요 삶이 곧 문학이며, 그리하여 몸 전체를 붓 삼아서 죽을 작정으로 뚫고 나가야 하는 인생 그 자체라는 것도, 그러므로 문학이야말로 ‘쯩’이 없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살아낼 수 없는 이 중생 같은 응달의 젊은 영혼들이 온몸으로 한번 달려들어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도, 이 세상은 어찌하여 ‘쯩’이 있는 자와 ‘쯩’이 없는 자로 나누어지게 되었으며, 나누어져서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고 투쟁해야 하는 것인가를 밝혀내는 일이야말로 문학의 사명 가운데 하나라는 것도, 이 세상은 왜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누어지고,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로 나누어지고, 착취하는 자와 수탈당하는 자로 나누어지며, 세상이 즐겁다고 웃는 자와 세상이 막막하고 인생이 슬퍼서 고통스럽다고 우는 자로 나누어져서 끝없이 서로 물고 뜯게 되는가 하는···. 그늘의 꽃. 그래서 무엇인가를 써 보았던 것이었다. 무언가를 써서 응모해 보았던 것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데 무엇일까? 무언가 세상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는 이야기이겠다. 할 말이 많다는 것은 맺혀 있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이겠다. 맺혀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은 세상 또는 세상 사람들한테서 상처를 받았다는 이야기이겠다. 그것도 회복 불능의 깊은 상처를. 그리하여 세상과 세상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는. 잘못되었으므로 뜯어고쳐야 된다는. 뜯어고쳐서 아름답고 훌륭한 새 세상을 만들어야 된다는. (……) ‘홀로 피어나는 그늘의 꽃’, 김성동,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열화당, 2004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장석주, 시공사, 2000 <만다라>, 김성동, 동아출판사, 1995
연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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