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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명
저자
최창학(崔昌學)
구분
1960년대
작품소개
작가 최창학의 등단작으로 발표와 더불어 상당한 주목을 받은 문제작이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정체불명의 절망감 속에 가위눌린 채 부유하는 젊고 독단적인 영혼의 심상을 치밀하게 표출하고 있다. 도시 서울을 배회하는 주인공 ‘이상’은 우중충한 건물에 자리잡은 출판사 편집부원으로 근무한다. 예수의 전기를 다룬 번역물을 교정 보고 있으며, 가슴 속엔 구멍난 폐를 가지고 있고 변두리의 싸구려 하숙집에 기거하고 있다. 대학 시절엔 끊임없이 자살충동에 휩싸이면서도 이미지즘 계열의 난해한 서정시를 쓰면서 자신의 음울한 열정을 다스렸던 문학청년이었다. 현재 그의 삶은 단조롭기 그지없다. 출근하면 끊임없이 책을 읽지만 단지 띄어쓰기와 표기법의 오류만이 눈에 띄는 소외된 노동을 하고 어디에서 생리현상을 해결할 것인가를 궁리하고 퇴근해서는 어제의 반찬이 다시 나오는 밥을 먹고 르 끌레지오의 불어판 소설을 뒤적거리는 일과를 살아간다.
저자
최창학(崔昌學, 1941~) 1941년 7월 26일 전북 익산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68년 <창작과비평>에 지식인의 고뇌와 절망을 그린 단편 <창>을 발표하며 등단한 후, 윤리적인 삶이 왜곡되고 훼손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소설집으로는 <물을 수 없었던 물음들>(1977), <바다 위를 나는 목>(1979), <하늘의 침묵>(1983), <가사자(假死者)의 꿈>(1994), <아우슈비츠>(1997) 등이 있다. 최창학은 보편적인 선악의 문제와 정치·종교·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어 현실을 해부하고 고발하며, 의식의 흐름 기법을 즐겨 사용한다. 1970년대 이후에는 생존을 위해 인간 이하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삶이 그 실제에 있어서 광기에 가득한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독특한 작품세계는, 상식적 내용에 안주하거나 관념적 전개에 의존하지 않고, 판단정지와 본질환원을 통해 대상 자체에로 나아가는 현상학적 방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리뷰
(……) 대부분 소설가의 고백은 공들인 초기의 작품 속에서 이루어진다. 작중화자가 작자의 체취를 강하게 풍기는 데뷔작이 유달리 많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데뷔작은 자주 문제작이 된다. 작가 최창학은 그러한 경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소설가이다. 1930년대 초현실주의 유파의 자의식 과잉과 전후 부조리 문학의 파격이라는 유산을 물려받은 최창학의 등단작인 <창>(<창작과비평>, 1968)은 발표와 더불어 상당한 주목을 받은 문제작이었다. <창>과 더불어 몇몇의 최창학의 대표작들은 신음 소리도 없이 암울한 현대의 묵시록을 작성하는 한 작가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작품 <창>이 사람들의 관심 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정체불명의 절망감 속에 가위눌린 채 부유하는 한 젊고 독단적인 영혼의 등장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영혼의 이름은 ‘이상’으로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탁월한 이단아 ‘이상’을 패러디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작가 최창학은 놀라울 정도로 투명하고 날카로운 자의식을 가진 주인공의 의식 흐름을 레이저프린터로 뽑아내는 듯이 선명하게 출력한다. 그러한 창작방법론 또한 모더니스트 이상의 자산을 이어받았음을 보여주는 선명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의 흐름’이 작품의 표면에 등장하는 작품군의 가치는 끊임없이 꼼지락거리는 의식의 진폭과 깊이를 더듬는 것을 통해서만 가늠할 수 있다. (……) 플롯도 사건도 갈등도 없는 소설의 폐쇄된 공간은 그러나 끊임없이 명멸하는 주인공의 의식을 통해서 그 내적 동선을 한없이 확대연장한다. 주인공의 의식의 가장 깊은 지층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비정형적인 시적 이미지들이다. (……) 주인공의 연상행위와 인용된 시편들을 통해서 표현된 이미지들을 가장 역동적이고 상징적인 형태 그대로 둔다고 할 때, 가장 집약적이고 밀도 있는 모습으로 주인공의 의식을 보여주는 것은 파격적인 성적 언어들이다. 