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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 교실 1

작품명
해부학 교실 1
저자
마종기(馬鍾基)
구분
1950년대
저자
마종기(馬鍾基, 1939~) 1939년 1월 17일 일본 도쿄 출생. 아동문학가 마해송(馬海松)의 아들. 서울고교, 연세대 의과대 및 서울대 대학원 의학과를 졸업했다. 1966년 의학 연구차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문필활동을 하였다. 1959년 <현대문학>에 시 <해부학 교실>, <나도 꽃으로 서서> 등으로 추천을 받으면서 등단했다. 이후 <협주곡>, <인상>, <정신과 병동>, <제 삼 강의실> 등의 시를 계속 발표하였으며 시집 <조용한 개선(凱旋)>(1960), <두 번째 겨울>(1965), <변경의 꽃>(1976),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1980), <이슬의 눈>(1997) 등을 펴냈다.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꾸준히 모국어로 시 창작을 하여 김영태(金榮泰)·황동규(黃東奎)와 3인 시집 <평균율>(1968), <평균율 2>(1972) 등을 발간했다. 1976년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작품은 의사로서의 체험과 외국 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에 대한 애정어린 통찰을 세련된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리뷰
(……) 마종기 시의 특징은 대개 세 가지 방향에서 이야기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의 직업이 의사라는 점, 그가 음악, 무용, 미술 등에 대한 취미와 교양을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 자기 직업의 제약 속에 살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특히 글 쓰는 일과 먼 직업을 갖고 있는 작가의 경우 불가불 직업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줄거리를 찾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의사라는 직업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특히 느낌이 많은 시인으로서는, 여러 가지 감회와 생각에 젖게 할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짐작이 아니라 실제로 병자들을 치료하면서, 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시인의 기분과 정서는 변화를 겪고 생각은 그러한 체험 속에 들어 있는 암시를 읽어내려고 애쓴다. (……) 의사는 성격이 냉정해야 한다는 것이 자격요건의 하나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직무수행상 요청되는 자질이요 또한 치료의 반복과 습관에서 생긴 제2의 천성이지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사람다운 감정에 있어서는 특히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의사도 의사 나름이어서 한결 더 기술자에 가까운, 기능인에 가까운 사람도 있겠지만 시를 쓰고 싶고 시를 써야 살맛이 나는 시인의 눈에 비친 인간의 불행과 황폐- 병은 그를 유감(有感)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유감의 내용은 연민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는 슈바이처 같은 실천적 휴머니스트가 보여준 인간애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떻든 병자들이 자기연민을 포함한 인간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종합병원에 갔을 때 흔히 느끼는 감정이며 또는 가까운 사람이 탈이 났을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기도 하다. 마종기 시인이 드문드문 귀국할 때 게브랄 T라는 비타민을 선물로 가지고 오는 것도 친구들의 건강을 생각하는 인정스러운 마음에서라고 할 수 있고 또 중병을 앓는 사람 곁에 오래 지켜앉아 있는 것도 그동안 의사로서의 그의 체험과 성찰이 만든 심성이 시켜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비망록(備忘錄) 3>에서 “내가 몇 해 만에 인천에 갔을 때도 바닷물이 내게 와서 말해주었지, 친구여 소리 없는 시간에 도착하여 잔잔히 녹아주어라”고 말할 때도 우리는 따뜻함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 (……) 마종기의 사람됨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아마 그의 정일 것이다. 이것은 그가 외국에 살고 있는 동안 더 증대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정다움은 친구와의 사귐 같은 데서 나타나기도 하고, 앞에서 보았듯이, 사람의 병과 생명에 대한 매우 인간적인 느낌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그의 그러한 인간적 자질은 그로 하여금 사람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살기를 바라게 하고, 중요한 것은 싸움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사실을 말하게 하는 것일 것이다. (……) 마종기 시의 반 이상이 아마 미국에 살면서 쓴 게 아닌가 한다. 지구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늘날 인간의 생활 반경은 매우 넓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 저 나라로 옮겨가 살고 있고, 또 그것이 국력신장이라는 몫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시인에게 있어서는 자기 나라를 떠나서 산다는 것이 일종의 유기요, 형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모국이란 작품의 모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꼭 자기 나라에서 살아야 작품을 쓴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일 것이다. (……) 다만 우리가 여기서 얘기하려고 하는 것은 시인이 모국을 떠나 살면서 시를 쓸 때, 그의 작품이 여기서 사는 사람들에게 주는 실감의 진폭이 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것은 물론 시인의 역량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고 또 궁핍한 삶을 사는 한국인다운 편견이 낳은 우려일 수도 있다. 