주인공 이상은 자신의 의식 속에 길들여지지 않은 성을 방목한다. (……) 이러한 주인공의 성적 언설들은 두 가지 차원의 가능성을 분절되지 않은 채로 간직하고 있다. 그 가능성들이란 ‘전복적 상상력’과 ‘염세주의적 상상력’이라는 창작의 전략에 의해서 피어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 성을 분배하는 가치체계를 정립하기 시작한 문명사회의 형성 이래로 노골적인 성적 담화들은 공식문화의 표면 아래로 침몰당했다. 그 이후로 성에 관련된 이야기와 상상력들은 천박한 하위문화의 테두리 아래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회적 위계의 유지와 세대 재생산의 엄격한 체계에 의해 성이 관리되기 시작한 이래 성의 영역은 가장 은밀한 개인의 공간으로 자리잡는다. 물론 그 은밀한 공간이 무한한 개인의 자유가 주어진 축복받은 공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규범에 의해 해명되거나 용납받을 수 없는 저주받은 공간이었다. 축복은 선택되고 분배된 성에만 내려졌다. 저주받은 성적 언설들이 공식적인 문화의 표면을 뚫고 분출해 올라오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의 유형으로 나타난다. 먼저 과잉과 탕진 그리고 일탈의 성격을 가진 향연으로서의 성, 즉 제의적 성의 유형이다. 금기의 위반이 공식적으로 벌어지고 그를 통한 죄의식의 공유와 초월이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이때 성은 광기와 더불어 종교적 차원에서 가장 심층적인 반전의 드라마에 의해 문화의 영역 안으로 수렴된다. 또 하나의 경우는 민중문화 속에 표출되는 해학적 성애의 난장이다. 이때의 노골적 성적 담화들은 지배계급에 대한 자신들의 거리감을 표현하고 공식문화의 권위에 도전하는 우회적 장치의 성격을 가진다. 공인받지 못하던 성은 끊임없이 회화되고 야유의 대상으로 전락하면서도 피지배계급의 낙관적인 자기정체성을 정립시켜 주는 계기를 마련해 주게 된다. 이러한 유형들은 사회적 규범과 일탈의 공간 사이의 부인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상기시켜 주는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그것이 집단적인 성격의 성에 해당되며 문화적 순기능을 향해 수렴된다는 특징을 가진다. 그러나 노골적이고 치열한 성적 언설이 어떤 배후의 지지 논리도 없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던져지게 될 때, 그것은 놀라울 정도의 공격성과 파괴성을 보여 주게 된다. 기실 그러한 공격성과 파괴성은 그것이 당대의 성적 규범과 금기를 조롱하고 야유하면서 급기야는 가치관의 전복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정립된 가치와 분배된 성의 작위성을 비웃고 규범의 절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러한 성적 언설은 규범의 저편에 현존하는 도발적 세계를 뚜렷하게 보여 준다. 규범은 체계가 완강하고 정교할수록 그에 비례해서 매혹의 강도를 높여 가는 그러한 도발적 세계에 대한 천착은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전면전을 펼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자신의 전 생애를 투기해야 할 만큼 그것은 위험하며 견고하고 묵중한 정신과 사상의 깊이를 요하는 작업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그러한 시도를 보인 것은 이상, 장용학, 박상륭 등의 작가들인데, 그들은 모두 소설적 장치를 동원해서 대공포화의 각도를 어느 정도 비틀었다. 그들의 시도는 초현실주의적 혹은 표현주의적 기법이라는 방어막을 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 최창학도 일종의 의식의 현상학이라 할 수 있는 창작방법론의 특성 속에서 그러한 ‘전복적 상상력’의 가능성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를 했던 우리 문학사의 다른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최창학은 그것을 가능성으로 남겨 두고 또 다른 가능성으로 세계를 개척해 나간다. 그것은 바로 ‘염세주의적 상상력’이다. 주인공 이상이 보여 주는 염세주의적 태도는 그의 성에 대한 담화뿐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며 고개를 가로젓는 냉소적 시선을 통해서 소설 전편을 관통하고 있다. 