어떻든지간에 지금 여기서 더불어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공감대가 있음직하고 그게 괴로운 일이든 즐거운 일이든 그러한 감정과 의식의 자장(磁場)이 귀중하다고 생각되어, 물귀신이 드글거리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서 살아 마지않는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나라 시인, 소설가뿐만 아니라 외국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걸 보면, 그들이 각자 자기의 나라와 모국어를 가지고 있고 무대도 국지적일 수밖에 없었으나 그들의 작품이 다룬 것이 인간의 보편적 운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고 한다면, 시인의 사는 곳과 하는 일이 그의 작품의 감동을 좌우하는 필수적 요소라고는 할 수 없다. 마종기 시인의 많은 시가 외국생활의 음영을 보여주고 있는데,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자신의 말대로 자기가 의사 노릇을 하는 것도 냉정하기 때문인데- 외로움과 그리움이 은연중에 배어 있으면서 때로는 모국에서 산 일들에 대한 추억을, 때로는 외지에서의 민족감정을, 때로는 동족을 향한 애정과 울분을, 그리고 때로는 자기의 생활에 대한 반성에서 오는 부끄러움을 노래한다. (……) ‘삶의 어둠과 시의 등불’, 정현종, <그리고 평화한 시대가>, 지식산업사, 1982
작가의 말
(……) 동규(황동규 시인)가 벼락같이 추천을 완료할 때쯤 나는 박두진 선생님의 도움으로 시가 추천되기 시작했고, 한 2년이 걸려서 <나도 꽃으로 서서>, <해부학 교실>, <돌> 등의 시로 추천을 완료하게 되었다. 1959년 2월에 나는 괜찮은 성적으로 의예과를 수료하고 3월부터는 서울역 앞에 있는 의과대학에 다니게 되었다. 우선 그곳은 교통도 편했고 제법 주위가 번화했는데 해부학생리학 같은 과목을 배우면서 ‘아, 내가 의학 공부를 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천천히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신촌에 사시는 박두진 선생님을 방문했을 때, 나의 세 번째 마지막 추천 작품을 현대문학사로 보내셨다는 말을 들었고, 내가 좋아하던 최민순 신부님과 동규에게 주는 편지 형식의 천료 소감을 보냈는데 몇 달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어서 안달을 하던 중, 그해 10월말인가에 서점에 나온 잡지에서 드디어 내 천료 소감과 추천된 시를 보았다. 11월 14일에는 같은 과의 친구들이 종로 어디 큰 중국집에서 교수님 여럿을 모시고 축하 파티를 열어주었다. 60여 명이 모인 파티는 성황이었고 그때 자개가 박힌 작은 꽃병을 축하 기념품으로 받았는데 뒤쪽에는 금박으로 ‘시인되었음을 축하합니다. 1959년 11월 14일. 세브란스 학도호국단’이란 글이 박혀 있는 이 볼품없고 이상하기 짝이 없는 꽃병을 나는 아직까지 보물처럼 잘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추천 완료가 되는 내 시가 실린 잡지는 1960년 2월호 <현대문학>지였다. (……) 이렇게 1학년 의대 학생이 시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과대학의 어떤 교수님은 신통하고 귀엽게 생각하시고 칭찬도 해주었지만, 어떤 교수님은 ‘의사가 되는 길이 그렇게 쉬운 줄 아느냐? 딴 짓에 너무 시간 쓰지 말라’는 충고도 해주셔서 나는 스스로 근신하는 척하며 아무데서고 또 누구에게도 시를 쓴다고 어깨를 으쓱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 버릇은 아직까지도 여전해서 의사 친구들이나 의학계 선배후배에게는 절대로 내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살아왔다. (……) 나는 이렇게 긴 글을 평생에 써본 적도 없고 내가 자라오고 살아온 인생을 짧든지 길든지 누구 앞에 한번도 글로 써보인 적도 없다. 나는 이 글쓰기를 무척 망설였고 쓰기 싫어하면서 썼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분은 벌써 내 글에 성의가 없고 맛이 없고 불꽃이 없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한국말 시를 써온 지난 40년, 고국에서는 물론 외국에 나와 사는 고마운 독자들이 내 시 읽기를 즐기고 내 시를 공부까지 한다는 분들의 소식을 접하면서 그리고 출판사의 의도가 그런 분들에게 혹 내 시 읽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어서 할 수 없이 이렇게나마 이어봤다. 다시 돌이켜보아도 별볼일 없는 들풀 같은 인생이고, 술 취한 개모양 뒤죽박죽인 인생이지만 나는 되도록 가감없이 솔직히 나를 털어 보이려고 애썼다. 이 글이 아름답지 못하고 문학적이지 못하고 상상력의 미학을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나는 오랫동안 과학을 공부하는 학생에게 가장 쉽고 간단하고 명료하게 설명하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늙은 의사 교수이고, 껍데기를 벗겨서 어정쩡하고 불투명한 것을 다 씻고 닦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의술로 평생을 살아온 탓이라고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의사로도, 시인으로도’, 마종기, <마종기 깊이 읽기>, 문학과지성사, 1999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마종기 시전집>, 마종기, 문학과지성사, 1999 <마종기 깊이 읽기>, 정과리 편, 문학과지성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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