주인공은 어떤 계획도 희망도 욕망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는 그 무의미 위를 떠다닐 뿐이다. (……) 주인공은 어디에서도 어느 순간에도 다시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세상의 모든 부조리는 이미 완성되어 있을 뿐이다. 가족을 잃어야만 했던 장질부사와의 투병생활 이후 그가 느꼈던 탐욕스러운 이상식욕이 삶에 대한 강한 집착에서 생겨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악화된 폐를 수술하라는 진단이 내려진 후 주인공의 발걸음은 정체불명의 충동에 이끌려 술집으로 향한다. 그러한 행위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자학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물이 날카로운 창이 되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환영을 주인공이 보게 되는 것은 그가 삶의 부조리성의 정점에 서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결국 성에 대한 주인공의 집착과 자살에의 충동은 작가의 염세주의적 상상력의 짜임새를 그대로 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 성을 매개로 한 인간 세태의 묘사가 끔찍할 정도의 사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최창학의 <창> 이후의 작품들은 웅변해 주고 있다. <동물과 그들의 시간>에서는 실험의 대상이 된 인물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노출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자위행위의 증거물을 남기는 후안무치의 본능을 보여 주는가 하면 <학자의 황혼>에 등장하는 소설가는 대학 시절 연구실에서 다른 여학생을 강간하려다 실패하고 자살기도를 한 전력을 가지고 있고 <지붕>에서는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며 생리현상을 해결하던 반신불수의 노인이 갑자기 간병하는 여봉사자를 겁탈하려고 안쓰러운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성의 모습은 여전히 주체하기 어려운 인간의 본능이기는 하지만 야유와 냉소의 대상은 아니다. 성적 욕망의 맹목성은 거대한 삶의 공허 속에 자리잡은 작은 애물단지로 그 의미가 현저하게 축소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성에 대한 담화들은 삶의 덧없음을 정직하고 견고하게 묘사하는 사실성의 도구가 된 것이다. 이에 상응하는 일정한 변화가 그의 염세주의적 상상력이 굽이쳐 흘러가는 과정에서도 발견된다. 삶의 무의미에 독설과 야유 그리고 자학 등의 소극적이지만 격렬한 저항을 보여 주던 <창>의 세계에서, 삶의 유한성과 무의미에 직면해서 마침내 인간들의 내일이 무너져 내리는 현장들에 대한 응시의 세계로의 변화가 나타난다. (……) ‘삶의 검은 늪과 실존의 고고함’, 임태우, <심야의 정담·창 外>, 신상웅·최창학, 동아출판사, 1995
작가의 말
(……) 이십 년을 써왔어도 작품 쓰는 일은 여전히 세상 사는 일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막막하고 힘겹다. 쓰나마나 한 작품, 이미 다른 작가들이 수없이 써온 작품이나 별로 다를 게 없는 작품이라면 구태여 또 쓸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는 강박의식 속에 미처 펜도 들어보지 못하고 진땀부터 흘리는 일이 너무 많다. 너무나 뼈저려 이제껏 차마 쓸 수 없었던 이야기,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쓰지 못할 것 같은 이야기들을 가슴 가득 간직하고서도 그렇다. 이 책을 펴내는 것을 계기로 그런 의식에서 조금은 헤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작가라면 마땅히 생애를 걸어야 할 내 사십대의 끝도 바로 저 앞에 보이지 않는가. ‘가슴 가득 간직한 이야기들을 위하여’, 최창학, <긴 꿈 속의 불>, 한겨레, 1988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심야의 정담, 창 외>, 신상웅·최창학, 동아출판사, 1995 <물을 수 없었던 물음들>, 최창학, 문학과지성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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